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의 이별
박 지 연
공항은 여행자에게 하늘 길을 열어 헤어졌던 사람들이 기쁘게 만나는 곳이지만 이곳은 언제나 정든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아쉬움으로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2009년 9월10일에 미국 오하이오 주의 수도 콜럼버스에 도착했다. 2008년 8월까지 일본 오키나와에서 거주했던 사위가 3년의 임기를 마치고 바로 오하이오 주에 정착해 새 둥지를 마련하고 엄마를 손꼽아 기다렸기 때문이다.
한 달의 예정으로 출국했으나 사위와 막내의 집요한 만류에 일정을 변경하고 6개월이란 긴 시간을 같이 했다. 오늘은 한국에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게이트 앞에서 같이 기다리다 티케팅 시간이 다가왔다. 정든 사위와 막내, 귀여운 손녀와 헤어지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정말 헤어지기 싫어 부둥겨 안고 얼마를 울었다.
우리 수민이는 1995년 여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많은 고생 끝에 병원의 한 자리를 잡기까지 그가 감당해야 할 어려운 고비를 잘 헤쳐 나온 막내딸이다. 2003년 가을 버지니아에서 그의 결혼식을 마치고 아빠와 같이 놀퍽 공항에서 헤어지던 그 때 일이 떠올라 더욱 슬펐다. 그 때 아빠의 병환을 인지하고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사위는 영국이나 독일의 임지를 마다하고 오키나와에 오기 위해 2004년부터 뉴멕시코, 아칸소 플로리다주 등지에서 특수 비행훈련을 치열하게 마치고 2005년 10월 오키나와 가데나 캠프에 기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기다려 주지 않고 그들이 오기 전 한달 앞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막내의 효심을 뒤로 한 채 아빠 가까이 하고 싶던 막내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언제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의 ‘나이야가라’ 투어에 나서 8시간의 운전 끝에 버팔로의 힐튼호텔에 밤 1시에 도착했다. 아침에 캐나다를 향해 출발해 나이야가라의 웅대한 위용에 감동과 감탄을 연발하며 온 김에 토론도와 런던시에서 한 밤을 더 지냈다. 19세기 말을 타고 다니던 좁은 길에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번화가 거리를 활보했다.
미국에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공부하던 토레도 주립대학에 들려 기숙사 도서관 스터디 하던 과학관도 구경시켜 주었다. 그곳에서 마티와 수민이는 같이 공부하는 인연이 되어 기계공학도이던 사위는 다시 항공대학에 가서 파이럿이 되었고 그 사이 막내는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가 많이 의지하던 한국 가게도 들렀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우리 막내가 생면부지의 이곳에서 공부하고 그 어려움을 이긴 곳이라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바로 조금 떨어진 의과대학에도 들렀다. 이곳에서 숫한 날, 멈추고 싶었던 갖가지 고난을 잘도 참아준 막내가 끝없이 대견하고 고마워 드디어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이 건물을 향해 고맙다고 소리없이 외쳤다. 우리아이를 나대신 허허벌판, 이곳에서 싸안아 돌보아 준 게 너무 고맙다고 엎디어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미국에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
10월 말이 가까워 오면 할로윈데이도 준비한다. 너른 호박밭에 나가 오랜지빛 진한 커다란 호박이 가득 누워 있는 밭에서 가족 수대로 4개를 골랐다. 이 풍속은 기원전 500년경부터 고대 켈트(Celt)족의 풍습인 삼하인(Samhain)축제에서 비롯해 아이랜드 프랑스 북부 유럽지역에서 성행하던 축제가 미국에 이민 오면서 전해졌다. 현관이나 잔디밭에 무섭게 새긴 호박 등에 불을 켜 놓고 아이들은 오후에 새 드레스를 입고 집집마다 방문하면 쪼코렛과 과자를 바구니에 채워준다. 나도 처음 보는 풍습이라 같이 따라 다녔다.
추수감사절에는 미국 전통으로 내려온 칠면조 요리와 내가 알지 못한 많은 요리를 막내는 하루 종일 만들고 나도 쿠키를 만드는데 도왔다. 시댁 부모형제가 다 같이 모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외인을 부딪치며 즐거운 날을 보낸 일이 덧없이 행복했다.
앞산에 눈이 하얗게 내려 그림 같은 이 풍경을 엄마에게 보이고 싶어 막내는 크리스마스도 같이 하게 했다. 지붕과 잔디밭, 현관과 벽난로 옆에 크리스마스 추리의 꽃 등과 벽난로 위의 사슴이 하얀 마차를 끌고 달리는 장난감에도 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연말이 가까워져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러 퍼지는 너무 아름다운 집들이 모여 있는 피크린톤 마을을 나와 얼마를 달려 백화점에서 선물을 고르던 재미와 오가며 맛있는 미국의 이모조모 하루걸러 맛보던 컬럼버스의 레스트랑도 그립다.
크리스마스에는 맛 있는 오찬을 마치고 시댁 어른들과 다 같이 볼링게임으로 승부를 나누며 천진한 웃음꽃을 피우던 일도 엊그제 같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소니의 디지털 카메라를 받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한 이층 막내네 집을 샅샅이 찍던 일도 추억이 되었다. 주일이면 다 같이 미국교회에서 경건히 예배를 드리며 미국인의 신앙생활도 엿 보던 일도 새롭다. 막내는 일을 마치고 서둘러 귀가하면 엄마를 위해 꼼꼼히 마음 써 주던 일, 다운타운에 가족들이 나가 피아노를 고르던 일도 재미있었다. 결국 만 불을 주고 야마하 피아노를 드려오던 날부터 마티부터 차례차례 피아노 렛슨을 해 주던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다 출근하고 나면 나는 오전 내내 혼자 연습을 하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시간도 너무 소중했다. 어린 컬리와 게임을 하면 으레 내가 지기 마련이만 윷놀이는 내가 이기던 일도 너무 즐거웠다.
1시간을 달려 한국 식품점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한국음식을 만들면 그렇게 좋아하던 가족, 뭐든 만들어 바빠 외식만 하는 그들을 보살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다 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축구장, 수영장 기계체조 스키장 등 유치원반 귀여운 컬리의 클럽에 동행하던 재미도 놓칠 수 없다.
미국시민이면서도 유럽 중세의 종교 풍속을 그대로 지키고 문명과 발달된 혜택을 거부하고 마차를 몰고 다니며 손수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아미쉬 사람들을 보기 위해 멀리 펜실바니아 랭커스터까지 드라이브를 해 그들이 지은 채소와 고기로 만든 ‘독일 아미쉬 레스트랑’의 풍미를 잊을 수 없다. 푸른 잔디밭에 아름답게 놓인 그들의 알록달록한 집들도 눈에 선하다. 이 모든 프로그램은 글을 쓰는 엄마에게 많은 경험을 갖게 했던 막내의 사랑의 선물에 나는 늘 감동했다.
이제 사랑하는 막내네를 떠나야 한다. 나는 더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정든 사위 마티와 막내, 컬리를 떠나기 정말 싫었다. 왜 우리는 헤어져 살아야 하는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마치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에 나는 눈물만 흘리며 늘 같이 살고 싶은 막내를 이 넓은 땅에 두고 떠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컬럼버스 공항에서 올 때 그들의 마중을 맞으며 그처럼 행복했었는데 이제 공항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국내선 유나이티드를 타야 시카고에 도착한다. 시간이 촉박해 붙든 손을 놓고 울며불며 뒤돌아보면서 타랍에 올라야만 하는 공항의 이별이 너무 서러웠다. 2010년 1월 22일
첫댓글 미국에 간지도 작년 재작년 2년이 되었다. 너무 그리운 막내네였다. 다시 가고 싶지만 여기서 할 일이 많아 언제나 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