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방향을 되돌아보다
-도연명, <음주> 제5수
2013260565 중국학부 조예담
도잠, 그는 과연 회재불우한 인물인가. 일단 좋은 시대를 타고난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가 살던 시기는 위·촉·오 삼국시대를 서진이 통일한 후 동진이 그 바톤을 이어받은 때였다. 당시는 중앙의 힘이 많이 약하였고 오히려 지방 군대장들의 힘이 강성하던 때였기 때문에 국내 정세가 굉장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어린 시절에 부친을 여읜 도연명은 그 어려운 가정 형편 가운데서도 교육은 괜찮게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청년 시절에는 누구나가 다 그렇듯이 입신양명의 기대를 가지고 관직에 오르려 하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으니 가세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반드시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인생에서 총 5번의 관직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였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유명한 일화인 “쥐꼬리만한 봉급을 위해 윗사람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고(不肯爲五斗米折腰)” 관직을 그만둔 일만 보아도 어느 정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즉, 공직에 오래있지 못한 것은 외부적인 요인(모함이나 음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내부적인 요인(그의 신념이나 성격적 특질)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과연 회재(懷才)한 인물이었는지는 좀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충분히 입증되었지만, 관리로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며 공무를 해내는 데에는 능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며, 한 발 양보하여 그러한 재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온갖 흙탕물이 튀기는 정치라는 자리를 그 본성상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과감히 난잡한 홍진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내려가 평생을 보낸다.
따라서 그가 지은 작품들의 내용은, 여느 장삼이사의 문인들이 지은 것들처럼 궁중의 화려함을 기록하거나 임금이 자신을 중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예를 뒤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느끼는 소박한 기쁨과 여유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를 매우 잘 드러내주는 시가 바로 <음주>의 제 5수이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성의 경계지역에 집을 짓고 살아도,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을 멀리 두면 사는 땅이 저절로 외지게 된다네.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의 기운은 저녁 무렵에 더욱 좋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나는 새 서로 짝하여 돌아온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 속에 참뜻이 있으니,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말로 더 설명하려다가 이미 말을 잊는다.
분명 사람들이 사는 곳에 집을 지어놓고 사는데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장소가 농촌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는 그것에서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답한다.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떠나면서, 아니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의 마음은 잡다한 세속과는 멀리 떨어지는 것을 지향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도연명, 그는 세상을 잘못 타고났기보다는 어느 시대에 태어났든지 간에 결국 자연으로 회귀할 운명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작품을 좀 더 살펴보자. 이제 화자는 자연을 마음껏 누리다가 돌연 멈추어서 먼 산을 바라본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초월한 듯한 느낌이다. 시인의 그 한적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만족함이 느껴지는가. 그는 그의 본성에 따라 돌아온 이곳에서 비로소 삶다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 사실 산에 어스름이 내리깔리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산의 기운이 저녁 무렵에 더욱 좋다고 한 것은 어쩌면 그의 처지를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정오의 태양처럼 힘이 솟구치는 청년기동안 세상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명예와 부귀를 추구해 보았지만 그런 것들은 결코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였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자연의 순리를 마음껏 누리니 일석(日夕)이 어찌 더욱 좋게 느껴지지 아니하랴. 그러한 흡족함 속에서 자연 풍경을 바라보면 그 어떤 장면이라도 아름답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부터 한 쌍을 이루는 것은 완전함과 조화로움을 뜻하는 것인데 화자의 눈에 한 쌍의 새가 날아오는 것이 들어온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주위의 사물을 아름답게 바라볼 만큼 충분히 안정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가장 백미가 되는 부분은 마지막 연이다. 마지막 연은 비록 한 줄이지만 또한 이 시의 모든 내용을 가득가득 담고 있다. 참된 것은 결코 말로 형상화되어 풀어내지지 않는다. 깊은 사색에 잠겨 본 적이 있는가. 삶의 모든 의미와 방향, 세상과 나 자신의 관계에 대해 마음 깊숙한 심연까지 내려가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온갖 사고의 물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다시 돌이키며 말로, 글로 표현해보려 하지만 이미 많은 것들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뒤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깊은 생각들을 건지지 못했다는 허탈감이 있지만 그 허탈감은 곧 홀가분함으로 바뀌고, 비록 여러 사고들은 나의 의식적 기억 속에는 남지 않았지만 나의 잠재의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이루니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인생 자체가 되어있는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서, 시인은 ‘이 속에’ 참 뜻이 있다고 하였다. 즉 시 속에, 시가 그려내는 풍경 속에 참 뜻이 있는 것인데 이 시를 관통하는 시인의 마음 상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시인 자신의 본성을 따라 되찾은 삶에 대한 ‘흡족함’이다.
도연명의 인생을 살펴보며 나는 내 삶의 방향성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좇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혹시 젊은 날의 도연명처럼 남들이 다들 가는 길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형태는 무엇인가. 도연명은 그의 귀전 시기에 비록 곤궁하였을지언정 진정으로 삶을 누리다 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 활동이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이루어진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방법은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 가지 문제점 또한 있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사는 삶은 자칫 무책임한 삶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 하나는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한 편으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재주와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불의와 부정이 난무하는 세상에 의롭게 항거하지 않고 그저 도피해버리는 것 같은 인상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사실 이러한 도피는 종국에는 나 하나의 안위마저도 지킬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 그 누구도 불의에 항거하지 않는다면 그 불의는 세력을 넓히고 넓혀 시골이든 산 속이든지 간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범람하여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도연명의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도화원으로만 남아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그 삶을 이상향으로 삼고 그것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되 결코 그러한 삶을 살지는 않는 것이다. 즉 그 삶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넣고 우리 인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되 결코 말로 형상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연명이 추구했던 삶은 ‘아직’ 우리네 현실에 당도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이 아닌 그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그 도화원을 추구해나갈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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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 도연명 <음주> 제5수를 통하여 이상향에 대한 추구와 현실에 대한 집착 사이를 숙고하였다. 전반부는 <음주> 제5수에 대한 해설이다. 사실 이 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감각과 해설 사이에서 큰 곤혹을 느낀다. 아름다운 황혼을 보고 우리는 순간적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수많은 책을 써도 부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 편의 문제적인 작품을 잘 이해하고 이를 남에게 설득시킨다는 것은 때로 아주 힘들다. 글쓴이는 도연명의 대표작인 위 시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음미하면서 풀어내었다. 그 시작은 도연명의 시대와 은거의 성격을 생각해보고 이러한 시를 썼던 환경과 심리를 추적함으로써 잡아내었다. 그리고 각 연에 대하여 적절한 이해를 가하였다. 왜 황혼인지, 왜 새가 한 쌍인지 등 사소한 풍경도 의미있는 것으로 그려내었다. 그리고 난해한 말미의 구절도 나름대로 잘 풀어내었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이해의 심도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후반부는 도연명의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다. 본성을 따라 되찾은 삶의 흡족함은 불의와 부정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미래로 유예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에 대해서 더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겠지만, 이 역시 가치있는 의견의 하나이며, <음주>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시 작품에 맞먹는 힘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