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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네즈
작 전혜성
1. 첫 장면
아정, 컴퓨터 책상 옆에 놓여있는 스탠드의 불을 밝힌다. 깔 묻힌 생각들의 울력으로
짓이겨질 듯한 눈빛. 무대 뒤에서 떠오르는 한 장의 가족사진.
아정 : 남편의 출장은 언제나 급작스럽게 닥친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게 어디 남편 출장뿐일까?
있을 줄 몰랐던 것이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올 때,
항상 있던 것들조차 불현듯 낯설어진다.
삼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살뜰하게 엄마를 보살펴주던 막대마저 남편 따라 외국으로 떠나면서
엄마의 외로움은 공포로 변했다.
엄마는 내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너무 바빴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환하게 밝아지는 무대, 사라지는 사진.)
2. 서로에게 ‘엄마’를 원하는 모녀의 기이해 보이는 만남
거실은 무대 중앙쯤, 전면은 베란다로 연결되고, 객석에서 바라보았을 때, 무대 오른쪽은
식탁과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보인다. 무대 후면 후미진 곳이 집의 현관 거실과 수직선을
이루는 무대 깊숙한 곳이 욕실과 방이다. 거실의 비어있는 바닥 외의 공간은 소파, 탁자,
체경, 화분 따위로 적절히 구성된다. 탁자 위엔 무선 전화기와 탁상용 메모첩, 간단한
화장품, 얼굴을 비춰 볼 수 있는 크기의 거울 따위가 잘 정돈돼 있고, 그 밑에는 예쁜
휴지통이 놓여 있다. 그리고 무대 전면 오른 쪽에는 딸의 컴퓨터책상과 스탠드가
놓여있고, 책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다. 호사와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집은
깔끔하고 티끌 한 점 없이 잘 정돈 돼 있다.
아정 : 누구세요? (딸은 벌떡 일어선다. “누구세요?” 사이, 다시 딩동댕동, 초인종이 울리자,
딸은 화들짝 놀라며 그제야 현관문을 열어준다. 보라색이나 창백한 하늘색 따위,
아무튼 예순의 노인네치곤 유별나 보이는 색감의 롱코트에 장식용 방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두 팔에 가방을 낀 엄마, 너무 지치고 불안했던 나머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들어선다.
엄마 : (가방을 털썩 떨어뜨리며) 아이고 어지러워라…
(모자도 안 벗고 현관마루턱에 주저 않는다. 입술을 악물었다 분을 실어)
다 죽어 가는 줄 알았더니!
아정 :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엄마…
엄마 : (다시 힐긋보며 얄밉다는 듯) 말짱하네.
아정 : 왔으면 됐지. (약간 성가시다는 듯) 왜 이래.
내가 뭐 꾀병이라도 부린 줄 알아?
엄마 : (비꼬며) 내가 이 집에 들어가도 되겠지?
아정 : (참 기가 막혀서 하는 표정) …
엄마 : 다시 가버릴까?
아정 : (배를 잡는다) 우욱,
엄마 : (깜짝 놀라) 왜 아직까정 피나와? (딸을 부축하려한다)
세상에 진짜 아팠든 가베.
팔을 잡으려는 엄마 손길을 피한다. 허리를 구부린 채 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의 손을 저어 보인다. 잠시 후 허리를 펴며, 살짝 어금니를 깨문다. 딸이 되레 지친 사람처럼, 소파로 가서 앉아버린다. 그 뒤 엄마가 계속해서 지껄이는 소리에 아무대꾸 없이 아픈 시늉만 하고 있다.
엄마: (가방을 끌고 들어오면서 중얼중얼 내뱉는다. 코트를 벗어 소파에 걸쳐놓는데 모자는 벗지 않는다)긍게, 내가 뭐래대? 애 섰을 때는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조심, 조심, 불조심이라 안했냐? (사이) 참말로, 최서방 갸는 뭐하는 물건이여. 하필 골라골라 이런 날 출장을 간다는 것여. 도대체 어디로 갔는데?
아정: (비슬비슬 허리를 옹알거린다) 스페인, 몰라, 여기저기 도나봐
엄마: 아주 홍콩 갔구만!
아정: 일하러 갔지 놀러갔어? 갑자기 스케줄이 바뀐 걸 어떡해 그럼. (부엌쪽으로 가며) 과일 좀 줄까?
엄마: 몸은 좀 나아졌냐?
아정: 응, 엄마, 그 모자 좀 벗을 수 없어?
엄마: (모자에 손을 얹고)아. (머쓱해져) 물 있으면 한 컵 줘라.
아정: 물컵을 들고 와 탁자에 내려놓는다.)...
엄마: 찬 물 없냐?
아정: (찬물 가져다 준다)
엄마:(부스럭부스럭 가방 속에서 약봉을 꺼내 물과 함께 털어 넣는다. 사래 들린다.)에취, 에취, 캑캑...(사래를 추스르며 가슴을 두들긴다.)
아정:(앉아 구겨 던진 약봉지를 만지작거린다.) 이거 혈압 약이야?
엄마: 콜록콜록... 신경안정제다.
아정:(고개를 번쩍 들고, 염려와 성마름과 짜증스러움이 뒤섞인 착잡한 표정) 그건 좀 끊어봐!
엄마: (눈을 스르륵 감으며) 심장이 보통으로 뛰야지... 퉁탕퉁탕 북을 친다....
아정: 심장은 왜?
엄마: 사는게 불안해서 안그냐.
아정:...
엄마: 아무래도 엄마는 오래 못살 것 같으다
아정;(퉁박을 주며) 그런 소리 좀 그만해
엄마:(비위가 틀려)사실 안 올라고 혔는디.
아정:중풍이 도졌다면서? (눈을 흘리고)거짓말까지 하면서 사람 놀래켜 놓고,(씨근덕거린다) 그 소리 때문에 나 정말 애 떨어질 뻔했단 말야.
(엄마, 눈빛에 덥썩 말을 삼킨다.)
엄마:(삐딱하게) 그래, 엄마가 중풍이 아니라 실망했지?
아정: 그만해, (사이)아, (다시 아픈 듯 아랫배를 만지며 허리를 쪼그린다.)
엄마: (벌떡 일어나 앉으며 열을 낸다.) 어쩌겠냐? 그려 나도 나이 먹어봐라. 자식, 서방 다 떨구고 혼자 사는 기분이 어떤지 바퀴벌레 한 마리만 기어 나와도 비명이 터진다.
아정: (작업실로 총총히 걸어가며) 아, 그러니 잘 왔다구요. 이렇게 왔으니 만사형통이잖아?
엄마가 중얼거리는 사이, 딸은 원고를 봉투에 꾸린다.
엄마:아라는 어찌 지낸다냐? 에미가 온 줄도 모르나? 매몰차지 매몰차. 손목 때기에 쇠통을 찼는지 아무튼....(수화기를 들고 번호판을 누른다.)
딸, 옆구리에 원고봉투를 끼고 나온다
아정: 엄마! 나 좀 나갔다 올게.
엄마: 받도 안네... (수화기를 어깻죽지에 낀 채)어디 가는데
아정: 나,
엄마: 참 (수화기를 내려놓는다)이리 좀 와 봐라.
엄마,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비닐 포장에 덮인 파란 색 유아복.
엄마: (지친 티가 말짱 가시고 환히 피어난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이게, 색깔도 색깔이지만 디자인이 기가 막히다. 엄마가 왜 옛날부터 옷 고르는데는 선수였쟈녀. 얼른 뜯어봐라.
아정: (어정쩡하게 바라본다) 애, 옷을 벌써 샀어?
엄마: 벌써라니? 금방 나올 건데...
아정: (옷을 들어본다, 라벨의 치수를 확인하고) 돌복이잖아?
엄마: 애들은 금방 큰다.. 어쩌? 너무 앙증맞지 않냐? (눈시울이 촉촉해진다)...옷파는 디서 물어 본게. 분홍색은 계집애 꺼고, 이 퍼런게 고추꺼라드라.
아정: 누가 벌써 아들났어
엄마: 떡두꺼비 겉은 아들로 척 낳아서 에미 평생에 한을 풀어주야지. 그런 효도도 안할라믄 뭐할라고 이적까정 밥쳐묵고 살았다냐?
아정: (푸드덕 홰를 친다)그렇게 소원이면 소원인 사람이 낳아!
사이, 딸, 저도 모르게 자꾸 말실수를 저지르게 되자, 얼얼하게 굳는다.
스스로를 책망하다가도 다음 순간 문득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퍼뜩 후회하는 것의 반복, 그렇게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얼버무리고,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엄마.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너그러움이며, 아무리 나이 먹은 자식이라도 자식인 한 어쩔 수 없이 귀여움을 느끼려는 충동이다. 이 때문에 엄마는 주책스럽고 이기적으로 보이다가도 연민을 자아내고, 본인의 의도 여부와 아무 관계없이 인간미를 풍기게 된다
엄마: 근디 자가 미쳤나?(웃는다)이 나이에.... 이 과부가...(자지러지게 웃는다)
아정: (옷을 내려놓고) 어쨌든 고마워 엄마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엄마: (눈이 휘동그레진다) 아프다메?
아정: 뭐 좀 부칠게 있어. 금방 갔다올게.(문을 열고 나가며)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뭣 좀 꺼내먹어. 그리고 엄마, (안으로 얼굴을 내밀며)실내에선 모자 좀 벗고 있어.(사라진댜.)
엄마: 기가 맥혀서!(모자를 벗는다.)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아정의 책상에서 딸들의 사진을 발견하고
엄마: 아이고, 아라야! 아이고, 아영아. 아영이? (숫자를 하나하나 읊어가면서 전화기의 번호판을 누른다. 동작이 굼뜨고 서툴다)헬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영이냐? 엄마다. 아이고 우리 공주! 등, 언니집 왔다. 니는 헬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영이냐? 엄마다. 아이고 우리 공주! 응, 언니집 왔다. 니는 제때 시집가서 보기좋게 아들딸 놓고 얼마나 좋냐 그래! (침을 꿀꺽 삼키며 본격적인 태세를 취한다.)근디 느그 언니는 왜 저렇게 흉측스러운지. 배 아프다고 니 에미 마중도 안나온 거있쟈... 으응 그려 나도 알지. 갸가 우리집 가장노릇 다 했잖냐. 최서방 거 뭐하는 사람인지. 엄마하고 아라는 시외전화, 니는 국제전화라고..(아저이 들어노는 기척을 느끼곤 황급히)...야 아니다. 그래 끊고 아이 러브유! 아영아! 니가 전화해! 땡큐!
딸이 현관문으로 들어온다.
코트도 벗지 않고 내지들을 들춰보며 소파에 앉는다
엄마: 금방 오네? 그새 볼 일 다 봤는 갑네?
아정: (복사물을 들여다보며) 아니, 뭣 좀 확인할게 있어서 가다 도루 왔어.
딸의 얼굴, 점점 찌푸러든다. 엄마, 부엌안으로 들어간다.
아정: 93년이라더니, 92년이었어? 이 여자, 웃기네! 자기 기억력이 컴퓨터라고 잘난체하더니만, (복사지에 시선을 박은 채 일어선다.) 큰 일 날뻔 했잖아.
엄마: 느그는 저녁 몇 시에 먹냐?
아정: (엄마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아차차! 연도가 완전히 뒤섞였네? 이때 큰애가 열 아홉이면, 막내는 아직 중학교에 안 들어간 거 아냐? (성마르게) 에이, 다섯장을 다시 써야되잖아(코트를 벗으며) 참, 최서방 전화 없었어?
엄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정: 아라는?
엄마: (포기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아정: (컴퓨터 책상 쪽으로) 걔도 참...
못마땅해하는 엄마를 내버려두고, 딸은 컴퓨터를 켜고 복사물과 원고를 대조하여 내용이 불일치 되는 부분을 살핀다
엄마: (큰소리로 딸을 향해) 밥솥이 텅텅 비었다. 내가 밥이라도 앉히까?
아정: (일에 집중하려고 애를 쓴다)
엄마: 냉장고도 텅텅 비고, 나물 한가지 없이 뭐하고 먹고사는지
아정: (외친다) 아니, 잠깐만!
엄마: (다시 딸을 향해) 날 다 저물어간다.
아정: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잠깐만, 잠깐만이라고 했잖아. 한 십 분이면 될 걸, 자꾸 보채니까 한 눈에 찾을 것도 찾아지지가 않잖아!
엄마: (자세를 취하며, 시비조로) 야가 맨 정신에 사람잡네. 도대체 찾는 게 뭔데?
아정: ...
엄마: 고 안에 신주단지라도 감차났는가 벼?
아정: (몸을 흔들며 격하게) 자꾸 그러지 마! 시간 없단 말야
어마: 긍게 그게 뭔디
아정: (커서를 올렸다 내렸다) 알면 엄마가 대시 써 줄꺼야?
딸이, 엄마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는 이유는 그 일에 대한 어떤 껄끄러움, 자신도 모를 수치감, 그러니까 자존심에 걸려서이다.
엄마: (딸에게) 어째.... 순순히 오라고 하드라. 아! 이럴걸 뭐한다고 오라고 혀
아정: 꿈에 강도가 나온다며? 불안 초조 노이로제, 변비에, 혈압에, 중풍이 도졌다면서!
엄마: 그려 이놈의 팔자, 혼자 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든가 말든가, 아이고 더러워서, 자식이 아니라 무슨 웬수다 웬수!
엄마, 한걸음에 코트와 가방 한 개를 들고 나가려 하는데 딸, 천천히 소파 뒤로 걸어가 너머지 하나의 가방과 모자를 들어올린다.
아정: (엄마뒷모습을 향해) 엄마!
엄마: (팍 뒤돌아본다.) 왜
아정: (가방을 들어보인다.)...
엄마 딱 멈춰선다.
아정: 모잔?
엄마: 뭐?
엄마, 아차 싶은 듯, 머리 위에 손을 갖다 올린다. 순간, 딸이 얄미워 한방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한다. 딸, 푸풋 웃기 시작한다.
조명 어두워진다.
3. 옷 얘기가 나오면 힘이 솟는 엄마...
조명의 변화, 식탁 쪽이 환하게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앞치마를 두른 딸, 식탁과 싱크대 사이를 오가며 찻잔을 나른다.
아정: (걱정스럽다는 듯)엄마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왜 그래? 또 변비야?
엄마: (화장실 안에서) 물을 바꿔먹어 그런가. 약도 안 듣는다.
아정: 자꾸 약을 먹으면 어떡해.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해야지.
엄마: (식탁쪽으로 오며)야가 무슨 소리한테 내가 저보다는 먼저 일어났는디...
아정: 우리 둘 다 말이야. 바이오리듬이 완전히 깨졌어.
엄마: (찻잔을 흝어보며) 야이야 이거는...
아정: (자기가 마실 커피 잔을 식탁에 놓는다)...
엄마: 애 가진 사람은 이 빠진 그릇 쓰는 거 아닌디 너는 여즉가정 맞벌이 험서 그릇하나 바꿀 여유도 없냐?
아정: 이 집 얻을 때 은행에서 대출 받은 거 내가 얘기했잖아. 이자 갚기도 빠듯해. 생활비도 만만 찮구
엄마:(떠름하게 차를 마시고)그럼 엄마가 새로 하나 사주까?
아정:(커피 한모금 마신다.) 맘에 드는 건 잘 깨져나가 죽어도 정 안가는 건 절대개지지도 않고(찻잔을 보며)그릇도 사람 같은가봐(아정, 순간적으로 자기가 한 말에 움찔 놀란다. 순간 서먹한 분위기.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밥 너무 쪼금 먹은 거 아냐?
엄마: 응 나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 당뇨병 땜시, 밥도 실은, 현미밥을 먹으야 되는디...
아정: (말똥말똥 쳐다본다)이는 또 왜 그래?
엄마: (입을 오므리며) 이것도 당뇨 때문에 안그냐
아정: 하지만 결국은 (심각하게)안 먹는다. 안먹는다 하지만 항상 나보다 많이 먹어.
엄마:(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응 긍게 그게 참 이상타, 나 혼차 시골에 있을때는 하루종일 쫄쫄 굶고 살아도 암시랑토 않했는디.. 며느리 밥을 못얻어먹어서 근갑다.
아정: (사이) 며느라라면 전부 파출분 줄 알지.
엄마: (아정의 커피잔을 훔쳐 마신다) 자가 뭐라쌌냐?
아정: (엄마 손을 탁 치며 눈을 흘긴다)녹차 마시라니까.
엄마: (겸연쩍어) 왜 니 맛있는거 않해 준단게 삐쳤냐?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뭐여? 나 찾는 전화왔는갑다.
딸, 거실 탁자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든다
아정: 네! (사교적이고 화사한 분위기로 변한다) 어머, 안녕하세요? 그렇잖아도 제가 머저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엄마: 노박이 아녀?
아정: (신경질적으로 도리질) 쉿! 네, 그냥 대강 되어가요... 아뇨! 아직 두어번 더 만나야 돼요. 다시 보니까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구요. (목맘른 듯) 그보다 계약서 말인데, (마른침을 삼킨다) 우선 도장부터 좀 찍었으면 하는데... 네? 안계세요? 제가요. 집안에 일이 있어서 돈이 좀 필요해서 그러는데요... 아니에요. 그렇게 급한 건 아니구요... 예? 25일까지요? 제가 맞춰 볼께요. 네, 네에,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고 인상을 쓴다) 원 제기랄! 식전 댓바람부터! (엄마를 향해)
노박이 아줌마는 왜! 애인이라도 소개시켜준대?
엄마: 아니 아니다. 왜 또 이사갈라꼬?
아정:...
엄마: 계약서고 도장이고 해쌌대?
아정:...
엄마: 뭔일인디?
아정: 으응(얼버무린다)(사이) 아후!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엄마, 난 왜 이렇게 맘에 없는 소린 잘도 지걸이면서, 꼭 해야 할 말은(목줄기에 손바닥을 갖다대며)목구멍에서 딱 막히지?
엄마:(손가방에서 약을 꺼내며, 심각하게 묻는다) 그짝에서 계약서를 안써줄라고 그냐?
아정:...
엄마:(약들을 살펴보며)뭐신지는 모르겄지만, 무조건, 계약서 안 써주믄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다고 혀라. (약을 털어넣는다)
아정:...
엄마: 시상에 나쁜놈들 많다. 믿을 놈 하나도 없다. (탁자위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그나저나 아정아, 엄마 입이 많이 비틀어져 보이지? 어찌자고 나이 오십에 중풍이 왔으까... 병 오기 전만 혀도 차려입고 나서기만 하믄 뒷모습은 처녀 같다고들 혔는디...
머리도 새까마니 윤기가 자르르르 돌고...(머리카락을 만지며)
요새는 영 아니다. 부석부석한게...
아정:(음울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난다) 일해야돼. 초조해 죽겠어.
엄마 설거지는 그냥 둬!
엄마:(머리카락을 만지며) 아정아! 냉장고에, 마요네즈...
아정: 부르지도 말고, 전화와도 바꾸지 마? 아, (배를 싸쥐며 아픈 표정)
딸 컴퓨터를 켠다.
딱하다는 표정으로 딸을 보던 엄마, 딸 옆으로 쫓아온다.
엄마: 아프다면서 쉬지, 계약서도 안 써주는 디 뭐시 급하다고 그냐 튕길 때는 확실히 튕겨야지, 세상 그리 살믄 안된다.
아정:(대답이 없다. 모니터만 골똘히)...
엄마 무렴해진다. 모니터를 노려보던 딸, 밑에 몰두하기 위해 애쓴다
엄마: 노박이한테 전화나 해볼까... 그래도 갸가 인정스럽다... 잘 살아도 거만 안 떨고 이십 년 우정이 변함이 없다.
아정: (자판만 난타한다.)
엄마: 갸는 피부도 탱탱한게, 젊어 인물 그대로 아니냐! 나만 쭈구렁할망구 다 됐지. 돈 있는 사람들은 다 안 늙대! 돈! 그거 그래서 무섭다
아정: (일에 집중하려 애쓴다)
엄마: 한번에 오만원짜리 티켓을 열 갠가 한꺼번에 끊어갖고 한달에 두어 번은 맛사지를 한다는디(딸의 반응을 살펴보며) 열장 한꺼번에 끊으면 오파센튼가 십파센튼가 할인을 해준다데.
아정:(더 이상 못참겠다는 듯 소리친다.) 오파센트고 십파센트고 순 유한마담이네 뭐!
엄마: 근디 자가... 갸가 얼마나 야물딱시런디!
아정: 뭐, 저번에 볼륨댄스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엄마: 그거사, 나이 든 사람들 운동 아니냐
아정:...
엄마: 글고 노박이는 본시 춤을 참 잘췄다. 왜 그 피크닉이라는 영화에서, 킴노박이 추던 춤, 그거하나 기차게 흉내를 잘 냈거든, 그리캬꼬 별명도 노박이 아니냐
글고 가는 옷도 압구정동에서 철철이 맞차 입는다고 하는디 (부러움의 극치)
얼마나 좋냐? 젊게 살고 츄미도 살리고,
딸 묵묵히 자판을 두들긴다.
엄마: 아정아 근디 그 원고 뭐 내용이냐?
아정:...
엄마: 뭐신디 안갈켜줘? 엄마한테 말좀 해주믄 누가 와서 잡아먹냐?
아정: (버럭)그냥, 책쓰는 거야
엄마: (깜짝 놀라)채액? 긍게 니가, 책을 쓴다고?
아정: (위축되어)...
엄마: (희색이 만연해서)아아, 아정아... 너, 참말로 장하다이... 그려 내 딸이 암만히도, 그냥 들앉을 리가 있나...
딸, 엄마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엄마: 내 니 그럴 줄 알았다. 니가 참 글도 얼마나 잘 썼는디... 그려 그 책 쓰믄 돈은 많이 벌지?
아정: (잔뜩 비틀린 얼굴로 다시 의자를 당겨앉는다) 많이 팔려야 벌겠지.
엄마: 뭔 책인디?
아정: (손놀림이 빨라진다)뭐, 사람사는 얘기지.
엄마: (환희에 차서) 아이고, 아정아, 니가 드디어 일로 치는구나(하지만 그러다 불현듯 심각해진다. 사이) 근디 그게 (엄마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가 많다) 요새 소설 같은 거 써서 어디 돈 벌리나?
아정: (자판을 두들기며 어금니를 질끈 깨문다)
어마: 글지 말고 아정아 너도 방송극본 같은 거 한 번 써봐라. 누구누구 극본가는 최민수, 최진실이 이름보다 먼저 나온다. (힘주어) 돈도 엄청나게 번다는디.
아정: 누가 그래?
엄마:다 말해 주는 사람 있다.
아정:누구?
엄마: 하여간 있다. 노박이가 너 보고 연속극본 한 번 써보라고 혔었는디...
아정: (혼잣말로) 노박이 좋아하네. (사이) 유리엄마 진짜 웃겨. 남이야 손가락을 빨든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자기가 뭔데 연속극을 쓰라 마라해?
엄마: 노박이야 니 재주가 아까워서 그라제...
아정: 재주는커녕, 메주도 못된다
엄마: 기집에 성질머리도... 내가 오늘부터 기도를 해야지.
아정:...
엄마: 언제 다 쓰냐? 백일기도면 되겄지?
아정: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 제발 좀 그만좀해! 나 시간 없어
엄마: (꿈찔) 너, 그 성질머리부터 고쳐야 된다. 푸닥가리헐 때 보믄 영락없이 느그 아부지다. 미꾸라지 소금 친 거 맨치로 파들파들! 자구 그래싸믄 될 일도 안되는 것여. 이 엄마좀 봐라! 평생 물 흐르득기 고요하게...
아정: (얼빠진 얼굴)..
엄마: 사랑도, 미움도 다 안으로 다스리얀다. 살아보면 안 허망하고 티끌 안 같은 것없다. 글고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수가 없다. 암만 후회해봐도 지나간 거는 지나간거다. 긍게 너도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아정: (컴퓨터 자판위에 팍 엎어진다)
엄마, 자기 말에 취해 베란다로 겅중겅중 탱고풍으로 걸어간다. 활짝 핀 얼굴
엄마: 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믄 좋겄다... 동백섬에는 벌써 동백꽃이 폈을 텐디...(혼자 흥얼흥얼 ‘산너머 남촌에는’을 부르다가 되돌아서, 딸을 향해 큰소리로) 아정아! 그 책 팔아서 돈 마니 벌믄 엄마 충치 이것 좀 어떻게 해 주라. 그때 싸구려로 안했냐... 아, 아니다 이는 당뇨 때문에 안됭게 내 밍크코트 하나 사주믄 되것다.
아정: 밍크 있잖아
엄마: (숨차게)벌써 이십 년도 더 된 넝마? 그게 좋으면 너 입어라. 너 주께.
아정: (이를 막문다)...
엄마: (실망스러운 듯)(그러나 곧 생기를 되찾고 화려한 체스쳐를 섞으며) 명택이 에미도 재작년 겨울에 롱코트 새로 안샀냐 아이고 그 화상 한번 봐라. 쥐알탱이만한 여편네가 밍크에 폭 파묻혀 갖고, 사람이 아니라 꼭 밍크만 걸아가는 것 같은디. (파안대소) 푸하하... 그래도 지도 좋타고 껄떡거리고 댕긴다... (생뚱맞게) 그래서 너 밍크 안 사준다고?
아정:...
엄마: 나야 인자, 바람소리만 들어도 어깨에 살얼음이 낀 거 맨치로 춥고 시리다...누가 뭐래도 옷은 유행따라 입는게 최곤디..(잠자코 있는 딸의 눈치를 살피며) 할부로도 해도 안 될랑가? (꿈에 취한다) 길이는 하프로 해 가지고, 색깔도 시커먼 거 말고 은여우색 같은 걸로, (천천히 일어난다) 가슴선에서 후레야스 카트맨지로 (훌라후프 돌리듯 허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찰랑찰랑 퍼지는 거, 그런 거 입고 싶다...
딸, 컴퓨터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지고, 어스름 속에서,
엄마: 아이고 내가 또 훼방을 놓네... 엄마 신경 쓰지 말고 후딱 글써라!
암전
4. 저녁을 못 먹은 날
거실 쪽 조명 밝아진다
저녁, 외출에서 돌아오는 딸,
엄마, 보이지 않고, 딸,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정: (목도리를 풀어 던지며) 질렸어! 질렸어!(두리번거린다) 엄마!...엄마? (집안을 돌아디닌다). (커다랗게) 엄마!
엄마, 욕실에서 나온다. 머리엔 세수수건을 감고, 막 샤워를 마친 듯 얼굴이 발그레 달아 있다.
아정: (탁자 위로 봉투 하나를 던진다)자.
엄마: (앉아서 발을 닦으며) 그게 뭐시다냐?
아정: 아영이한테서 온 거야. 읽어봐.
엄마: 우리 공주가? (얼굴이 밝아진다)
딸, 코트를 벗어 행거에 걸고 엄마는 탁자로 달려와 카드 봉투를 뜯어 읽는다.
엄마: (또박도박 읽는다. 어딘지 어린아이 같다) 콘그래츄래숑! 언니가 곧 엄마가 된다니 믿어지지 않아. 난 언니가 결혼 안하고 혼자 살 줄 알았거든... (혼자말로)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다시 카드로) 엄마한테 너무 돈 아끼지 말고 맛있는 것 많이 사드시라고 전해줘. (연하장을 떨어뜨린다) 맛있는 거? 흥! 내가 저녁밥도 쫄쫄 굶고 있는디.
아정: 아 밥 있고 찌개 있는데 여태 안 먹고 뭐했어?
엄마: (울적하게)낮에 아라한테 전화 해봤다.
아정: (부엌에서 뭐 마실 거 없나 찾으며 혼잣말) 질렸어, 질렸어, 확 때려치워버릴까.
엄마: 아라는 무슨 시험인가를 본 다는디 와보지도 못한단다
아정: (순간 짜증이 치민다) 여기 오라고 했어?
엄마: 엄마 있는디 얼굴이라도 비쳐야지.
아정: (딱딱하게 굳어서 식탁에 앉는다)...(사이)....(엄마쪽으로 구개를 틀며)지금은 안돼
엄마: 밥은 챙기먹지도 않고 배가 되게 고파야 겨우 라면이나 끓여묵는 다드라 그게 무슨 영양가가 있다고?
아정: (성가신 듯) 걘 원래 라면만 먹어...(불현 듯 메스껍다)욱,
엄마: 최서방이 전화했는디 목소리 씩씩하대! 기분 좋은 가보드라... 스페인이라던디 너한테 엽서를 띄았단다
아정: 정말 치사해서 못해먹겠어.
엄마: 사람이 말을 하믄 대꾸라도 좀 제대로 해 봐라. 너하고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아정: 으이그 (손바락으로 머리를 휩싼다)
엄마: 즈그서방한테도 저러는가?
아정: (벌떡 일어나) 엄마, 나 잠깐만 누울게, 천지가 빙빙 도는 거 같애.
엄마: (딸의 등 뒤를 향해) 어릴 꼭 저러등만!
딸, 쿠션을 끼고 소파에 드러눕는다.
엄마: (딸 곁에 팔짱을 끼고 서서)어릴 때도 꼭 나갔다 퉁퉁 불어올 때믄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든거여... 암만 물어도 주둥아리를 뽄드로 붙있는지 쯧쯧... 너도 낼 모레면 애기엄마다.
아정:...
엄마: (몸이 달아) 아정아 아라는 무슨 시험을 보는디?
아정: (벌떡 일어나며) 으이그! (애써 언성을 낮춰) 종합시험이겠지, 뭐?
엄마: 아니 무슨 놈의 시험을 보다 보다, 인자는 서른 넘어 갖고 종합판으로 또 본데? 시집도 못가고 평생 시험 치다 좋은 세월 다 보낸다.
아정:...
엄마: (탁자 위에 널부러져 있던 약을 털어먹는다) 사람이 현실감각이 있어야지. 큭, (사래들려) 콜록콜록...
아정: (쿠션을 품에 안고)엄마, 나 다 때려치고 장사나 할까?
엄마: 자가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는 개비?
아정: 보세옷 같은 거라도 떼다 팔면...
엄마: (생뚱맞다는 듯) 옷도 싫다는 애가 무슨 옷 장사는? 너 밑천은 있냐? 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정: 이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어. (팔굽을 베고 드러눕는다.) 엄마도 그런 느낌 가져봤어? 자기가 자기한테 사기 친 느낌 같은 거...
엄마: 사람평생이 다 사기공갈 아니냐? (타령조로)알았든 몰랐든 속아줌서 사는게 인생이다. 긍게 내가 뭐래데? 진즉에 약대를 가든가, 의대 가라 했지. 머리좋다는 것들이 쯧쯧, 너나 아라나 말하자믄 다 헛똑똑이다. 공부를 해도 실용성 있는 거를 해야지. 하다못해 교사자격증이라도 따놓든가. (사이 )왜 ? 뭐시 문젠데
아정:... 갑자기 하기가 싫어.
엄마: 뭐가?
아정:...
엄마: 책? 아이구, 노박이한테 다 말해 놧는디...
아정: 책이건 뭐건, 자존심이 상해...남의 글이나 대신 써줄려고 공부했나 싶구, 정말 한심해 죽겠어.
엄마: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그 짓 하라고 누가 등 떠밀데?
아정:...
엄마: (완연히 실망스런 얼굴로 한숨을 쉬며)그래 하기 싫으면 다 때려치워라... 내가 무슨 복이 있어 니 손에 팔자 고치것냐? 사는 만큼만 살다 죽지...아, 너는 돈벌어다 주는 남편 있것다. 뭐시 아쉽디? 돈이사 모지라믄 아껴 쓰믄 되고, 사람 한 평생 다 거기서 거긴데,
아정: (벌떡 몸을 일으킨다)...
엄마: 왜? 인자 후회되는 개비(두 귓불에 향수를 톡톡 찍어바른다), 애기 엄마 도리란게 인생이 똑바로 뵈는 갑다.
아정: (한숨을 토하며 도로 드러눕는다)아무도 내 마음 몰라.
느닷없이 크게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다. 발작적으로, 자학적으로, 약간은 현시적으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그때 따르릉, 전화벨 소리.
엄마: (귀를 막고 고함을 지른다)여보세요?
아정: (계속 혼자 노래를 하고 있다)
엄마: 네! 김아정씨? 잠깐만 기다려요(딸 옆구리를 쿡 찌른다) 받아봐
아정: (노래 계속 흥얼거리면서, 흩어진 머리칼을 추스르며 수화기를 건네받는다)네, 어머, 편집장님, 아직도 퇴근 안했어요? 네, 좀 피곤했죠, 뭐... 참, 제가 보낸 원고 읽어보셨어요? 어땠어요? 네... 글쎄요. 그거 느껴지시죠? 제가 볼 땐 솔직히 그 사람 문제가 아니(재빨리) 뭐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에요! 제가 다시 고쳐 볼께요... 네, 네 안녕히 계세요!
딸, 전화를 끊고 다시 눕는다.
엄마: 아이고, 뱃속에서 쫄쫄 시냇물 소리가 난다! 너는 환자를 혼자 내팽개치고, 하루종일 싸돌아댕기다가 저녁 채리 줄 궁리도 안하냐?
아정:...
엄마: (어이없어 하다가 푸념조로) 긍게 사람이 대접받고 살라믄 아들이 있어야 한다.
아정:....
엄마: 너는 꼭 아들을 낳아라. 아니 꼭 더 같은 딸 낳아서 내짝 되든지.
어마: 엄마, 어떤 사람은 마흔 다섯에 홀몸 돼서, 자식 넷 거뜬히 유학가지 시켜.
엄마: 남겨준 재산이라도 있겄지 뭐
아정: (볼 메인 소리로) 재산은커녕, 사업 빚만 잔뜩에다 전셋집 한 칸밖에 없었다.
엄마: 글믄 건강이라도 했겄지뭐
아정:...
엄마: 안그냐? 하다못해 배운 거라도 있겄지
아정:...
어마: 그것도 아니믄 아들이 있었것지 뭐! 맞지? 소도 비빌 언덕 보고 드러눕는다고, 지도 뭔가 희망이 있었은게 그런 악착을 떨었을 거 아녀?
아정:...
엄마: (타령조로)못한다 못해. 나는 못한다. 사람이 고생도, 고생 끝에 낙을 보고 하는 거다. 내가 그런 고생해봤자 뭔 낙을 볼라고?
아정: 끼웅! 그래, 알았어! (소파에서 훌쩍 내려선다) 차려줄게 차려주면 될 거 아냐
부엌으로 가려는 딸 앞에 막아서는 어마.
엄마: 됐다
아정: 비켜
엄마: 됐다니까
아정: 되긴 뭐가 돼?
엄마: 입맛이 싹 떨어졌다
아정: (쿵쾅쿵쾅 발을 구른다)누구 약을 올리는 거야 뭐야?
엄마: 지금 뭐라했냐?
아정: (코를 쥐며)잘 밤에 웬놈의 향수야? 머리아파 죽겠어
엄마: 왜 아까워서? 니꺼 좀 썼다고? 야야, 도로주께, 주믄 될꺼 아녀
아정: (아랫배를 붙잡고)욱,
엄마; (딸쪽으로 오다가 어지러운 듯 바닥에 주저앉는다O아, 너무 굶어서 그런갑다. (일어나 딸을 붙들려고 손을 뻗는다)
아정: (물리치며)(뒤돌아서) 정말 엄마 같은 엄마 될까 겁난다.
엄마: (충격을 받고 휘청거린다.)...
아정: (뒤가 켕겨 슬쩍 돌아본다)...?
엄마, 째려보고 있다.
엄마: (한 발 다가오며)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정: (물러서며) 난, 점심밥도 못 먹었단 말야.
엄마: (또 한 발 다가오며) 진심이냐?
아정: (물러서며) 너무 시달렸어.
엄마: 진심같은디
아정: (비명) 쓰러질 뻔했다니까!
엄마: 아이고 세상 사람들아 ..(헉헉 흐느끼는 제스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디.
사이
딸, 멍하게 서 있는데 엄마 벌컥 일어나 소파 뒤에 있던 짐가방을 끌어낸다.
엄마: 그래 가자 가믄 될 거 아녀, 떠나가는 손님 뒤꼭지가 이뻐 보인다고, 너하고 나하고가 딱 그짝이다.
엄마, 머리 수건을 쓴 채 가방을 들고 현관을 걸어가면, 조명 서서히 아웃, 흐린 암전속에서 ‘어머니 은혜’노래반주가 시작된다....
이어서 어린딸의 목소리. 아래는 녹음 처리.
설정: 어머니날, 시를 써서 상을 받은 어린딸, 원고를 들고 시를 낭송한다. 어린시절의 딸은 똘망똘망하고 기세등등하며, 거의 ‘병적인 자아도취’상태이다.
어린아정: 제목 어머니, 김아정,
비바람이 쓸고 간 저녁 뜰 아래, 한 떨기 꽃송이 소담하여라. 바람은 메워도 가슴 속 목련은 시들지 않네. 그대, 아름다운 이름
(한 호홉) 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울려퍼지는 박수갈채
5. 죤웨인과 스칼렛
거실쪽 조명 들어오면, 엄마, 소파에 느슨히 누어 땅콩을 까먹으며 티브이 주말명화를 보고 있다. 딸, 그 곁 마루에 앉아 안경을 끼고 신문을 본다. 영화<카사블랑카>의 한 장면, 샘의 피아노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아따, 험프리 보카트가 저 때만 해도 진짜 젊었네. (딸을 힐긋 보며 땅콩을 씹는다.)
아정: (신문을 보며 건성으로) 응
엄마: 저 표정 좀 봐라. 사람 잡네 사람잡어? 저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사랑을 지킬라고... 남자라는 것은 모름지기 저래야 된다. 저게 진짜 남자다 저것 좀 봐라. 저것 좀 보라니까
아정: (신문을 보며)응, 알아, 안다니까!
엄마: 엄마는 저 남자하고, 록 허드슨을 좋아했다.
아정:...
엄마: 엄마도 그땐 잉그리드버그만처럼 젊고 이뻤지...
아정: (신문을 접는다) 피융! 존 웨인 하고는 어떻게 돼?
엄마: (티브이에 눈을 둔 채 미간을 찌푸리며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듯이) 쫀 웨인! 술이나 처먹고 총질이나 헤대는 위인! 엄마는 그런 무식한 카우보이 같은 거 안 키운다.
아정: 아버지는 좋아했잖아
엄마: 느그 아버지사 좋았지 아 둘이 안 비슷하냐?
아정:...
엄마: 너는 존 웨인 그거 좋드냐? 덩치만 컸지. 매력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아정: 록 허드슨도 뭐, 덩치만 크더라.
엄마: 허지만 미남이고 신사에다 부드러운 남자 아니냐 어디 그뿐인가 (손가락을 꼽으며) 자상하지 능력있지. 술은 먹는지 안 먹는지 티도 안나고, 그거 뭐드라? (사이) 맞다! 구월이 오면! 엄마는 그 영화보고 그 미남자한테 홀딱 반했었다.
아정: (다시 신문을 펼친다) 그 미남자, 에이즈 걸려서 죽었어.
엄마: (충격을 받는다)어어?
아정: (약간 위악적으로 신문지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예쁜 말씨, 연극적인 말투로 엄마를 놀린다). 마지막에 그 사람 몰골이 어땠는줄 알아?
엄마: (토라진다) 시끄럽다. 또박또박 서울 혀쌓는 것도 꼴보기 싫어죽겄다. 그만 서울말 서울 양아치 한티나 써먹어라
아정: (멍하게)...
사이, 엄마, 다시 티브이에 열중한다. 감미로운 샘의 피아노 소리.
엄마: 저 피아노소리가, 심금을 울려주네...(발가락으로 바닥에 앉은 딸을 툭툭 건드리며) 너는 이자 피아노 전혀 못치지?
아정: (불쾌한 듯)...
엄마: 니가 어릴때는 피아노를 오죽 잘 쳤냐? 피아니스트 뺨 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니가 박사, 의사가 되고, 서른 살 넘으면 날마다 테레비에 나올 줄 알았는디 암마 지둘리도 너는 안 나오고, 수길있지? 가가 미국 가서 자동차 박사가 돼 가지고 테레비에 떡 나왔데..(엄마 리모컨으로 테레비를 끄는 동작).
엄마: 조선천지 그게 박사가 되고 테레비에 나올 줄을 누가 알았겄어. 바뀌어도 한참 뒤바꼈지. 그대만 해도 수길이 갸가 솔직히 얼마나 형편없었는디. 내가 나한체 그 피아노 사줄 때만 해도....
아정: 엄마, 나 픠아노 못쳐.
엄마: 백권짜리 세계문학전집도 사주고, 드레스도 사주고...(딸, 굳은 채 엄마를 본다)
아정: 엄마, 언제까지 여기,
엄마: (잘 알아듣진 못하고)뭐라고?
아정: 아니, 아니, 어마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감싼다) 난 피아노라면 신물이 난다고...
엄마: (다시 귀를 쫑긋 세우며) 아, 참 드레스! 가만 있어봐라. 가방...(방쪽으로 가며) 내가 요새 이렇게 정신이 없다. 오자마자 줄라고 했는디 참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아정: 아니, 아무것도 아냐,
엄마: (방입구 압로 앞에서 멈추며) 너 줄 라고 뭐하나 갖고 왔는디....
아정: (객석쪽으로 몸을 돌려 한숨을 쉬며)아마 엄마는 전생에 앵무새였을 거야...
엄마와 아정 소톱모션. 조명의 변화. 엄마는 화상공간으로 설정된 무대 뒤쪽 샤막안으로 이동. 딸은 식탁앞 쪽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따 라라라. 따 라라라. 따 라라 Fk라, 따 라라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테마곡/
설정: 책 읽는 딸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해 불행한 스칼렛 엄마 이 회상은 딸의 시점이다. 엄마와 딸은 각자의 공간에서 대사를 주고 받지만,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아정(이하 아정): 흑흑, (코를 패앵 풀어젖히곤 책갈피를 넘긴다.)
엄마: (딸을 놀래키는 동작)얏! 노크도 안하고 뭐야
엄마: 너 책 그렇게 가까이 보지마라이 눈 나빠진다.
아정: (기분나쁘다는 듯 책표지를 밀어보인다)...
엄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너 벌써 이런 거도 읽냐?
아정: (미심쩍게 )봤어?
엄마: 엄만~ 그까짓 거 진즉에 띠었지. 그게 영화도 있다(비비안 리를 흉내내는 제스쳐)비비안이 이렇게 기둥 잡고 허리를 착착 졸란메는 고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너 그 영화도 봤냐?
아정: (어벙하게 엄마를 본다)...
엄마: 그래 니는 그 책이 뭐슬 말할라고 하는지 알것냐?
아정: (떠름하게 자신없이) 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엄마: (회심의 미소)(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책은 말이다... (촉촉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허고 결혼을 못허믄 평생 불행하다.
아정:...
엄마: 이 한가지를 말할 라고 씌여진 거다
아정:...?
다시 영화의 태마곡, 짧고 잔잔하게.
조명의 변화, 다시 현실공간으로 딸, 거실 식탁쪽에 있고 엄마는 방에서 나온다
엄마: (빨간원피스를 보여주며)이 드레스, 너 줄라고 갖고 왔는디...(옷을 앞에 대보며)아직도 때깔이 그대로네...)십년이 넘은 건데 새옷 같다 그지?(자신도 모르게 서글퍼진다.)아정아 내 손원이 뭐신지 아나?
아정:...
엄마: 너하고 다정스럽게 팔짱끼고 백화점 쇼핑한 번 해보는 거다.
아정: (듣기가 민망한 듯 주춤거리다가 화장실로 간다)...
엄마: 느그 아버지하고도 팔짱 한 번 다정시럽게 껴 보는게 평생 소원이었다.
아정:...
엄마: 모질고 인정머리없는 영감쟁이! 할 줄 아는 거라곤 됫병으로 술나발 부는 것 밖에 없었다.
엄마:(딸의 뒷통수에 대고 )불면증 이것도 전부 느그 아부지 탓이다. 술도 술도 작작 먹어야지. 그래 퍼묵고 와서는 곱게나 잠사, 아영이하고 나를 지지밟는게 일이었다. 뭐할라고 이남에는 내려와서? 이북서 김일성이 하고 같이 살지... 입에 자물통 탁 채우고, 어금니를 디리릭 갈 때 보면 영판 무장공비맨키로 생겨같고 평생에 나를 웃겨준 일이 한번 있나.
아정: (화장실안에서 냉정항게) 평생 더 당하고 살면서도 꿋꿋하게 견뎌내는 여자들, 얼마든지 있어.
엄마: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를 버럭 지른다) 그래 아부지 위하는거, 평생 소원하나는 뫠 못들어 줬는데?
엄마, 스톱모션, 조명의 변화, 우르릉 쾅쾅, 빗소리...
딸은 무대 뒤쪽 샤막안 회상공간으로 이동, 엄마는 거실 소파뒷쪽에 자리잡는다.
설정: 말 안 듣고 반항하고 딜레탕트적 기질이 농후했던 딸의 십대, 이 회상은 엄마의 시점이다. 엄마와 딸은 각자의 공간에서 대사를 주고 받지만,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엄마(이하 엄마): (울며)아정아 저 지금 고삼이다 학교는 안가고 바닷가는 뭐하러 갖다냐
아정: (꽥) 그냥! 비 맞고 싶어서!
엄마: (발을 구르며) 너 환장했냐? 여학생이 챙피도 모르고, 바닷가 갔다가 파출소에나 끌려가고
아정: (튀쳐나갈 듯) 에이씨 대학 안 가면 되리 거 아녀!
엄마: (애소하듯)아정아 느그 아부지가 너 약사 만들 희망으로 평생 면허장도 없이 형사 눈치보면서 겨우 약국 저만큼 꾸리왔는디 아정아(딸의 다리를 끌어안으며)너 글믄 못쓴다.
아정: 약대 안가 나는 연극 할 거란 말여
엄마: 뭐시라? 딴따라 하이고, 야가 고등고시 패스해서 농사꾼 되겠다는 짝이네 .누구 복장 터져 디지는 골 볼라고 그냐?
아정: (엄마로부터 확 떨어져, 꽤) 엄마는! 나한테 그런말 할 자격없어
엄마: (기가 질려)...
아정: 백날천날 돌아다니고, 백날 천날 싸우고 지지볶고, 엄마, 아버지 물고 뜯는 거 신물이 난다. 나는 결혼도 안 할 꺼야. 혼자 살 꺼야
엄마:...
아정: 나는 혼자살 거야
엄마: (입을 벙 벌린다) 호온자? 하이고 야가 완전히 바람이
아정: 자꾸 이러면 꽉 도망쳐버린ㄹ꺼야. 나가서 내 멋대로 살아 버린다.(확 뛰쳐나갈 듯)
엄마: (딸의 다리를 부등켜 안는 시늉)아정아, 안된다...너 어쩔라고 이러냐. 그래 니 마음대로 해라. 아이구 인자 느그 아부지는 약국 저거 불질러 버릴꺼다
아정:...
비명 같은 현악기 선율, 다섯, 넷, 셋, 둘, 하나...
조명의 변화 암전짧게, 그 사이, 어마는 현관밖으로 나가고, 딸은 거실에서 서성거리다가 전화를 건다.
아정: 아라니? 언니야, 엄마 약이 더 늘었더라. 아니야, 자세히 세어 봤는데 몄 가지 더 늘었다. 걱정이다. 점 점 횡설 수설하고, 밤엔 통 잠을 못자 꿈에 자꾸 아버지가 보인대. 음 지금? 수퍼, 너 엄마한테 전화 좀해. 왜는? 맨날 니 전화만 기다린다니까 그렇지. 너. 이달 말쯤 와사. 으응... 아직 못 끝냈어. 그래, 그 보험여왕이 아주 사람잡는다. 이러다가 진자 내 글은 영영 못쓰는거 아닌가 모르겠어... 어떻게 그만 두니? 엄마 약값에, 이집 이자에, 돈들어가는데가 어디 한두 군 덴줄 아니? 형부 눈치도 보이고... 형부? 형부야 잘 돌아다니고 있지. 자기도 돌아오면 편친 않겠지뭐... 안 물어봤어. 뭐라고 할거야 엄마,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교대로 너나 아영이한테 가서 한 한 달씩 있으라고 그럴까? 아이구 참... 나 어젯밤에 리어왕 다시 읽었다. 왜 그렇게 슬프니 리어왕은 답답하고 딸들은 악마같고... 사실 엄만 ... 내가 되게 미울거야
그때 인터폰 울린다
아정: 아라야. 워 왔다. 잠깐만,
전화기를 들고 현관으로 가서 인터폰을 집어든다.
아정; 네 네? 숄 두른 할머니요? 네 맞아요.
다시 전화기에 대고
아정: 야 사고 났다. 엄마가 길을 잃었대. 몰라 엊저녁에도 같이 갔던 수펀데.(초인종소리 들린다.)끊자 끊어(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연다) 네, 고맙습니다.
엄마, 파랗게 질려서 들어선다. 인삼, 대추등 속이 든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
엄마: 하이구(바닥에 철푸덕 주저앉는다)
아정: (객쩍어하며)코앞에서 길을 잃었어?
엄마: (뒤틀린 목소리로 따지듯)너는 전화갖고 일하냐?
아정: (거실로 몇 발짝 우당탕 걸어들어오며) 빨리 들어와
엄마: (고래 고래) 파출소에서 삼십분을 전화했다. 여러 수천 번을 눌러도 또또거리는디 (씩씩댄다) 애미한테는 응 아니 두 마디뿐이 아니면서 누구한테 그리 꽃나발을 불고 지랄이여 앵무새는 (악을 쓴다) 니가 앵무새지. 내가 왜 앵무세냐 에미는 길을 잃고 동동거리는디 삼십분이 넘도록 전화통 붙들고 씨부리는게 앵무새지. 내가 왜 앵무새여:? 시상 앵무새 씨가 전부 말라 자빠졌는갑다
아정: (입을 앙다물고 멍해 한다)
엄마: 그래 잘 씨부리는 게 왜 말이 없어? 순경도 나를 보고 혼자 사는 할망군가 하드라
아정: 조용히 좀 해. 아래층에서 인터폰 오겠다
엄마: 오라고 혀! 동네 사람들한테 한 번 따져 물어보자.
아정: 내가 언제 시장보라고 등 떠밀었어? 엄마가 자꾸 이러니까 아무것도 못하겠잖아.
엄마: 왜 내가 스트립쇼를 하냐, 고성방가를 하냐
아정:...
엄마: (한 풀 꺾인 음성으로) 냉수나 한법 줘.
딸, 부엌으로 간다.
엄마: (일단 판콜에스 한 병 마시고, 약가방을 열고 약을 한꾸러미 늘어놓는다. 아들없는 년이 죄인이지
아정: (탁자 위에 물컵을 내려놓는다) 저녁 그냥 먹자. 야채에다가 소스 끼얹어 샐러드 해먹으면 되겠다. 된장국도 있고, (약봉을 뺏으려) 이거는 먹지마
엄마: (안뺏기려 확 털어쥔다) 냅둬. (약을 덥썩 삼켜버린다)
아정: (기가 막혀서)..
엄마: 내가 염생이여? 맨날 푸성귀만 씹으라고...
아정: 마요네즈 찍어 먹으면 고소한데.
엄마: (솔깃)마요네즈?
아정: (다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고 야채보관함도 열어본다.) 아니, 간장으로 오리엔탈 소스 만들까?
엄마: (자신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마요네즈는 (침을 삼키며) 머리카락 이게 부석부석할 때, 맛사지로 한 번,
아정: (냉장고문을 탕 닫으며 엄마를 노려본다.) 내가 싫다 그랬지? 절대 안돼
조명 어두워진다.
6. 여왕이 부러운 이유
경쾌한 에어로빅 음악과 함께 밝아오는 무대.
딸, 음악에 맞춰 발작적으로 몸을 흔든다. 마루와 식탁 사이를 춤추듯 오가며, 한편으론 마요네즈 볼을 거품기로 휘젓는다. 딸의 이 행위는 자신과 엄마, 그들의 생, 막혀있는 일상을 향한 일종의 시위다.
엄마는 방에서 딸의 원고를 들고 나온다.
엄마: (원고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참말로 글 잘썼네...
소파에 앉아 돋보기를 꺼내쓰고 계속 원고를 읽는 엄마
어느결에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진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원고를 들었다. 내렸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 돋보기 때문에 한결 늙어보이고 위축돼 보인다. 딸, 엄마쪽으로 다가온다.
엄마: 마흔 다섯에 과부가 돼서 아아 넷 유학을 시키두룩 얼마나 고생을 했으까 그래 참말로 장하다. 이런 여자는 진짜 상주야 된다. 여왕, 여왕 혀쌓드만 나도 진즉에 보험이나 해볼걸
아정: (침을 삼키며) 엄마, 이 여자는 (힘주어) 대빵 건강하고, 명문대학가지 나온데다, 친정도 잘살아, 큰 계약만 딴다고 큰소리 치지만 전부 연줄 연줄로 꿰진거야 (엄마의 무릎을 흔들며)게다가, 아들이 , 거짓말 안 보태고 턱수염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아들이, 셋... 딸은 딱 하나, 하나밖에 없어
엄마: 아이고
아정: 엄마, 왜 이래.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엄마: 그게 아니라.
아정:...
엄마: 이 여자 서방 말이다... 이 사람은 우째 이리 마누라를 떠받들고 살았으까 주말 마다 여행가고 옷해 입히고, 맛있는 거 사주고, 업어주고 닦아주고 아 (진정하려 애쓰며) 이 여자가 달리 여왕이 아니라, 즈그 서방한테 여왕이었네..
아정: (뜨악해진다)...
엄마: (그래 이 여자는 안 그러냐? 자기가 악착을 떰서 살아낸 이유가 전부 이 ‘남편’과 나 사이의 사랑하는 자식들 때문이라고 이 여자는 여기서, 바로 이 ‘남편’을 강조하고 있는거여
아정: (멍청)...
엄마: (푸념조로)저 여자가 하도 남편, 남편 해댄게 나도 느그 아브지 생각난다.
아정: 엄마한텐 기억도 병이야.
엄마: 미우나 고우나 느그 아부지 있었을땐 ... 참말로 심심치는 않았는디
사이
음악 구슬프고 잔잔하게 감겨든다(클레멘타인)
아정: (베란다쪽으로) 아버지, 참 뜨거웠을꺼야...
엄마:...
아정: (먼 발치를 바라보며) 굉장히 오래, 오래 탔어
엄마: 덩치가 큰께
아정: 그러고선 찬 바다에 뿌렸으니, 영혼도 깜짝 놀랐겠지... 뜨거웠다. 추웠다 나라면 싫었을거여
엄마: (훌쩍) 엄마도 죽으믄 그리해라. 외할머니도 그리 안 보냈냐 외할머니는 (울먹) 인자 생각하믄 내가 잘못해도 너무너무 잘못했었다
아정: 참 엄마도 엄마가 있었지
엄마:...
아정: (엄마를 보며)아버지도 ‘엄마’라고 부른 사람이 있었을 꺼 아냐, 할머니는 어떻게 생겼을까. 엄만 얼굴도 모르지?
엄마: 모르지. 아부지가 스물 넷에 이북서 혼자 내려왔잖냐, 마흔 넘어 간신히 외아들하고 그리 생이별을 했는디 느그 할머니도 눈 감는 그날까지 가슴을 쥐뜯고 살았을 거다... 왜 아들 복을 잘 좀 안빌어주고, 독불장군에 고주망태로 살다가게 했을꼬... 저승서도 나를 그리워는 하는지.
딸, 픽 웃는다
엄마: 꿈에 자꾸 뵌다 (판콜 에스 한병을 또 딴다)
아정: (찌푸리며) 그걸 또 마셔?
엄마: 내 영혼의 묘약이다 (한모금에 털어넣는다).. 꿈을 꾸는디 옛날 집이 보이더라... 그 집 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하나 있었다. 기억나지? 그게 살살 떠오르면서 감나무 뒤로 느그 아부지가 슬 나타났는디 젊어서 모습 그대로드라. 여기 좀 와봐라. 하길래 왜요? 하고 갓는디 그 길로 사람은 없어지고 감나무 앞에 수도꼭지만 보이는디 그걸 꽉 비틀었더니 꼭 펌푸질 할 때 맨치로 물이 콸콸콸 쏟아지는디... 그런 꿈이 좋은 꿈이거든.. 옛날부터 그런 꿈 꾸면 횡재한다고 했는디...(남편이 보인다) 아정이 아빠 아정이 아빠(어디로 끌려갈 듯 하다가 엎어진다)
아정: 엄마
엄마: 아이쿠! (흔미한 상태, 눈을 부빈다)
아정: (판콜에스 빈병을 보이며) 이딴 거 자꾸 먹으니 비몽사몽이지. 엄만 이거 중독이야
엄마: 느그 아버지가 손을 내밀고, 힘들지? 험서 나랑 같이 가자 하드라.
아정: (아연해 하면서도)그래서 뭐라고 했어?
엄마:... 안 간다 했지(딸, 피식 웃어버린다. ) 그게 먼조화겄냐? 영감쟁이가 진짜로 나를 데려갈라고? 아니믄 부자 만들어줄라고 그렸나? )(차츰 정신이 또렷해진다.) (뭔가 짚이는 듯) 암말도 하지 말고 엄마가 돈 줄텐게 가서 복권 좀 사와라. 왜 또또복권있지? 사는 김에 조별로 몽땅 한 장씩 사와라.
아정: 싫어.
엄마:...
아정: (불경스런 것을 피하든)난 일해야 돼.
엄마: 잠깐 이믄 돼것구만
아정: (컴퓨터쪽으로 가며)길 잃었던 수퍼에서 팔 걸? 운동삼아 직접 사오지 그래?
엄마: 뭐시 어째? 참말로 승질머리하고는 쯧쯧...(병속에 담겨있는 우유빛 마요네즈가 눈에 띈다) 이게 뭐시다냐? (손가락으로 찍어맛을 본다) 야아가 아침 내내 마요네즈를 만들었는갑네 (표정이 풀린다) 재주도 좋다 이런 재주도 있었냐? (손가락으로 찍어머리에 쓱 발라본다 딸방쪽을 힐끔한 뒤. 마요네즈병을 집어든다.)
아정: (갑자기) 엄마, 뭐해?
엄마: (뒷걸음질) 엄마야!
아정: 머리에 뭐 발랐어? (튀쳐나온다)
엄마: 아니
아정: (엄마 손에서 마요네즈 병을 빼앗는다) 안돼
엄마: 조금만
아정: (신경증적으로) 안 돼. 엄마. 이건 먹는거야
엄마: 조금만 쓰자
때르릉, 전화벨 소리
아정:네? (사교적으로 변한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얼추 돼 가는데요? 다음 주 초쯤 한번 들를, (표정이 어둡게 변한다) 네?(낮게 쥐어짜듯) 제가랄 (소파에 앉아 소리를 죽여) 네, 네...
황급히 코트를 덮어입고 숄더백을 어깨에 매고 종종 걸음으로 후다닥 뛰쳐나간다. 그사이, 조명 차차 흐려진다. “엄마 출판사에 갔다올게. 마요네즈 냉장고에 좀 넣어놔” 마요네즈 병을 안고 있는 엄마 보이는데. 조명 아웃
7. 마요네즈
부엌쪽에서 흰연기 구물구물 피어오르며 조금씩 밝아지는 무대, 무언가 타고 있다.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비닐캡을 쓰고 욕조안에 쓰러진 엄마가 무대뒤쪽 사막안에 흐릿하게 보인다. 엄마, 일어날 듯 미미하게 꿈틀거리나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연기, 서서히 무대 전체로 퍼져나간다 탁자 밑에 마요네즈 병이 뒹글고 있다
아정,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성마른 목소리로 “엄마, 엄마”그리고는 거실로 뛰어들어와 놀라며 “어 , 어! 불이야 곧 옷과 숄더백을 내던지고 재빨리 부엌으로 가 가스렌즈를 끄는 시늉 미쳤어. 미쳤어. 엄마를 찾는 아정 여기저기 둘러보다 욕실 쪽으로
아정: (엄마를 본다) 세상에, 여기서 뭐하는거야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엄마! 엄마!
엄마: (어슴프레 눈을 뜬다) 아, (흔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아정: 우욱...(구역질을 하며 욕실에서 뛰쳐나온다)(바닥에 뒹구는 마요네즈 병을 본다. 엄마 머리의 비닐캡과 마요네즈 병에 번갈아 시선을 주면서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어코 이걸 발랐어.
엄마: (차차 정신을 차린다)
서서히 밝아지는 거실, 동시에 욕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정: (마요네즈 병을 내리치며 욕시쪽을 향하여) 이거 바르고 누워 똥 싸면서 불난 것도 몰랐어? 대관절 저긴 뭘 올려놓은 거야?
엄마: (욕조안에서 나오려 몸부림친다)대, 대추하고 삼 좀 고을라고... 그 물이 임산부한테 좋다고 해서 콜록콜록, 그거 끓일 동안 샤워나 할라고 했는디 머리가 어찌 부석거리는지,
아정: (울먹이며) 내가 그건 먹는거라고 했지. 어떻게 엄마까지 이럴 수가 있어?
엄마: (탈진된 음성으로)내가 다 치워줄텐게 아무 걱정하지 마라, 못 치우믄 약 털어먹고 디져버리지 뭐.
아정: (비명을 지른다)아! (몸서리를 친다) 엄마하곤 정말, 더는 같이 못살겠어!
딸, 발을 쾅쾅 울리며 부엌으로 간다. 소주를 들고 나와, 단숨에 털어넣는다. 사이, 엄마는 수습을 한다.
아정: (다시 한 잔 탁 털어놓곤) 끝났어
엄마:...
아정: 맨날 이렇게 지지고 볶다 인생 종치는거야(얼굴에 눈물이 번져흐른다) 비란,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꼭 이래 다른 사람한텐 고작 실비나 가랑비 정돈데, 우리한텐 언제나 홍수야, 무슨 저주 같지 않아. 엄마?
엄마:
아정: 나, 이제 엄마 밍크코트 못사줘. 그 잘난 여왕이 내일을 다른 사람한테 쥐버렸대. 난, 아직 계약금도 못받았는데, 석달동안 죽도록 고생한게 도로아미타블 됐어... 내 글이 맘에 안든데.
엄마:...
아정: (울먹이며) 근데 어떡하지? 난, 난 그 돈을 꼭 받고 싶은데, 내 일을 해서 내돈을 꼭 벌고 싶은데. (울부짖는다) 도대체 난 하는 일마다 왜 이런거야
엄마: (욕실에서 나오며)애를 품은 년이 술은.. 너 직장 다시 나가라(더듬거리면)어, 엄머가, 인자부터는 저, 정신 채리고 살림 다 살아줄텐게 애도 다 키워줄텐게
아정: (코웃음)흥, 이 실직자 천국에? 이제와서 그런 소리하면 무슨 소용있어? 임산한 유부녀를 누가 다시 받아준대?
엄마: (한탄) 그래, 느그 아부지 말대로 약대를 갔어댠디
사이 아정 소주 한잔을 더 마신다.
아정: (소리친다)나도 아버지가 미웠어
엄마, 꿈찔 놀라 주저앉는다
사이, 이후, 딸은 술기운을 빌어 푹포수처럼 지껄인다
아정 :미웠다구... 아버지만 없으면 모두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구!
엄마: (푸드득)이것아 너는 그런 소리 하믄 못쓴다. 느그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디.. 집어치우지도 안했고, 약국 그것만 계속했어도 그렇게 일찍 죽지도 안했을거다. 약사 면허증 하나가 느그 아부지 평생소원이었는디?
아정: 그런 소리 이제 지긋지긋해 희망이나 소원이니... 그게 다 인생을 짜부러뜨렸다구
엄마: (가만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도대체 우리가 뭐슬 잘못했는디 다 느그들 때문에 한평생을 참고 살아 왔는디
아정: (중얼거린다) 바로 그 점이 나의 하프오브 다크니스야 너무 부담스러웠어.. 미안해 엄마 내가 엄마한테 원한 건 아주 단순한 거였는데.(약간 취했다)모든게 어그러지고, 망가져도, 엄마만은 온존해야 된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엄마니까. 엄마란 완벽해야한 하는 존재니까
엄마: 니가 언제 나를 온전히 여기기나 했냐?
아정: 아냐, 아냐, 엄마(도취되어 저도 모르게 긴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그건 오해야.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다구? 엄마가 예쁜게 얼마나 자랑스러웠다구 언제나 다른 엄마들관 달랐고 그게 날 물먹이는 순간에도 한편으론 우쭐거렸어. 난, 우리가 아주 특별한 모녀 같았거든, 한땐 내가 불행했던 이유는 엄마가 엄마답지 않아서가 아냐. 내가, 엄마만큼 예쁘지 않아서였어. 나 어렸을 때 ... 난 오로지 위대해지려고 인사불성이었잖아? 잔 다르크, 퀴리부인, 나이팅게일, 머릿속에 온통 그딴것들밖에 없었지. 하지만 있지? 결국엔... 다 때려치고 엄마처럼 예쁜여자가 되고 싶었어. 아무런 장점이 없어도, 그냥 예뻐서 모든게 용서되는, 그런 인형 같은 여자 말야.
엄마는 저도 모르게, 딸의 얘기에 희비가 교차되는 표정으로 몰입되다.
아정:그런 엄마를 망그러뜨리지 않으려고... 아버지, 사기, 가난, 중풍, 약물, 그런 것들이 차례로 엄마를 난타할때마다 난 발버둥쳤어. 돈이 엄마를 기쁘게 한다면, 옷이 엄마를 행복하게 한다면, 백번이라도 더 공부 같은 거 때려치고, 돈 벌어 엄마 새옷을 사주려고 했던 거야...
엄마:(울먹인다)
아정:근데 엄마, 난 이제 엄마를 잃어버렸어.
사이<
아정: 아버지를 그렇게 보낸 엄마를 보면서...
엄마:(충격을 받아)내가, 어쨌는데? 내가 뭐슬 그렇게 잘못했다고
아정:벌써 잊었어?
엄마:(음성이 부들부들 떨리며 격앙되기 시작하다)혈압에 당뇨에 나도 인사불성이었다. 내 일신도 간수를 못하는데. 그래, 치료비도 없지. 왜? 그때 느구 아부지한테 잘못했다고 지금 에미한테 보복을 하는 거냐? 글도 그렇지. 내가 안 한게 뭐가 있는디 밥 먹였지. 똥 치웠지. 제때 시간 맞춰 약 먹었지.
아정:하지만 사람 대접은 하지 않았지.
엄마:너는 뭐 잘했다고... 서울서 몇 번 내려와 보지도 않고 다 죽어가는 애미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전화질빽이 더 했었냐?
아정:월급 게워내며, 직장에 목을 맺잖아
엄마:그래 그 찌는 한증막에 혈압이고 혈당이고 푹푹 치솟아서 느그 아부지가 아니라 내 송장을 치게 생겼어도, 그래도 해 내야지, 해 내야지 죽을 힘을 짜내서 오줌 받고 똥 치우고... 너도 그런 세월로 십년을 보내봐라. 죽고 싶지 살고 싶은가. 그래 신경질 좀 부리는게 그게 뭐시 잘못됐다고
아정:(소리친다)난 마음을 말하는거야
엄마:마음도, 몸이 따라야 마음도 있는거야
아정:죽어가는 사람인데?
엄마:왜 팔팔할 때는 몸간수 모하고?
아정:아버지 병원 한 번 안간 거, 결국 엄마 위해서였잖아? 엄마한테 집 한 채라도 남겨주려구.
엄마:시끄러워(왈칵 울며)사람이 무슨 낙이 있어야 살지. 직업도 없지. 남들 다 있는 아들도 없지 느그들은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사방막힌 집구석에서 할 일이 라고는, 오직 옛날에 느그가 복사해다논 ‘대부’비디오 보는 것빽이 없는디(다시, 자신도 모르게 회상에 빠져든다) 말론 브란돈가, 연기 하나는 기차게 잘 하드라 사람 쏴 죽이는 게 일인 놈이 깜장 수트로 쫙 빼입고, 빨간 장미에 왈츠까지 추고, 하기사 느그 아부지는 사람 쏴 죽이는 영화라믄 본시 좋아했다.
아정: 아니든데? ‘황혼’도 좋아하고, 제니퍼 존스도 좋아하는데? (격렬하게)엄마 남편하고 내 아버진 같은 사람이 아닌가 보지?
엄마: (딸을 격하게 쏘아본다)
아정: 집이 쫄딱 망했을 때, 그래 그 사깃꾼들이 우리 돈 몽땅 말아먹었을 때, 아버지가 서울로 우릴 찾아왔어. 종로 사가 뒷골목에서 함흥냉면을 사줬어. 점심 때였는데. 빈속에 깡소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 ‘인제 집구석 다 망했다’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드는데... 울고 있었어(손짓)‘내가 진작에 머리 깎고 중이나 되는건데...’그러면서, 냉명 한 그릇 더 먹겠냐고 하는데, (울음이 복받친다)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어. 결국 아파 죽어갈때도.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버지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아, 머리깎고 중이나 되는 건데...’ 그때, 엄마가 나타났지. 방문을 왈칵 열고,
엄마:..
아정: 또 똥냄새가 난다고 발을 굴렀지
엄마:...
아정:그래 그러고 보니, 온방에 진짜 똥냄새가 진동을 했어.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팔월 대낮에 엄만, (혀가 마른 듯) 아버지를 굴려놓고 등짝을 마구 내리쳤어 그 옛날 아버지가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엄마, 인생은 정말 그렇게 똑같이 되갚아주는 거야? 요령도 안치고 또 똥샀다고... 아무리 미웠어도 아무리 쓸모없는 빚 껍데기라도 그래도 사람인데 근데 그게 다가 아냐. 그 순간 난, 울컥 토할 뻔했어. 처음엔 그냥 똥냄새 때문인줄 알았지. 그런데 내 속을 뒤집어놓은 냄새는 ... 마요네즈였어. 엄만 그 와중에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머리엔 마요네즈를 비벼발라 비닐캡을 쓰고 있었어. 꼭 지금처럼...
엄마:...
아정:(슬프게 애련하게 간절하게) 그때야, 내 머릿 속에서 뭔가 탁 끊어졌어. 아니, 심장에서, 가슴 속에 남아있던 아주 애련했던 뭣인가가, 있잖아 왜 어렸을 때 불렀던 엄마에 관한 슬픈 노래, 그러니까, 엄마를 향한 아주 애틋한 울먹임, 그리움, 아버지 주먹에서 엄마를 막아섰던 아픔, 분노, 미움, 아, 그 모든게 그러니까 내가 엄마한테 마지막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그 무언가가.
엄마: (소리없이 헉헉, 흐느낀다)...
아정: 엄마, 난 그때 심장을 잃어버렸어.
엄마: 아정아
아정:( 돌아서며)자꾸 아정아, 아정아 하지마 난 그 이름이 싫어.
엄마: 아정아...
아정: 내겐 이미 엄마가 없어.
엄마: 물
아정: 날 좀 내버려 둬.
엄마: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싸쥐고)물, 물 한 컵만 갖다줘
조명아웃
8. 외할머니
그날 밤 깊은 시간. 딸 컴퓨터 앞에서 여왕원고를 한 장, 한 장 찢고 있다. 엄마, 단정한 차림으로 가방으로 들고 방에서 나온다.
엄마:아정아
아정:...
엄마:엄마 하나 와 있는게 그렇게 힘드냐?
아정:(고개숙인 채)
엄마:나도 니가 버겁다. 평생 너한테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너라믄 기가 죽어서. 이자는 너한테 아무 기대도 없지만
어둑한 무대 뒤에서 옛사진이 떠오른다. 외할머니, 엄마, 어린딸, 어린 이모의 모습, 이후 엄마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사진은 ‘엄마의 이야기를 호위하듯’ 빛 바랜 후광처럼 떠올라 있다.
엄마: 니가 시집가서 애를 나으믄 외할무이 얘기를 해줄라고 했는디 니 그 사진 기억나지?
아정:(먼산보듯)...
사이
엄마:느그 외할무이는 가난한 양반집 규수였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백발이 성성한 환갑쟁이 노인한테 시집을 가겠냐... 아들 낳아주러 시집을 가서, 아무 소용없는 나같은 가시네나 낳고,
딸, 두려운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엄마:아들을 하나 낳기는 낳았다. 근디 이듬 핸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그 아들만이, 외할무이 대들보고, 신주단지였는디... 그 금쪽 같은 외아들이 두 돌을 못넘기고 지아부지 뒤를 따를 줄 누가 알았겄냐 참말로 하늘도 무심하지... 영감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안 울던 엄마가, 그 아들 잃고서는, 완전히(울음)실성을 했는디 창호지문 두짝 걸어닫고, 일주일 열흘 가도, 물 한 모금 음식 한 입 안 삼키고, 보다 못해 문을 따고 둘어가 보니, 온 머리에 드글드글 이가 끓고 서캐가 뽀얗게 내리앉아드랴...
아정:(회상으로)아영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송장처럼 드러누웠어. 딸, 딸에, 또 딸이라고 아버지는 술만 들이켰지.
엄마:엄마가 너무 곱고 젊어서, 색깔있는 옷만 입고 나가도 나를 죽이고 나가라고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어데로 영영 도망이라도 갈깝시. 언제던가 엄마는 진짜로 자취를 싹 감춰버렸다. 나는 하루종일 문밖에 웅크리고 앉아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생나무 울타리만 쓰다듬었다. 그때 집안에 들락거리던 총각이 하나 있었는데... 엄마가 그 총각하고 배가 맞아 도망을 쳤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져나갔다.
아정:엄마는 곱게 채려있고 날마다 나돌기 시작했어. 멋쟁이 친구들과 교양있는 신사를 만나, ‘품위있는 대화’만 나눈다고 했어. 아버진 돌아온 엄마를 타고 앉아 몸 여기저길, 마구 두들겨팼어.(비명) 안돼! 내 엄마야!
엄마: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다.
아정: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그러던 어느 날 해질녘.. 동구 밖 저멀리서... 엄마가 소복한 귀신처럼 사북사북 걸어오면서 나를 부르는데 ‘선영아’ ‘엄마’(추운 듯이 후들 후들 떨며) 엄마가 또 날 버리고 가버릴까 학교에도 못가고.. 꼭 불안해서 못견디겠더라.
아정:(회상으로)엄마는 약을 먹기 시작하고, 난 점점 약이 싫어졌어(약과 약국과 약대 일체에 대한 환멸)약이 미웠어! 약국도 싫고, 약대도 싫었어.
엄마:그러다가 시집을 안갔냐. 처음 봤을때는 느그 아부지가 얼매나 휜칠하고 매끈하던지. 꼭 험프리 보가트 갔앴다. 근디 함께 살아보니까
이후 ‘아버징에 관한’ 내용은, 엄마와 딸이 ‘공유’해 온 부분이다.
엄마 아정: 술도깨비였지
엄마:느그 외할무이는 아버지를 참말로 좋아했다. 철철이 약도 달이믹이고, 사우 좋아하는 음식도 해나리고... 그러다가 느그 아브지가 할머이한테 돈을 쪼개 빌리줐던가 했는데, 그 돈 후딱 안 갚는다고 술을 고주망태로 쳐먹고 와서, 나한테 말도 못하게 퍼붓는디... 왜 엄마는 김서방 돈을 안 갚고 나를 이렇게 만드는가... 글도...다 아정이 너 때문이었다.(흐느낀다)흐흐, 내가 아버지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내 새끼한테만은 절대로 그런 설움을 줘서는 안된다. 그래서 느그 아부지하고 갈라서지도 못하고 하나밖에 없는 우리 어마이 가슴에 그런 대못을 박았으니... 외할머니는 그 길로 시집을 가버렸다. 서울 어딘가 재취자리라 했는디... (딸을 본다) 아정아 너 그 사진 기억나지?
다시 외할머니의 옛사진이 후광처럼 떠오른다
엄마:우리 덕수궁 갔을 때, 외할무이 하고 찍은 사진 말이다.
아정:(끄덕끄덕)...
엄마:그때가 할무이하고 마지막이었다. 어찌나 챙피스럽던지 내 ‘엄마’라고 여기고 싶지도 않더라... 지금 생각하믄 내가 나서서 시집을 보내드렸어도 부족했을텐디... 왜 그 계집애 있지? 너랑 나란히 사진 찍은 애? 유미든가... 그 애가 너한티는 이모다
아정:(의자에서 자빠질 듯)이모?
엄마:그애가 지금 어떻게 됐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 애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흐느낌)
사이
엄마:(딸을 향해)아정아 엄마 땜시 속 많이 상했지?
아정:....
엄마,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두 개의 가방끈을 만지작거린다.
엄마:좋다는 공부 끝가지 시켜주길 했나. 시집갈 때 해 준게 있나. 백날 천날 사네 못사네.
아정:(엄마에게 다가서며)...
엄마:(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내가 너를 떠나야 된다.
아정:(다급하게)왜 이래, 엄마! 오밤중에 어디로 간단 말야
엄마:(눈물을 후두둑 뿌리며)잘 있어라
엄마, 몸을 빼 현관쪽으로 달려나갈 듯, 딸, 가방 하나를 빼앗는다. 그때, 때르릉, 때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아정:여보세요? 네 그런데요?(얼떨떨해 한다. 엄마에게) 엄마, 전화(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어떤 아저씨야 채여사 바꾸라는데?
엄마:(놀라 고개를 들고)채여사?
아정:(손가락으로 엄마를 가리킨다)채선영(낮은 목소리로 재빠르게) 채여사 맞잖아?
엄마:(주먹으로 어깨를 때리며)누구다냐?
수화기를 건네준 딸은, 엄마의 가방을 방안으로 옮겨놓는다
엄마:(소파에 앉아)여보세요. 예. 예... 예? 아 , (하이톤으로) 예 안녕하십니까? 시상에 어찐 일로 예? 여기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 노박이한테요? 예에. 우리 큰딸집 곧 애기 엄마될 겁니다. (딸, 입술을 씰룩거리는 반응)여자가 그게 제일로 편하고 좋지요. 사위는 월급쟁이하고 있지요. 즈그끼리 도란도란 잘 삽니다. 아 아닙니다. 가야지요 몸이 쪼깨 안 좋아서 밥 좀 얻어묵을라고 와 았는디(껄껄껄)(딸도 소파에 앉는다)아이고, 오래 살아 뭐합니까? 부모도요 돈 있고 빽이나 쓸 때 부모 대접 받지요? 예 예 아이구 글도 나는 사는 동안 밝게, 둥글게, 남한테 폐 안끼치고 살다 갈라고 마음 독하게 먹었습니다. 예? 보살 됐다고요 으 크하하... 뭐... 애살이? 갸하고도 연락이 됐습니까? 아이고 시상에... 예 그럽시다. 까짓거. 25일 잠깐만 (흥분돼 급히 딸에게 재촉한다)적어라. 받아적어라. (딸, 의뭉스럽다는 듯 엄마를 향해 눈을 한 번 흘기고 메모를 한다.) 예, 25일, 일곱시, 노박이가 이리로 나를 데릴러 온다고요?
아이고, 잘됐다. 그게 그래야 됩니다. 나는 안즉 서울길도 모른게요 알았습니 다. 글믄 그때 봅시다.
엄마, 귀뿌리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수화기를 살픈 놓는다
아정:누구야?
엄마:(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다)아, 이 사람?
아정:애살이는 또 누구야?
엄마:향숙이 아줌마, 하도 애살이 많아서 애살이지
아정:그런데?
엄마:이 아저씨가 옛날에 향숙이 아줌마 좋아했던 그 아저씨다. 둘이 좋아져서 이 혼을 한다 만다 생난리... 이 아저씨가 우리 밥도 잘 사주고 노래도... 근디 내 가 보고 싶단다.
아정:그래서?
엄마:그래서는 뭐?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거지 뭐(갑자기 얼굴이 흐려진다)가만 있어봐라. 25일이 무슨 요일이지?
아정:다음 주 토요일, 맞아 그 날이 원래 마지막 원고 남기기로 했던 날이야.
엄마:(민망해 한다)그랬었나? 글믄 어쩌지? (불안정하게 두리번 거린다.) 그때까지 여기 있어야 되나
아정:(아이의 태동을 느낀다)
엄마:왜 애가 발로 차냐(딸쪽으로 가려고 한다.)
아정:(기지개를 켜며)아 아냐 몸이 왜 이렇게 찌부등 하지? 엄마 나 샤워 좀 해야겠어... (욕실 쪽으로 걸어간다)
엄마: 아정아 우리 아라는 언제 온다디?
아정:(화장실 앞에서)몰라. (안으로 들어가며) 이달말쯤
엄마:(중얼거린다)글믄 아라나 보고 가까 망할 년 끝끝내 전화 한통을 안하네 아이고 아라야, 아이고 아영아... (화장실쪽을 보며 서글프게) 오야. 느그들도 자식 낳아 키와보라.. 글믄 에미 마음을 알꺼다. 옛말 그른거 하나없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디(정면을 보며)모르겠다. 머리가 터질라고 근다 일단 잠이나 자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허는게 좋것다.
엄마 스르르 소파에 눕는다. 엄마의 테마곡 ‘아다지오’가 흐른다. 암전
9. 끝장면
아정, 컴퓨터 책상에 앉아 스탠드의 불을 밝힌다. 창의 바깥 면을 때리는 빗줄기를 안에서 닦아보려는 심정.
아정의 모노로그:나는 긴 악몽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의 악몽을 영혼의 악몽과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는 다시 맑아졌고 웃음을 되찾았으며,
모든 건 무사하고 안전해진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중얼거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음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고,
그 점을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때때로 나는 후회하기 위하여 이렇게 앉아 있는 것 같다.
다시 나지막하게 울리는 엄마의 테마 ‘아다지오’, 어두워지는 무대 아스라이 떠오르는 가족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