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감리교회, 개척초기 고난과 역경의 스토리
1991년 선교감리교회는 김 목사의 부친이신 김영팔 목사와 가족에 의해 ‘울산영생교회’라는 이름으로 중구 반구동 지하 25평의 좁은 공간에서 개척됐다. 강대상이 없어 철제 책상으로 대신할 만큼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 당시 병영일대의 토착민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불교세가 강해 알게 모르게 교회에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1991년 2월 동구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장년 성도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다행히도 주일학교는 날로 부흥하여 수십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생교가 한창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매스컴에서 요란할 때, 이단으로 오해를 받아 그 여파로 주일학생들도 10여 명으로 줄어드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도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라 교회이름을 ‘화정제일교회’로 개명했고, 그 후 다시 부흥을 경험하여 지하 성전에서 벗어나 2층 상가로 다시 이전하게 되어 교회 이름을 지금의 ‘선교교회’로 개명하게 되었다.
이 때 개척교회는 지역 이름을 포함해서 교회 이름을 지으면 안되겠다는 중요한 경험을 얻기도 했다. 아무튼 비록 75만 원의 월세를 부담하고 있었지만, 전도와 부흥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음악을 전공한 이성옥 사모가 플루트·피아노로 토요음악반을 운영했다. 그 당시 임신 중인 어떤 분은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 사모에게 플루트를 배우다가 믿음이 생기게 됐고, 현재는 큰빛교회에서 열심히 집사로 섬기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조금씩 자리잡아갈 무렵, 이번엔 교회 옥상에 집을 지어 입주한 주인집이 우리가 드린 월세로 주일날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시간에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 문제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어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성전 건축의 비전을 품게 되었고, 너무 빈약한 재정 상황이라 대지를 구입하여 건축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되어 땅을 임대라도 할 수 있으면 건축할 수 있지 않을까 기도하면서 주변을 알아보게 되었다.
여유자금이 있어야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지을 텐데 아무리 궁리해 봐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김상근 목사와 이성옥 사모는 전국에 있는 대표적 감리교회 100교회를 방문하기로 작정했다. 협조공문을 만들어 공문만 들고 무작정 믿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우리교회가 건축을 위해 이런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비전을 이룰 수 있도록 같은 교단의 목회자로서 십시일반의 정성을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 교회에서는 정성을 보이며 성의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근 목사와 이성옥 사모는 다른 교단의 교회들도 수없이 찾아다니며 후원요청을 받았다. 차갑게 대접하는 교회도 있었고, 힘내라며 기도해주고 격려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런 세월을 거치면서 선교감리교회의 토대는 하나씩 자리를 잡아갔다.
선교감리교회, 대지구입과 성전건축 스토리
선교감리교회를 건축하게 된 배경을 잠시 언급하자면 어느 날 임대해 줄 땅을 찾던 중 근처에 있는 부동산을 찾았다. 사정 얘기를 듣고 있던 사장님께서 “임대보다는 저렴한 땅을 소개해 드릴테니 걱정 마시고 구입하는 것으로 해 보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뭘 가지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땅을 소개한다”고 하며 130만 원 시가의 방어동 1099-10번지 61평의 토지를 보여주면서 110만원에 계약을 해 주겠다고 했다. 수중에 무일푼이었지만 김 목사는 본인이 사택으로 사용하던 보증금 600만 원을 빼 계약금으로 삼고 중도금 1,100만원만 마련해 오라고 우리를 채근했다.
앞이 캄캄했지만 이 일도 하나님께서 해 주시리라 믿고 기도하던 중 당시 사택을 방문했던 수영로교회를 출석하던 후배가 400만 원의 건축헌금을 보탰고, 김영팔 원로목사는 자녀들이 모은 회갑잔치 비용 300만 원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셨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대지 구입을 완료하고 드디어 2003년 1월에 기공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그 해 7월 착공할 때까지 수 많은 우여곡절 끝에 43평의 땅을 더 구입하게 되었고, 건축 후 주차장 부지 45평을 더 구입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물론 공사를 늘 모자라는 건축비 때문에 공사가 중단됐다 재개됐다를 반복했음은 당연하다.
그 무렵 김상근 목사와 이성옥 사모는 성전건축 후원을 위해 전국교회를 찾아다니며 한 주일에 보통 1000km 이상의 거리를 운행했다. 차 안에서 자면서 김밥 등으로 거의 끼니를 때웠다고 술회했다. 그런 노력으로 2003년 7월 31일 착공한 교회를 2004년 3월 22일에 드디어 준공검사를 마치게 됐다. 그때의 감격을 어찌 이루 말로 다 할 수 있을는지. 솔로몬의 성전건축에는 비교하진 못할지라도 그 만큼의 감격스러움과 희열이 있었다. 이때 그동안 무리했던 김 목사는 허리디스크가 생겨 한 해 동안 꼼짝달싹 못할 만큼 어려움도 겪었었다. 병원에서 고통스런 뼈 주사를 거의 매일 맞아야 했고, 하루 두 차례 반신욕을 했으며, 학교 운동장 10바퀴를 이를 악물로 매일 걸으면서 겨우 몸을 추스르고 회복하게 됐다.
김상근 목사는 한때 울산공항 앞에서 제자들교회의 이름으로 따로 개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일학생들이 40명가량 출석했고, 김상근 목사는 주보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매주 300부씩을 제작해 교회 주변 지역 곳곳에 배부했다. 초등학교 4·5·6학년생들을 구역속장으로 임명했으며, 학생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제법 성장세를 일궈냈다. 그 당시 학생들의 교육과 부흥에 정통한 파이디온선교회를 이수한 학생들은 수요예배에도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부친과 함께 공동사역을 하기 위해 제자들교회를 후배에게 넘기게 됐고, 오늘까지 부친을 이어 선교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입당예배 때 남은 성도는 온전한 한 가정과 청년들이 전부였지만 감격스런 예배를 봉헌해 드린 이후 153이웃초청집회를 열어 박용식 집사·신국 장로·이영후 장로가 강사로 와서 은혜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며 다녀갔다. 김 목사가 1997년 제자들교회를 개척했을 당시 <구인광고>라는 소책자를 매호마다 300부를 직접 편집해서 만들었다. 그런 노력으로 전국감리교회 월간지·회지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현재도 꾸준히 발간하고 있는 구인광고는 매주 100부씩 제작해 우편으로 부치고 직접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인광고를 단행본으로 발간하기도 했었다.
선교감리교회, 꿈이 있는 비전스토리
선교감리교회의 비전은 <꿈을 꾸는 교회·꿈대로 자라는 교회·자란만큼 나누는 교회>이다. 이제 교회에는 장년성도들과 아이들 모두 합쳐 60여 명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또한 김 목사는 직접 성도들의 생일을 챙겨주는 일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여자 성도들에게는 꽃 배달을, 아이들에게는 케이크를, 남자 성도들에게는 화장품·텀블러 등을 선물하고 있다. 그리고 명절에는 김영팔 원로목사와 김상근 목사에게 어린이들이 세배를 하면 5000원의 세뱃돈을 준다고 한다. 벌써 5년의 세월을 맞으니 교회전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목회의 현장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지나왔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김 목사는 조만간 선교감리교회의 발자취를 책으로 발간할 소망을 피력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교회 입구의 머릿돌을 보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마태복음 19장 26절 성구가 새겨져 있었다. 사람으로서는 힘겹고 어려운 일을 감당해 왔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아오름같이 활기찬 영적인 비상과 상승을 허락하시길 빌어본다.
인터뷰-이금희 발행인, 글-박정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