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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antor 박천수음악카페 - Music Academy 원문보기 글쓴이: 박천수음악감독
제 5장 분열왕정 -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
; Siegfried H. Horn, P. Kyle McCarter 개정.
1.초창기
1)솔로몬 사후의 분열
르호보암의 왕위계승(B.C 930-913); 왕좌권리 주장을 위해 북부 세겜으로 감.
여로보암의 망명; 왕에 대적, 애굽 시삭의 보호 아래로..
북부지도자들의 반란; 르호보암의 혹독한 강제노역 정책, 르호보암의 예루살렘으로의 도피 & 여로보암의 즉위..
2)시삭의 공격
시삭의 원정; 유다의 특별한 겨냥이 아닌 이집트의 가나안 이권 회복과 주요 교역로의 영향력 재확립 의도.
- 이집트와 Sinai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후 Gaza를 통과해서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Gezer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거기서 방향을 바꾸어 에브라임 산지 남부로 갔다가 아얄롯, 벳호른, 기브온을 통과하는 통상적인 북부 접근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르호보암의 과중한 조공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다의 주요 도시들을 남긴 채 북쪽으로..
- 카르낙목록; 네겝의 피정복지들의 이름을 길게 나열.
- 고고학적 기록에서 돋보이는 준거점을 제공; 그 지역의 곳곳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파괴하는 데 이용..
- 부바스티스 현관 부조에 기록된 여정; 10새기 말엽에 해당하는 층의 격렬한 화재흔적의 유적발견.
아라드, 게셀, 다아닉, 므깃도 등 포함(므깃도에서는 시삭이 세운 기념비 파편 발견)
- 고고학적 기록의 두 측면; 10세기 요새들과 다른 건축물의 광범위한 보급과 뛰어난 수준, 파괴된 도시들의 신속 완벽한 재건.
3)여로보암의 종교정책
여로보암의 천도; 세겜 - 브뉴엘(Penuel) - 디르사(Tirzah)로..
국가적 종교 중심지; 단, 벧엘 - 신명기적 사가의 초기 형태, 종교적 율법의 위배.
- '자기 마음에 정한 달' 제8월 15일 벧엘의 축제, 황금송아지와 비레위인을 제사장으로..
- 신명기사가의 "여로보암의 범죄"; 후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 마침내 북왕국의 멸망과 그 백성의 유배 야기.
4)초기 분열 왕정의 전쟁
분열 왕정 초기에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전쟁이 거의 끊이지 않았다.
르호보암 17년 후 - 단명한 그의 아들 아비얌(Abijam;B.C 913-911) - 그의 손자 아사(Asa;B.C 911-870)
여로보암 - 그의 아들 나답(Nadab;B.C 908-907) - 잇사갈 지파, 바아사의 군사 정변(B.C 907-884)
바아사와 아사의 통치기간 중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쟁에 끼어든 다메섹
- 바아사의 예루살렘 봉쇄정책 중 다메섹왕 벤하닷의 도움요청 vs 아사의 많은 금,은 선물로 벤하닷 유인
- 벳하닷의 갈릴리 북쪽 이스라엘 도시 파괴, 바아사의 라마 철수, 아사의 유다 북방 경계선 강화
바아사의 아들 엘라(B.C 884-883)와 그이 가문을 시므리가 멸절 - 한 주만에 오므리가 등극..
2.오므리 왕조
1)오므리 왕과 무역 강국으로 회복된 이스라엘
오므리의 12년 통치(B.C 883-872) 기간 동안의 업적
- 한 왕조의 창립, 이스라엘의 교역국가 회복, 오므리 6년; 사마리아 수도 건설
- 두로와 긴밀한 관계; 아들 아합과 두로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Jezebel)의 결혼으로 지중해의 번영하는 상업도시들과의
외교적, 상업적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상당한 부를 가져다 줌.
- 이러한 페니키아의 협약으로 다메섹과 충돌; 사마리아와 다메섹의대립은 아시리아의 위협에 공동전선형성으로 마무리.
2)아합의 통치
오므리를 계승한 아합의 22년간(B.C 872-851)의 통치 - 북왕국의 번영기
- 성서의 악한 왕의 전형으로 묘사; 백성의 권리 억압, 동맹으로 인한 이방신 숭배..
; 배타적 야훼종교 신봉자(선지자 엘리야) vs 포괄적 종교 신봉자(사마리아 귀족)
- 9세기 전반의 고고학; 광범위한 건축 사업
; 왕상22:39"그 건축한 상아궁","그 건축한 모든 성" - 단, 하솔, 므깃도, 이스르엘..에서 발견.
- 오므리를 이어받은 외교정책의 핵심
; 두로의 공주,왕비로 인한 페니키아의 탄탄한 동맹, 교역로 장악을 위한 다메섹과의 대립우위와 이시리아에 대항한 동맹.
- 전반적인 유다 지배; 아버지 아사를 이어 유다 왕이 된 여호사밧(B.C 870-846)은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와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과 더불어 평화를 공고히 함.
- 요단 동편에 대한 지배력과 길르앗을 포함해 남쪽으로 모압과의 분쟁지역, 아르논 강의 북부 지방까지의 지배.
3)살만에셀(Shalmaneser) 3세와 아시리아 제국의 등장
- 근동의 역사에 주도적 동인 아시리아(기원전 9-7세기)
; 시리아 북부 - 아나톨리아의 교역로 장악 동기로 시작, 남쪽으로 팔레스타인까지 야심.
- 아시리아 재기의 주요한 요인
; 무자비한 전사 아수르나시르팔(Assurnasirpal)2세(B.C 884-859)의 원정을 통해 축적된 엄청난부.
- 살만에셀의 등장; 아수르나시르팔의 아들, 후계자인 끈기와 목적을 갖춘 뛰어난 지략가 살만에셀3세(B.C 859-824)는 왕의 연례 원정의 관례수립, 서부지역정복 종합계획, 발리크(Balikh) 강과 유프라테스 사이, 아시리아 본토 가장 가까운 동맹 가담 국가인 비트 아디니(Bit Adini) 점령.
- 비트 아디니(Bit Adini) 점령 후 살만에셀에 위협을 느낀 남쪽의 반아시리아 동맹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
; 그들 동맹국가들 중 규모있는 다메섹의 하닷에셀과 이스라엘의 아합이 살만에셀의 공격 대상이 됨.
- 살만에셀의 끈질긴 공격에도 다메섹의 하닷에셀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동맹이 효율적이었다
기원전 845년 원정 후 하닷에셀 사후, 하사엘(Hazael)의 다메섹왕 찬탈과 동맹의 와해로 고립되어 B.C 841 살만에셀의 공격으로 초토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사엘은 살아남아서 더 강한 세력이 되었고 이웃나라와 이스라엘을 희생시켜 영토를 확장.
3.다메섹의 패권 아래 이스라엘과 유다
1)예후의 반란
- 카르카르 전투(B.C 853) 이후 아합은 오래 살지 못했고, 이세벨은 태후로서 상당한 영향력 행사 - 아하시야(Ahazia, B.C 851-850)의 짧은 왕위 계승 - 그의 아들 요람의 즉위(10년의 통치)
- 이 기간의 유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Jehoram, B.C 846-841)이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기 때문에 일종의 손아래 동반자로 이스라엘과 동맹 관계.
- 여호람 사후 아들 아하시야의 등극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사밧의 아들, 이스라엘 군대장교 예후의 이스라엘과 유다 왕 모두를 숙청하는 반란을 일으킴.(성서학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이는 오므리 왕조, 특히 아합의 종교정책과 사회적 착취에 관한 결과)
; 이는 9세기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적, 정치적 긴장을 반영하는 선지자 당파와 오므리 왕가 지배층 사이의 대립을 반영.
- 이스라엘에 대한 모압의 반란과 유다에 대한 에돔의 반란으로 인한 경제적침체, 모압과 아시리아와의 계속된 투쟁의 실패가 반란의 요인, 교역로의 통제와 상업적 이해충돌로 인한 다메섹과의 격전으로 요람의 심각한 부상이 반란의 결정적 환경.
- 1993-1994년 텔 단(Tell Dan)에서 발견된 현무암 기념비 조각; 예후 정변의 하사엘 결탁설 제기.
2)하사엘의 등극
- 니므루드(Nimrud)에서 나온 살만에셀 3세의 소위 흑색기념탑(Black Obelisk); "오므리의 아들 야우(Yaw, son of Omri)"(예후로 추정)의 아시리아 군주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 작품.
; 예후를 다메섹의 적으로 간주.
- 기원전 838년 살만에셀의 다메섹 원정 이후 다시는 서부로 돌아오지 않음; 하사엘의 이 지역 전성기와 배반한 예후의 보복과 이스라엘, 유다 및 주변국들의 희생으로 패권장악의 실현 가능성..
- 유다의 아하시야의 피살 후 아합과 이세벨의 딸, 여호람의 왕비,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의 정권장악 - 여호야다의 아하시야의 아들 여호아스가 7세 때 왕으로 선포.
- 다메섹 하사엘의 위협; 여호아스의 성전 수리 사업 중단(역대기서; 유다 방백들의 책임), 하사엘의 블레셋 도시 가드(Gath) 점령 후 예루살렘 위협(왕하12:17-18); 여호아스는 수세대 걸친 보고의 엄청난 공물로써 예루살렘을 겨우 건져냄.
무엇보다 하사엘은 블레셋 땅과 유다 땅을 점령합으로써 주요해안 도로 비아 마리스(Via Maris)와 주요 교역로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손에 넣음으로 상업적 왕래를 독점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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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란(왕상12:1-4, 대하 10장)
- 열 지파는 이 왕국에서 탈퇴 하여 아히야가 예언한 대로 여로보암을 왕으로 하는 자기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 여로보암 은 자기의 두지파 유다와 베냐민을 통치 하는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2. 초기 시대(B.C931-885, 왕상12:25-16:20)
(1) 왕이 된 여로보암
① 새 왕국
-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이라는 열지파의 첫 통치자가 되었다.
- 그는 세금을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징수제도를 완전히 없앴을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디르사(Tirzar)를 수도로 정했다.
② 대체된 예배 장소
- 종교적으로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방 백성들을 위한 다른 예배 장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2) 질책과 징벌을 받은 여로보암.
- 여로보암의 행동은 하나님앞에서 큰죄를 범하게 된다.
- 이에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꾸짖게 하신다.
- 그가 그로임해 다시 마음을 돌이 켰다는 기록은 없다.
(3) 영토의 손실
- 이스라엘 초기에 특히 여로보암때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왕성 해져 그들이 잃었던 영토를 다시 요구 하였다.
- 이러한 영토의 손실 외에도 여로보암의 국가는 적어도 한번 외국의 침공을 당했을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죽음
- 여로보암은 22년간의 통치후 자연사로 죽었다.
(5) 나 답
- 나답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디르사에서 2년간 다스렸다.
- 종교적으로 나답은 그의 아버지를 그대로 따랐다.
(6) 바 아 사
- 바아사는 24년이라는 긴 기간을 다스렸다.
- 그의 통치에 관해서 남쪽의 유다와 계속 투쟁을 벌였다는것 외에는 기록 된 바가 거의 없다.
- 종교적으로 바아사는 그의 두 선임자의 방법을 계속 했다.
(7) 엘라 와 시므리
- 엘라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년간 다스렸다.
- 군사적인물 시므리가 공모 하여 엘라를 살해 하였다.
-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 하였는데 이것이 7년 통치 후였다.
3. 오므리 왕조(B.C885-841, 왕상 16:23-22:53, 왕하1-8장)
(1) 정치적 상황
- 오므리는 3년 동안 세번째 왕가를 대신 하였다.
- 유다의 아사왕은 바아사를 공격 하기 위해 이미 이 나라왕 벤하닷 1세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었다.
- 오므리가 이스라엘을 지배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오므리의 집권
① 새 수도 사마리아
-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사마리아를 정했다.
- 역사적으로 보아 사마리아는 거의 공격이 불가능한 요새로 증명되었다.
- 이 건축 사업에 훌륭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 B.C 722년까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② 모압의 정복
- 모압인의 돌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③ 페니키아 동맹
-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의 결혼은 정식동맹의 표시로 공주의 아버지 엣바알
과 조약을 맺은것으로 보인다.
(3) 아합과 이세벨
① 바알 숭배의 도입
- 이들은 이세벨의 본래 종교인 바알-멜칼트(Baal-Melqart)의 제단을 이스라엘에 도입 시켰다.
-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 하였다.
② 통치적인 수완
- 아합은 그의 아버지와 같이 능력있는 통치자였다.
- 오므리의 궁전 근처에 위치한 많은 건축물들은 아합의 “사아궁”으로 판명 되었다.
③ 전쟁 경험
- 종교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으로 아합은 군사적으로 살효를 거두었다.
- 아합은 라못 길르앗에서 벤하닷과 싸우다 죽임을 당한다.
④ 유다와의 동맹
- 아합의 딸 아달랴는 동맹의 표시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 하였다.
- 여호사밧이 아합의 아들들을 원조 하였다.
(4) 선지자 엘리야
① 기근과 불
- 그의 첫번 행동은 이런 사악한 종교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기근을 내실 것이라고
아합왕께 고하는 일이었다.
-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갈멜산에서 시험을 주선 하는데 협동하도록 왕을 설득 하였다.
② 실패와 재기
- 엘리야 자신이 연약해지는 순간 여호와 숭배에 대한 국민적인 재생의 전망을 망쳐 버렸다.
- 엘리사와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정권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를 계속 저항 하면서 10년동안
함께 일 하였다.
③ 이 후의 세가지 이야기
1. ⇒ 아합왕이 이스라엘에 있는 왕궁 근처에서 부당하게 포도원을 탈취한 사건에 대해 엘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2. ⇒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의회복을 바알세불에게 사람을 보낸것을 엘
리야가 꾸짖은 것이다.
3. ⇒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간것이다.
(5) 아하시야
- 아하시야는 2년간 다스리다가 아글이 없이 죽었다.
- 아하시야는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얻은 병으로 인해 죽었다.
(6) 여호람
① 종교적 관점
- 여호람은 바알을 없애 버렸다.
- 그러나 여호람이 바알을 계속 지지 했을것이라는 추측은 이세벨이 그의 재임 기간에 계속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② 모압의 반란
- 여호람 당시 주목할 만한 사건은 모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7) 여호람 재임 시의 아람 사람 예화
① 아람 장군 나아만
- 그는 문둥병에 걸려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여자 아이로 부터 이스라엘 선지자가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되었다.
-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요단강에가 7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 실천함으로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게
되었다.
② 장님이 된 아람 사람
- 얼마후 아람 사람들이 엘리사를 잡으러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인들은 눈이 멀게 되어 곤경을
겪었다.
③ 사마리아의 포위
- 수 개월 후 아람 사람들은 더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로 다시 와 사마리아를 포위 하였다.
④ 아람 사람에의한 부상
- 아람 사람과의 마지막 교섭에서 여호람은 죽었다.
(8) 선지자 엘리사
① 배경 문제
- 엘리사가 한일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바알-멜칼트에 항거 하는것이었다.
- 엘리사의 활동기간은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 시작 하여 요아스때에 죽었으니대략 50년의 기간이
된다.
② 엘리사의 경험
- 엘리사에 관한 내용은 주로 여호람 재임 시의 일로써 시간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하
나의 연속적인 내용은 아니다.
- 엘리사의 주요 관심중의 하나는 점ㄹ은 선지자를 교육 시키는 일이었다.
4. 예후왕조(B.C841-753, 왕하 9:11-10:36;13장;14:16-29)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다
-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넷째 왕조를 살해 하리라는 징벌을 예고 하셨다.
- 엘리사는 선지자의 아들들중 한 사람을 보내 여호람 대신 예후를 왕으로 기름 붓고 숙청에 관한
지시를 전하게 하였다.
1.→ 여호람왕
2.→ 이세벨의 종들로 하여금 그녀를 창문에서 떨어뜨림.
3.→ 아합의 70명의 아들 살해.
4.→ 이스르엘에 있는 모든 궁정 관리를 살해
5.→ 아하시야의 친척 42명 살해
6.→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죽임
(2) 왕이 된 예후
- 종교적으로 예후는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는데 순종 하였으므로 제일 초기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
으나 처음에 시작한 그 길을 계속 따르지 못 하였다.
① 하사엘의 이스라엘파괴
- 외국 사람에 의한 이스라엘의 모욕은 특히 예후 재임 시에 선고 되었다.
- 이것은 아람 사람 하사엘에 의해 오게 되었으며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셈이었다.
② 앗수리아 앞에서의 모욕
- 이스라엘을 또한 에후 재임시 앗수리아로 부터 피해를 입었다.
- 앗수리아 침범은 하사엘의 침범 이전에 일어 났으며 이스라엘땅 부다는 하사엘의 땅에 더 큰 해
를 가져다 주었다.
- 이 사건은 앗수리아 기록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다.
③ 예후가 미약하게 된 이유
⇒ 오므리 가문의 숙청 당시 유능한 관리를 살해한점
⇒ 유다와 페니키아와의 동맹이 이 숙청으로 끊어짐.
(3) 여호아하스
- 여호아하스는 그의 아버지 예후를 계승하여 17년간 다스렸다.
- 하사엘에게 굴복한점 외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4) 요아스
- 요아스는 왕위로 오른 직후 엘리사로 부터 군사적 지위를 회복 하리라고 약속을 받았다.
- 요아스는 유다와 아마샤(Amaziah)의 공격을 지탱할 정도로 우세 하였다.
(5) 여로보암 2세
- 여로보암 2세는 예후왕조의 세번째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 여로보암은 다윗과 솔로몬 제국시대에 존재했던 동쪽과 북쪽 경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6) 8 세기 선지자
- 선지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 여로보암 2세때의 선지자
→ 요나 / 아모스 / 호세아
(7) 스가랴
- 6개월 이내에 그의 후계자가 암살 당했다.
-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숭배를 계속 했다.
5. 이스라엘의 쇠퇴(B.C751-722, 왕하15:13-17:41)
(1) 살 룸
- 살룸은 스가랴를 죽이고 왕으로 선언함
- 므나헴이 그를 죽임
(2) 므 나 헴
- 므나헴은 총 10년간 다스렸다.
- 므나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리아의 세력이 다시 한번 지중해 국가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 디글랏빌레셀의 주전 743년 원정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게 되어 여기에 므나헴이 휘말리게 되었다.
(3) 브가히야
-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그러나 2년을 다스렸을때에 군대 장관인 베가(Pekah)사마리아 궁전에서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웠다.
- 베가의 단독 통치 6년인 주전 734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반역적 동맹을 진압 하고자 서쪽으로
돌아 왔다.
(5) 호 세 아
- 호세아가 즉위 할시 이스라엘은 큰나라가 아니었다.
-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로 건너가 수도를 포위 하였다.
- 마침내 사마리아성은 무너졌고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앗수리아의 속국
- 사마리아 성이 무너지자 앗수리아 총독이 그 당에 오게 됨으로써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도 역시
주(Province)로 편입 되었다.
7. 요약
- 이스라엘은 B.C931년 부터 B.C722년 까지 약 2세기 동안 국가로 존재 하였다.
- 제9왕조 / 19명이 집권 / 8명의 왕은 암살당했거나 자살함.
- 오므리에게의 징벌
→ 예후에의한 오므리 가문의 진멸
→ 하나님은 앗수리아에 국가적 모욕을 허락 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