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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전면개방까지 83년
(청와대지역 변천사/ 역대 대통령 청와대 개방 역사)
벚꽃필때 靑서 태어났다…이승만이 '김경숙' 이름 준 아기 정체
Ⅰ. 청와대 지역 변천사
● 고려시대 ☞ 남경(南京)의 신궁터였다
▷ 고려는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의 영향으로 수도인 개경 바깥에 삼경(三京)과 삼소(三蘇)를 두었다. ▷ 1067년, 문종은 양주(지금의 서울 일대)의 지명을 남경(南京)으로 바꾸고, 이듬해 지금의 청와대 자리(추정)에 신궁(新宮)을 지어 여러 왕들이 왕궁으로 이용했다.
☞ 문종(1046~1083) : 고려 11대 왕. 8대 현종의 셋째 아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 1128년, 인종때 왕궁에 불이 난 뒤 온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 인종(122-1146) : 고려 17대 왕. 16대 예종의 맏아들.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
▷ 1232년, 몽골군이 침입하자 고종은 강화로 천도했다.
☞ 고종(1213-1259) : 고려 23대 왕. 22대 강종의 맏아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고 28년간 항쟁!
▷공민왕, 우왕, 공양왕 등은 은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 남경 천도를 꿈꿨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고려는 이미 기울어 가고 있었다.
☞ 공민왕(1351-1374) : 고려 31대 왕.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과 반원정책을 단행하였으나, 권문세족 반발 등으로 결국 시해당했다.
☞ 우왕(1374-1388) : 고려 32대 왕. 공민왕이 시해된 후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었다.
☞ 창왕(1388-1389) : 고려 33대 왕. 32대 우왕의 아들로 9세에 즉위했으나 이성계에 의해 폐위되었다.
☞ 공양왕(1389-1392) : 고려 34대 왕. 20대 신종의 7대손. 고려의 마지막 왕이다.
● 조선시대 ☞ 경복궁 후원이었다 (임진왜란때 전소 → 방치 → 고종때 중건)
겸재 정선의 1754년도(영조30년) 작품 '경복궁'.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5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복구를 못한 경복궁 모습이다.
▷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고종 때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중건하기까지 270여 년간 폐허로 있었고, 그 시기의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 경복궁은 1868년 중건 뒤 (아관파천을 했던) 1896년까지 29년간 제1궁 역할을 했다. 다시 전각들이 들어차며 궁 안이 비좁아지자 청와대 지역에 후원을 만들며 부속 건물들을 지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들 건물 상당수가 사라졌다.
▷ 지금의 상춘재와 녹지원 일대에 (과거 시험장인) 융문당과 (군대 사열 또는 훈련을 참관하는 곳인) 융무당을 만들고 일대를 경무대(景武臺. 융문당 후문이 경무문이다)라고 이름을 붙였다.
▷ 1905년, 옥련정 가까운 곳에 연회장용으로 침류각을 지었다.
▷ 이들을 포함해 오운각, 옥련정 등 모두 488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 융문당과 융무당 모습.
⇒ 1928년, 융문당과 융무당은 해체되어 (일본 불교 종파인) 진언종 사찰인 (한강대교 근처에 있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 납골당이었던) 용광사로 이전했다.
⇒ 1946년, 원불교가 이를 인수해 서울교당으로 썼다.
⇒ 2006년, 두 채 모두 전남 영광 원불교 영산성지로 옮겼다.
● 일제강점기 ☞ 경무대라는 총독관사가 지어졌고, 광화문1번지가 되었다.
▷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은 경운궁으로 처소를 옮겼고,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허물어 경운궁 증축 자재로 썼다.
▷ 일제는 (조선과 일본의 문물을 전시해 선진 일본을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경복궁 자리에서 조선물산공진회 열었다. 행사용 가건물 지을 터를 닦느라 궁내 전각들이 다시 헐려 나갔고, 청와대 일대의 전각들도 마찬가지였다.
▷ 1926년, 경복궁 안에 새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 이 건물은 광복 뒤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다가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했다.
▷ 1939년, 공원으로 남아있던 경복궁 북쪽에 조선 총독관사를 짓고, 관사 이름은 고종 때부터 일대를 부르던 경무대를 가져다 붙였다.
● 미군정 시기 ☞ 미군정 책임관 거처였다
▷ 1945년, 광복뒤 경무대는 미군정 책임관 하지 중장의 거처가 됐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경무대 → 청와대)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가 됐다.
▷1960년, 4·19혁명 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 이름을 청와대로 바꿨다.
▷ 영어 명칭은 ‘Blue House’였으나 현재는 ‘Cheong Wa Dae’다.
▷ 청와대 주소는 광복 뒤 세종로 1번지가 됐다.
Ⅱ. 역대 대통령의 청와대 개방 역사
● 1대~3대 이승만 ☞ 경무대 시절~ 1957년부터 날짜를 정해서 개방. 수학여행 코스가 되다
▷ 한국전쟁 뒤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후인 1957년부터 날짜를 정해 경무대 바로 앞까지 공개했다.
▷ 지방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경무대를 구경하기도 했다.
※ 일화 : "공개 첫해인 1957년, 만삭의 임산부가 벚꽃 구경을 하다가 안뜰에서 아기를 낳았고, 소식을 들은 이 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의 첫 글자를 따서 김경숙(金景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 4대 윤보선 ☞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개명하고 상춘객을 맞이하다
▷ 1960년 4·19혁명으로 윤보선 대통령이 그 해 8월에 취임했다. 그리고, 12월 30일에 경무대를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 1961년 4월 15일, 청와대 문을 열고 상춘객들을 만났다.
※ 경향신문 기사 내용 : "지난날 줄지어 질서정연(?)히 경무대를 구경하던 긴장된 시민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환해진 얼굴로 마음껏 대통령 관저일대를 구경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날 하루에도 청와대를 찾는 시민은 무려 四만 여명이나 된다고…"
▷ 1961년 5월 16일,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 경복궁 주둔 부대, 30경비단 이야기
※ 박정희 시대에는 측근 증의 측근이 지휘했고, 12.12 쿠데타때는 비밀모의 장소였던 경복궁 30경비단 본부건물. 지금은 태원전이 다시 복원되었다.
▷ 1961년 5.16쿠데타 때 30사단과 33사단 병력 일부가 서울로 진입했다.
▷ 그 뒤 이 부대들은 복귀하지 않고 청와대 주변에 눌러앉았고, 30대대와 33대대라고 불리다가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 됐다.
▷ 대통령 최근접 경호부대였던 30경비단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태원전 자리인) 경복궁 북쪽 건물에 주둔했다. 30단 병사들은 새벽마다 웃통을 벗고 경복궁 안을 구보하며 군가를 불렀다고 한다.
⇒ 태원전은 1915년에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기 위해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경호하는 일본군 부대가 주둔했다.
▷ 차지철 경호실장은 병력을 연대 규모로 늘리고 전차와 장갑차로 중무장시켜 청와대 3중 경계망을 운영했는데,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시위 진압이었다.
⇒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나 ‘효자동 이발사’에 등장하는 탱크부대가 30경비단 소속이다.
▷ (손영길·전두환·이종구·장세동·안현태·이현우 등) 역대 30경비단장들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 1979년 12·12 쿠데타 때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에게 보고도 없이) 30단장 장세동, 33단장 김진영 등 신군부 핵심들이 장세동 방에 모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체포를 모의했다.
▷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두 부대를 제1경비단으로 통합했다.
※ 제1경비단 :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으로 서울 서대문구를 근거지로 삼아 청와대 외곽 및 북악산과 인왕산 일부 경비를 담당하는 단급 경비부대다. 1996년 창설되었으며, 단장은 대령급이다. 서울 도심 속 주둔지와 산 속 근무지를 6개월 단위로 교대 근무한다. 편제는 본부대/ 통신대/ 전투지원중대/ 수송대/ 방공대/ 1경비대대 청룡/ 2경비대대 백호/ 화학단(제독차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위키)
▷ 2006년, 30경비단 주둔지에는 다시 태원전이 들어섰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복원된 태원전 모습 :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일제에 의거 철거되었다가 2006년에 복원되었다.
● 5~9대 박정희 ☞ 1969년 1·21사태와 1974년 육여사 암살사건으로 백악·인왕산 통제하다
▷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반에는 제한적으로 개방했다. 어린이날에는 아이들을 만나 공책과 연필을 나눠주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 1966년 4월 1일~ 27일까지 개방했다. 첫날 1만여 명이 방문했다.
▷ 1967년 4월 22일에는 4만3000여명이 방문했는데, 대부분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1·21사태가 벌어졌고, 이때부터 청와대는 외부에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총에 피살된 뒤 통제는 더 심해져 청와대 주변 도로를 전면 차단하고 인왕산과 백악산 등산로도 막았다.
▷ 1974년 12월 11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네 귀퉁이에 벙커가 설치된 광화문이 세워졌다.
● 10대 최규하 ☞ 혼란의 9개월.. 개방은 꿈도 못꿀 일
▷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12쿠데타 뒤부터 1980년 8월까지 청와대에 머물렀으나, 극도로 혼란한 정국이었으니 청와대를 개방할 여유도 없었다.
● 11~12대 전두환 ☞ 초기 일부 개방하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로 통제 강화
▷ 취임식 날 골라 뽑은 시민들을 청와대로 초청했고, 취임한 해인 1980년 말에는 효자동과 팔판동 일대 통행을 일부 허용했다.
▷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가 일어난 뒤 일대는 다시 전면통제로 돌아갔다.
▷ 그 뒤로는 특별한 날에나 청와대 문을 열었다.
▷ 1984년에 경내 첫 전통 한옥인 상춘재를 짓고도 준공식을 하지 않았다.
● 13대 노태우 ☞ 청와대 개방 공약 1호.. 그러나 용두사미
▷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청와대 개방을 내세웠고, 취임 직후인 1988년 3월 1일 충북 음성에서 온 나환자 300여 명 등 959명을 영빈관으로 초청했다.
▷ 1989년에는 2월 24일부터 5일간 전국에서 온 5000여 명이 경내를 관람했다.
▷ 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을 건립했고, 준공식에는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도 참석했다. 준공 다음 날 첫 공식행사에는 회사원, 택시기사, 주부 등 ‘보통사람’을 초청했는데, 상징적인 행사로 그치고 개방은 점차 흐지부지됐다.
● 14대 김영삼 ☞ 1993년 인왕산 등산로 열고, 청와대 앞길 화끈하게 개방!
▷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날인 1993년 2월 25일 정오에 청와대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낮에는 승용차와 관광버스의 상시 통행을 허용했다.
⇒ 효자로는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팔판로는 24시간 내내 화물차를 빼고 모든 차의 통행이 허용되었다.
⇒ 민간인에게 청와대 앞길 개방은 1·21사태 뒤 처음이라 개방 초에는 구경꾼이 몰려 주말마다 일대에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 인왕산 등산로를 일반인에게 열었고 주변 환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 당시 중앙일보 기사(1993년 2월 28일 19면)
「해금」 청와대일대 땅값 “들먹”/옥인·효자동 등 “도심 최고주거지역” 눈독/「고도제한 완화」 소문도 가세..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과거 25년 동안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25일부터 개방됨에 따라 옥인동·누상동·효자동·팔판동 등 서울중심지 10여개 동 일대의 부동산경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 15대 김대중 ☞ 개방구역 늘리고 개인과 외국인 관람도 허용
▷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개방구역과 대상이 더 늘어나 단체만 가능하던 관람을 취임 첫해인 1998년에 개인과 외국인에게까지 허용하여 첫 해에만 관람객이 20만 명을 넘었다.
▷ 2001년 11월에는 칠궁도 열었다.
● 16대 노무현 ☞ 본관,경회루, 신무문.. 2007년 백악산 성곽로 개방!
▷ 노무현 대통령 때는 본관을 경유해 녹지원까지 둘러볼 수 있게 됐다.
▷ 2004년 10월, (2층에서 청와대가 보인다는 이유로 일반인 출입금지였던) 경회루를 개방했다.
▷ 2006년 9월, (1·21사태 38년만에)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열었다.
▷ 2007년 4월, 숙정문이 있는 백악산 성곽로를 개방했다. 청와대 주변 등산로 개방은 처음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혼자 보기가 좀 미안한 것 같더라"고 소회를 밝혔다.
● 17대 이명박 ☞ 청와대 관람 월1회 → 주1회로 확대/ 청와대 분수대 경유 버스 운행은 실패
▷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분수대 앞에 관광홍보관인 청와대 사랑채를 열고, (청와대 앞길을 다니는 최초의 버스인) 8000번 버스도 다니게 했다.
⇒ 8000번 버스 노선 : 분수대 앞~국립민속박물관~경복궁~안국동~조계사~종각역~을지로 입구~롯데백화점~북창동~숭례문~서울역 순환코스
⇒ 8000번 버스는 4년 8개월 만에 없어졌는데 이유는 20억 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 때문이었다. 노선을 두 차례 바꿨지만 승객수가 늘지 않았다. (당시 시내버스 한 대당 평균 승객은 하루 700여명인데 이 버스는 100명이 안 됐다.)
▷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만 허용하던 청와대 관람을 매주 토요일로 확대했다.
● 18대 박근혜 ☞ 추가 개방 없이 그대로..
▷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대중과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그간 진행해온 개방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 박근혜 대통령의 은둔 생활은 탄핵 뒤 치러진 대선에서 <집무실 이전 공약>이 다시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19대 문재인 ☞ 청와대 앞길 24시간 통행.. 2022년 백악산 등산로 완전 개방!
▷ 2017년 취임 다음 달인 6월 26일부터 청와대 앞길을 완전 개방하고 검문 없이 밤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 2020년 11월 1일에는 북악산 북측 등산로를, 퇴임 직전에는 남측 면까지 열었다. 이로써 백악산은 54년 만에 막힘없이 다니게 됐다.
● 20대 윤석열 ☞ 청와대 개방 및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 첫 실천.. 다음은?
▷ 취임하는 첫날인 2022년 5월 10일이 되는 밤 12시부터 청와대 완전 개방을 선언하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했다.
※ 역대 대통령 관련 자료는 나무위키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