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가면 담임목사실을 목양실이라고 표시해 놓은 곳들을 봅니다. 목사는 목자요 교인들은 양이라는 의미로 목사를 양을 치는 목자라는 의미로 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목사를 목자로 표현하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 질문하시고 내 양을 치라는 말씀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목자장(벧전5:4)으로 표현한 것으로 예수님은 목자장이시니 사도는 목자요 사도의 계보를 잇는 목사는 목자라는 논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자는 일반적으로 품삯을 받고 주인의 양을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양 한 마리라도 들짐승이나 도적들에게 빼앗기거나 골짜기에 빠져 잃어버리게 되면 그 목자는 양을 변상하여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목자는 자신이 맡고 있는 양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목자의 비유를 많이 드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목자이십니다.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대속물로 내어주시어 우리의 생명을 구하셨으니 그보다 더한 목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보다 우리에게 진한 감동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감동때문인지 목사들이 자신들을 목자로 칭하는 것을 좋아하고 교인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목자란 칭호를 자신이 쓰려면 자신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랍비 등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군중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생각하셨습니다.(마9:36)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이 결코 목자가 될 수 없음과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부담되는 용어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사실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성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들먹이는 종교지도자들이 태반인 것을 보면 이 정도 언어도용이야 애교로 봐 줄 수도 있겠지만 이 언어 도용이 심각한 범죄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보듬고 계시거나 목에 걸고 즐거워 하시는 그림이나 사진을 가끔 보셨을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여 이렇게 안아주고 쓰다듬고 만져주어도 된다는 생각을 목사들이 한다면 그것은 목사라는 직책이 성범죄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제가 공지에 올려 놓았던 성범죄 관련 포럼에 인사말을 하는 이동원 목사가 과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생활을 가졌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성생활이라는 말이 서로 대화하는 것도 포함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왜 굳이 대화와 교제를 성생활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생활이라는 의미를 이런식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그 포럼의 인사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런식으로 해석하면 모든 종교행위가 다 성생활을 갖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당시 이단 종교의 성을 통한 밀교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이 목양실이라고 방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침대와 응접실을 꾸며 놓았다면 그 곳이 어떻게 예수님께서 언급하였던 위험을 무릎쓰고 들에서 양을 지켰던 목자들의 처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목양실이라는 푯말부터 때어 내십시요. 그리고 침대 치우고 오픈된 사무실로 만드십시요. 목사가 피곤하여 의자에 앉아 잠시 존다고 그것이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다 피곤에 지쳐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목양실이라며 밀폐된 공간 잘 꾸며진 침실을 꾸며 놓고 그곳에서 성추행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면서 거룩한 교회라고 주장할 것입니까?
첫댓글 목양실- 목사는 사람, 교인은 짐승? 고로 인권 침해요소가 있슴.
또한 목사집무실을 항상 열어놓아야한다.
어느 목사님은 자신의 사무실은 물론 서랍까지도 열어놓고 누구든 마음대로 사용하게 한다.
그렇게 투명하지는 못할망정 목사방에 시건장치해놓고
여비서 여전도사 여사무원, 여권사 불러다 느끼한 상담한다고 *랄떠는 것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