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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위의 희망』을 찾아낸 조성숙 시인의 시세계
恒山 장 순 휘(시인, 문학평론가, 한마음문인협회 회장)
18세기 프랑스의 문인이자 박물학자인 뷔퐁(Buffon, G.L.L.)은 “글은 사람 그 자신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운문(韻文)이든 산문(散文)이든 모든 문학작품 속에는 작가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쌓아온 학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철학과 삶의 흔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을 경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비현실적 이상주의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역시 작가라는 사람의 범주에 경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경(詩經)에서 ‘시란 마음속에 뜻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詩者 在心爲志 發言爲詩)’라고 ‘시가 사람의 생각과 말’이라고 강조했다. 포우(Poe, E.A.)는 ‘시란 미(美)의 음악적 창조이다’라고 말했다. 릴케(Rilke, R.M.)는 ‘시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감성이 아니고 체험이다’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시(poetry)라는 장르의 문학은 단순한 언어적 나열의 문학이 아니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비유법(metaphor)에 의해서 형성된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는 오묘(奧妙)하고, 심원(深遠)한 미적 감동의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평론(評論;criticism)은 문학작품을 정의하고 분류하고 평가하는 작업으로, 하나의 문학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총체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문학용어 사전에 따르면 평론은 “예술작품에 관하여 의식적으로 평가(evaluation)하고, 감상(appreciation)하는 일”, “분석(analyse)하고, 판단(judge)하는 일”로 규정하여 전문성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의 좋은 자질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선별해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련의 활동을 포함하는 것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 섬세하고 예민한 문학의 한 장르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인의 작품을 문학평론가는 작가와 독자사이에서 시에 담긴 사유(思惟)의 내적 의미와 외적 가치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평가함으로써 문학 그 자체의 성격과 사회역사적 역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비평가의 견해가 특정한 선입견에 입각한 편향된 재해석으로 작가의 진의(眞義)와 문학적 가치를 훼손하는 오류를 저지른다면 씻을 수 없는 문학사의 과오(過誤)로 남는다는 점에서 과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작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insight)을 통하여 작가의 다중적 심리(multi mentality)를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대관세찰(大觀細察)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작가가 아닌 제3자가 작품을 완벽하게 심독(心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인간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기에 헤아릴 수 있는 공유의 범위는 상존한다. 따라서 이번에 첫 시집 『갯벌 위의 희망』을 상재(上梓)하는 아진(雅珍) 조성숙 시인의 시들은 ‘지성과 감성의 사유(思惟)와 삶의 단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랑자적 시각 그리고 계절과 가족사랑 등’ 다양한 소재를 담금질해내는 솜씨에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중독성(中毒性)있는 시적 특성과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 갯벌 위에서 찾아낸 희망이야기
조성숙 시인의 첫 시집 『갯벌 위의 희망』에 발표된 78편의 시를 내용별로 분류하면 제1부 <갯벌 위의 희망>, 제2부 <코스타리카의 오후>, 제3부 <오후의 수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갯벌 위의 희망>은 지성과 감성의 깊은 사유에서 건져올린 인생과 삶의 단상으로 엮은 시들이라면, 제2부 <코스타리카의 오후>은 우정과 추억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 및 형제애가 녹아있다. 특히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느낀 방랑자(pilgrim)의 이방인(stranger)적 관점에서 그려진 시들이다. 제3부 <오후의 수다>는 인생과 삶속에 시간적 흐름을 스케치하여 소중한 변화와 성장을 노래하는 시들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조성숙 시를 평론하가에 앞서서 ‘서문(序文)’에 주목할 필요를 느껴본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시집의 서문은 어쩌면 시로 표현 할 수 없는 자신의 생각을 변호하려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상투적인 인사말보다는 잘 들여다보면 작가의 문학적 강한 의지를 설득하는 내용이 담겨있어서 매우 유의미(有意味)하다. 우선 ‘밀물이 빠져나간 텅 빈 갯벌 위에도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는 터전을 보았으며, 그곳에서 인생의 희망과 삶의 의미를 재발견했다.’고 첫문장이 시작한다. 썰물때의 바다는 바다를 본다기 보다 갯벌을 보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로 갯벌은 바다가 아니다. 아마 바다에 감춰진 땅이라고 보는 것이 솔직하다고 본다면 ‘바닷물이 빠져나간 바다’라는 표현은 모순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구경간다면 밀물시간을 알아보고 가는 것이다. 밀물의 바다가 ‘진짜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성숙 시인은 썰물때의 ‘갯벌’에서 ‘인생의 희망과 삶의 의미’를 재발견했다고 하니 새삼 궁금증을 더하는 평론의 시작이 불가피했다. 과연 갯벌로 다가간 조성숙 시인이 발견한 ‘생명들’은 무엇일까하는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특히 시낭송가이기도한 조성숙 시인은 ‘반복해서 듣고 싶어지는 시가 되고 시낭송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다’고 부연한 점에서 자유시의 자연스러운 내재율과 음운율에 충실할 것으로 사료된다.
●제1부 <갯벌 위의 희망>
제1부 <갯벌 위의 희망>은 인생을 살아온 삶에서 묻어나는 감성적 자기 연민과 사랑에 대한 담백한 표현력을 담은 시들은 첫 시집을 내는 조성숙 시인의 수준이 사유의 훈련을 많이 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갖게 한다. 주제시 ‘갯벌 위의 희망’은 인생을 살아온 허허로운 연륜에서 다시 찾은 “밑바닥까지 부숴낸 갯벌”에서 심지어 “그림자까지 휩쓸고 / 지나간 자리에 / 이름모를 생명들이 남는다”라는 생명을 찾아낸 시인의 눈길에 인간적인 ‘긍정적 심성(心性)’이 깃든 조성숙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성숙 시들은 매우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의욕적이라는 것을 재발견할 수 있다.
밑바닥까지 부숴낸 갯벌 위에서
덩그러니 멈춰선 한가한 돛대들
그림자까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이름모를 생명들이 남는다
먼 바다 지켜보는 뱃머리엔
한낮의 태양만
눈 부릅뜨며 지키고
뜨겁게 달궈진 밀물은
아직 저 멀리있다
허공에 손짓하는
빈 돛대의 춤사위
밀물에 편승할 기회 엿보며
출항할 채비에 바쁜 손짓들
어부의 땀방울
그물 끝에 매달고
만선(滿船)의 희망 찾아
날개짓 한다. -‘갯벌 위의 희망’ 전문-
조성숙 시인이 발견한 ‘이름모를 생명들’은 정말 너무나도 많았다. 게, 소라, 쭈꾸미, 낙지, 문어, 망둥어, 갯지렁이, 민챙이, 조개류, 성게, 해삼, 바다고동, 불가사리 등 일일이 다 호칭할 수 없는 수십종의 생명들이 갯벌 위에서 생존한다는 것을 재발견한 시인은 사실은 자신의 생명력을 재발견한다는 비유적 표현을 쓴 것이다. 인생 썰물의 시간에도 인생 밀물은 기다리며 “출항할 채비”를 한다는 것은 긍정의 정신세계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제4연에서 “어부의 땀방울 / 그물 끝에 매달고 / 만선의 희망 찾아 / 날개짓 한다”에서 여류시인의 섬세한 눈매를 볼 수 있고 기초가 튼튼한 시인의 문장력을 발견한다. 갯벌 위에 기울어져 멈춰있는 배들에게서 “허공에 손짓하는 / 빈 돛대의 춤사위”는 다가오는 밀물을 관조하면서 희망의 깃발을 흔들고있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보여주고 있다. 알고보면 시에서 등장하는 ‘어부’는 우리들 자신이라고 본다. 인생의 ‘배’를 떠날 수 없는 게 유한한 삶의 한계(限界)이기에 참 좋은 시어의 발견이며, 알고보니 인간은 인생을 낚고자 애쓰며 살아온 어부가맞다는 공감을 갖게된다. 주제시 ‘갯벌 위의 희망’이 주는 긍정의 메시지와 인간적 따스함에 조성숙 시인의 첫 시집 『갯벌 위의 희망』은 순항을 시작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심장 속 외로움 감춘
무화과 한 송이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피멍 든 가슴 훔쳐낸
석류의 눈물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리움에 지쳐 녹아내린
양초의 슬픔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기다림이 켜켜이 쌓인
애달픔 한 움큼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달빛 속 눈물
훔치는 것입니다. -‘그리워한다는 것’ 전문-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을 향한 그리움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움의 대체물이 부모라고도 한다. 과연 우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관계의 숙명’이라고 보는 것도 좋다. 조성숙 시인은 그리움의 감성적 색채를 남다르게 변화를 주면서 그리움을 심미(審美)의 실상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무화과’는 청소년의 녹색이고, ‘석류’는 청년의 열정적 적색입니다. 그리고 ‘양초’는 굳건한 중년의 백색이고, ‘애달픔’은 노년의 회색이라면 ‘달빛 속 눈물’은 무색투명한 그리움의 달관(達觀)으로 자기위로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리운 눈물’로 치유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때로 눈물이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제공하여 울고나면 억울했던 감정이 씻기우는 정화감(淨化感)을 느끼게 된다.
산다는 것은
오랜 세월
가슴에 품고 사는
화롯불 속 인두다
고목되어 말라버린 가슴
숯으로 태워내고
비워진 자리 한가득
풍경소리 채워진다
비움은
산야에 울리는 범종소리다
비워내니 맑은 소리다
비워내니 바람이다. -‘비워내기’ 전문-
인생을 산다는 것은 알고보면 깨달아가는 시간의 과정이다. 그래서 인생의 완성도가 깨달은 깊이와 넓이라고 쉽게 표현 할 수 있다. 시 ‘비워내기’는 비교적 짧은 시이지만 담고있는 내공(內功)은 시인의 연륜을 느끼게 한다. “화롯불 속 인두다”는 누구나 공감하는 지나간 치열한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 그 자체를 은유한다. 살아보니 “숯으로 태워내고”라는 점도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자식 키우랴’, ‘일 하랴’, ‘부모 모시랴’. ‘출세 하랴’ 정말 숯검댕이 된 가슴 한 칸씩은 품고 살고있다. 그런데 조성숙 시인은 인생의 문제들이 ‘푸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법(解法)을 제시해준다. 그것이 제3연의 ‘비움’의 독백이 아닐까. “비움은 / 산야에 울리는 범종 소리다 / 비워내니 맑은 소리다 / 비워내니 바람이다.”라는 깨달음을 준다는 점에서 종교적 지식의 수준이 아닌 구도적 해법제시가 담긴 시로 마음에 위로가 된다. ‘비워내기’는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구도(求道)가 제시되어 공감하기에 좋다.
●제2부 <코스타리카의 오후>
제2부<코스타리카의 오후>는 고향 친구들과의 우정과 세상을 여행하며 수채화 그리듯이 그린 색감어린 서정시가 잘 어울어져서 읽기에 흥미롭다. 조시인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살아서 대화하는 듯한 정감은 시적 구성이 아니더라도 한 편의 수채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생이 담겨야 시라고도 한다.
찰랑거리는 잔 속에
뜨거운 마음 스며오고
처음처럼 다정한 눈길의 입속엔
이슬이 넘친다
마주치는 손길에
짙푸른 사랑이 일렁이고
넉넉한 쥔장의 인심은
부개동의 사랑방이 된다
들어서는 마음들은
제각각 사연들
발길은 처음처럼 그 자리
광어 두 마리다. -‘부개동 사랑방’ 전문-
시 속에 드러나는 활성화된 표현이 개성있기에 살펴 본 시가 ‘부개동의 사랑방’이다. 소주잔에 술이 부어지면 가만히 담겨있는 것을 보는데 조성숙 시인은 “찰랑거리는 잔 속에 / 뜨거운 마음 스며오고”라고 썼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느낀 마음인데 ‘찰랑거리는 것은 무엇인가?’, 스며오는 마음은 ‘왜 뜨거운가?’를 질문해보면 재미있는 시다. 소줏잔을 받고서 방금 부어받은 잔 속의 액체는 분명히 식탁위에서 3초간 찰랑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부어준 잔에 액체의 온도는 섭씨 4℃ 인데 뜨거운 마음이 담겨져 있다고 표현한 음주의 일상이 알고보니 살아있는 동영상을 찍어놓은 것이다. 시의 맛을 여기서 느낄 때 좋은 시를 창작해내는 깊은 사유(思惟)의 힘을 나누게 된다. 시 ‘부개동의 사랑방’은 시어적으로 잘 정돈된 시라고 평하고자 한다.
시의 언어라는 것은 일상의 언어와 어휘 자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언어의 쓰임이나 기능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언어 역시 일상언어에 뿌리를 둔 언어이지만, 일상언어를 좀 더 정교하고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시인의 표현이 남다른 것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시인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사물과 의식의 이면을 포착하는 능력을 계발해온 문학인이다. 때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에서도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는 문학인이기에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시인의 예리한 눈이라도 포착한 세계와 사물의 아름다움과 신비함 그리고 진실한 현상을 기존의 언어로는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결코 쉬운게 아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고뇌하고 사색하고 심지어 자학의 변인(變因)도 가지게 된다.
푸르던 매산등
오가던 세월 지나
흑백 사진 속 흐릿한
친구들 얼굴
어린 시절 놀던 생채기에는
훈장으로 남아있다
골 깊어진 인생의 무게는
짊어진 만큼이나 무거운데
친구들 만날 설레임에
가벼워진 마음은
바람따라 내달린다
보고파서 달려간다
하회탈같은
넉넉한 웃음으로
함께 익어가는
친구들이 있어 참~ 좋다. -‘매산등 친구들’ 전문-
조성숙 시인의 순수한 수채화 색깔이 가장 잘 드러난 시가 ‘매산등 친구들’로 본다. 그대로 죽마고우(竹馬故友)들과의 첫 우정과 함께 해온 추억거리와 또 함께 익어가는 세월의 모든 것이 너그럽게 담긴 시다. 흑백 사진 시대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로 추정된다면 어언 50년 우정의 세월이다. 아직도 그때 친구들과 함께 인생을 걷는다는 것은 현대인의 삶에서 흔치않은 모습이기에 부럽다. “골 깊어진 인생의 무게는 / 짊어진 만큼이나 무거운데”에서 눈시울이 찡한 것은 부모님 세대의 가난을 이어받아서 잘 살아보겠다고 애쓰면 살아온 사진 한 장 찍어낸 표현이다. “하회탈같은 / 넉넉한 웃음으로 / 함께 익어가는”에서 더 이상 좋은 친구들은 없다고 조성숙 시인은 단정(斷定)을 내리고 있다.
이제 모습은 제각각
거북이 등같은
갑골문자 새겨져있지만
개구쟁이와 수줍던 소녀들이
반백(半白)되어 만난 인생은
아직 영롱한 비누 풍선되어
날아 다닌다 -‘우이동 계곡에서 추억 하나 더’ 일부분-
이 시는 ‘우이동 계곡에서 추억 하나 더’의 제2연이다. 인생 60여년이 담긴 은유적 표현에서 숙연해지는 그리고 아련해지는 기분에 휩싸이는게 사실이다. 삶을 견뎌온 모습은 각기 다르더라고 이순(耳順)이 넘으면 “거북이 등같이” 여기저기 주름이 깊이 생기면서 “갑골문자 새겨져있지만” 서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없다. 보기에 따라서 늙어서도 곱고 이쁠 것으로 생각했던 어느 친구가 의외로 주름깊게 갑골문자를 새긴 얼굴이라면 잠시 실망은 해도 그 얼굴에서 벌써 고교 시절 옛 모습을 찾아내서 더 반가운게 사실이다. 어디 늙지않고, 죽지 않는 것이 있다던가? 세상사 만물은 생성(生成)하고 소멸(消滅)하는게 진리이기에 대한민국의 대표지성 이어령 교수님은 생존에 늘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와 “아모레 파티(삶을 즐겨라)”를 강조하셨다. 무엇보다도 조성숙 시인의 시가 젊고 싱싱한 것은 이런 우정어린 친구들이 주위에 많기 때문이고, 독자들께서도 친구들과 잡은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조언을 드린다.
파란 잉크병이
통째로 쏟아져버린
하늘 끝 언저리
커피 향기 짙게 배인
따스한 오후
대바구니 가득
달콤 쌉쌀한 행복의 향기
커비 한 모금 물고
태양의 보석따라
초록의 융단 위로 들어선다
손바닥 가득
채워지지 않아도
얼룩진 손톱밑 세월이다. -‘코스타리카의 오후’ 전문-
조성숙 시인의 시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재적으로 이국적 스케치가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한다. 각별히 세계여행을 즐기는 삶의 여유는 시작(詩作)을 통하여 시인의 본능적 기록으로 완성미를 더 한다. ‘신들의 정원’, ‘화산의 짐꾼’, ‘사이판의 여정’, ‘우도의 파도’, ‘써니 레인’ 등의 여행시는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시간과 장소에서 조성숙 시인은 시적 영감을 사진과 동시에 찍어낸다는 것은 참 좋은 습성의 특장이다. 생떽쥐베리는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가볍게 여행해야 한다”고 했고, 마르쉘 푸르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데 있다”고도 한 것처럼 조성숙 시인은 “행복하게 여행가서 더 행복하게 시를 쓰고 온다”고 말할 수 있는 방랑자(pilgrim)적 분위기에서 이방인(stranger)의 눈(eye-sighting)으로 인생을 스케치하는 ‘시인 화가’의 개성을 가지고도 있다.
시린 잇몸 사이로
외로움 한가득
허기진 엄마 뱃속
달래주던 홍시 한 입
빨간 홍시 속에
비쳐지는 엄마 얼굴
골 깊은 주름
없어진 치아는
주린 배 움켜쥐고 기다리시던
엄마의 간절한
연명(延命)이었다. -‘엄마의 홍시’ 전문-
‘엄마의 홍시’에서 조성숙 시인의 효심(孝心)이 차마 눈물겹다고 하겠다. 병상의 어머니가 잇몸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말캉말캉한 ‘홍시’였기에 그것을 주식(主食)으로 배고픔을 달래시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승의 끝에서 홍시만 먹을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직접 쳐다보지를 못했다고 고백한다. 홍시를 잘 씻어서 접시에 담아 드렸을 때 표면의 물기에 반사되었던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루라도 더 사시기를 바랐던 딸의 효성으로 힘겹게 쓴 시이기에 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시 ‘형제 사랑’에서 보여주는 형제애(兄弟愛)는 보통 가정의 평범한 정감보다 진한 정서적 연계성이 느껴진다. “작지만 큰 사랑 / 가볍지만 / 무거운 사랑 // 자신은 / 양초되어 / 녹아내리는데 // 행복이라고 / 미소 짓는 / 사랑 // 넘치는 마음 / 아픈 사랑이다 / 그냥 눈물이 난다.”에서 조성숙 시인은 무려 ‘사랑’을 5번이나 직설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형제애가 각별하다는 의식이 내재되어 남다른 가정사(家庭史)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이 반복되면서 강조된 점은 기독교적 가풍(家風)이 엿보인다. 한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사랑’한다면 “그냥 눈물이 난다.”라는 시인의 함축에서 ‘누나로서의 행복’이 드러내고 세상 사람들에게 형제자매간 ‘눈물나게 사랑하라’고 역설한다.
●제3부 <오후의 수다>
제3부<오후의 수다>는 삶의 사계절에 느끼는 풋풋한 인간의 정으로 다져진 시인의 다양한 시각을 담아서 사람냄새가 나는 시들의 마당이다. 민감한 계절의 변화를 시로 읽어낸 점에서 세월의 덧없음도 새삼 느끼는 연륜이 품격있게 다가온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은 시로 승화하여 참 아름답게 수(繡)를 놓았다는 점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다.
우리동네 봄잔치에 초대 받았다
잔치는 온통 눈길의 호사(豪奢)다
푸른 하늘빛조차 화사하게 물들인
벚꽃의 흩날린
물빛 속 자태까지 샛노랗게 물들이는
병아리 입술같은 개나리꽃
자나가는 행인의 눈길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철쭉꽃의 수려함은
가히 잔치 중 백미(白眉)다
동백꽃은 벌써 저만치
소담한 꽃무덤 만들고
꽃진 자리
사랑의 정표만 남겼다
앵두꽃 복숭아꽃
서둘러 꽃잔치 파장하고
푸른 보자기에
잔치끝 이야기 주워 담는다
눈부신 목련화는
웨딩드레스 자락 땅바닥에 드리우고
석양 노을빛 손잡고
푸른 옷 갈아입을 채비한다
화려한 꽃잔치에 덩달아
나도 봄 치장한다. -‘우리동네 봄잔치’ 전문-
삶을 영위하는 터전의 봄을 이보다 더 화려하고 진면목있게 쓴 시가 있을까? 조성숙 시인은 이 시에서 어수선한 것같은 시적 분위기를 연출을 했다. 그리고 결국 살고있는 동네의 봄은 꽃잔치라는 총천연색 필름으로 찍어서 멋진 풍경화를 그려냈다. 특히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까지”라는 객관적 표현에서 시인의 동네가 상상을 초월한 객관적 아름다움을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방증(傍證)을 끌어낸 것이다. 참으로 시적 연출이 교묘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봄의 끝물에 꽃이 떨어져 생성된 ‘꽃진 자리’는 낙화(洛花)라고 하더라도 초라하지 않다는 삶의 가치를 그려준 것이 참 좋았다. 결과적으로 시인 자신이 “나도 봄치장 한다”라는 결구에서 계절의 봄은 여성적 탐미(耽美)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봄’으로 승화시킨 삶의 긍정을 재발견해 주었다.
숨 막히는 더위 속에
바람타고 그대가 온다
처서를 붙잡고
치맛자락 나풀거리며
창문 앞을 서성거리는
코스모스의 미소가 예쁘다
가만히 얼굴 내밀어
그대와 입맞춤한다
아~ 가을이 오나보다. -‘가을이 오는 시간’ 전문-
조성숙 시인의 계절 감각은 의인화(擬人化)된 점이 특징적이다. 그만큼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 가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통상 가을이 주는 풍경은 열매를 맺는 풍요가 있지만 잠시후 ‘가을걷이’가 끝나는 시점이면 ‘허무’와 ‘공허’가 엄습한다고 경험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설익은 여름이 그립기도 하고, 굳이 “푸른 보자기에 / 잔치끝 이야기 주워 담는다”는 쓸쓸함에 젖는 것이 힘겹기도 한다. 장순휘 시인의 ’인생 알고보니 1‘에서 “봄이 그릇에 담기면 / 봄이 끝이다 / 봄이 담긴 그릇은 / 찬란한 슬픔이다 // 여름을 실어오는 / 선선한 바람결에 / 때이른 낮더위가 / 새삼스런 눈물이다 // 알고보니 인생은 /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다 / 그 사이에 삶이 끼어들어 /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된다“고 하여 결국은 인생이 가을로 겨울로 가는 시간의 여정이라고 노래했다. 그게 인생 아닌가? 계절의 변곡점에서 시인들이 감수성이 발동하고 많은 시가 쓰여지는 사유는 세월 앞에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 때문이다.
◆ 갯벌 위에서 찾아낸 조성숙 시인의 시와 꿈
2022년 임인년(壬寅年)의 첫 시집 『갯벌 위의 희망』을 상재한 아진(雅珍) 조성숙 시인의 시가 장차 성장(成長)의 여지를 가득 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갯벌 위의 희망』에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을 것으로 확신한다. 사실 등단이후 첫 시집을 낸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없이는 쉽게 도전하기 어렵다. 세상에 내놓기에 습작같다는 자괴감에 많은 초보시인들이 오랜 시간 망설인다. 그러나 조성숙 시인은 첫 시집 『갯벌 위의 희망』에서 기우(杞憂)를 털고 인천 시단(詩壇)에 당당하게 가식없는 자신만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기성 시인들에게 참신한 조성숙 시인의 다양한 시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자극제의 역할도 기대하게 된다.
시에 어디 나이가 있는가? 시를 사랑할수록 젊어지는 것이 시인이다. 이제 조성숙 시인의 시가 제2집, 제3집이 더 해갈수록 한국문단에 신선한 바람이 일렁이기를 기대한다. 세네카의 명언에 “목표라는 항구를 모르는 배에는 순풍 조차은 불지 않는다”가 있다. 조성숙 시인이 살아오면서 시의 사랑과 시인을 향한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상황을 극복한 긍정적 정신’의 존재론적 탐구가 첫 시집 『갯벌 위의 희망』에 오롯이 잘 담겨져 있다고 결론짓고 싶다. 앞으로도 인생의 노련미에서 뿜어나오는 조성숙 시인의 시가 왕성하게 창작되어 삶을 재발견하고자 했던 우리들에게 희망이 될 것을 기대한다. 아진(雅珍) 조성숙 시인의 눈부신 작품 활동을 기대하며, 문운(文運)과 건필(健筆)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