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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대하(盧大河)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수오(受吾), 호는 이소당(履素堂). 본관은 광주(光州). 백부 노수신(盧守愼)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관계되어 진도(珍島)로 귀양가자 그를 모시고 따라가서 수학하였다. 1574년(선조 7)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이 되었고 1584년에 교하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세자를 이천(伊川)에 배종(陪從)하여 첨정이 되었고, 김응남(金應南)의 종사(從事)가 되어 식량의 운반에 공을 세웠다. 또 천안(天安) 군수를 지낼 때는 처음으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여러 고을의 본보기가 되었다.
2. 신여량(申汝樑) 장군
신여량장군의 정려 : 지방기념물 제111호 지정일 : 1987년 6월 1일 지정 소재지 :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815 - 1 |
신여량(1564 ~ 1606)은 고령신씨 고흥입향조인 석(碩)의 6세손으로 부 홍해(弘海)와 모 흥덕장씨(興德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중임(重任)이고 호는 봉헌(鳳軒)으로 15세때 부를 16세때 모를 여의고 4년간 시묘를 살았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15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1586년에는 평북용만(의주)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가 되어 북경(北境)의 거란족을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에 의해 압록강변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591년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오위도총부의 부부장(副部長)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과 의주로 피난갈 때 호종하였고, 조방장(助防將)으로서 이순산장군과 연합하여 노량·한산(露梁·閑山) 양대첩과 가덕양(加德洋) 싸움에 참전하였다.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우수영군첨정(慶尙右水營軍僉正)으로 특진되었다.
그때 조헌이 창의하여 옥천·대전(沃川·大田)을 수복하자 향리에서도 동생인 여기·여정(汝杞·汝楨)과 종제인 여극(汝極), 그리고 종숙인 영해·원방·홍수(榮海·元方·弘壽) 등이 창의하여 함께 권율의 막하에 편입하여 행주대첩(1593)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몫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공은 다시 향리 친척들과 창의하여 순천예교(順天曳橋) 싸움에서 대승하였다.
3. 해동명장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약사
김덕령 묘.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본관 광산(鑛山), 자는 경수(景樹), 호는 충장(忠壯) |
충장공 諱 金德齡은 우리 광산김씨의 명조(名祖)이자 해동명장(海東名將)이다. 장군은 조선 宣祖 元年(서기 1568년) 12월 29일에 광주 무등산(無等山) 아래 석저촌(石底村 : 現 충효리)에서 탄생하였다. 그 때 무등산의 정기(精氣)가 온통 장군에게로 쏟아졌기에 무등산의 草木이 3년동안 꽃을 피지 못하였다고 전해온다. 장군은 태어나면서 신용(神勇)을 타고나 바라보면 단아(端雅)한 선비였으나 내면에는 상상을 초월한 용력(勇力)이 있었다. 눈방울이 가을물처럼 맑으면서 광채가 나 아무리 어두운 밤일지라도 수리(數里) 안의 물체를 환희 구별하였으며, 둔갑술(遁甲術)을 능통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였다.
宣祖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이듬해 계사년(癸巳年)에 장군은 수령(守令)·방백(方佰)의 명 천거와 권유로 모상(母喪)중에 묵최(墨 )로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키니 그 소식을 듣고 하루 아침에 의병 5천여명이 운집하였다. 이에 광해군(光海君)은 전주에 분조(分朝)하여 있다가 장군을 불러 보고서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려주었으며, 선조대왕은 특사를 보내 충용군(忠勇軍)이란 칭호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장군의 전략(戰略)은 담양을 출발하여 순창, 남원, 운봉, 함양, 산음, 단성, 삼가, 의령, 함안, 창원, 김해, 동래, 부산과 동해의 대마도를 거쳐 일본 대판(大阪)으로 쳐 들어가려고 하였다.
장군은 의병 5천여명을 거느리고 영남의 진주로 진군하여 월아산(月牙山)에 목책(木柵)을 설치해 놓고, 대여촌(代如村) 마평(馬坪)에서 호두가면(虎頭假面)을 쓰고 24斥짜리 철추(鐵椎)에 50斤짜리 철일(鐵 )을 휘두르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곤 하였다. 장군은 이 정예(精銳兵)들을 거느리고서 의령 정암진에서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연합기습작전으로, 거제도에서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륙연합작전으로 왜적을 크게 무찌르기도 하였다. 장군은 명성이 너무나 높아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터무니 없는 모함을 받아 의금부(義禁府)에 나치(拿致) 되었다가 다행히 무죄방면되면서 어구마(御廐馬)를 하사받아 진주로 환진(還陳)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596년(선조 29년) 7월에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장군이 또 터무니없이 연루되어 추국청(推鞫廳)으로 체포 압송되었다.
이 때에 추관(推官)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좌의정 김응남(金應南)·지중추부사 정탁(鄭琢) 등이었다. 김응남(金應南)과 정탁은 장군을 힘껏 구원하였는데, 정탁은 장군을 구원하는 옥사계(獄事啓)까지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독 영의정 柳成龍만이 장군을 배제(排擠)함으로 인하여,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는 웅략(雄略)을 조금도 펴보지 못한 채, 만고(萬古)의 억울함을 품고서 "春山火燃曲" 한 수를 남기고서 옥중에서 원통하게 돌아갔다. 때는 선조 29년 8월 21일로 장군의 보령(寶齡) 겨우 29歲이였다. 이 때에 진주 백성들은 장군의 비보를 듣고 모두들 골목에 모여 서로 울었었다. 장군이 돌아간 지 65년 만인 현종(顯宗) 2년에야 비로소 신원 복직되고, 현종 7년에는 병조판서를 가증한 동시에 장군이 합향(合享)된 벽진서원(碧津書院)과 의열사(義烈祠)에 사액(賜額)도 하였다.
그리고 정조(正祖) 12년에는 충장(忠壯)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장군의 옛 마을 석저촌을 충효리(忠孝里)로 명명(命名)하여 표리비(表里碑)를 세워 주었으며, 13년에는 좌찬성을 가증하고 부조판하(不 判下)도 내려 주었다. 뿐만 아니라 1976년에는 정부(政府)에서 장군의 묘역을 성역화(聖域化)하고 충장사(忠壯祠)를 창건(創建)해 주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올린 장군의 옥사계(獄事啓) 초본(草本)을 종현(宗賢) 김선원(金善源)씨가 인사동(仁寺洞)에서 발견하여 내게 연락을 주기에, 단걸음에 달려가 고가(高價)에 구입 표구하여, 봉심재배(奉心再拜)하고서 오동나무 갑에 넣어 화씨벽(和氏璧)보다 더 보배로 간직하다가, 이번에 번역을 곁들여 월간 光山뉴스에 게재한다.
후손 충호(忠浩) 삼가 씀. ※ 이글은 후손 김충호 (성균관 한림원 원장 겸 성균관대 교수, 단국대 동양학 전문위원) 일가가 월간 光山뉴스에 기고한 글을 우리 광산김씨 후손들은 알아야 하겠기에 원문 그대로 올린 것입니다. |
春山火燃曲 춘산에 불이 나니 못 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없는 불이 나니 끌 물없어 하노라 |
4. 김덕함(金德諴)
김덕함선생묘 및 신도비(金德 先生墓·神道碑) 지정번호 : 기념물 제144호 지정일 : 1993년 10월 30일 문화재유형 : 선현묘역 시 대 : 조선 1660년(현종 1) 소재지 :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산1 |
본관 상산(商山:상주),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조선 중기의 문신 1593년 봄 조정이 정주로 파천할 때 공조와 예조의 좌랑으로서 비변사낭청(鄙邊司郎廳)을 겸하였다.
1594년 군공덕이 세워지자 우의정 김응남(金應南)과 병조판서 이항복의 주청(奏請)으로 군공도청이 되어 공정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그해 예조정란으로 승진하여 다시 비변사낭청(鄙邊司郎廳)을 겸하고, 1595년 선천군수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호조정랑으로 재임 중 우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주청으로 명군의 후방 군량보급을 전담하였고, 이듬해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다가 청풍군수로 나갔다.
☞ 비변사낭청(鄙邊司郎廳) : 주청(奏請): 임금에게 아뢰어 청함.
논공행상(論功行賞) : 공을 따져서 상을 줌
5. 이 보(李輔)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임(景任), 호는 남계(南溪). 조선 중기 문신. 경상북도 군위(軍威) 출생. 성리학자 진(軫)의 아우이다. 유성룡(柳成龍) 문하에서 경전·성리학 등을 익혔으며, 1580년(선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해(金垓)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모속관(募粟官)을 겸하여 전란으로 황폐해진 인동(仁同)을 다스리면서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뒤에 김응남(金應南). 정곤수 등의 천거로 당진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인동주민의 요청으로 인동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천생산성(天生山城)을 쌓을 때 역사(役事)를 맡았으며, 1604년 거창현감에 전직되었으나 노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6. 배응경(裵應褧) : 1544(중종 39)∼1602(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 무선(茂先)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정랑을 거쳐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군사 1,000명을 모아 ‘야격군(野擊軍)’이라 하고 박경전(朴慶傳)을 대장(代將)으로 삼아 왜적 수백명을 포획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5년(선조 28)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나주목사가 되어 금산을 수비하였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으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막아 분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감사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부마(駙馬) 서경주(徐景霌) 등의 상소로 곧 석방되었다.
1601년 대구부사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
그뒤 영천(榮川)에 머물며 김륵(金玏)·김우옹(金宇顒)과 《반야심경》을 강론하는 등, 제현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일찍이 유성룡과도 교유하였는데, 그의 박학함에 유성룡이 탄복하였다 한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안촌집》이 있다.
7. 박이장(朴而章) : 본관(本貫)은 순천(順天), 자(字)는 숙빈(叔彬), 도천(道川), 숙필(叔弼), 호(號)는 용담(龍潭), 호은(壺隱)
1547년(명종 2년)~1622년(광해군 14년) 조선 중기의 문신.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 을과(乙科) 2
1591년(선조 24년: 45세) 5월에는 하절사(賀節使) 김응남(金應南)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中國)에 가서 명(明)나라 왕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하사받고 9월에 귀국하였다. 명(明)나라에서 돌아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용담(龍潭)은 두 번째로 중국(中國)에 갔을 때는 천재일우(千載一遇)로 오계자(吳季子)가 주(周)나라 음악을 구경한 유풍(遺風)으로 금연가(金蓮歌) 한 곡을 지음으로 당시에 소장공(蘇長公)이 한림원(翰林院)으로 돌아온 고사와 비교되었다고 한다.
8. 전식(全湜) :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팽조(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혼(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여림(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신(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전식선생 묘역위치 = 경상붇도 상주시 외답동 산 24-1
9. 김억추(金億秋) : 본관은 청주이고 자 방로(邦老), 시호 현무(顯武)이다.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작천면(鵲川面) 박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577년(선조 10)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하였는데 선조는 그의 무공을 높이 평가하여 이이로 하여금 김억추의 용맹을 칭송하는 시를 짓게하였다고 전한다. 무이만호(撫夷萬戶)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판관 ·사복시판관, 진산(珍山) ·순창(淳昌) 등의 현감을 지냈다.
순창군수로 재임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김억추를 방어사로 임명했고 밤을 가리지 않고 말을 급하게 몰아 평안도에 당도하여 대동강을 지켰다. 하지만 왜군과의 전투에 패하여 관직을 빼앗겼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고, 이어 진주목사 ·고령진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를 지냈다. 1597년 정3품에 올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어란포해전과 명량해전에 참전한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만호(萬戶)에나 맞지 대장의 재목이 못되는 인물이며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억지로 임명되어 개탄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울두목(鳴浪) 싸움에서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도망쳐 가물가물거린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밀양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종2품에 올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뒤에 제주목사를 지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강진군 박산마을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
10. 이필형(李必亨) : 1571(선조 4)∼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태(而泰). 준경(浚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열(禮悅)이고, 아버지는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사수(士修)이고, 어머니는 김선(金銑)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참찬 필영(必榮)의 형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서 병과 6위로 급제하였고, 1596년(선조 29) 주서(注書)를 거쳐, 정언에 올랐다가 이듬해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남쪽에 파견되면서 헌납을 사직하였다.
1598년 지평ㆍ직강ㆍ헌납을 차례로 역임하던 중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 제학ㆍ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수권(首圈 : 가장 우수한 후보자로 지정됨.)으로 선발되었다.
이어 이조좌랑 겸 왕세자를 보필하는 사서(司書)직을 수행하다가, 이듬해 성균관전적ㆍ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소북(小北)을 이끄는 남이공(南以恭) 김신국(金藎國)의 당을 좇다 헌부의 탄핵을 받아 한 때 삭탈관작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607년(선조 40) 교서관교리에 재임용되었다.
이어 임천군수(林川郡守)로 파견되어 목민 업무를 수행하다가 37세의 일기로 졸하였다. 시론(時論)에 합하지 않은 김류(金瑬) 등을 탄핵하여 여러 해 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젊어서 관직에 등용되어 시세(時勢)에 편승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11. 송응순(宋應洵) : 1547년(명종 2)∼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공신(公信), 호는 소옹(簫翁)·춘호(春湖).
증조부는 송여해(宋汝諧)이고, 조부는 송세충(宋世忠)이고, 부친은 송기수(宋麒壽)로 명종(明宗)·선조(宣祖)대에 걸쳐 판서(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채침(蔡忱)의 딸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안언수(安彦銖)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우애도 깊어 큰형 송응개(宋應漑)가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당쟁에 휘말려 회령에 유배되자 이를 극진히 돌보았다.
두 형과 달리 뒤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595년(선조 28) 지천현감(鎭川縣監)을 시작으로, 1596년(선조 29) 병신정시문과(丙申庭試文科)에 을과 4등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이어 호조(戶曹)·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김응남(金應南)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영남에 내려가 있다가, 그해 겨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도 사헌부, 홍문관, 세자시강원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의 원병을 위한 군향(軍餉) 조달관으로 관서지방에 파견되었으며, 한때는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곧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승진하였다. 1601년(선조 34) 사도시(司䆃寺)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양주목사로 전임되었는데 곧 사임하였다. 그 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이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쳤고, 54세의 나이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귀국 후 얼마동안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조참의(吏曹參議)를 맡아 일을 보다가 1608년(선조 41)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올랐다.
고향으로 내려 간 뒤, 3년 후인 1611년(광해군 3)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회덕 식장산(食藏山)에 있다.
12. 신할(申硈) : 본관은 평산(平山). 묘소는 충남 공주시 신풍면 영정리,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19세손으로 영의정에 증직된 신화국(申華國)과 첨정 벼슬을 지낸 윤양정(尹讓貞)의 딸 파평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할(申硈)[1548~1592]은 19살이 되던 해인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사에 보임(補任)되었고, 1589년(선조 22) 경상도좌병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병사가 되어 선조의 몽진을 호위함으로써 그 공을 인정받아 좌승지 민준(閔濬),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 대사헌 윤두수(尹斗壽) 등의 추천으로 경기수어사겸남병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막하의 유극량(劉克良), 이빈, 이천(李薦), 변기(邊機)를 아장(亞將)으로 삼고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병사를 이끌고서 임진강을 지키며 적과 대치하였다. 9일 동안 적과 대치하던 신할과 그의 병사들은 당시 도순찰사였던 한응인(韓應寅)의 병력을 지원 받아 작전을 세우고 심야에 적진을 기습하였으나 복병이 나타나 44세의 나이로 그 자리에서 순절하였다.
13. 우복룡(禹伏龍) : 1547(명종 2)~1613(광해군 5)
본관(本貫)은 단양(丹陽),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미산면 백석리 분석골에 묘(墓)가 있다. 자(字)는 현길(見吉), 호(號)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이다. 현령(縣令) 효친(孝親)의 증손자이며, 민순(閔純)의 문인(門人)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었고 그 뒤 우의정(右議政) 이탁(李鐸), 이조(吏曹)판서(判書) 이이(李珥)의 천거(薦擧)로 내섬시직장으로 승진(陞進)하여 종부시주부․공조좌랑․목천현감․김포현령․지평(持平)을 거쳐 1589년 용궁현감이 되었으나 재임(在任)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왜적(倭敵)과 수 차례 싸워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認定)되어 안동부사로 승진(陞進)하였다. 강화유수, 홍주․나주․충주(忠州) 목사(牧使)와 강원도(江原道)․충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歷任)하였다. 만년(晩年)에 성천부사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사양하고 왕징면 무등리에 무등장(無等庄)을 짓고 세속과 거리를 두고서 깨끗한 몸가짐으로 독행(獨行)하면서 일생(一生)을 마쳤다. 저서(著書)로는 『구암집(懼庵集)』이 있다.
- 참고문헌 『宣祖實錄』;『光海君日記』;『國朝人物考』;『眉?記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연천군(인물)
강원도관찰사구암우선생묘비명
조선국 통정대부 수걍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구암 우복룡 묘비병 병서
당시 호조판서가 궐석중임으로 임금은 묘당에 자격을 따지지 말고 적합한 사람이면 천거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공을 천거하고 영의정 유성룡에게 문의하자 유성룡이 말했다.
우복룡이 지금(1593년) 안동을 맡고 있는데 치적이 뚜렷하니 불러들이면 필시 남쪽백성들의 소망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거가 취소되었다.
2년 뒤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신년(1596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제배되어 아직떠나지 않고 있던 중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여 하교했다.
묘의 소재지 : 미산면 백석리 산 18
14. 조정에서 임란 초기 목숨바친 조헌을 기릴 것을 건의하다
◎ 선조 28년(1595년) 12월28일 [옥천 등지에 의병장을 보내줄 것을 건의하다]
윤근수 등 대신으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각 지방의 상황에 대해 보고받았다. 특히 옥천과 괴산, 남원 등의 방비와 관련, 전의 의병장을 보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봉년은 늙기는 했으나 43번의 전투를 겪으며 적을 살상한 것이 많다고 증언했다.
또 이봉년(李鳳秊)은 전에 옥천군수로 있을 때 처사는 혹 서툰 점이 있었으나 인자로서 백성에게 임하고 청렴으로써 자기를 단속했다고 전했다. 이에 박춘무(朴春茂), 신경행(辛京行) 등도 모두 거두어 쓸 것을 요청했다. 김응남(金應南)은 조헌(趙憲)선생 등을 기리는 문제와 관련, 상소했다.
김응남(金應南)은 "요즘 수 년간의 일을 살펴보니 반드시 충의로운 사람을 쓴 뒤에야 나라 일을 해볼 수 있습니다. 전라·경상 등의 도에서 사변(1595년이면 임진왜란 시기임) 초기에 힘써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이 포상을 입지 못하니 실망이 매우 큽니다"라고 말했다. 김응남(金應南)은 "고경명·최경회 같은 사람은 이미 추증하기는 하였으나 조헌(趙憲)·황진의 자제와 아울러 모두 거두어 서용하되 인심을 격려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안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고 조헌 선생의 자제 등을 관리로 쓰는 등의 포상책이 있어야 한다는 건의였다. 임금은 비변사에 말하여 의논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 이봉년(李鳳秊 1652년~) :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자(字)는 덕휘(德輝), 숙종(肅宗)25년(1699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4(丙科14)
☞박춘무(朴春茂) :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화천당(花遷堂),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 1544~1592)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임천군수(林川郡守)·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였고, 이듬해는 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지낸 바 있다. 관계(官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참찬(參贊)에 추증되고,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내에 박춘무 전장기적비가 남아 있다. 조헌과 함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 동문수학하였다.
저술『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 신경행(辛景行 1547년 ~ 1623년) : 본관(本貫)은 영산(靈山), 자(字)는 백도(伯道), 호(號)는 조은(釣隱), 시호는 충익, 조선 중기의 문신
157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지내고 1596년 종사관으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우고 1604년 청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병마절도사에 벼슬이 이르고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조헌(趙憲) : 본관은 배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이며, 호는 중봉(重峰)·도원(陶原)·후율(後栗), 조선 중기의 문신, 유학자, 의병장(義兵將). 경기도 김포출생이다.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菡)에게도 배웠다.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했다.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 1571년(선조 4) 홍주목교수(洪州牧敎授)에 임명되었는데, 이 시절부터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1572년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궁중불사(宮中佛寺)의 봉향(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고, 이듬해 교서관저작이 되어 다시 같은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1574년 5월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1월 귀국하여 시무(時務)에 관한 '8조소'(八條疏)를 올렸다.
1575년 교서관박사에 오르고 이어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쳤다. 그뒤 통진현감이 되었으나, 내노(內奴)의 작폐를 다스리다 장살(杖殺)한 죄로 탄핵을 받아 1577년 부평으로 귀양갔다. 1580년 풀려나 이듬해 공조좌랑·전라도도사에 임명되었고, 1582년 보은현감이 되었다.
1584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옥천의 밤티(栗峙)에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1586년 다시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公州牧敎授兼提督官)에 임명되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음을 주장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는 등 5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11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방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車嶺)에서 문인 김절(金節) 등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금산전투).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대체로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이(理)의 일차성을 인정하면서도 기(氣)의 존재를 중시했다. 한편 그는 국내외의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여러 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으로 불린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고,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옥천 표충사(表忠祠),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 소백주(小栢舟)의 시(詩)
相公을 뵈은 후에 事事를 밋자오나 拙直한 마음의 병들가 念慮려니 이라마 뎌리챠하시니 百年 동포 하리이다 ~소백주(小栢舟)~ |
상공을 뵈온 뒤에 모든 일을 전혀 믿사오나, 옹졸하고 고지식한 마음에 병이 들까 걱정이 옵더니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하시니 백년을 함께 살고자 하노라. |
◎ 배경
두암 김응남(金應南)은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의 사위였다. 이지번의 아우가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토정이고, 아들이 또한 유명한 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였다.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였고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였으므로, 서인이 몰리는 시대가 되었다. 때를 만난 남인과 북인은 다시 들고 일어났다. 동강 김우옹이 선두에서서 오음 윤두수와 송강 정철을 공격했다. 그러자 수몽(守夢) 정엽(鄭曄)과 상촌 신흠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엽(1563~1625)은 본관이 초계(草溪)로서 자는 시회(時晦)인데 수몽은 여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이산해의 아우 산보(山甫)의 사위가 되었으며 산보의 숙부 토정이 그를 보자 “장차 크게 될 사람이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상촌과 수몽은 “송강 정철과 오음 윤두수는 임진왜란에 둘다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는 없습니다. 하물며 원로대신을 공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선조대왕은 당쟁을 싫어했으므로 크게 노하시고 김우옹과 정엽이 다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다. 한편 이 무렵 명나라는 심유경(沈惟敬)이란 자를 내세워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심유경이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풍신수길을 일본왕(日本王)으로 봉하기로 하고 저들이 그것에 만족하여 화해를 청해오면 조선에서도 화의에 응하시오.“라고 했다. 서애는 이 말을 듣자 일이 좀 맹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의 말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계 성혼과 함께 선조대왕 앞에 나아가 “지금 국세가 위태롭고 급박하오니 조금 병봉(兵鋒)을 늦추어서 우리의 힘을 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따라서 왜국이 화친을 청해오면 들어 주사이다.“라고 아뢰었다. 우계는 서인이었다. 정철은 이미 병들어 돌아간지 오래였으므로 우계는 서인의 영수인 셈이었다. 이 왜국과의 화친문제를 춘호(春湖) 유영경(柳永慶)과 관송(觀松) 이이첨(李爾瞻)이 공격했다. 이들은 둘다 북인이었다. 성혼은 고향에 돌아가 이내 병들어 죽었으므로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에게 공격의 화살을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서애는 선조 32년 영의정을 내놓고 물러났는데 오음 윤두수가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므로 북인은 오히려 서인의 정권 장악에 힘을 빌려준 꼴이 되었다.
소백주는 평양 기생으로서 자세한 것은 모른다. 선조 33년 의인왕후박씨(懿仁王后朴氏)가 승하를 하셨다. 의인왕후에겐 아드님이 없었으므로 후궁의 몸에서 난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 책봉돼 있었다. 그것보다 왕후는 하루도 없어선 안 되는 것이므로 선조대왕은 늦게 장가를 들게 되었다. 이 때 맞아들인 왕비가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다. 그런데 인목왕후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던 것이다. 왕후의 몸에서 적자가 태어나므로 세자 광헤군은 몹시 불안해하였고 그 지위 또한 흔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갖고서 조신들 사이에 한바탕 논쟁이 또 벌어지게 되었다.
“원자께서 이미 태어나셨으니 광해군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하는 주장과 “원자께서 탄생하셨다 하더라도 광해군이 벌써 20여년이나 세자로 계셨으니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자못 시끄러웠다. 오음 윤두수는 몇 달 안 되어 물러가고 오리(梧里)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5. 나덕준(羅德峻) 보은공파(報恩公派) 14세
나주인(羅州人), 자(字)는 대지(大之), 호(號)는 금암(錦岩), 사침(士침)의 아들이다. 명종(明宗) 8년에 나서 박사암(朴思菴) 순(淳)과 이율곡(李栗谷) 이(珥)와 사귀었는데 율곡(栗谷)은 일찌기 내사(內賜)한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주면서 학업(學業)을 권유하고 또 정곤재(鄭困齋) 개청(介淸)에게 종유(從遊)하도록 하였다. 덕준(德峻)은 아우 덕윤(德潤)과 함께 나주(羅州)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書齋)를 짓고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강의계(講義契)를 설입(設立)하여 곤재(困齋)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조 22년 정여입(鄭汝立)의 옥사(獄事)에 부녕(富寧)으로 귀양갔다가 26년에 석방되어 두암(斗岩)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망운현감이 되고 1599년에는 보은(報恩)현감(縣監)에 탁배되었으나 불열자가 있어 부임하지 못했다. 1604년(선조37년) 8월 28일에 졸(卒)하니 향년 52세로 사후에 호조참판(戶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위소(緯素)는 문과(文科)하여 동지(同知)에 이르고 손자 선(선)과 현손(玄孫) 만성(晩成)이 모두 문과(文科)하여 대성(臺省)에서 봉직(奉職)하였다.(기축록, 나주지)
16. 신경행(申景行)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 자전(自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주(世胄)이고, 아버지는 습독(習讀) 질(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 한산군수가 되었고, 1596년에 충청도순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관내 홍주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나자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고, 1604년에 청난공신(淸難功臣) 삼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충청도병사가 되었으나 시정이 바르지 못하다는 암행어사의 지적을 받았다.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선조가 김응남(金應南)에게 호서지방을 방비할 적임자를 추천할 것을 비변사(備邊司)에 하교하였다. 김응남(金應南)이 답하기를 오직 우리는 왜놈침략 방비를 다해야 할뿐이오니, 괴산(괴산), 남원(南原), 옥천(沃川) 등지에 훌륭한 의장병을 보내야 합니다.
신경행(申景行)은 청렴하고 활을 잘 쏘니 의장병으로 거두어 사용해야 합니다. 라고 선조에게 호서지방의 의장병으로 신경행(申景行)을 적극 추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