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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강; 광야/이육사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
우리는 계속 조금씩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게 되면,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당신의 두통과 전신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미막염 때문에 당신은 좋아하는 일 대부분을 조금씩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고통을 용케도 감추었지요. 친구들은 당신이 아주 건강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신은 끊임없이 글을 쓰라고 나를 격려했지요. 우리 집에서 살아온 23년 동안, 나는 책 여섯 권과 수백 편의 논문 그리고 대담집을 펴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수십 명의 방문객을 맞았고 인터뷰도 수십 차례 했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결심한 대로 살아오지 못했던 게 분명합니다. 현재에 충실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둘이 함께하는 삶이라는 풍요에 집중하며 살자고 결심했는데 말입니다. 다급한 심정으로 그런 결심을 하던 순간들이 이제 다시 눈앞을 스치는군요. 지금은 집필하고 있는 대단한 작품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조르주 바타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존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You're 82 years old. You've shrunk six centimetres, you only weigh 45 kilos yet you're still beautiful, graceful and desirable' -- so begins Andre Gorz's 'open love letter' to the woman he has lived with for 58 years and who lies dying next to him.
As one of France's leading post-war philosophers, Andre Gorz wrote many influential books, but nothing he wrote will be read as widely or remembered as long as this simple, passionate, beautiful letter to his dying wife.
In a bittersweet postscript a year after Letter to D was published, a note pinned to the door for the cleaning lady marked the final chapter in an extraordinary love story. Andre Gorz and his terminally ill wife, Dorine, were found lying peacefully side by side, having taken their lives together. They simply could not live without one another. An international bestseller, Letter to D is the ultimate love story -- and all the more poignant because it's true.
이육사(陸史) 이활(李活, 1904~1944).
본명은 원록(源綠). 활(活)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출생.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또는 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루쉰)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이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육사 [李陸史]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2.25)
(두산백과) 사단법인 이육사추모사업회와 이육사문학관은 올해로 제 12회 이육사문학축전 봄행사가 오늘(4일) 오후 2시 안동민속박물관 학술행사를 시작으로 11일까지 이어진다.
광야
이육사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이 웅혼(雄渾)한 시는 우주의 탄생과 가난한 현재의 삶과 초인을 목 놓아 부를 천고의 미래를 담아내고 있다.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작품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분분한 실정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인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의 경우에도 밝은 세계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김종길, 문덕수, 김흥규)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김용직, 오세영, 이승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난한 노래의 씨"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시, 내면적으로는 꽃씨, 눈이 덮인 땅이 언젠가는 꽃동산이 되리라는 신념"(김인환), "민족 해방의 날의 상징"(김용직), "삶을 거부하는 상황 속에서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근원적, 초월적 가능성"(문덕수) 등으로 의견이 대립되어 있다.
절 정
이 육 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참고;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3&contents_id=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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