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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이 사람 - 김호길 박사
-무은재(無垠齋) 김호길(金浩吉) -
김호길 박사는 해방되기 12년 전 1933년 10월 15일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에서부친 김용대옹의 4남4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 두 분이 계시고 밑으로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셋이 있다. 김호길 박사가 태어날 당시 고향에는 국민학가 없어서 큰 형님은 경주 양동의 외가에 유학가서 공부했다, 김호길 박사는 아홉 살 때 *<지례간이학교>에 입학했다. 간이학교를 다니던 중 1943년 4월 지례의 집을 떠나 안동군 도산면 토계동 고모댁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산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지례간이학교> 서산(西山)선생의 제자인 수산공(秀山公)으로 따님 한분만 두시고 아드님을 두지 못해 안동군 서후면 금계동의 먼 친척인 심대공(心臺公)의 아들을 양자로 맞는다. 취석공(翠石公)으로 학봉 김성일 선생의 11대 손이다. 김호길 박사의 부친 김용대 옹은 12살에 서후면 금계동에서 임동면 지례동으로 양자로 들어가 아버지 되시는 수산공 밑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후진 양성을 위해 지례에 사립 소학교를 만드셨다. 그것이 <지례간이학교>다. 간이학교는 해방되기 1년전에 국민학교가 되었으며 해방후 지례같은 산간벽지에 외지의 교장들이 근무 하기를 꺼려 김호길 박사의 부친이 교장으로 임용되어 1946년 부터 1962년까지 근무했으며 수몰된 길산초등학교 전신이다.
김호길 박사의 고모부는 우석공(友石公)으로 김호길 박사의 조부 수산공(秀山公)의 수제자다. 김호길 박사는 고모부 우석공으로 부터 소학과 맹자를 배웠다. 도산국민학교를 졸업한 김호길 박사는 안동중학교에 입학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일본식 영어발음을 하는 선생님과 수학을 모르는 수학선생님에 환멸을 느꼈으며 해방직후 좌,우익 사상논쟁에 학교를 다니는데 흥미를 잃고 2학년 9월쯤 학교를 중퇴하고 몇달 놀다가 의성공고 토목과에 입학한다. 의성공고에는 사촌형이 교편을 잡고 있었다.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지 6개월 만에 6.25가 터져 다시 1년가까이 놀다가 안동사범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수강하다 나중에 정식학생이 되고 이듬해 졸업했다. 그후 1952년, 6·25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이전했던 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문리학과 동기생으로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과 같이 공부했다. 1956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진해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며 교관생활을 하면서 이론물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959년 원자력 연구소 촉탁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이동녕 박사의 지도 아래 중성자빔 발생장치를 설계, 건설하는 일을 맡았다. 1961년 국제 원자력기구(IAEA) 장학생으로 영국버밍엄대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대학 로렌스연구소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이때부터 그는 사이클로트론 분야의 전문가로 미국과 유럽, 동구권까지 그 학문적 권위를 인정 받았으며, 미 메릴랜드대학에서 12년 동안 물리학과와 전자전기공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가속기, 핵물리학과 플라즈마물리학을 연구하며 이 분야의 세계적인 업적을 쌓았다.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겠다고 마음먹고,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 박사는 로렌스버클리연구소 선임과학자로서, 미국시민이 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1983년 국내 과학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 22년 간의 해외체류를 끝내며 영구 귀국하였다. 귀국후 친구인 유혁인(임동 박곡출신 청와대 정무수석.공보처 장관 역임)의 소개로 당시 럭키금성그룹 구자경 회장이 선친(연암 구인회)의 호를 따 고향인 경남 진주에 연암공과대학을 설립 하기로 할때 초대학장요원으로 초빙되었다. 처음에는 4년제 대학 인가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 했지만 정부의 인가 불허로 좌절되었으며, 이후 공대 신설을 추진하던 포항제철의 박태준회장과 인연이 되어 포항공대 초대학장을 맡아 포항공대를 세계적인 명성의 대학으로 발전 시켰다. 1994년 4월 30일 포스텍 체육대회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뛰어난 교육행정가였던 김호길 박사는 유교적 인본주의 가치관의 부흥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배우고 익혀 실천하고 이를 보급시킨다는 뜻을 지닌 박학이문 약지이례(博學以文 約之以禮) 에서 비롯된 *<박약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박약회의 발전에 헌신하였던 것은 물론 국제퇴계학회, 퇴계학연구원, 그리고 한시를 짓는 모임인 난사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 유학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촌음을 아끼지 않았다.
*<박약회(博約會)> 권오봉, 이동승, 이근필, 김호길 등을 발기인으로 하여 발족하였다. 초대(初代) 회장(會長)에는 김호길 박사가 선출되었다. 박약회는 학술 및 강연회 개최, 선현 유적지 답사, 유교 및 전통사상의 보급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수몰전 김호길 박사의 지례 고향집>
고향의 산에 올라 수몰을 앞둔 지례 고향냇가를 바라보는 김호길 박사
지례가 수몰되기 전 1985년 1월 미국에서 큰 아들 종호가 왔을 때 아들과 함께 도연폭포를 지나 지례 고향집으로 가면서 그때의 소감을 한 수의 시로 읊었다
與家兒訪故鄕(여가아방고향)
巖壑幽深미鹿遊(암학유심미록유)
바위산 깊은 골짜기에 노루가 뛰노는데 서산에 해 떨어지는데 나그네의 수심 깊어만 가네
공군사관학교 교관시절
서울대학교 동문(아랫줄 오른쪽이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입학기념 (1952.12) 뒷줄 왼쪽 고등학교 교복입고 찍음 (뒷줄 오른쪽이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
미 로렌스버클리연구소 연구원시절 (1964.6)
영국 버밍햄에서
가족과 함께
은혼식
손자 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포항공대 총장실에서 맏손자와
1967년 동생이 미국을 방문했을때 메릴랜드 그린벨트에 있는 김박사댁에서 (맨왼쪽이 한동대 총장으로 있는 동생 김영길)
부인 권봉순 여사와함께 (권봉순 여사는 서울대 국어교육과 출신으로 김박사와 동기)
김박사의 회갑때 부모님과 함께 1994년 10월
出天의 효자인 김박사가 때때옷을 입고 모친을 등에 업고 있다.
포스코 박태준 회장과의 첫 만남
<박태준 회장과 함께 無에서 有를 창조>
제1회 학위수여식 (1991.2.20)
1985년 8월 17일 착공식
대학설립공사 착공식후 박태준 회장과 김호길 학장
1985년 8월 1일 김호길박사 학장요원 부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와 함께
김호길 박사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포항공대를 설립하면서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수한 석학을 교수로 초빙 20여명의 교수들을 포항공대로 모셔왔다. 그때의 심정을 한 수의 한시로 남겼다
寄海外招聘敎授諸位
大海氷原萬里行(대해빙원만리행)
해외 교수제위님 초빙함에 부쳐
큰바다 얼음평원 만리길을 가는 것은
조순 서울시장과 함께
강영훈 총리와 함께
석사학위 수여식
대처 수상과 함께
대처 영국수상 포항공대 방문
상허대상 수상
정통 퇴계학맥을 이어 온 갈암 이현일 선생의 글귀 김박사는 평소 이 <심사명변>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深思明辯(심사명변) 중용에 나오는 구절로 <신중하게 생각한 후 판단은 명확하게>
학연 체육대회, 고인의 마지막 모습 (1994.4.30)
학연 체육대회, 고인의 마지막 모습 (1994.4.30) 발야구 선수로 참가, 공을 차고 있는 김호길 박사. 이 공을 찬 후 홈으로 달려들어오다 홈 뒷편 콩크리트 옹벽에 머리를 부딪혀 세상을 떠났다. 이 사진이 생전의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김호길 총장 영결식(1994년 5월 4일)
평소 절친한 친구였던 조순 서울시장의 만사
조순 시장은 김호길박사를 한편의 시로 보냈다
高談風發好懷開(고담풍박호회개)
의기 높은 이야기 바람같이 나오고, 회포는 좋아라.
지례 고향의 선산으로 향하는 김호길 박사
무은재(無垠齋) 김호길(金浩吉) 박사 전기 <멋과 빛과 향기를 남긴 인생> 출판기념회 (1996년 6월 20일)
무은재(無垠齋)란 학문엔 경계가 없다는 뜻으로 김호길 박사의 아호다 <무은재>란 호를 쓰기 전에는 지파(芝坡),지헌(芝軒)이란 호를 썻다
김호길(金浩吉) 박사 전기 全3권 <멋과 빛과 향기를 남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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