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을 다녀오며.......
1594년 5월9일 많은 비가 종일 내렸다 아침에 순무어사 徐渻이 화원에서 비를 무릅쓰고 농막으로 왔다 城主와 유좌수가와서 지대하였다 나는 徐行遠(전귀당의부친)과함께 동성친족으로 알현하니 쌀과소금,간장등으로 구제하여주었다 점심을 먹은후에 어사는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낙재공 임란일기에서)
......그리고 2013년 6월8일 음력으로 계사년 4월30일 오후 4시반 조금은 흐린듯한 날씨에 우리는 포천으로 출발하였다
경부고속도로를 한참을 달려 청주에 계시는 범석운영자님을 태우기 위해 문의ic에서 내려 일터에 도착하니 좌로는 청주시내요 앞은 봉황이 날개를 펴고 앉은곳에(재덕씨曰) 자리잡았다는 공군사관학교가있는이곳 그리 시골같지않은 시골 범석님 물주고계시네요 하수오에,,,,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발길을 재촉했다
저녁 8시반무렵 의정부인근에 이르니 안내판에 부대찌게 거리라 누구나 할것없이 먹고가시더....
우리는 차머리를 돌려 검색과 네비로 찾아 의정부 중앙역앞 형네식당에서 맛있게 허기진 배를 채울수있었다
시간이 늦어 근처에서 간단히 호프한잔하고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포천을 향해 갔다
네비안내에 15분정도 걸린다한다
재덕씨가 포천 주손이신 서동성님에게전화를 해 오전 10시쯤 만나기로 하였다
설운리 도착 2킬로전 편의점에서 잠시 커피한잔을 하고 네비의안내가 마칠무렵 동성주손께서 말하신 사업장이 보였고 좌측 부대 담벼락을 타고 100여미터를 가니 신도비와 약봉공묘소 그옆을돌아서니 재실과사당 종택이 보였다
주손께서 엷은 미소를 머금어며 대문앞에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얼마만의 만남인가! 임오보(1702년) 이후 대구와 달성으로 나누어 보계가 전해온지 언300여년이고, 낙재공과 약봉공께서 만난 1594년 5월9일 이후 419년이니 이 뜻깊은 자리에 우리가 서있다는 자체가 가슴이 치밀어와 뭉클해지는것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한인사를 나누고 종택안으로 들어가 동성주손님의 부친되시는 기원 어르신께 정중히 인사를 드리니 90이넘으신 노대부부부께서 환한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간단한소개를 하고 담소를 나누니 그 동성친족의 정이 서로 통하지 않을수있게씁니까
준비해온 낙재공 국역문집 1질과 구암서원실측조사도1권 금호선유도 1부를 드리니 감사히 받으셨고 최근 발행된 대구서씨문헌록 상,중권 1권씩을 받고 스크랩해놓으신 선조들의 기록물 3권을 보여 주시었습니다
기원 어르신의 옛날 동산당 구암서원 방문얘기와 동성주손님의 몇년전 구암서원 향사시 아헌관으로 참관한얘기 등등 앞으로 양문의 화합과 상호교류방한등을 화기 애애한 분위기속에 주고받곤하였습니다
잠시후 달성서문의 창덕주손님이 약봉공사당에 분향을 하니 도포입은 모습은 400여년전의 낙재공을 뵙는것같았고,어린주손의 용태가 어느자손 어느유자가 이보다 더 낳을수가 있었겠습니까
또한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이야 어찌다 말할수있었겠습니까
분향을 마치고 뒤쪽의 참의공, 함재공 양위 묘소에 참배하고 동성주손께서 묘소에 얽힌 이야기와 광탄, 장단 선영이야기등의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사당우측에있는 약봉공묘소에 이르니 풍수가들이 천하명당이라하는데 묘소앞 산야는 일자눈썹으로 물결을 이루니 어찌 인물이 안 나올수가 있겠는가 하는데(재덕씨 曰) 무지한 내가 그뜻을 알려만은 틀리지않은 진실이니 어찌 부정할수있겠습니까
묘소앞 신도비의 위용은 약봉공이 문무를 겸비한 선조의 고명대신이니 그위용이 우리들을 앞도하고도 남았습니다
종택으로 돌아와 어르신과 기념촬영을 하고 작별을 고하니 90노부부의 얼굴엔 친친의 정이 묻어 나왔습니다
문앞을나서며 고대 다니는 창덕주손보다2살어린 손주 아무개가있다해 내가 주손이름이 창덕이라하니
노대부어르신의손주분중에도 창덕이가있다하며, 마치 당신의 손주를 보시는듯 더 친친의 정을 느끼는것 같았습니다
이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성주손님의 일터에들러 만사공과몽어공화상사진1부를 받고 담소를 하는중 인근의 전첨공주손이신 서홍덕님을 부르셨어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근처 식당 조선곰탕집에서 무익공(휘 유대)주손께서 합석하게되어 점심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전첨공묘소에 참배하였는데 개발의 여파는 묘소 턱밑까지 밀려와 묘소와 재실 종택을 목조이는것같아 안스러웠습니다
전첨공주손의 부친이신 동규어르신을 뵙고 인사드리고 소호헌지 4권을 받고 다음을 기약하며 석별의정을 나누었습니다
6월의 뙤약볕은 애틋한 친친의 정을 시샘이라도하듯 왜그리도 따가운지.....
오후 4시조금넘어 봉담의 사가공 묘소에 이르렀는데 신도비는 홀로 외로이서있고 묘소의 쓸쓸함은 너무나 안스럽기 그지 없었고 달성 10경을 읊으며 고향의 정을 그리워하든 공..... 정자에 앉아 풍류를 읊조리든 대문호의 자취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수없었어니 이 아쉬운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수있겠습니까
염수재 재실은 새로이 우뚝서 있건만 무언가 공허한 우리의 마음은 무엇으로 매울수 있을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청주에 도착 간단한요기를 하고 대구로 향하니 어느듯 달빛이 길을 안내하게되네요
선산휴게소에서 커피한잔에 오늘의 여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10시가 다 되어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아! 북받쳐오는 친친의 정이 꼬리를 물어 포천에서 발원의 땅 이곳 대구 달성까지 이어지니 어찌 양문의 발전이 있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
끝으로 반갑게 맞이해주신 포천의 동성주손님 ,전첨공주손이신 홍덕님, 무익공후손이신 동준님 그리고 기원어르신, 동규어르신 너무나감사합니다
그리고 주손 창덕님 더운데 못난 형,아재들따라 나서 주어 고맙습니다
우리까페지기 재덕씨 고생하셨습니다 청주의 범석운영자님도요....
오늘의 만남이 초석이 되어 양문의 화합과발전에 기여했어면 합니다
글짧고 우둔한이가 오늘의 일을짧게나마 위와같이남기고
아래의1834년 족회사적비의 9인의 연구시로 갈음하고자합니다
파는 다르다 할지라도 한근원에서 나왔어며 희순의 본관은 달성이라 우리서가 본도의 관찰의 인부를 차기 세번이라(안동 일직 소호리 유문)
안렴절도 백여년인데 상환곡을 감하신 전석의 자취를 추모하세(안의현감 유여)
숭현사를 우르러보니 옛거리를 느끼니 여기에 종족을 모음이 마땅하다(영천언하동 정)
지금에야 한가지 옷깃을 기지런이하여 꽃나무아래에서 친족끼리 정담을 나누네(삼가현감 용보)
영호에 색거한 것 한슬우나 기쁘게 술잔들고 즐거워라(신령현감 석보)
슬프다 조상이 살던터이라 곧이땅에서 아름다운 모임을 이루니(섬거현감子 필순)
종족이 도타이하여 그 처음으로 올라가니 동성보다 더 좋은것이 없네( 진사 상정)
누가 허심탄회로 대려하나 다른날에 오는자들은.....(산격동 표)
반드시 이석면의 글을 보시라(희순)

참의공 묘소앞에서 양문의주손 인물이 훤 하십니다

거실에서 가운데분이 동성주손의 부친이신 基源 어르신


설운재앞에서

몽어공묘소앞의 문인석과무인석 도난당한것을 되찾아 설운재앞에........

약봉공 사당 숭덕사

분향을하다






참의공묘소에서본 종택

참의공묘소


함재공묘소


약봉공묘소

신도비

곰탕집에서


전첨공묘소




전첨공의 맏아드님


전첨공묘소앞에서 좌로부터 범석(운영자 대의원), 재덕(대종보간사), 창덕(달성서문주손),동성(대구서문주손).동준(무익공(휘 유대)주손),홍덕(전첨공주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