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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오 | 오마이뉴스 |
남사예담촌을 나와 진주를 향해 한참을 달리다 '성철스님 기념관'이 있다. 그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 기념관은 성철스님의 친딸 불필 스님과 원택 스님을 비롯한 문도 스님들이 큰 스님의 뜻과 덕을 받들어 대중들을 위해 작은 역할이라도 하려고 탄신 100주년 사업의 하나로 2011년 지었다.
연화좌대 위에 올라선 여덟 개의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데 '올바른 여덟가지 길'을 상징하고 있다. 양쪽 벽면에는 성철 스님의 출가송과 오도송이 지름 3m의 크기로 조각됐다.
기념관 1층은 참배의 공간으로 해인사에서 주장자(柱杖子)를 들고 있는 성철 스님의 대리석 법상이 놓여 있으며 2층은 참선과 기도, 정진, 강연을 할 수 있는 강당 퇴옹전이 마련됐다.
▲ 성철스님 사리탑 겁외사 앞마당에 있는 성철스님의 사리탑 | |
ⓒ 강상오 |
성철스님 기념관 길 건너에는 성철스님의 생가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겁외사'가 있다. 겁외사는 성철스님의 상좌인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세운 절이다.
겁외사 입구는 18개의 기둥으로 된 누각인 '벽해루'다. 벽해루를 지나면 앞마당에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있다. 장엄한 성철스님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성철스님의 사리탑을 지나 해근문을 통과하면 성철스님의 생가가 나오는데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성철스님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은 '포월당'이 있다.
나는 평소 성철스님이 하신 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의 뜻에 대해서 궁금했었다. 나 나름대로 해석한 것은 있으나, 그것이 맞는지 궁금했었다. 4월30일 성철스님 기념관을 들르게 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본다.
1)원래 이 말은 8세기 중엽 당(唐)나라 청원(靑原) 선사의 말로서 -
"내가 30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런데 후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깨침에 들고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제 정말 깨침을 이루고 보니 전과 같이 산은 그대로 산이었고 물은 그대로 물이었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의 견해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이를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하겠다" 라고 한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것을 종정수락법문으로 1981년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추대됐지만 취임식에 나가지 않고, 대신 보낸 것이다.
2)인터넷에 아래와 같이 계속되는 시귀가 보인다.
山是山兮 水是水兮(산시산해 수시수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日月星辰一時黑(일월성신일시흑) 해와 달이 일시에 암흑이구나
欲識箇中深玄意(욕식개중심현의) 만약 이 가운데 깊은 뜻을 알고 싶다면
3)잘 이해가 안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용있겠는가? 하더니 결국 산은 산이요하는 것으로 연결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다른 글에서 yangsi는 선지식에서는 이해하려 하지 말고 실제로 자기가 그것을 봐야 한다. 어떤 설명을 붙이더라도 그 설명은 여전히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흔히 하는 이야기지만 그리고 깨닭음의 어느 단계에서는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단계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필요하지 않다.
4)위시를 소개한 미소만들기는
마음이 복잡하면 산은 산으로 안보이고 물은 물로 안보인다. 집착없는 마음으로 평온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자세하게 설명한다.
자신의 부정을 통하여 다른 것에 몰입되게 될 때
즉 편견없이 만물을 제대로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을 깨우친 후에는 현상적으로 같은 것을 보더라도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즉 꿈 꾸기 전에 모든 만물을 상대적인 이분법적 논리로 보았다면.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평등하게 볼 수 있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죠.... 꽃 과 똥 이 있습니다....
우리는 꽃은 아름답다.... 똥은 더럽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자의 꿈 혹은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의식에 변화가 오면. (긍정적인 측면으로)
꽃 과 똥은 서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꽃은 꽃 자체로만 보아야지.... 아름답다라는 편견(비교)이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이죠.
물론 똥도 마찬가지고요..
요컨대 비교편견없이 물 자체로 보면 꽃이 아름답지 않고 똥도 더럽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5)kbs1tv 방송을 소개한 깊은 산은 방송 내용인지 본인의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개인의 잣대로 대상을 왜곡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라고 한다.
6)성철스님을 시공한 원봉스님은 책에서 자신의 모순이 없으면 타인의 모순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타인의 모순 내지 잘못을 보는 것은 자기에게도 모순 내지 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 같다
사견)
나는 전에부터 1) 당나라 청원선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뻔한 것을 사춘기나 청년기의 어느 때에 인식론적 회의를 하게 된다. 예컨대 과거의 나를 구성한 세포가 빠지고 나날이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가 아니다. 고로 결국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와 씨름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면서 이런 이야기가 씨 잘데기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라고 관념할 실체는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돈을 차입해 놓고 자기는 그 전 사람이 아니니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러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산과 물이 다른 것은 누구나 아는 자명한 상식이다. 그러나, 물이 비가 내려 숲을 만드니 구별이 안 된다고 따라서 산도 물이고 물도 산이다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불교에 입문한 분들은 절대를 추구하면서 상식을 거부하고 인식론적 회의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 한계를 깨치는 것이 청원선사의 뜻이 아니였을까.
불분명한 경우에 발생사적 원류를 추적해서 이해하는 일이 많은 바, 내 생각이 원류에 일치하는 점에서 맞지 않나 싶다.
4)는 비교편견없이 물 자체로 보면 꽃이 아름답지 않고 똥도 더럽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가 똥이 꽃처럼 향기가 나니 똥에 코를 박고 웃을 것인가? 공룡의 똥을 발견한 과학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0.0001%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특히 그런 예외적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 속에서는 (똥은 일반적으로 더러운데) 똥도 더럽지 않더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이유로 비교편견없는 것을 강조하는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5)는 개인의 잣대로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6)은 타인에 단점을 보는 것은 나의 편견이다라는 것 같다. 다 좋은 말이나 문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이런 뜻으로 알아듯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라 하셨다고 한다.
火裏木馬步步行(화리목마보보행) 불 속의 나무 말이 걸음걸음 가는도다= 나무 말(木馬)이 뚜벅 뚜벅 걸어서 불 속으로 들어가 다 타고난 뒤에 내가 말이었느니,내가 무엇이었느니, 해 본들 무슨 소용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