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5년 권상로가 펴낸 ‘부모은듕경’에 실린 현존 최고의 불교음악 ‘찬불가’. |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음악은 불교가 전래된 국가와 지역마다 그 특성에 맞게 독특하면서도 다양하게 변천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불교음악은 중국으로 유입된 인도음악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불교음악이 그대로 유입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진감국사가 당나라로부터 범패를 전수 받아 신라에 유포시켰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음악은 이후 여러 유형으로 발전했고, 현대적 의미의 찬불가(讚佛歌)가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부터다. 오늘날의 찬불가는 구비전승으로 전래된 불교음악과 달리 서양음악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찬불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초기에는 “왜 다른 종교의 용어를 차용해서 쓰느냐”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고 “법당에서 오르간 소리가 웬말이냐”고 호통을 치는 등의 웃지 못할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찬불가는 다른 종교에서 사용하는 찬송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의 승려 의정이 인도 유학 중에 닦은 승려의 규범을 40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대당남해기귀내법전(大唐南海寄歸內法傳)』에 ‘찬불’과 함께 ‘찬송’이란 용어가 실려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불교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가 다른 종교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불교음악용어를 타종교에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찬불가’ 용어는 1925년 권상로가 출판한 『부모은듕경』의 악보집에서 처음 사용됐고, 이 책에 실린 악보집 가운데 첫 번째로 실린 곡의 이름이 ‘찬불가’이기도 하다.
이후 찬불가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둥글고 또한 밝은 빛은(…)’으로 시작하는 노래의 제목을 ‘찬양합니다’로 바꾸고 모든 불교노래를 통칭해 ‘찬불가’로 부르게 됐다. 이처럼 찬불가가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조학유를 비롯해 백용성, 권상로, 김대운, 김정묵 등이 찬불가를 제작하면서부터다.
용성 스님, 왕생가·권세가 남겨
|
'부모은듕경‘에 실린 ‘신불가’ 악보. |
권상로가 『부모은듕경』에 ‘삼귀의’라는 악보를 남긴데 이어, 조학유는 월간 「불교」지에 직접 작사한 찬불가를 연재하면서 찬불가 보급에 주력했다. 또 백용성은 1927년 『대각교의식』에 ‘왕생가’와 ‘권세가’의 악보를 남겨 당시에 불렸던 찬불가의 존재와 유형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찬불가를 세상에 알리고 전한 이들의 초창기 작품은 작곡 활동이 드물었던 시기를 반영한 듯, 곡보다는 가사를 중심으로 창작되었다. 때문에 1920년대 알려진 불교노래 가운데 창가풍이거나 군가풍이 많았다. 그러한 창가풍 찬불가 중 대표적인 작품이 조학유의 ‘염부수 하의 느낌’이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불리던 ‘황성의 달’이라는 곡에 가사만 바꿔 부른 것이었으며, 이처럼 가사만 바꿔 부른 찬불가는 어린이 찬불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20년대 당시 널리 불려지고 있던 동요에 가사의 내용만을 바꾼 것 중 대표적인 노래가 김정묵의 『찬불가』에 나와 있는 ‘불교일요학교’로, 이 곡은 ‘학교종이 땡땡땡’의 곡을 차용했다. 또 ‘우리 절 부처님’은 ‘우리 집 강아지’의 곡을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비록 작곡가가 제대로 없어 찬불가가 기존의 곡에 가사만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찬불가가 널리 알려지면서 스님들이 주관해오던 불교의식에 대중들이 동참하는 의식으로 방향이 전환되기도 해 대중포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초창기 찬불가를 만들고 보급하는데 주력한 이들의 작품은 어떠했을까.
찬불가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권상로의 『부모은듕경』은 삼귀의-반야심경-찬불가-불설대부모은듕경-찬불게-신불가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책의 한 면을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고 상단에는 한문으로 된 원문을, 하단에는 원문에 대한 한글번역을 각각 실었다. 이 책에는 모두 12곡의 불교노래가 악보와 함께 수록돼 있어 찬불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에서 찬불가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가사 내용이고, 신불가는 부처님이 성도 후에 중생들에게 베푼 자비은덕에 감사하는 한편 미혹함에서 벗어나 부처님께 보답하고 귀의하자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곡의 형식은 당시 유행하는 4/4박자 창가조와 우리의 전통음악에 흔히 쓰이는 3/4박자가 혼용됐다.
권상로에 이어 조학유는 월간 「불교」지에 1926년 10월부터 이듬해인 1927년 11월까지 매월 2곡씩의 신작 찬불가를 발표하는 등 잡지에만 24곡의 찬불가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해인사 승려로서 일제강점기 불교개혁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조학유는 찬불가를 연재하면서 서언에 찬불가를 연재하는 목적과 경위, 그리고 구성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제1편 삼대예식(三大禮式), 제2편 보통예식(普通禮式), 제3편 석가일대(釋迦一代), 제4편 일반단체(一般團體), 제5편 일요학교(日曜學校) 및 유치원(幼稚園)으로 나누어 게재함을 밝혔다. 하지만 「불교」지에 수록된 찬불가는 제3편 석가일대 24곡 ‘태자의 고행’을 마지막으로 중단됐고, 연재 중단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일본 용곡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이미향은 「항일 측면에서 본 불교음악운동」에서 “조학유가 불교지에 연재한 찬불가의 가장 큰 특징은 부처의 일대기를 통해 불교 사상이나 이념을 전달하려는 것으로, 이는 불교계의 항일운동에서 강조하고 있는 불교교육을 통한 전통불교 수호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며 항일운동 측면에서 찬불가 제작 및 보급활동을 해석하기도 했다. 이미향은 또 조학유의 찬불가 연재를 “일본불교에 야합하지 않고 한국 전통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기초사상교육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현행원·산회가는 정민섭 작곡
|
1970년 종립학원연합회가 주최한 찬불가 공모에 당선된 대전 보문고 최영철 교사의 ‘삼귀의’와 ‘사홍서원’. |
조학유에 이어 찬불가 보급에 나선 인물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이다. 백용성은 독립운동을 펼친 이유로 3년간 수감됐다가 풀려난 이후 찬불가 보급에 나섰다.
수감생활 중 서구의 다른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이제 다른 종교와 경쟁할 수 있는 포교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는 인식을 했던 때문이다.
이에 백용성은 직접 작사·작곡한 곡을 수록해 노래를 통한 대각사상운동을 전개했고, 스스로 오르간을 연주하며 찬불가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중 1927년 발행된 『대각교 의식』에 ‘왕생가’와 ‘권세가’, ‘대각교가’, ‘세계기시가’, ‘중생기시가’, ‘중생상속가’, ‘입산가’ 등 7곡이 수록돼 있다. ‘왕생가’와 ‘권세가’만 악보가 전해지다가 김정묵이 1959년 펴낸 찬불가집에 나머지 5곡의 악보가 실려, 7곡 모두 가사와 악보가 전해지고 있다.
찬불가는 이후 1950년대 의식전환을 일구는 개화기를 거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시기를 맞았고, 그 중심에 운문 스님이 있었다. 운문 스님은 1960년대 서울 대각사와 조계사에 합창단을 만들고 직접 가사를 지어 작곡가들에게 곡을 의뢰하는 등 찬불가보급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때문에 운문 스님의 창작 활동은 오늘날 찬불가의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 운문 스님은 “노랫말을 지을 때는 화두를 들 때처럼 모든 잡념이 사라지곤 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운문 스님에 이어 작곡가 정민섭이 오늘날까지도 전국 사찰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찬불가를 만들었다. 1960년 대구에서 운문 스님을 만난 그는 찬불가 작곡을 시작해 ‘하얀 구름 검은 구름’, ‘보현행원’, ‘예불가’, ‘만생령을 위해 오심’, ‘산회가’ 등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보급되면서 지금은 모든 법회 때마다 불리는 찬불가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1970년에 만들어졌다. 이 두 곡은 당시 종립학원연합회가 주최한 찬불가 공모에서 당선된 곡으로,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최영철 교사가 작곡했다. 최영철은 이후에도 대전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작곡활동을 펼치면서 후인들에게 한국불교음악에서 헨델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어 반영규와 서창업이 주축이 되어 찬불가 보급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서창업은 1974년 6월 ‘불교음악연구원’을 설립해 1980년대까지 무려 160여 곡의 찬불가를 작곡해 ‘찬불가 운동에 있어서 전문작곡가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들었다.
최영철, 삼귀의·사홍서원 발표
|
1927년 2월 11일 조선불교소년회 주최로 열린 가극대회. 1천여 명의 관객이 참가한 가운데 신춘 음악 동요를 주로 불렀다. |
서창업은 또 1976년 자신이 작곡한 찬불가를 모아 엮은 책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 책의 후기에서 “옛날부터 내려온 범패라는 훌륭한 불교노래가 있었으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불교노래가 꼭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다”며 “이 찬불가집이 이 시점에서 태어난 것은 실로 필연적인 결과”라며 찬불가 보급을 위해 찬불가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980년대에는 전국 곳곳에 사찰 합창단이 생기면서 찬불가 보급 역시 활발하게 진행됐다. 때문에 찬불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책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1983년에는 김용호가 『새찬불가』를 펴낸 데 이어, 운문 스님의 『불교성가집』, 최영철의 『찬불가 1집』, 변규백의 『청산은 나를 보고』등의 찬불가집이 잇따라 출간된 것.
이어 1990년대 들어서는 제3세대 불교음악동인회가 1993년 926곡의 찬불가가 수록된 『찬불가 전집』을 발간해 전국 합창단과 불교음악 관계자들에게 배포한 것을 비롯해 박범훈, 최영철, 조영근, 반영규·김회경, 이종구 등 개인이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계사와 불광사를 시작으로 사찰에서 잇따라 찬불가 책을 출판해 적극적으로 찬불가 보급에 나서기 시작했고, 조계종 총무원도 『찬불가 합창곡』을 제작하면서 찬불가 보급에 참여했다.
* 원본 : http://blog.daum.net/blue_lj/6369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