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선생의 생가 터에 가다
강원구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아내와 함께 매주 시골집에 갔다. 어머니도 만나고 동생들도 만나 항상 즐거움이 많았다. 어머니가 91세가 되면서 조금 아프시더니 그때부터 치매(癡呆)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매번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하여 항상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8남매로 항상 어머니의 고생하신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아버지께서 50세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46세에 홀로 계시면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논밭을 다니면서 일만 하시었다. 어머니가 힘들기 때문에 나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집에는 꼭 다녔다. 그러나 어머니가 99살 10개월간 살으셨으니 100세라고 보아야 한다.
치매에 걸렸으면서 어머니는 우리와 즐거운 대화를 많이 하였으며, 항상 유머가 풍부하시었다. 내가 강의도 많이 하고 있지만, 어머니를 닮아 유머있게 강의를 하여 지금도 강의로 돈을 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머니가 집에 계실 때는 매주 일요일 나와 아내는 항상 시골집에 간다.
아내도 우리어머니를 대단히 존경하였고, 어머니 말씀에 기분 나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집에 가면 아내는 아무 스스럼 없이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준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가 다리를 다쳐 딸 민정이와 같이 시골집에 일하러 갔다. 민정이는 매주 집에가서 산과 밭에서 일을 많이 하고 집에 온다. 딸은 항상 산에 가서 할머니한테 인사하고 산과 밭에서 일하였다.
이번 여름은 너무나 더운 날이었다. 1시간 동안 더위 속에서 대나무 죽순이 바깥으로 나온 것과 칡넝쿨 등 잡초를 제거하였다. 나무가 흐트러진 것은 끈으로 묶기도 하고 버드나무가지 너무 늘어진 것을 일부 잘라내기도 하였다. 점심시간에 동생 칠구가 돼지고기를 사까지고 와서 같이 먹기도 하였다.
딸 민정이란 노안면 금안리에 한옥마을에 새로 만들어진 곳을 가보았다. 민정이에게 금안리는 호남의 3대명당이라 말하자 놀랐다. 그리고 고려시대 정가신(鄭可臣)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원(元)나라 쿠빌라이 황제를 만나 외교활동을 잘하여 금(金)으로 된 안장(鞍裝)을 받아와서 그 마을이 금안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마을에 신숙주(申叔舟)선생 5형제가 태어난 마을이라고 말하자 민정이가 “아빠는 왜 신숙주를 신숙주선생이라고 불러?”그러는 것이었다. 아마도 신숙주선생은 사륙신(死六臣)이 아니기때문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40년 전에 신숙주선생의 생가를 공원화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가보니 내가 세웠던 ‘신숙주선생 생가터’라는 비석이 그대로 있었다.
딸에게 신숙주선생은 한쪽 이야기만 들으면 “배신자”로 보이고, 다른 쪽에서는 “유능한 정치가”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숙주선생이 수양대군의 편에 서게된 것은 아마도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6개월동안 인간적으로 정이 들었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숙주선생은 광주목에서 현으로 강등되었을 때, 이선제선생과 힘을 합쳐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한 분이라고 말했다. 광주는 그 때 기쁘고 경사스럽다고 하여 희경루(喜慶樓)를 지었는데, 신숙주선생이 희경루기(喜慶樓記)를 지었다고 말했다. 그 뒤 희경루가 없어졌다가 몇 년 전에 희경루를 복원하였는데, 신숙주선생의 희경루기에 한자(漢字)가 잘못 파져서 다시 고치기 위해 걸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를 공부할 때는 결과만 보기보다 당시의 상황과 선택의 배경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많은 학자들이 좋게 생각하고,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방송에 나오는 말중에 숙주나물이란 말은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말이고, 정치판에 들어가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숙주선생은 일본에 다녀와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남겼다. 그리고 한글을 창제하는데 성삼문선생과 요동지방을 13차례나 방문하여 명(明)나라 언어학자 황찬(黃燦)선생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에도 앞으로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임진왜란시 거북선으로 승리를 한 것은 나대용(羅大用)이 거북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숙주선생은 나라의 안정을 우선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세조(世祖) 치하에서 국가 제도장비와 외교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선생을 당(唐)나라 위징(魏徵)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위징은 황제에게 “나를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말고, 양신(良臣)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그말의 뜻은 목숨 하나 내놓으면 충신은 쉽게 될 수 있으나, 양신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역사를 한쪽으로만 보지 말고, 양쪽을 보는 눈도 길러야 할 것 같다.
2026.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