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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정보 원고
가톨릭의 상징들, 여전히 유효할까?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장면 1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십자성호를 긋고 하루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매일 미사』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말씀을 되새기며, 식사 전 기도를 하고, 출근길에 묵주를 손에 쥔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누구든 천주교를 신자를 만나면 반갑지만, 천주교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가끔은 주변에 힘들어 하는 동료나 교우가 보이면 화살기도를 바쳐주고, 내가 쓰던 묵주나 작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의 손에 쥐어준다. 주일이면 일찌감치 성당에 가서 앞자리에 앉고, 제단 중앙의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내 죄를 뉘우치고, 미사 참례 전에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고해소에 들어간다. 사제의 강론을 열심히 듣고 작은 실천거리 하나라도 마음에 새긴다. 거룩한 성체를 조심스럽게 받아 모시고 조용한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좋고,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의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친한 교우들과 커피 한잔을 마시고, 레지오 회의나 본당에서 봉사할 거리가 있으면 열일 제쳐두고 열심히 일한다. 때로 마음 상한 일도 많지만 신부님의 따뜻한 위로와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마음이 너무 좋다. 매일 카톡방에서 전달되는 좋은 메시지를 읽고, 성당에서 즐거웠던 일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려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는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밥을 차리고, 잠들기 전에 성경책 한 줄이라도 읽는 즐거움이 있다. 하루를 마치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가족들과 내가 기억해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잠이 든다.
#장면 2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아침을 맞는다. 반복된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며 감동 없는 하루를 맞고, 배우자와 자식의 투정 한 마디가 아침부터 짜증을 나게 한다.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와 주식시장 소식을 보고, 간밤에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을 뒤진다. 학교와 직장에 늦지 않게 가려고 서두르다 부딪힌 사람들의 무례함에 화가 나고, 나를 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불편하다. 직장동료들 가운데 누군가가 식사 전에 성호를 긋는 것을 보면 낯설고, 누가 천주교 신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불편하다. 뉴스에 성직자의 비리 소식을 들으면 교회 역시 별 수 없다고 혀를 차고, 사회적 공분을 얻을 대기업의 횡포와 충격적인 폭력과 사기 사건을 접하면 흥분하지만 희생된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긴다. 주일이면 성당에 가야하는 것이 귀찮고, 행여 등 떠밀려 간다 해도 미사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짜증이 난다. 성당 입구의 성수대는 지나치고,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것도 불편하다. 독서와 복음 말씀은 들리지 않고, 사제의 강론시간이면 주보를 집어 들고, 스마트폰으로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가끔 사제의 좋은 훈계라 해도 ‘너나 잘 하세요’를 속으로 외친다. 고해소는 가본지가 오래고, 헌금 시간에는 천원이면 충분하다. 성체를 모셔도 감동이 없고, 미사가 끝나면 행여 본당에서 활동이나 봉사하라고 붙잡히는 것이 싫어 사제보다 먼저 퇴장하지만, 주차장에서 내 차를 가로막은 다른 차 때문에 심통이 난다. 성경책은 어디 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누가 가정방문이라도 온다고 하면 문전 박대가 상책이다. TV와 인터넷 쇼핑에 빠져 쇼파에 앉아 졸거나 늦은 밤까지 게임을 하다 잠드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기도는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래된 상징들
그리스도교는 제자들의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2천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고 성장해왔다. 교회는 박해의 시대를 견디고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세속적 권력을 얻으면서 봉건적 중세 서구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성직자들의 타락과 세속화된 교회는 근대정신에서 촉발된 종교 개혁으로 분열의 상처를 얻었지만, 가톨릭이라는 표징을 견고히 세우며 합리주의와 무신론에 맞서 신앙의 절대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가톨릭 교회는 세상 속의 교회를 표방하며 갈라진 개신교 형제들과는 재일치와 화해를, 이웃종교들과는 대화와 협력으로 상생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에게는 익숙한 교회의 상징들이 있다. 십자가, 묵주, 성모상, 성수, 성체, 제단, 십자가의 길, 성화상, 제의, 수도복, 미사보, 장궤틀. 그러나 이러한 실물적 상징들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남성 혐오를 표방하는 ‘워마드’란 블로그에서 발생한 성체 훼손과 모독에 대한 논란은 그 단적인 예이다. 문제는 가톨릭의 심장과도 같은 성체신심이 훼손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성체를 그저 밀가루 빵에 불과하다는 교회 밖의 여론들에 신자들이 동조하거나 공감할 수도 있는 정체성의 상실이다. 천주교 신자에게 성체의 의미는 과거 도심 한복판을 가르며 성체행렬을 하던 시대나 감히 손으로 성체를 모실 엄두도 못 냈던 시절을 생각하면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거룩한 표징이 아닌 집 안팎의 인테리어나 악세사리로 둔갑했다. 묵주는 여전히 사랑받는 천주교의 상징이지만, 부적과 같이 주머니 속에서 잠을 잔다. 미사보는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생긴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사라져가고, 무릎을 꿇는 장궤의 의미는 미사 시간의 조용함과 무릎 건강에 자리를 내준다.
가톨릭 신앙이 간직한 통과의례인 유아세례, 고해성사, 혼인예식, 장례미사, 축복예절들이 지닌 문화적 상징들도 변하고 있다. 아이의 신앙을 부모가 미리 정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감은 판공 성사표를 제출하여 냉담자 명단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의무 방어가 되었다. 혼인과 장례예식은 가톨릭 전례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표징으로 적지 않은 미신자들을 신앙으로 이끌어왔지만, 오늘날에는 부모들이 자식들 신앙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되었고, 장례 미사는 화장터의 시간에 맞추느라 고인이 마지막까지 신앙생활을 한 성당에서 봉헌되지도 못한다. 대세는 신자 아닌 부모가 성당에서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하는 자식들의 궁여지책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가진 아름다운 가치들, 사랑, 고통, 희생, 용서는 물론 죄악과 사탄, 죽음과 천국의 영적 상징들도 변하고 있다. 희생의 아가페적 사랑은 탐욕과 적자생존의 시대에 걸맞지 않은 어리석은 선택이고, 고통의 인내는 약자들의 자기 합리화이며, 용서는 보복과 앙심의 악순환 속에서 정의롭지 못한 태도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나약함과 유한함을 상징하는 죄악과 죽음, 그리고 사탄과 천사의 존재와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표상들도 변하고 있다. 죄의식은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 대한 부당함으로 축소되고, 사탄은 도깨비로 미화되며, 천사는 수호신으로, 심판에 따른 천국과 지옥은 제도 종교가 사회에서 도덕적, 윤리적 질서를 만들고 지켜가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이자 상상에 불과하다고 치부되기도 한다.
소통의 시대, 교회의 현주소
상징은 인간 감각이 의식으로 넘어가는 통로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지구의 생태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낸 협력체계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고유한 감각 능력으로 사물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피조물의 이름을 하나씩 붙이도록 허락해주신 것처럼(창세 2,19 참조),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보이는 것을 넘어 기억하고 상상하는 것들을 상징에 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징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의미를 담고 있는 표징이고, 의미는 인간이 삶의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간직해온 신앙의 상징들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상징에 부여된 의미는 교회가 일방적으로 신자들에게 교육하고 훈육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미사 중의 강론이나 교리교육, 교회 가르침의 전달 방식들은 여전히 교회가 부여한 의미를 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교회의 사명이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를 온전히 보존하여 전달하는 임무로 국한하는 순간 그 계시 진리의 수호자이자 교도권자인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권위가 중요해지고,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로, 신자는 ‘배우는 교회’가 되어 일방적인 소통구조가 고착되어 버린다. 성직자의 권위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옷을 입으면 세속적 질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권력으로 나타나고, 신자들은 순종과 들음의 영성으로 강요될 뿐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거나 불편해도 하느님 계시의 절대성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중세 시대에는 교도권에 저항하는 일이 신앙의 도리에 맞지 않았다. 19세기 가톨릭 교회는 세상과 대조되는 완전 사회체로서 교황을 선장으로 한 구원의 방주가 되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고, 죽음 직전에 물로 씻는 대세라도 받아야 구원이 보장된다고 가르쳤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서구 사회는 이데올로기 논쟁의 희생이 된 인류의 상처를 되돌아보고 참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성찰하며, 종교의 본질과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의미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성령강림으로 불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현대 가톨릭 교회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당신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따르는 ‘친교의 교회’, ‘일치와 화해의 교회’이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섬기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었다.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의 일방적 소통은 하느님 백성에 봉사하고, 세상에 봉사하는 고유한 사명을 가진 성직자와 평신도의 대화와 협력, 친교와 나눔으로 바뀌었고, 과거 교황권 중심의 봉건적 제도는 지역의 주교들이 고유한 가톨릭성을 지키면서 전 세계 주교단의 일원으로 형제애를 나누게 되었고, 교황은 이들 주교단의 수장이자 ‘종들의 종’으로서 보편 교회의 일치와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세상 속의 교회는 개혁과 쇄신의 표징으로 오랜 관행이었던 낡은 교회의 상징들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세상의 표징들을 교회의 상징으로 재해석하며 문화의 복음화는 물론, 복음을 듣는 고유한 지역의 맥락을 토대로 신앙을 재해석하는 토착화의 노력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독특한 신앙 전통과 신학을 창출해냈다.
공의회 이후 사목 현장에서는 세속의 다양한 상징들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고 변용하며 재해석해왔다. 사제는 제사장으로서가 아닌 신자들의 영적 유익을 돌보고 그들의 은사들을 교회 안에서 조화롭게 이끄는 사목자가 되었고, 제도로서의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선교 정책이 마련되었다. 신문과 방송은 물론 다양한 미디어와 대중매체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터전을 돌보고, 인권을 보호해주며, 정의를 세우는 사회 복음화를 통하여 교회는 ‘세상 속의 교회’라는 상징을 넓혀가고 있다. 본당 사목의 구조에도 이러한 대화적 소통 방식은 사목회의 구성은 물론,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통한 신자들의 목소리를 사목에 수용하는 길로 가고 있고, 신자들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는 사목 방식을 찾는 사제들의 의식 전환으로 이어졌다. 이에 맞춰 신학교와 수도회의 양성 과정들도 달라져 스승과 제자 사이의 열린 대화와 친교는 물론, 영성과 생활에 있어서 동반의 여정이 강조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미래의 세상,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처음의 장면으로 되돌아 가보자. 신앙의 상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는 천주교 신자와 세례는 받았지만 주일 미사에만 참여하는 신자가 있다. 마음은 있지만 성당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신자와 어떤 이유에든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냉담 하는 신자도 있다. 교회의 구성원은 단순히 세례 받은 신자와 예비 신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신앙은 갈망이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한다. 진실한 기도와 즐거운 봉사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지만, 의무적인 성사생활과 억지스러운 선교는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싫증나게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미래를 전망하는 학자들은 21세기를 새로운 가치의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시대라고 일컫는다. 인류는 경쟁과 적자생존을 넘어 상생과 『공감의 시대』(제러미 리프킨)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제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인류는 최첨단의 과학과 인공지능이 결합된 새로운 상징들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오직 신의 영역에만 국한되었던 생명의 신비가 풀리고, 유전자 공학과 뇌 과학의 발전, 의학과 최첨단 과학의 만남은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로 만들었던 죄의식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신화가 생겨나고 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신의 용서를 받아 구원과 해방을 얻는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낡은 제도 종교의 이념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심리학과 약물, 유전자 치료를 찾을 수 있고, 인간의 한계인 고통과 죽음의 영역마저도 노화를 막는 기술과 병든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 장기들의 교체를 통해 생명의 연장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지고, ‘호모 로보티쿠스’, 혹은 ‘호모 데우스’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과거 공상과학 영화들은 미래를 보여주는 표지가 되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 매체들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통한 인간 통제의 기술을 통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자유 의지마저도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통하여 전달되고 수집되는 무한량의 데이터와 정보들은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지배하고,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마저도 빅데이터의 분류에 의해 지배되는 미래가 펼쳐지고 있다. 지금도 우리 곁에 떠도는 수많은 거짓 정보들은 검증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판단의 기준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권력을 지닌 지배층과 재력을 지닌 부유층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미디어를 오용하고, 경제시스템을 조작하여 넘나들 수 없는 새로운 인간 계급사회를 정착시키려 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 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미래 인류가 맞이할 정보화 사회와 인공지능의 결합, 그리고 최근 소셜미디어(SNS)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동시다발적 소통 구조들을 과연 교회는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지켜온 종교적 상징들의 의미를 해체할 것인가, 아니면 재해석되어 미래의 새로운 종교성의 표징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미래의 가톨릭 교회가 지금 누리고 있는 종교적 권위와 가치를 어디서 계속 지켜나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고, 제도 종교로서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질서 유지와 윤리적 지침을 제공해주는 종교로서의 가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물음이 될 것이다.
필자는 1993년 신학생 때 독일로 유학을 떠나 10년이란 세월 동안 서구 사회의 중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고민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국이라는 맥락에 토착화되기 위한 신학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연구 해왔다. 우리 사회가 지닌 내면의 힘이 종교심의 뿌리에서 나왔고, 그 종교심이 문화적 상징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비록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명시적인 고백이 약해져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와 신념이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는 반면, 그들이 과거 겪어 온 종교에 대한 무관심, 교회 생활에 대한 비판, 사회에서 교회의 전근대적인 구조와 메시지에 대한 시민들의 염증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과 점점 유사해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급속한 문명 발전에 따른 인간성 상실에 맞서 고요함과 거룩한 종교적 상징들을 통해 민초들의 종교심을 지켜온 교회는 오늘날 제도와 의무에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형태의 신앙과 상처 받은 내면의 힐링 테라피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인권과 정의를 외치며 세상과 대조되는 사회로서 예언자적 소명을 다했던 교회는 이제 시민 사회의 공감의 목소리를 묶어 내는 소셜미디어의 힘과 지난 해 촛불 혁명의 과정에서 SNS의 다차원적 소통 구조를 통해 보여준 시민들의 새로운 민주주의 의식과 시민세력의 응집력에 힘을 보태주거나 동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종교 사회가 서구 사회와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최근 한반도가 처해 있는 역사적 현실은 강대국들의 이권에 의해 좌우되는 위기의식과 평화정착에 대한 열망이 교차하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한반도는 역사 속에서 힘의 균형을 잃으면 외세에 의해 민중들이 고난을 겪는 역사를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미래 사회에 한국이 세계 역사에서 주도할 수 있는 힘은 남북 화해와 평화 협정 체결을 통한 한반도 통일을 통한 외교적 균형과 견제에서 나오겠지만, 현실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양대국의 이념적 차이와 세계 패권 경쟁의 희생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 속에서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세속적 힘과 안정에 대한 집착이 커질 것으로 보이지만, 국제 정세의 불안정과 사회적 이념 갈등, 빈부의 격차와 세대 간의 갈등은 물론 저출산과 난민, 이주민과의 공존의 문제 등과 심각한 갈등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교는 본래 인간의 현실 인식에서 체험되는 인간 실존의 위기와 의미 부재의 체험들을 토대로 인간의 초월적 본질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역사 속에 고착화된 제도 종교에 대한 실망과 그런 종교들이 지켜온 낡은 상징들은 새 패러다임의 맥락에서 그대로 수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종교성은 그 자체로 실존적 한계와 위기에 대한 인간 체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어떤 형태로든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안정과 평화,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 고통으로부터 탈피,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은 지속될 것이다. 단지 유발 하라리가 예고한 ‘호모 데우스’의 여정이 인류 문명의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올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한 첨단 과학과 인공 지능을 통한 문명사적 전환이 과연 인류 전체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기술혁명의 혜택 역시 현 인류의 특정 기득 세력들이 향유할 수 있는 고립된 문화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점은 이미 인류가 근대주의의 합리주의 신화에 빠져 신 없는 인간의 유토피아를 꿈꾼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을 되돌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당시에는 신의 영역에 맡겨졌던 수많은 삶의 영역들이 과학의 발견과 해명을 통하여 밝혀지고, 신의 비밀로 여겨진 종교의 본질이 ‘인간의 자기 투사’(포이에르바흐)나 현실 도피를 위한 ‘인민의 아편’(마르크스), 더 나아가 “심리적 결핍에 따른 자기 퇴행”(프로이트)으로 치부되는 시대였다. 그러나 20세기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역사 속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인간(하이데커)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단지 존재의 의미를 찾고, 의미를 기획하며, 죽음을 넘어 미지의 신비의 영역에로 자신을 투신하는 현존재의 초월에로의 도약(칼 라너) 없이는 실존의 망각 내지는 존재 의미의 상실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21세기 제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의 결합은 기억과 상상을 가상현실 속에 구현하여 인간이 누리는 심리적 충만감과 현실적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현실이 아니다. 마치 신기루처럼 현실에서 잠시 빠져나와 상상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착각을 일으켜 현실과 실재를 혼동하게 하고, 나아가 현실 감각의 상실은 존재의 불안정성을 피하려는 인간의 자기모순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참된 종교성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말에는 역사의 표징으로 드러난 종교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종교는 제도적 상징이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부르게 만드는 본질에는 정신 능력이 지닌 놀라운 창의력과 상상력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동료 인간은 물론 피조물의 세계와 소통하는 신의 능력을 받았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부르는 데에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갈망하고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절대적 신비, 형언할 수 없지만, 역사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통해 상징으로 드러난 바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지닌 상징들이 가진 가치는 동일하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징에서 시작된 종교적 표징들은 시대의 옷을 입고 변형되고 재해석되고 있지만, 그 상징들이 지시하는 종교성의 본질이 사라진 적은 없다. 우리가 간직해온 종교적 상징들은 우리 인간이 철저하게 ‘타자로부터의 존재’이고, ‘타자와의 관계 속의 존재’이며, ‘타자를 향한 존재’라는 점을 알려준다. 곧 관계 속에 인간이 체험해온 삶의 기쁨, 슬픔, 고통과 상처의 기억, 용서와 희생은 관계 안에서만 발생하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체험들이고, 인간이 어떤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해도 이러한 인간 본질의 체험 자체를 표현하는 상징들은 바뀌더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래 사회에 어떻게 사목할 것인가?
그렇다면 미래의 사목자는 무엇을 배워야 하며, 어떻게 신자들을 사목해야 할까?
1) 종교성의 회복
진보와 발전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은 스스로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기계문명과 인공지능에 지배되는 세상이 펼쳐질 수 있다. 종교성의 회복은 곧바로 인간이 지닌 ‘멈출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흐름을 중단하고 인간 본질에로 회귀할 수 있는 종교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종교만이 인간에게 멈출 것을 요구한다. 종교만이 자아의 가장 깊은 본질을 바라보고, 감각이 느끼는 참된 행복의 길을 묻게 한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수행의 전통은 인간의 위대함보다는 나약한 본질을 먼저 성찰하게 하고, 인간 영의 흐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지향하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수행의 전통에도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삶의 가치가 소유와 정복, 배타적 경쟁과 욕망이 아니라, 가난과 고독, 인내와 친절, 평화와 기쁨의 삶을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찾아내는 것임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신자들의 눈높이에서 요청 받는 다양한 종교적 상징들을 새롭게 찾아낼 필요가 있다. 신앙이 의무감이 아닌 삶의 힐링이 될 수 있으려면 교회의 제도들과 상징들은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주일의 의무를 하느님께 바치는 시간의 봉헌으로 해석해주고, 이미 주교들의 사목지침에서 제시되었듯이, 부득이한 여건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기에 앞서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성당을 찾아가거나, 자신만의 시간에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와 희생 등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자세를 갖도록 안내해야 한다. 혹자는 주일 미사 참례자가 줄어들면 교회의 수입원이 줄고, 결국 교회의 불안한 미래가 될 것이라 말하겠지만, 주일 미사 참례를 못하는 신자들을 탓하기에 앞서 주일 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참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교회의 공간과 제도적 문제이거나, 사제들의 성직주의, 수준 낮은 강론이나 권위적 사목 방식 때문은 아닌 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냉담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고해 성사에 대한 부담감을 들기도 한다. 인터넷 혁명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들은 사이버 세계에서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자신의 신분을 대신해주는 ‘아바타’의 세상에서 살며, 사회에서 ‘본래의 자아’를 숨기고 ‘연극적 자아’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고해 성사는 교회 안에서 인격적 화해와 용서, 치유의 가장 가톨릭적인 상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통적인 형태의 고해 성사의 틀과 제한된 시간은 신자들에게 겨우 판공성사 때 몇 가지 교회의 계명을 어긴 죄만 고백하고 마치 면죄부를 받는 형식의 전례가 되어버렸고, 진정한 용서와 치유의 체험을 갖기에 미사 전후의 짧은 고해성사 시간은 한계가 있고, 사제들의 불필요한 사목적 열정은 신자들의 종교적 체험의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판공성사 제도라도 있어서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등한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은 고해성사를 값싼 용서와 치유의 도구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본당의 성당은 신자들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 보안의 문제로 굳게 닫힌 성체조배실과 시간에 쫓겨 만나기 힘든 사제들과의 면담실도 신자들에게 영적 서비스의 공간으로 열려야 한다. 물론 본당 사목의 짧은 경험을 가진 필자 역시 교회가 이러한 영적 서비스를 마련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본당 사제들이 갖는 당혹감과 절망감은 사제들에게 주어진 역량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불만에서라기보다는, 사제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 사목적 소명과 개인의 취향과 관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식별의 문제라고 본다. 사회가 다변화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도 사람들이 찾는 영적인 갈망은 변하지 않기에,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목자들이 필요하지만, 소수의 해외 교포들을 위한 선교 사제 파견이나, 교회의 역량을 넘어서는 병원이나 학교, 전문가의 영역에 맡겨도 되는 사회 복지 시설 등에 관리자로 사제를 파견하는 일은 재고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시설에서 활동하는 신자들과 비신자들에게 여전히 사목자로 사제가 필요하지만, 능률과 효율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는 유능한 행정가나 조직을 잘 운영하는 관리자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어느 사제도 사제의 삶을 방해 받는 기관과 시설에 파견되어 영적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유능한 행정가나 관리자가 되어버리는 사제직을 원하지 않는다. 사제 역시 관리자나 사목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영적 삶에 목마른 종교인으로서, 상처 받은 치유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2) 공감과 합심의 시대에 소통하는 교회되기
교회가 세상과 분리된 구원의 공동체로 고립되지 않고, 세상에 파견된 교회이기에 세속적 질서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구현하는 현대의 사목자들에게 요청되는 과제들은 많아졌다. 단순히 본당의 신자들을 위한 성사 집행과 영적 상담, 사목적 돌봄으로 충분했던 사제들의 역할은 점차 시대의 예언자적 소명에 걸맞는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갖도록 요청되고 있다. ‘신앙 감각’은 성령의 인도로 복음의 진수를 본능적으로 식별하고 파악할 수 있는 개인적 은사이자, 신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영적 감각이고, 교회생활에서 같은 신앙 감각을 지닌 이들이 올바른 신앙을 식별해내는 교회의 공동체적 합의이자 지혜의 길이기도 하다.
사목자는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 감각을 성장시켜야하지만, 동시에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강화하고 식별하며 판단해주어야 한다. 최근 들어 영적 목마름을 지닌 신자들이 교회생활에서 갖는 불만과 회의는 곧바로 새로운 영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단과 사이비 종교들의 유혹으로 이끈다. 불교 역시 세속화의 물결을 피해가지 못하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수행의 종교심을 이끌어준 바탕이고, 21세기 새로운 영적 패러다임의 전환기 속에 남다른 매력을 전하고 있다. 소유와 욕망의 세계 안에서 무소유의 자유, 제도적 의무감에서 해방된 자아 수행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수행의 전통, 생태적 종교 공간을 통한 자연친화적 삶에 대한 공감을 일으키는 불교의 매력이 전근대적인 구조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실망한 서구 유럽인은 물론 기성 종교의 구조적 모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종교심의 출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역시 이들 종교들보다 훨씬 훌륭한 영적 수행의 전통과 사회 참여의 탁월한 가치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발전시켜 왔다. 문제는 사목자들이 교회의 운영과 신자들과의 친교에 사목적 관심을 집중하다보니 시대의 표징을 읽을 수 있는 연구 능력의 부족과 이 표징들을 해석할 수 있는 복음의 진수들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신학 공부는 사제가 되는 순간 끝나는 것처럼 여겨지고, 대다수의 사제들은 신자들이 겪고 있는 지적, 영적 어려움들을 돌보기 위해 이 시대의 문제들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이전에, 성사 자동주의에 쉽게 빠져 미사와 성사 집행, 면담에서 신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힘들어졌다. 문제는 사제들이 가진 능력의 부재보다는, 사제들이 사제적 삶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사제 스스로의 영적 결핍과 하느님 부재 체험,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얻는 상처와 무능력감, 사제 역시 인간으로서 얻고 싶은 욕망과 자아실현의 욕구 등이 사목 현장에서 사제들을 피로감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의 소통 구조에 있어서도 심각한 결함을 만든다. 사목자가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가 줄면 대화와 소통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물론 신자들 가운데 정신질환이나 세심증, 이념적 독단에 빠져 분노 조절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이 사목자와의 대화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아예 포기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제들이 사목회를 구성하거나, 본당 단체들과 만날 때 신자들의 목소리가 전체를 대변하기보다는 교회 내 일부 특권층이나 기득세력들의 목소리가 되어버릴 때도 많다. 따라서 본당 사목자는 교회 안의 다양한 신자들의 은사들을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조화롭게 만들고, 각자가 지닌 고유한 은사들이 적절하게 발휘될 수 있도록 식별의 은사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목자는 적절한 훈계와 식별, 모범적 선행과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다. 신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말투와 인내와 존중의 대화 능력, 다양한 신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복음적 기준으로 식별해낼 수 있는 영적 지혜와 결단, 그리고 그 결단에 따른 책임까지 짊어질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는 절대적 군주처럼 군림하는 지도자나 리더형의 사목자보다는,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적 리더십을 더 필요로 한다. 상처 받은 신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감싸주고 보듬는 여성성의 포용 능력과 아울러 악과 맞서 싸우며 용감하게 행동하는 남성성의 은사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본당 사목회는 양성평등의 구조로 적절하게 구성되어야 하며, 사목자 역시 신자 공동체의 결정을 존중하는 사목자로서의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아울러 신자들은 스스로 교회의 주인 의식을 가지면서도 사목자가 지닌 사제적 소명과 권위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교회는 민주주의의 훌륭한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받은 사도 공동체가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목자로서의 표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통의 구조는 본당 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제와 본당 수도자, 본당 사제와 본당 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공감과 협력이 새로운 시대의 소통 패러다임이라면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불만스러운 관계 속에서 교회는 오해와 편견의 온상이 되기 쉽고, 고립된 패거리 집단이 형성되어 사목 현장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사제는 이들과의 관계를 치유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공감과 소통의 능력과 친교와 화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결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상대방의 상처와 고통을 반응하는 한(恨)의 사제가 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소통하는 교회는 양방향의 소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가 동시다발적 소통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다양한 대화 채널을 통해 교회의 보편성을 성장시켜야 한다. 본당은 물론 교구 역시 다양한 위원회와 참사회, 평의회를 통해 다양한 소통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교구장 주교가 지닌 관심과 교회 정책에 대한 추진은 일방적인 방식이 아닌, 교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협의체적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법적으로 허용된 교구장 주교의 권한은 분산되어야 하며, 주교 개인의 관심과 취향이 교회의 방향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교구장 주교는 사제들을 진정한 사목의 협력자로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자부적 관심을 쏟고, 주교들 곁에 머무는 평신도들보다는 사제들의 고충과 불만, 그들이 사목자로서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돌보는 데 힘을 써야 한다. 모든 사제들이 교구장 주교를 쉽게 만나 대화하고, 사목에 대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어야 하며, 사제들의 관심과 능력이 교구 안에서 적절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사제 인사제도에 대한 합리적이고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가톨릭의 글로벌 상징들, 여전히 유효한가?
필자는 언젠가 사제서품식에 참석해서 사제 후보자들이 호명되어 제단으로 나가는 장면과 여기저기 사제서품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글로벌 기업, 가톨릭 교회에 취업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청년 실업과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과는 달리 전 세계적으로 12억의 회원인 신자와 46만명의 중간 관리자인 사제들, 5,000여명의 그룹 회장인 주교로 구성된 글로벌 기업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왜 일까? 아마도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성장을 지켜본 시간들, 지금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이 보여주는 지적, 영적, 인격적 성숙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 이처럼 안정적이고 존경 받으며, 노후가 보장된 기업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상상이 달갑게 여겨지지는 않겠지만, 세계적 글로벌 기업들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기업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과 영업 정책을 개발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가톨릭 교회는 그 글로벌한 규모와 형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근대적인 운영 방식과 일방적인 소통 구조, 성직주의의 폐단 속에서 2천년을 견뎌왔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은 성숙한 신앙 감각을 지닌 다수의 신자들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의 참된 표징을 새롭게 찾아가는 위대한 선구자들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교회는 분명히 사회적 제도이기에 앞서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항)이다.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라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세상에 드러내야할 표징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이지, 결코 하느님 나라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징은 그 상징하는 바를 올바르게 드러낼 때 참된 표징의 의미를 갖는다. 교회의 수많은 상징들은 세상에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업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들이 되어야 한다. 만일 이 표징들이 의미하는 바를 잃고 스스로 의미 자체가 되어버리는 순간 본질의 왜곡이 일어나면, 그 표징의 의미는 사라진다.
현대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정보화 시대를 달려가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어떤 이는 교회가 세상의 표징이 되려면 이 상징들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을 교회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맞다. 하지만 현대의 상징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 상징들이 지닌 의미에 대한 복음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가치는 쉽게 다수의 여론과 대중적 가치에 의해 왜곡되거나 오용되는 일이 이전보다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윤리적 식별과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소명은 여기서 빛날 수 있다. 사람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문화적 코드들이 곧바로 복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며, 세속적 질서의 원리들이 교회의 구조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교회는 스스로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인 하느님 지향의 구원 공동체여야 한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복음이 살아 있어야 하며,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 소개: 송용민(사도요한) 신부
인천교구 소속으로 1997년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2003년 독일에서 기초신학을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교수이며, 주교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 속 신앙 읽기], [문지방 위의 신앙],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이 있고, 번역본으로는 [교회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이 있다.
첫댓글 얼마전 차동엽 신부님의 부탁으로 급하게 쓴 원고인데, 나름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모아 놓은 글이네요. 부족하지만 읽고 공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어렵긴 하지만 공감하겠습니다.^^
생각할 거리들이 많은 좋은 글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신부님
깊이 공감되는 여러내용들..
저에 신앙관에 대해 다시금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함께 이뤄나가야할 과제란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 모습은 어디쯤인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정석으로 돌아가 귀기울이는하루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와 글을 읽다보니
신부님의 생생한 강의를 듣는듯 합니다.
어렵게 느껴지지만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