안 동 의 동 성 마 을
동성마을과 취락의 특성
1. 동성마을이란 무엇인가
흔히 성(姓)과 본(本)이 같은 성씨들이 특정 마을에 모여 중심적 세력을 이루고 있는 마을을 동성(同姓)마을이라 하며, 여러 성씨들이 더불어 사는 마을을 각성(各姓)마을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성마을이라 해서 하나의 성씨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성받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각성받이 숫자가 더 많은 경우도 간혹 있다. 따라서 한 마을에 특정 성씨가 과반수를 넘지 않더라도 그 성씨가 주도적 세력을 갖고 있을 때는 동성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동성마을의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궁금증이 절로 생기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에서는 특정 성씨가 차지하는 비율과 마을에서의 영향력 행사 여부 등이 그 기준이 되고 있다. 따라서 동성마을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경우는, 첫째 한 성씨가 마을 전체 가구수의 과반수를 넘을 때이며, 둘째 성씨의 비율은 과반수를 넘지 않으나 한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성씨집단이 부계친족조직을 형성하면서 마을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갖고 있을 때이다. 이와 같이 동성마을의 기준은 특정 성씨의 수적 점유율과 마을에서의 지배력이라는 양과 질에 따라 판단되는 경향이 강하다. 어느 마을이 적어도 “○○ ○씨마을”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성씨의 점유율만이 아니라 마을 내에 위토 등과 같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대부분의 동성마을은 이를 형성할 당시 지배층에 놓여 있었던 양반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다소 예외는 있으나 동성마을은 반촌(班村), 각성마을은 민촌(民村)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대체로 동성마을에는 규모가 크고 오래된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동성마을에 들어서면 장엄한 모습을 한 기와집들이 몇 채씩 늘어서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학자에 따라서는 종가, 재실, 서원, 서당 등이 있으면 일단 동성마을로 여길 수 있다고도 한다 .
동성마을은 동족부락, 씨족부락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동족부락이라는 용어는 1930년대 일본인 학자에 의해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족부락이라고 할 경우 일본의 동족(도오조쿠)과 혼돈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적절치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 후 씨족부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도 있는데 씨족이라는 용어도 고대의 씨족국가, 씨족사회, 씨족공동체 등에서처럼 상당히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탓에 지금은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임재해는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동성마을이라 하고 두 개의 성씨가 상대적 균형을 이루는 마을을 양성마을, 특정 성씨가 중심을 이루지 않고 여러 성씨가 더불어 사는 마을을 각성마을로 칭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다만 여기서 굳이 문제를 삼자면 동성이라 하면 본(本)을 달리하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에 용어의 명확함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성마을이라고 했을 때의 ‘동성’이라는 용어에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사용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을 것 같다.
2. 역사적 성격
동성마을의 형성은 토성(土姓)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신라 말기에서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초기 무렵에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 토성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촌락공동체로서의 토(土)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공동체로서의 성(姓)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즉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특정 지역에 뿌리를 내려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토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특히 전국의 동성마을이 형성된 지역은 예전의 토성들의 토착지였다는 점에서 동성마을과 토성과의 관련성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ꡔ조선의 취락ꡕ에 따르면 전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 1,685개 가운데 5백년 이상 된 것이 207개, 3백년에서 5백년 미만이 646개, 1백년에서 3백년 사이가 351개, 1백년 미만이 23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458개라고 한다. 이 가운데 경상북도는 5백년 이상이 된 동성마을이 36개로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보이고 있으며, 3백년에서 5백년 미만의 동성마을도 경상북도가 110개로서 전국에서 으뜸이다. 한편 이들 자료에서 대략 5백년 미만의 역사를 가진 동성마을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동성마을의 최초 성립연대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동성마을의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동성마을 형성의 주요 배경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속제도의 변화, 주자가례의 보급, 중국의 종법적(宗法的) 가족제도의 수용 등도 17세기에 들어와서 확대․보급되기에 이른다. 조선전기에는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과 사위, 친손과 외손에게도 재산 상속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성씨가 한 마을에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들과 딸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던 상속제도가 바뀌어 재산상속에서 딸을 배제시키게 된다. 이와 같이 아들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속제도 아래서 사위가 처가의 상속에서 제외되고 외손이 외가의 상속에서 배제되면서 사위나 외손이 굳이 처가나 외가를 따라 거주지를 옮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아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동성동본의 부계(父系)친족의 동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영남지방은 신라가야문화의 발원지인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된 성리학은 15세기이래 서울의 집권세력에 대해 정치적․학문적으로 대항하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남인과 북인에 대신하여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중앙정계로 크게 진출했던 영남사림은 재야세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때 사림파 유학자들이 중앙정계로부터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시작함에 따라 유교문화의 중심지가 사림파의 본거지인 영남지방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영남지방은 16세기를 전후하여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동성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17세기부터 본격적인 동성마을이 비로소 정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정은 안동의 동성마을의 역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하회의 경우는 15세기이래 허(許)씨․류(柳)씨․배(裵)씨․권씨․안(安)씨․김씨․이씨․노(盧)씨 등이 제각기 서로 혼인을 맺으면서 함께 거주하다가 17세기 후반부터는 풍산 류씨(豊山柳氏) 중심의 동성마을이 된다. 예안의 온계(溫溪:지금의 온혜)와 오천(烏川)의 경우에도 16세기말까지는 이씨․오(吳)씨․금(琴)씨․임(任)씨․김씨․채(蔡)씨․박씨․권씨․서(徐)씨와 김씨(예안:禮安)․노씨․김씨(광산:光山)에서 17세기부터 점차 이씨(진성:眞城)와 김씨(광산)․금씨(봉화:奉化)촌으로 발전해갔다. 와룡의 주하촌(周下村)도 처음에는 이씨․고(高)씨․금씨․정(鄭)씨․권씨들로 각각 구성되어 있다가 17세기 후반부터 진성 이씨의 마을로 되었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신라를 중간에 두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안동지역은 고려의 중요한 전략지였다. 그러나 견훤이 경북지역 일대를 장악하게 되자 고려와 견훤군은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병산(屛山)전투이다. 이 때 당시 안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의 도움으로 왕건은 승리를 하게 되고 이윽고 후삼국을 통일한다. 그 후 왕건은 이들에게 벼슬을 내렸고, 안동도 고창군(古昌郡)에서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된다. 이를 계기로 지금의 안동 김씨와 권씨, 장씨의 시조가 된 이들 안동의 토성(土姓)들은 점차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명문가문으로 성장한 이들은 안동의 다른 토성들을 중앙정계로 불러들이기도 했으며 다른 지역출신의 명문사족들과 혼인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말 정치세력의 교체와 정치적 혼란으로 재경관인(在京官人)들은 낙향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 낙향지로 주로 선택되어지던 곳이 본향이나 처향․외향이었다. 즉 당시 중앙정계로 진출한 안동의 토착세력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지역의 사족들이 처향이나 외향을 따라 안동으로 낙향한 것이다. 이를테면 의성 김씨, 고성 이씨, 흥해 배씨, 경주 이씨, 영천 이씨, 진성 이씨, 봉화 금씨, 영양 남씨, 청주 정씨, 광산 김씨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안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3. 취락의 특성
1) 입지적 특성
ꡔ조선의 취락ꡕ에 나타난 동성마을의 입지형태를 보면 전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 1,685개의 마을 가운데 산기슭에 자리한 것이 602개, 평야에 자리한 것이 356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자리한 것이 277개, 강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98개, 계곡에 자리한 것이 97개, 바다에 자리한 것이 62개, 구릉에 자리한 것이 54개, 산음(山陰:산의 응달)에 자리한 것이 51개, 분지에 자리한 것이 44개, 길가에 자리한 것이 44개이다. 그런데 산기슭에 자리한 경우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면 배산임수의 마을에 해당되므로 결국 배산임수의 마을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셈이 된다.
산을 등지고 앞쪽에 하천이 흐르고 있는 배산임수의 마을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으로 여겨져 왔다. 뒤로 산을 등지고 있어야 바람을 막을 수 있고, 앞으로 강이 흘러야만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동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인 풍산 류씨의 하회(河回), 진성 이씨의 도산(陶山), 안동 김씨의 묵계(黙溪), 의성 김씨의 천전(川前)과 금계(金溪), 안동 권씨의 도촌(道村), 전주 류씨의 수곡(水谷:지금은 수몰됨) 등도 이러한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한 마을들이다.
동성마을 취락의 특성은 조선시대 양반층들의 거주관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양반들이 자신들의 거주관에 적합한 거주지를 찾아 마을을 형성하는 것을 ‘복거(卜居)’라 한다. 이중환에 따르면 ‘계거(溪居)’ 곧 시냇가가 가장 좋은 거주지라고 한다. 시냇가에 사는 것은 평온한 아름다움과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고, 물이 넉넉하므로 관개와 농사를 짓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중환은 시냇가에 살 만한 좋은 곳으로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들고 있다. 시냇가를 양반들의 적합한 거주지로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시냇가에 취락을 형성하는 것은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인 농경지를 수월하게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냇가 혹은 분지(盆地)는 외부와 적당히 차단되어 있는 탓에 동성마을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한 조건에 해당한다.
안동은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가 흘러 합류하는 분지의 지형으로 본류와 지류가 형성한 크고 작은 계곡이 여러 곳에 발달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내 주듯이 안동 지역에는 계곡과 관련된 곡(谷), 실, 질, 일, 계(溪), 천(川), 하(河), 내 등의 지명(地名)이 전체 지명의 35%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특히 이러한 지형적 요인은 안동의 동성마을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측된다.
2) 문화적 특성
동성마을의 특성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조상숭배를 중요시하는 까닭에 제사를 존중한다. 일반적으로 동성마을의 종가(宗家)에서는 기제사, 불천위(不遷位) 제사, 시사(時祀:시제, 묘사라고도 함), 절사(節祀) 등을 합치면 일 년에 수십 번의 제사를 지낸다. 실제로 하회의 서애 종택에서는 1년에 18번, 천전의 의성 김씨 종택에서는 20번, 토계의 진성 이씨 종택에서는 22번의 제사를 지낸다. 특히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는 것은 가문의 자랑거리이며, 한 집안에 불천위로 모셔져 있는 분이 여럿일 때는 후손들의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불천위도 임금이 내려 주는 국불천위(國不遷位)일 경우에는 그 위상이 한층 더 올라가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흔히 특정 성씨의 동성마을의 위상을 알고자 할 때 불천위 제사의 유무, 숫자 등을 살피곤 한다.
둘째, 양반이 중심이 되고 있는 마을인 만큼 유학자 등의 지방중심인물의 배출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동성마을이 많은 안동은 탁월한 인물도 많이 배출하였는데, 이중환이 ꡔ택리지ꡕ에서 “조선인물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물의 반은 안동에 있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실제로 ꡔ조선의 취락ꡕ을 보면 전국의 동성마을을 대상으로 유명한 인물과 정치가를 배출한 마을을 소개하고 있는데 전국에서 안동이 가장 많은 17개의 동성마을이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유명한 인물과 유학자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유일하게 안동만을 예로 들면서 인물들의 내력과 출신마을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안동의 인물로는 고려시대가 29명, 조선시대가 140명 기록되어 있다.
셋째, 서원과 사당(祠堂), 정자, 재사(齋舍) 등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사당과 재사는 조상숭배를 위한 것이고 서원과 사당은 후학의 양성과 선현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ꡔ영가지(永嘉誌)ꡕ에 나타난 안동의 서원은 모두 62개인데 현재 26개가 남아 있다.
동성마을의 취락구조
1. 종가와 종손
동성마을의 중심은 종가(宗家)에 있으며 종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종손(宗孫)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흔히 외부사람들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종가이다. 종가가 동성마을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은 종가의 입지적 성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마을의 가장 중앙에 처음으로 들어 온 조상의 신주를 모셔야 하는데, 이 때 그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가지고 있는 대종가가 마을 중앙에 자리하게 된다. 종가가 있는 곳은 명당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대체로 종가는 주산(主山)이 끝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여 앞으로는 하천을 바라보고 있다. 가령 천전의 의성 김씨 종택도 지내산의 주맥(主脈)이 끝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부터 종가의 몰락은 곧 문중 전체의 몰락을 의미했다. 따라서 문중에서는 종가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도움과 관심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보종(補宗)이라고 한다. 물질적 보종이란 종가가 체통을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을 말한다. 종가의 경우 일 년에 수십 차례에 이르는 조상제사와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 접대로 경제적 지출이 상당하다. 그러나 봉제사와 접빈객이 종가에게 주어진 의무이므로 이를 게을리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종가가 충실한 의무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필요로 하는데 문중에서 이와 같은 물질적 보조를 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를 마련해 준다거나 심지어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종가를 일으켜 세울 때도 문중이 적극 앞장선다.
뿐만 아니라 가옥의 내부수리를 비롯하여 종손의 학비나 혼인비용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다. 문중의 물질적 보조는 경우에 따라서는 문중성원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갹출할 때도 있으나 대개는 문중의 공유재산에서 충당된다. 흔히 문중재산은 모든 문중성원들의 공유재산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안동 지역 각 문중의 문장(門長)들에 따르면 문중재산이란 어디까지나 조상제사의 안전한 수행과 종가를 지탱․보존하기 위해 마련해둔 것이라고 한다.
정신적 보종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종가의 대(代)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문중에서는 종손의 혼인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다. 종가의 정통성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가문 좋은 집에서 며느리를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손을 얻는 데에도 늘 신경을 쓴다. 정신적 보종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는 종가에 후손이 없어서 양자를 들일 때이다. “칠촌(七寸)양자 빌듯 한다”라는 옛 말이 있듯이 촌수가 멀어질수록 양자를 얻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실제로 예전에는 8촌 이내의 당내(堂內) 범위를 넘어선 관계에서 양자를 얻을 경우 상대의 집 앞에 멍석을 깔고 엎드려서 허락을 할 때까지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가의 경우는 달랐다. 문중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종가의 양자로 일단 지명되면 아무리 촌수가 멀어도 보내야 한다고 한다.
종손에 대한 예우도 이에 못지않다. 이를테면 문중 성원들은 항렬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지만 종손만은 예외이다. 종손보다 아무리 항렬과 연령이 높아도 종손에게 ‘너’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고 ‘종군(宗君)’이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종손은 항렬과 연령에 관계없이 문중모임에서 늘 상석(上席)에 앉는다. 그리고 불천위 제사를 비롯한 문중 단위의 제사에서도 당연히 종손이 초헌관이 된다. 옛말에 ‘위선조주고종인소존(爲先祖主故宗人所尊)’이라는 것이 있는데, 선조를 위해 종손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종손을 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문중에서 종손의 지위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동성집단의 종통을 이어가는 중심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2. 조상숭배의식
동성마을의 조상숭배의식은 제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제사는 조상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상징적 행위라 할 수 있는데 자손들은 조상제사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재확인하기도 한다. 동성마을의 제사는 종류도 다양하지만 규모 또한 방대하다. 동성마을의 대표적인 제사로는 불천위 제사와 시사를 들 수 있다. 불천위 제사와 시사는 문중에서 주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족결합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불천위 제사의 경우 대부분의 이름난 동성마을에서는 여러 명의 불천위 제사를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테면 풍산 류씨의 하회에서는 세 분의 불천위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불천위로 추대된 분들의 부인 제사까지 올린다.
불천위 제사를 지낼 때는 그 마을에 살고 있지 않는, 즉 파(派)가 다른 사람들과 유림에서 참가하여 성황을 이룬다. 특히 유명한 인물의 불천위 제사일 경우에는 지역단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다. 원칙적으로 제사에 쓰이는 제수(祭需)는 문중의 위토에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마련하고 각 파와 유림에서도 제수나 제비(祭費)를 부조하기도 한다. 제관은 각 파의 대표와 유림대표로 구성되며 제사의 주관은 항렬과 연령에 관계없이 종손이 맡는다. 제사의 격식은 기제사와 거의 비슷하며 각 문중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하회의 경우에는 기일(忌日)에 해당하는 조상의 신주만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단설(單設)을 따르고 있으며, 의성 김씨의 학봉 선생의 불천위 제사는 기일에 해당하는 조상과 배우자 곧 부부의 신주를 함께 모시는 병설(竝設)을 따르고 있다.
같은 성씨 중에서도 파(派)에 따라 제수의 종류와 진설 방법이 다른 경우도 있다. 예컨대 포는 ‘좌포우혜(左脯右醢)’의 격식에 따라 가장자리에 놓는 것(변포:邊脯)이 일반적이지만, 진성 이씨의 상계파(上溪派)에서는 포(脯)를 중앙에 놓는다(中脯). 이에 대해 상계파에서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 상계파의 어느 집안에 일찍이 남편을 여윈 여자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내려고 진설을 하는데 제상의 가장자리에 놓아 둔 포가 여자의 치맛자락에 걸리고 또 아이들 소맷자락에 걸려 제물이 흩어지는 일이 잦았다. 이를 본 문중 어른들이 커다란 포가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진설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하여 그 후부터 포를 중앙에 놓도록 결정했다”라는 이야기이다. 같은 진성 이씨이지만 송당파(松堂派)에서는 포를 오른쪽에 놓는다. 하회의 겸암파(謙菴派)에서는 닭을 엎어 쓰는데 서애파(西厓派)에서는 뒤집어서 사용하며, 겸암파에서는 김을 쓰는데 서애파에서는 미역을 쓴다. 이와 같은 제사 격식의 다양함을 두고 항간에서는 ‘가가례(家家禮)’라고 한다.
시사는 4대조 이상 조상들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로서 1년에 한 번 지낸다. 시사는 제사 자체도 성대하지만 시사를 지낸 다음날 문중 모임을 갖기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사는 대외적으로는 문중을 과시하는 기회이며 대내적으로는 문중 단결을 도모하는 기회가 된다. 시사를 지낼 때는 조상의 세대(世代), 재실(齋室), 묘소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10월 초순에는 상대(上代) 조상의 시사, 중순에 중대의 시사, 하순에 하대의 시사를 지내는데, 이때 10월을 넘기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훌륭한 선조의 시사에는 될 수 있으면 모든 후손들이 참석하도록 하는데 진성 이씨의 퇴계(退溪)선생, 풍산 류씨의 서애(西厓)선생, 의성 김씨의 학봉(鶴峰)선생의 시사에는 수백 명의 후손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시사를 지낸 후에 문장과 문중 어른들은 제수와 차림새, 제사를 행하는 태도와 방식 등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3. 항렬을 우선하는 대인관계
동성마을은 특정 조상의 후손들이 모여서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친족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대부분이 친족관계로 이루어진 동성마을에서는 항렬(行列)과 촌수가 마을의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서열이 된다. 따라서 마을내의 인간관계는 이러한 항렬과 촌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엄격한 상하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항렬이 연령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항렬은 상대방보다 높지만 연령이 아래일 경우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 어색해진다. 특히 이들이 같은 마을에 살면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난처해진다. 물론 “항렬 하나가 나이 열 살을 접고 들어간다”는 말처럼 상대방보다 항렬은 낮지만 나이가 여덟 살 정도 위인 경우에도 나이 어린 상대방에게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요즘은 연령이 대인관계를 규정짓는 기준이 되어 버린 탓에 무조건 예전처럼 항렬을 따르기도 힘들다. 실제로 안동 주변의 동성마을에 가면 연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항렬만을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보다는 오히려 항렬을 무시하고 연령을 따르는 경우가 흔한 듯 하다.
특히 항렬과 연령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호칭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항렬로 따지자면 아재(아저씨)나 할배(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이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경우에 이를 ‘아재’ 혹은 ‘할배’라고 부르기란 참 민망하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아재나 할배 대신에 ‘아잼’과 ‘할뱀’이라고 부른다. 아재나 할배에 해당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항렬로 보면 아들과 손자뻘이지만 그렇다고 이름이나 자(字)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때 ‘택호 + 어른’이나 ‘字 + 씨’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동성마을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탓에 외부에 대해서 상당히 배타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배타성이 동성집단 내부에서 발휘되면 결속력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외부집단 그 중에서도 마을내의 각성받이들과의 생활에서 배타성이 발휘되면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특히 이와 같은 동성마을 혹은 동성집단의 배타성은 지역사회에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4. 혈통에 기반을 둔 마을조직
동성마을에는 여느 마을처럼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는 동장을 비롯한 반(班)과 개발위원회 등의 각종 조직들이 결성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조직들은 동성집단만이 아니라 마을내의 각성받이들과 함께 꾸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사 마을에 비해 동성마을에는 동성집단의 혈통에 기반을 둔 조직들이 유난히 많다.
여기서 하회의 풍산 류씨의 조직을 보기로 하자. 풍산 류씨는 동성집단을 중심으로 화수회(花樹會), 족회소(族會所), 양로소(養老所), 종당계(宗堂契) 등의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화수회는 화수계(花樹契) 또는 대문회(大門會)라고도 하며, 혈연적 지파(支派)와 거주지역을 뛰어 넘어 풍산 류씨라면 누구나 소속하는 대동적 조직이다. 화수회의 역할은 동성집단의 친목도모, 선조의 유물관리, 제사와 시사의 봉행, 문중재산의 관리 등이다. 족회소는 조선 초기무렵 봉산령(封山令)에 의해 선조의 묘를 잃어 버렸는데, 이때부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모든 후손에게 묘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둔다는 취지에서 겸암․서애선생과 그 선친 입암공이 만든 것이다. 현재 족회소에서 봉사하고 있는 묘소는 여섯 곳이다. 원래 족회소는 화수회의 산하조직이었으나 화수회가 점차 제구실을 하기 어렵게 되자 지금은 족회소가 화수회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족회소에서 원래 화수회에서 담당하고 있던 유사(有司)선출, 결산보고 등의 일도 맡고 있다.
양로소는 풍산 류씨 중에서 회갑을 지낸 어른들을 위한 모임이다. 이를테면 여름철에 경로행사를 베풀거나, 세모에 세찬(歲饌)을 돌리는 등의 일을 한다. 그리고 종당계는 족보를 편찬할 때 이용할 수 있도록 출생자, 사망자를 기록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 외에 파를 중심으로 한 조직들도 있다. 겸암의 묘소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의 모임인 화산소(花山所)와 서애의 묘소를 중심으로 한 수동소(壽洞所)라는 모임이 있다. 이들 소(所)단위로 위토와 재실을 따로 갖고 있으며 위토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제사를 담당하고 제각기 모임을 갖기도 한다.
위의 사례에서도 드러나듯이 안동지역의 대부분의 문중에서 결성한 조직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것들이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유교 격식에 따라 조상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고, 조상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조상과 자신들과의 연계성을 확고히 다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 다른 사례를 볼 것 같으면 지례의 의성 김씨 문중에는 조상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위소(祭位所), 손님 접대에 따르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접빈소(接賓所), 문중의 장로들과 노인들의 모임을 위한 의장소(毅長所)와 노인소(老人所), 산림의 보전과 유지를 위한 금양소(禁養所), 조상과 관련된 사업(묘비의 입석, 문집간행, 정자나 서당․종택의 보전)을 위한 추원소(追遠所)와 영건소(營建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강학소(講學所) 등과 같은 조직들을 만들어 두고 있다.
동성마을의 조직 가운데 조상제사와 별로 관련이 없는 것들은 점차 원래의 성격을 잃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의성 김씨의 천전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산(宗山)을 중심으로 의성 김씨들만의 산림계(山林契)를 형성하고 있다. 산림계는 종산을 지키고 연료를 채취하기 위해 만든 계로서 원래는 의성 김씨들만을 중심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씨 구별없이 천전에 거주하는 모든 집들이 회비만 내면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성마을이 예전처럼 동성집단만이 아닌 각성받이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 데에는 다음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농지개혁 등에 따라 마을 내의 신분구조가 크게 바뀌어 신분의 우열이 사라진데다가, 마을에 살고 있던 동성집단이 상당수 밖으로 이주함에 따라 동성집단의 집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동성마을도 이제 더 이상 동성집단만으로 마을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동 성 마 을
1. 안동지역 동성마을의 분포
안동 지역에는 유달리 동성마을이 많다. ꡔ조선의 취락ꡕ에 따르면 전국의 동성마을은 1만 5천 개로 이 숫자는 당시 전국 마을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경상북도는 1,901개로서 1,990개인 전라남도 다음으로 많은 동성마을이 분포하고 있다. 안동은 183개로 경상북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보이고 있으며, 전국 단위에서는 216개의 진주(晋州)의 다음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동성마을에 관한 자료는 면담조사와 문헌조사 그리고 몇 차례에 걸친 확인조사를 통해서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