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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는 금년(7월 1일) 시 승격 30주년을 맞는다. 인구 60만의 도시, 안양의 변천사와 함께 민관의 가교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원조 두 통장을 찾아 보았다. 두 통장은 안양시 승격과 더불어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통장으로 외길 인생을 걸어온 안양 역사의 산 증인들이다.
비산3동 박영현 3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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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산3동 박영현 3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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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안양 | "원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 한 평생 건달 생활을 한 게지 뭐."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박영현(73) 통장은 대수롭지 않은 사람을 찾아 왔다며 겸손해 한다.
"무슨 말씀을요. 한 평생 주민들을 위해 봉사해 온 걸요. 말이 30년이지, 그게 어디 작은 세월인가요."
곁에 있던 한 주민은 박 통장이야말로 상을 받아야 할 분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박 통장은 비산3동에서 출생하고 자란 토박이, 가업을 이어 농사일을 할 때 그의 성실함을 지켜본 동네 어른들의 추천으로 얼결에 이장 일을 보다가 시 승격과 함께 통장이 되었다.
"세월이 참 빨라. 퇴비를 독려하며 들판을 돌아다닐 땐 힘이 들어도 보람되고 재미가 있었어. 지금은 인구가 늘면서 옆집도 잘 모르니 그 만큼 재미가 없어."
박 통장은 예전에는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어느 집에 개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지 손바닥 보듯 훤했다며 옛날을 회상한다.
돌이나 회갑이면 동네 잔치로 이어지고, 초상이 나면 제일 먼저 통장 집으로 연락이 왔다. 그럴 땐 부고장을 시작으로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궂은 일을 도맡았다.
그러나 요즘처럼 잔치는 뷔페, 초상은 장례식장으로 가는 현실은 편리함에 앞서 삭막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 때는 지금처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고 여기 30호 저 산너머에 60호, 듬성듬성 있었고, 관할 구역도 제법 넓었다.
'꼬끼오~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에 자전거를 타고 논에 물꼬 터진 곳은 없나 둘러보고, 주민들이 들일 나가기 전 가가호호 방문하는 것이 통장의 일과였다.
동네에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팔 걷고 먼저 달려갔다. 개인의 일이라도 내 것 네 것이 없는 동네 일이었기 때문이다.
"허기진 배조차 채우기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 아마 이맘 때였을게야. 103번 종점 일대가 걸인촌이었어. 동네마다 리사무소가 있었지. 아침에 리사무소에 나가면 굶주려 쓰러진 사람들이 허다했어. 빵 사다 주고 물 떠다 먹이면 기운 차리고 일어났지. 그래도 인심이 넉넉해서 들길을 지나면 새참을 함께 하자고 여기저기서 부르는 거야.
이장에 대한 사례는 봄가을로 대동회 때 주민들이 추렴해서 주는 쌀보리 등의 곡물이 전부였어. 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한 가족처럼 어울려 술을 마신 외상술값 결산하고 나면 사례는 금방 바닥이 나지. 나는 술 담배를 안 하니까 그렇지. 이장 3년이면 땅 파는 사람이 허다했어."
박 통장은 동네에서 부동산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옛날에는 여기가 동네 사랑방이었어."
동네 사람들이 애환을 털어놓으면 박 통장은 상담을 통해 실마리를 풀어 주곤 했다.
문맹이 많았던 시절, 출생신고나 사망 신고는 물론이고 아이들 이름까지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해온다. "소중한 자녀의 이름을 어떻게 함부로 짓느냐"고 사양하면 "알아서 적당히 지어 줘요" 떠맡기다시피 하는 통에 지어 준 이름만도 수두룩하다. 그 시절, 비산리에서 박 통장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세상사라지만, 지금은 고지서 한 장 전달하려해도 더러는 문을 쉽게 열지 않는 이웃이 있어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한다는 박 통장은 부인 유숙자(69)씨와 사이에 2남 2녀를 두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알콩달콩 살고 있다.
석수 2동 김창회 2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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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수2동 김창회 2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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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안양 | 김창회 통장은 고향인 충북 영동을 뒤로 하고 좀더 나은 생활을 찾아 1962년 둥지를 튼 곳이 신안양리(지금의 석수동), 낯설고 물설은 안양에서 농사일을 시작으로 정착했다.
서울의 맥주회사에서 노동을 하기도 하고 리 서기, 동네 수리조합(논에 물대는 일)과 대서소. 신문지국 운영까지 여러 일을 했다. 낯선 동네지만 대학 중퇴란 학력을 인정한 노인들이 이장을 맡아달라고 권유, 시 승격과 함께 통장으로 위임되었다.
통장의 일이란 약방의 감초와도 흡사했다. 주민들의 애환을 듣고 해결해 주는 것도 김 통장의 몫이었다. 먹고살기조차 어려웠던 시절, 병원비가 없어 사경을 헤매는 주민들 돕기에 발벗고 나섰고, 장례식을 치를 때마다 공동묘지 따라 다니길 밥먹듯 했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부동산 사무소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사랑방이자, 출생신고며 사망 신고 등 각종 민원을 대행해 주는 동네의 작은 민원실이었다.
때로는 어려운 이웃이 찾아와서 속내를 털어놓으면 주인집에 사정하여 중개 수수료 없이 셋방을 저렴하게 구해 주었다. 일자리를 호소 해 오면 일자리를 찾아 주려 동분서주했고, 군대 가는 자녀 문제까지 자문을 해 주었다.
작명가 아닌 작명가가 되어 지어준 아이들의 이름도 수두룩하다. 대다수 주민들이 문맹이었기에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처리 하다보면 출생신고가 밀리기 일쑤였다.
"옛날에는 전출 신고하면서 주민들이 찾아와서 인사하고, 더러는 이사한 후에도 고맙다고 찾아왔었지. 그러나 지금은 전출 가는 것조차 모르고, 인사 오는 사람도 없어."
편리해진 만큼 삭막해진 것 같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김 통장은 최근 주민들의 여론을 결집해 주차장 두 곳 설치를 시에 요청하여 성사시킨 일이 보람이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부동산 사무소 벽에는 옛날 안양시장을 비롯하여 내무부장관 경기도 지사 등등 표창장이 즐비해 그의 이력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동네 지킴이가 되어 걸어온 외길 인생, 많은 일화 속에서도 안양시청의 소리 북을 수상식 때 첫 번째로 타고 하던 감회는 아직까지 새롭기만 하다며 옛일을 회상한다.
김 통장은 술을 좋아하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길 즐겼다. 주변에서 권유하면 한 잔 두 잔 거부하지 않고 마셔온 결과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굵은 주름살에 언행이 다소 어눌해 보이지만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김 통장은 부인 남창례(64)씨와 사이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취재하며 느낀 공통점은 "세월 따라 변한 문명의 편리함이 어쩌면 동네의 아기자기한 정까지 삭막함으로 물들여 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와 "임기 2년이란 조례에 묶여 동네의 일을 손바닥 보듯 뚜르르 꿰는 장기 통장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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