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을 여는 시〉-120회(광주매일신문 2023.1.9.월)
눈 오는 밤에
정 재 완
―그예 올 것이 온 것이리라. 오신 도신 축제 거느린 장독대며 다시 집집마다 이영한 지붕이며 그우에 풍경까지 내리신 선낯이라곤 없는 그 이상은 좋은 마음이여.
산모롱이 휘감친 바람은 가지 끝에 와닿는데 조금은 설움띈 지난 가을 강물우에 죄-흘렸다 작정헌 것이 꽃시절처럼 언제쩍 더워오는 마음은 또한 무엇으로 알아채릴꼬?…
맨 처음 구름 두엇 시름 잣(紡)는 어덕지내서 노상 가슴을 울먹그리는 노을이며 꿈엔들 눈자위 잠깐 떳다 살어지는 미소처럼 있고 또 착한 것이여.
(시집 『하늘빛』, 향문사, 1962.)
[시의 눈]
시를 쓰다 나와 어둠 녘 툇마루에서 눈을 부빕니다. 아, 눈앞을 점령한 다른 ‘그예 온’ 눈이 있지요. 눈은 ‘오신 도신 축제’를 펴는 ‘장독대’와 새로 ‘이영한 지붕 우에’ 하염없이 쌓입니다. ‘선낯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은혜이듯 내려옵니다. 순간, 백설 앞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설움 띈’ 시절을 흘려보냅니다. 하면, ‘꽃시절처럼’ 더워 오는 그이 체온이 출렁여올지도요. 내 삶은 ‘시름 잣는 어덕지내’에서 울먹이고 있지만, 눈은 ‘잠깐 떴다 살어지는 미소’만큼 설핏 새 기운을 주기도 한답니다. 거리를 쏘다니던 젊은 객기의 잎을 죄 훑어버리고, 이제는 조용히 날릴 사랑의 연을 만들려 푸른 대매듭을 다듬습니다. 소원을 실은 내 흰 방패연은 시루산을 넘어 그녈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해서, 내일은 그녀를 보낸 ‘어덕지내’를 오르려 합니다. 칼바람 눈밭에 흰 창호지 연을 띄우며 긴 눈물의 실로 그녀를 가까이 당겨 보려 해요.
정재완(1936~2003) 시인은 장흥에서 나 전남대 철학과와 충남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고 전남대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1960년 《현대문학》 천료를 했고, 시집 『하늘빛』(1962), 『저자에서』(1972) 등이 있습니다. 그는 순수서정의 휴머니티를 사물에 대입시킨 시인으로 송기숙 작가와는 단짝이기도 했지요.(노창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