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4월5일 식목일이자 한식입니다.
지난 1967년부터 매년 한식날에는 단종임금에게 제향을 올리는 날이었는데요
영월의 유지분들과 영월군이 장릉을 찾아가 단종임금에게 준비한 음식을 차려놓고 제향을 올리는 날입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진솔한 마음으로 큰절을 올리겠지요
커다란 축제형식으로는 4월27일부터 29일까지 4월의 마지막 주에 성대하게 제향을 올리게 됩니다.
오늘은 아주 조용히 임금님을 뵙는것 이지요
아침에 북면사무소를 다녀왔습니다.
봄이니까요
면사무소와 주변들의 봄은 어떻게 오고 있을까 이었지요
우체국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희망을 날다, 희망프로젝트사업으로 진행했던 벽화도 감상하고요
전임 북면번영회장님과 상업을 하시는 어른분들도 뵙게 되어 인사도 드리고요
면사무소 현관에서 발견한 사진입니다.
밑에 세겨놓은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희망이 샘솟는 샘물공원"
마차초등학교 교넝에 있는 이 샘물은 지역주민들의 식수이었기에
옜날에 옛날에 옛날부터 모두를 키운 생명수 이기도 하지요
여기는 면사무소 마당에서 왼쪽에 있는데요~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챙겨주고 있는 북면 보건지소입니다.
여기는 면사무소 앞 도랑건너편에 있는 "희망으로 날다"
미래의 꿈과 희망을 벽화로 표현한 희망의 나래입니다.
봄철 산불을 조심해 달라고 깃발은 바람에게 애원하듯 힘차게 펄럭이고요
둑방을 따라 마차의 역사와 문화를 말없이 말해주는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마차중고등학교로 가는 둑방길입니다
탄광문화촌의 요봉천 생태탐방로에서 만난 노랑할미새입니다
저 혼자만의 노랑할미새이지요
배가 노랑색이라서 그리 붙였고요~한쌍이 열심히 둥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귀한 식구를 또 만났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 뒤편 산자락 바위에 붙어 있는 달팽이를 발견했습니다.
어떠한 종인지는 모르겠고요~여기도 한쌍이 정답게 있었습니다.
음~그러니까 탄광문화촌의 식구가 늘었습니다.
오늘 발견된 노랑할미새에 달팽이까지!!
,오후, 번개투어가 있었습니다.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연수원 제9기 고위정책과정에서 연수중인 여덜분이 오셨습니다.
장릉과 청령포 그리고 영주 순흥으로의 500여명 연수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조사를 위한 답사단이었습니다.
장릉에서 뵙기로 한 오후2시30분,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장릉입니다.
경내 여러 시설물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기위해 애쓰시는 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반가움과 고마움이 앞서는 마음이었습니다.
탄광문화촌으로 이동한지 1개월만에 임금님을 뵙게 된 오늘이었으니까요.
오신분들과 인사를 나누곤, 박충원비각에서부터 역사관, 엄흥도 정려비, 정자각에서 참배를 올리고
임금의 능에 올라 또한번 인사를 올리곤, 청령포로 향했습니다.
바람이 참 많이도 불었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면서 1457년 6월28일 이곳 유배지에 도착한 단종임금에게는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었을지도 모를 서강의 푸른물은 깊고도 깊었습니다
바람불어 좋은 날도 있었겠지만 바람으로 받은 상처는 바람으로 아물려야하는 아린가슴으로
556년전 역사의 현장에서 참으로 애달픈 마음 그대로를 손님분들에게 전하여 드렸습니다.
영월에서의 답사를 마무리 한 손님분들은 영주 순흥으로 가신다는 걸음 앞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세조가 역적의 무리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고을이라하여 3살까지만 살려두라 했던
조선국 역사에서 가장 슬픈 피끝마을을 찾아가신다는 손님들의 자동차가
멀리 38번 나들목으로 들어설 때까지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 역사가 이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꿈꾸었고 실천에 옮기지도 못하고 순흥고을 전체가 몰살을 당해야만 했던
1457년 9월과 10월의 역사는 이러했습니다.
금성대군에게는 몸종 금연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은 서로 뜻이 맞아 죽령재와 문경세제를 깃점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조정을 치면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격문(오늘날의 용어로 말씀을 올리면 민중대자보 이지요)을 만들게 됩니다.
택일하여 마을고을 곳곳에 붙여 백성에게 알리고 민중봉기를 이르키려 했었습니다.
이것을, 대군의 처소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격문을 몸종 금연이 순흥부사 이보흠의 관노에게 갔다 주게되고,
관노는 한양으로 향하다 이보흠이 화급하게 보낸 심복 포교에게 죽령재에서 붙잡혔었습니다.
격문을 빼앗아 든 포교는 그 자리에서 찟어버리려하자 관노가 하는 말이
그 격문을 한양의 조정에 갔다주면 틀림없이 높은 벼슬을 내릴것이니 내 공도 잊지말고 덕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니
순흥으로 향하려던 발을 한양으로 돌려 조정에 알리게 됩니다.
한편, 관노는 포교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명을 꾀를 서서 면하곤 곧바로 안동을 발길을 돌렸습니다.
안동도호부에 가서 순흥부사와 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음을 고하면 한양으로 향한 포교보다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안동도호부이었으니까요
그곳에서 말 하기를 또한 "나를 잊지는 말아주십시오"이었습니다.
그렇게 순흥이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조가 하도 많은 백성을 죽였기에 스스로가 세조실록에서 몇명을 사사시켰다고 기록을 하지못하고
유추해석할 수 있도록 기록하기를 "집이 700호 되었다"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으니 식구 10명씩은 되는 셈이지요
10명, 10명, 그것이 700호이었으니 어림짐작으로도 7천여명은 됩니다.
그렇게 한날 한시에 집단으로 몰살을 당해야만 했던 순흥고을이었습니다.
그 금성대군의 신단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신단, 순흥고을 백성들의 신단,
3신단이 한자리에 모셔져 있는 신단을 찾아가는 일행분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고위정책과정 공무원들의 역사바로알기!!!
문화관광해설사인 제게는 참으로 고맙고 감사드려야만 할 인물분들이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곧 과거 이었으니 오늘의 현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이요,
현재의 권한과 권리가 있는 국가의 고위직분들이 계시니
미래는 자연스럽게 되풀이 되지 않을, 밝고 희망찬 미래를 열어 주시리라 믿게 되니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영월군문화관광해설사 김원식 이었습니다.
내일은 주천초등학교 방과후학교 기자단 수업이 있어 하루 쉬게 됩니다.
밝고 환하고 즐겁고 신나는 봄날이 되십시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