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 중기의 승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휘하에서 왜군과 싸웠다.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유정사명대사 상경남 밀양시.
출생-사망 | 1544 ~ 1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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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풍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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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이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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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사명당 ·송운 ·종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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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자통홍제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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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임응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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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종교, 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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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경남 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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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 |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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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泗溟堂 또는 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형조판서에 추증된 임수성(任守城)의 아들로서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休靜;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