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소경을 고치심: 책임소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인 하나님께로, 진실한 고백 가운데 죄의 소경됨을 벗어나는 자유
월, 2016-3-14
맥락과 의미
9장에서는 예수께서 길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소경과의 만남은 소경과 또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기존의 구약 교회 공동체가 타락해 있었는데, 타락한 구약 공동체 사이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로 오셔서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의 치유 능력을 나타내실 때 소경되었던 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에 빠졌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구원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들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항상 우리 자신의 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매일 매일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1. 소경된 것의 책임소재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치유하심 (1-14절)
1절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만났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이 다릅니다. 2절에 제자들은 이 사람의 소경됨이 누구의 죄인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무의미한 논쟁입니다. 부모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지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지가 그 사람에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은 분명합니다. 3절에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물론 그 부모나 자녀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질병이 그 사람의 구체적인 죄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 속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주 깊은 장애에 부딪힙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이 누구의 죄인가 따집니다. 쓸 데 없이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가지고 오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문제의 상황에서 해결책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과연 이 문제 상황 속에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정적이고 따지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기대하십시오.
6절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진흙으로 침을 진흙에 뱉어서 그걸 이겨서 이 소경의 눈에 발랐습니다. 상당히 상직적인 일입니다. 발랐다는 말에 크리오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기름붓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크리오) 그리스도로서 기름부음(크리오)을 통하여서 이 사람을 치유하신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사람은 보게 되었습니다.
13절에 이웃 사람들이 그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 갔습니다. 14절에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킬 때에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이런 저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규칙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병을 치료해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율법주의가 하는 아주 악한 것입니다. 율법주의란 것은 율법의 정신에 집중하지 않고 세부 규칙을 만들어서 그 규칙 하나 하나를 지키려고 자기도 피곤하고 다른 사람도 괴롭게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치유받았으면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해방의 날을 기뻐해야 되는데도 그것을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율법주의가 없기를 바랍니다. 세부적인 세세한 것들은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을 잡아야 됩니다. 복음은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이런 일에서 벗어나서 복음으로 인해서 해방과 행복이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2.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고백할 때 복음을 믿고 죄로부터 자유케 하심 (15-38절)
이후의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고 고침받은 자를 바리새인에게 데리고 가니까 안식일을 어긴 문제에 대해서 바리새인들끼리 얘기가 오갔습니다. 16절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즉 예수는 하나님께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또다른 사람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이렇게 상당히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 부모를 불러서 이 소경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부모는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왜냐하면 22절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가 있으면 출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모는 무서워서 내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면서 회피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겁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치유받았고 우리 가족이 치유받았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분명히 드러내야지 비겁하게 자신을 숨겨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독받고 아주 낮게 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26절에 다시 바리새인들은 전에 소경되었던 자를 불러서 “도대체 어떻게 낫게 되었느냐” 물었습니다. 27절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럼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또 30-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낫게 한 사람이 죄인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내 것을 낫게 했으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들으시겠느냐.” 하면서 정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낫게 된 소경의 정직성을 보십시오. 그렇게 고백하면 자기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낫게 한 그분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정당하게 결론을 내리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독하고 있더라도 성경 말씀과 추론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분명히 나타내야 됩니다.
36절에 이 사람은 결과적으로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출교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큰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전에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고 먹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몸은 나았지만 출교되어 그 사회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에 어떤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정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손해를 보고 위기가 옵니다. 이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두려워하면 그의 부모처럼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합니다.
35절에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셨고 그때에 만났습니다. 출교된 위기상황에서 예수가 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이 “주여”는 보통 존경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3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네가 말하는 자가 그다.” 예수께서 당신이 인자,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나라고 말하니까 그 사람이 38절에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합니다. 성령께서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절하기까지 한 것은 단순히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나타냅니다. - 절은 하나님께만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의 그런 메시아라는 깊은 신앙적 단계로 이끌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신 당신의 모습을 소경되었다가 낫게 된 자에게 보여주었고 성령께서 감동으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구차하게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나아가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계시를 환히 비춰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물질적인 것이나 여러가지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자기를 높이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심 (39-41절)
39절에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을 하니까 40절에 바리새인들이 옆에 있다가 “우리가 소경인가” 묻습니다. 41절에 예수님께서 “그렇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한 선한 것 때문에 나는 의롭고 나는 잘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소경처럼 나는 눈이 어둡고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다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은혜 누리기를 바랍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소경됨을 깨달아야 되고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됩니다. 매일매일 우리를 덮고 있는 죄를 깨닫고 고백하며 그리스도께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과정에 위기가 있고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우리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안으로 나아갑니다. 이 소경은 예수를 그냥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결국 메시아로,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삶에 같이 계십니다. 합리적인 생각에만 머물지 말고 주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서 신비한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 가운데 풍요 누리는 우리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사람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서 이 소경됨이 누구 죄 때문인가를 따졌습니다. 우리도 불필요하게 따질 때가 많습니다. 문제를 보고 누구 책임이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해결책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 일이 나타나는 데로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하나님께 달려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리스도께서 소경된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경은 나를 고쳐 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출교당했습니다. 우리도 주를 고백하는 일로 인해서 손해 본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고백하도록 도우소서.
그가 출교되고 손해보았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자신이 메시아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 주었고 그것을 통하여서 이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주여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고 매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겸손히 주를 의지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죄 용서의 기쁨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우소서. 우리 안에 자기 의와 남을 정죄하는 것들을 없애주시고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구원의 은혜가 크오니 이 땅에서 손해 보더라도 영적 풍요를 즐거워하며 나아가는 우리 교회와 가정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