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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길선주는 1920~30년대 신앙부흥운동을 주도하며 암흑기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묵시록적 비전’을 제시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의 첫 교회인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였던 그는 남녀 교인 가운데 휘장을 쳐서 내외(內外)의 풍습을 지키던 초기 개신교 교회의 습속을 타파하는 등 혁신에도 앞장섰다.그는 또한 전국적인 부흥목사로 신앙집회를 계속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평남 강서 고창교회 집회 중에 별세하였다.
(연세대 교수·신학과)
[조선일보 2006-02-09 03:06]
길선주 [吉善宙, 1869~1935.11]
장로교회 목사·교육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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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이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다. 같은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문집에 《영계 길선주 목사 저작집》, 저서에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이 있다.
1 길선주
길선주 吉善宙 1869 1935 는 장로교 목사이며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이다 자는 윤열 潤悅 호는 영계 靈溪 로 평안남도 안주 安州 출신이다 그는 힘이 장사여서 19세부터 차력술을 연마하던 중 25세 때 김종섭 金鍾燮 의 권유로 선도 仙道 를 닦았다 3년간 연마했으나 별다른 신통함을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한의학을 연구하다 1897년 광무 1 또 다시 김종섭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다 특히 『천로역정 天路歷程 』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897년 29세에 세례를 받고 1898년에는 영수 領袖 가 되었다 1901년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
한편 정국의 혼란과 국운의 비극을 염려하여 안창호 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기독교신앙운동을 통해 구국의 길을 찾을 결심으로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장대현 교회 건물을 세웠다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07년 제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으로 7명의 동료와 함께 평양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 개신교사상 최초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목회자로 부흥사로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부흥운동을 통해 심령의 역사를 크게 나타내었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번져나갔다 한국교회의 현대화와 토착화를 위해서도 크게 노력하였는데 그 당시의 남여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좌석 사이의 포장을 철거하게 했으며 아악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명절에 연주하게 하였고 찬양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교회선교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연극과 성화에도 관심을 두어 ‘성극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1910년 제 4회 노회에서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하여 국권상실의 수치와 비운에 빠진 민족을 구령으로 위로하고 민족의 최후보루를 교회에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애국정신으로 1912년 105인 사건 때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수난하였고 장남을 잃는 고통을 겪은 뒤 성서연구에 몰두 신구약성서의 주석서를 많이 남겼다
교육사업에도 힘써 숭실학교 崇實學校 숭덕학교 崇德學校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해도됨니다. 항상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까요. 기도라는 헬라원문은 푸로쉬코마이 라고하는데 목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은것과 같다는거죠. 영적교통 신과의 교통이 신통이고 기도입니다.
새벽기도는 절에있던 길선주라는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교로 개종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되었는데 후에 절에서 하던 습성(새벽에 목욕하고 탑돌이하듯)으로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신것이있어서 그걸 유래라고 하는데 길선주 목사가 시작한걸로 전해짐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세번씩 지정한 시간에 기도하기도 함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다섯번 . 교회서는 수요예배를 수요기도회라고도 하고 금요 기도회라고도 하여 철야기도나 시간을 정하여 하는교회가 있죠. 학생들은 편의상 토요일에 모이기도 하는데 주일예배도 시간을 정하여 하듯 기도회도 시간을 정하기 나름이지요.
어느때 하던 기도하는것을 뭐라고 할수는 없지요. 안하는게 문제이니까요.
개인에 따라 금식기도도 하고 서원기도도 하고 아묻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입니다.
근래에 기도오래하는 집사님이 책을 발간한것도 있죠.
매일 7시간이상한다는분. 열심히 합시다.
한국 새벽기도의 시작은 1906년 가을 길선주의 주도아래 pr3130 (2003-08-15 13:09 작성)
1. 한국 새벽기도의 유래
1906년 가을, ‘길선주’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길선주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 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이에 많은 교인들이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길장로는 새벽기도회의 규모가 커지자 당회에 정식허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짐으로 많은 사람들이 통회자복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영국의 저명한 신문인 [더 타임즈(The Times)]에 기사화가 될 정도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2. 길선주목사(1869. 3. 15.-1936.11.26)
‘조선기독교의 아버지’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개신교 인물 중에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목사는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일찍 학문을 시작하였고, 열 한 살이 되었을 때에 결혼하였다. 길선주는 한 때 병을 얻게 되어,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한국 무교종파 중 하나인 관성교(關聖敎)에 심취하였으나 어떤 영적 만족도 얻을 수 없게 되자 21세부터 선도(仙道)수련에 몰두하였다. 길선주의 종교편력은 다양했지만, 영적인 갈증은 점차 더해져 갔다. 1893년 미국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이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길선주의 친구 김종섭이 마펫과 교분을 가지면서 길선주에게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서을 가져다 주었다. 학문적 탐구심이 강한 길선주는 그 책들을 탐독하면서 차차 기독교 진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를 기독교로 이끈 결정적인 책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 기도를 하는 중에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1897년(29세) 장대현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면, 그래함 리(Graham Lee)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02년에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07년 졸업하여 평양장대현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주도한 새벽기도회는 이후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사실 그가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그의 종교편력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전통무교에서 새벽에 수련시간을 갖던 것에 익숙하였던 그는 기독교로 귀의한 이후에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명확히 구별되는 점은 이제 드리는 그의 기도는 정확히 예배를 받으실 분을 향한 것이었다.
3. 복음서에 나타난 새벽기도
흔히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 전통은 세계교회에서 한국교회를 구별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제적인 새벽기도의 기원은 예수님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마가복음 1:35).
-세계기독교역사상 유래없는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인중 하나가 '새벽기도'로 분석되자, 다른 나라교회에서도 새벽기도회를 여는 곳이 있으며, 현재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더 이상 한국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용출처 : 김인수, [한국기도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 및 개인자료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한국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던 1907년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길선주 목사님이예요. 길선주 목사님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셨고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건강을 위하여 선도를 공부하면서 한의학도 연구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공부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구 김종섭의 전도와 기독교 책을 보게 되면서 1807년에 기독교인이 되었어요.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7명의 목사님중의 한 분이기도 해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한국의 교회들도 어려운 시기였던 1907년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어요. 그 해 1월에 장대현 교회에서 블레어 선교사님과 길선주 목사님 의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성령님께서 첫날부터 강하게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장대현 교회와 평양뿐 아니라 한국의 여러 교회들에게까지 회개와 부흥의 불길이 번져가게 되었어요.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대 부흥운동에 앞장서신 분이기도 하고 한국 교회들의 새벽기도회가 길선주 목사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그 당시에는 교회들이 남녀가 얼굴이 보이는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
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사이를 커텐같은 것으로 가리기도 했으며, ㄱ 자 모양으로 교회들을 짓기도 했어요.
이런 시기에 길선주 목사님은 남녀구별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커텐같은 것을 없애기도 했어요. 교육사업에도 참여하고 숭실학교, 숭덕학교 등을 세우기도 했어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분이기도 하시며, 이 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그 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시며 일본의 지배하에 어려움에 처한 한국의 사람들에게 부흥사로 하나님말씀을 전하며 소망과 힘을 얻게 하며 많은 교회를 세우기도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길선주 목사님은 1935년 11월 20일에 평안남도 고창교회에서 설교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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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