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의 죽음인들 어찌 한 죽음에 있어서 한(恨)이 없으리요마는 그래도, 너무도 기가 막힌 이 여인의 한 많은 사연을 함 들어보소…
띠 동갑(?)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애틋이 키워온 사랑이 만개되어 왕자의 탄생이란 사랑의 결실을 맺고, 이어 나라의 국모 자리까지 올랐는데…
탐탁하지 않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란 이유로 심한 고부갈등과 국왕인 지아비를 둘러싼 여인들의
투쟁에 희생양이 되어 폐위당하고, 사가로 쫓겨난 뒤에도 어린자식의 모습을 지켜보지도 못한 채
젊디 젊은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훗날, 이러한 생모의 죽음을 모르고 성장한 자식이 조선의 국왕이 되었으니 조선조 10대 연산군이다.
(※폐비윤씨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이란 說도 있다.
종편방송의 TV드라마에서는 성종의 모친 인수대비 사가시절 집에서 부리던 가비(家婢)출신으로 어린 자산군을 일찍
부터 보필하였던 여인으로 자산군을 사내로 만들어 준 덕(?)에 후궁이 되어 궁에 들어왔고,
이후 공혜왕후의 승하 때 회임 중이었으므로 연산 출산 후 왕비가 되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부친 윤기견의 함안윤씨의 세보 및 초배 양성이씨, 계배이자 생모인 고령신씨의 족보를 살피어 類推할 때 1450~ 1455년 사이가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폐비윤씨의 태실 태지문에 1455년생으로
되어있다. 어릴 적부터 가까이 하였다 해도 띠 동갑까지는 좀 무리가 있어 보여 이곳에서는 태지문을 따른다.)
-> 회묘(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 묘소: 서삼릉 내)
♣폐(廢)제헌왕후 윤씨( ? ~ 1482): 본관 함안, 세조 원종2등공신 예천군수, 판봉상시사 윤기견 따님으로 1473(성종 4년) 숙의로 봉해진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연산군 회임 중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투기로 인한 부도덕을 문제삼은 정적들에 의해 폐비가 되어 출궁당한 후 결국 사사되었다.
처음 경기도 장단(현 망우리)에 묘비조차 없이 매장되었다가 후에 ‘윤씨지묘’로 비석을 세웠고,
성종 19년 양주 천장산(현 경희의료원터)으로 천묘되었다.
연산 10년, 아들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조성 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해 다시 격하되면서
‘회묘’가 되었다. 1969년 10월, 경희의료원이 묘역으로 들어오면서 지금의 서삼릉지역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 경희대가 있는 회기동(回基洞)은 폐비윤씨의 ‘회묘’에서 유래된 동명이란다.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같이 위엄이 당당하다. 오히려 조선 초기(개국 후 150년 지난 1450년 전후
까지)에 조성되었으므로 문무인석을 비롯한 모든 석물들이 더 크고 아주 멋지다.
아들 연산은 비운의 모친 무덤을 회릉(懷陵)으로 만들어 주었고, 곧 이어 중종반정으로 다시 폐위되어 ‘회묘’가 되었어도 우리네 조상님들 옛날부터 남의 묫자리 건드리면 동티난다하여 특별한 원한관계나 나라의 명령이 있지 않는 한 파묘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이름만 회묘로 깍여서 불리게 되었을 뿐 모습은 왕릉으로서 조금의 손색이 없는 훌륭한 陵으로 남았다.
-> 회묘 석물 (어느 왕릉에 못지않는 규모를 보이고 있다.)
이 여인의 한(恨)을 엿보기 위해서는 폐비윤씨의 입궁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행로와 성종과 주변
인물, 그리고 훗날 생모의 죽음을 빌미로 훈구세력과 사림을 한꺼번에 초토화 시키며 폭군으로 변모
되어 삶을 마감한 연산군의 생을 함께 재조명해봐야만 할 것이다.
야그의 첫 등장은 인수대비의 차남인 자산군 성종이 되시겠다.
-> 성종의 선릉이다. (강남 노른자위에 계비 정현왕후릉 하단에 있다.)
당시 자산군(13세)이 친형 월산대군(16세)은 물론 예종의 적자인 제안대군(4세)까지 제치고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은 세조의 정희왕후(52세), 모친 인수대비(33세) 및 장인 한명회(55세)의 강력한 후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막후에서 준비(?)되어 있었던 성종은 예종이 승하하자 당일
날인 1469년 11월 2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보위에 오른다.
즉위 후 정희대왕대비(할마마마)의 수렴청정을 7년간 받았는데, 이 기간에 우리 나랏님 완존 어린나이
부터 엉뚱한 곳으로만 장족의 발전을 보이셨으니… 재위 25년에 왕후님 세 분에서 2남 1녀, 열 분의
부인에서 14남 11녀를 두셨으니 조상님 태종과 세종에 버금가는 절륜의 파워를 과시하신다.
(기래서일까? 재위는 25년 이었으나 보령 겨우 38세에 일찍 눈 뜬 주색으로 진이 빠지고, 기가 쇠하여지셨는지 속절없이 가버리셨다.)
♣폐비윤씨의 입궁에서 죽음까지의 기록이다. 성종 즉위 후 3년이 지나 17세에 이르러…
▶1473(성종 4년) 3월, 故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을 숙의(淑儀)로 맞아들이다.
(이미 성종은 1467년에 혼인하여 1469년 왕비에 책봉된 공혜왕후가 있었으나, 왕비는 이 때 이미 병이 있었다.
그 해 7월에 병이 심해지자 거처를 친정으로 옮기었다가 일시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12월에 다시 재발되어 창덕궁 구현전으로 옮기었으나 이듬해 4월, 1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1473(성종 4년) 6월, 병조참지 윤호의 딸(후 정현왕후)을 들게하여 숙의(淑儀)로 삼다.
(여기에서 이미 비극은 시작되었다. 일찍이 1월에 두 명 모두를 종2품 숙의로 들일 예정이었지만,
비록 두 분이 성씨는 같았어도 한 쪽은 그저 그러한 집안 함안 윤문 출신으로 당시 19~ 22세(?) 정도이었고,
다른 한 쪽은 세도가 파평 윤문 윤호의 여식으로 당시 12세이었다.)
▶1474(성종 5년) 4/15일: 사시(巳時:오전10시경)에 공혜왕후가 창덕궁 구현전에서 흉서하다.
▶1475(성종 6년) 5/20일: 왕자 이효신(李孝信)이 卒하였다.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이다.
(※이 왕자가 폐비윤씨의 첫 아들이다. 역으로 계산하면 1475년 정월에 태어난 것인데, 그렇다면 회음된 것이
공혜왕후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실록에 탄생에 대한 기록은 없고 죽은 기록만이 한 줄로 남았다.)
▶1476(성종 7년) 1월,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다.
▶1476(성종 7년) 7/11일: 의정부에 전지하여 숙의윤씨를 중궁으로 정하는 일을 中外(널리 모든 곳)에 효유(曉諭: 깨달아 알아듣도록)하게 하다.
▶1476(성종 7년) 7/28일: 대왕대비가 중궁 책봉 뒤의 대비전 상수(獻壽)에 대해 허락하지 않다.
(上壽 = 獻壽 -> 장수를 비는 의미로 잔을 올림)
▶1476(성종 7년) 8/09일: 인정전에 나아가 숙의윤씨(22세)를 중궁으로 封하였다.
▶1476(성종 7년) 11/07일: 원자가 탄생하여 대사령과 백관의 하례를 시행하기로 하다.
▶1477(성종 8년) 3/29, 30일: 대왕대비의 명으로 중궁을 폐하는 문제를 논하다.
-> 중궁의 침소에서 비상과 굿하는 서책이 발견되어 숙의 끝에 빈(嬪)으로 낙점하였다.
-> 대부인 신씨는 작첩을 회수당하고, 삼월이는 교형, 사비는 장 1백대에 변방 종이 되다.
▶1477(성종 8년) 6/01일: 중궁 탄일에 하례를 정지시키니 백관이 표리(옷감)를 올리다.
▶1478(성종 9년) 1/01일: 중궁이 편찮다 하여 회례연(신년하례식)을 정지시키다.
▶▶1478(성종 9년) 3월(?): 중궁의 두 번째 왕자가 탄생하였다.
(※원자에 이어 둘째 왕자가 태어났건 만, 원자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게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 왕자는 이름조차 남기질 못하였고, 어미가 쫓겨난 후 10일 만에 卒하였다.)
▶1479(성종 10년) 6/01일: 중궁 탄일이었는데, 하례를 정지하고 표리(옷감)만 올렸다.
▶1479(성종 10년) 6/02일: 대신들과 의논하여 중궁(28세)을 폐출케 하고, 반대한 승지들은 육조의 참의로 개차하다. 그 날 폐출 교서를 내리고, 종묘에 고하였다.
(이 날 모든 대신들은 별궁으로 폐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국왕은 이미 대비와 의논이 끝난 일이라며 폐출시킨다. 폐출된 중궁은 소교를 타고 사제로 쫓겨나갔고, 반대하던 승지들을 벌하였다.
이어 사간원, 사헌부가 합세하여 왕비의 죄에 대해 듣기를 청하였고, 홍문관 직제학 최경지와 육조 판서 및
참판들과 왕족 은천군 이찬, 옥산군 이제 역시 중궁의 폐출을 반대하였으나 폐출의 구체적인 이유는 승정원
에서 들으라 하며 중궁 폐출 교서를 내리고, 왕비를 폐한 일을 종묘에 고하였다.)
▶1479(성종 10년) 6/03일: 대사헌 박숙진, 사헌부, 사간원이 합세하여 폐출된 중궁을 별궁에 두도록
건의하나 듣지 아니하다.
▶1479(성종 10년) 6/05일: 홍문관 직제학 최경지 등이 폐출 반대를 아뢰자 중궁을 폐출시킨 연유를
선정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직접 알리고, 폐출에 반대상소를 올린 성균관 유생 허형 등 65인을 하옥
시키다. 여기서 성종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직접 이유를 설명한 실록의 기록이다.
(前略 -> 후궁에서 중궁이 되었으나 내조의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지어 지난 정유년(1477년)
몰래 독약을 품고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음모가 들어났을 때 폐하려 하였으나 조정대신들이 합사해서
청하여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결단하지 못하였으나,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아니하고, 실덕함이 더욱 심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 엄씨집과 정씨집이 서로 통하여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다고 거짓내용의 언문을 만들었고,
- 나를 볼 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 초부의 아내라도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비로써 그러하지 못하였고,
- 거짓 문서로 본가에 통하여 ‘주상이 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을 편안
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일러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허물을 뉘우치겠다고 맹세하더니만 거짓으로 속이는 말이었다.
- 조회를 받는 날에도 비(妃)는 내가 조회를 받고 돌아온 뒤에야 일어나니, 이것은 부도(婦道)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내가 살아있을 때에야 변이 없겠지마는, 내가 죽으면 난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 後略)
▶1479(성종 10년) 6/12일: 왕자가 졸(卒)하였는데, 폐비윤씨 소생이었다.
▶1480(성종 11년) 10월, 의정부에 숙의윤씨(19세)의 왕비간택을 중외에 효유하라 전지하다.
▶1480(성종 11년) 11월, 왕비를 책봉하고 교명, 책보, 명복을 내려주다.
▶1482(성종 13년) 8월, 의정부, 육조, 대간이 대사헌 채수와 권경우가 폐비윤씨를 옹호한 죄에 대해
논의하고, 채수와 안윤손을 국문하고 문절은 의금부에서 고신하였다.
▶1482(성종 13년) 8/16일: 좌승지 이세좌에 命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서인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 이세좌 묘소(충북 괴산): 윤비에게 사약을 전해 준 소식을 듣고 부인 조씨는 “우리 자손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미가 죄없이 죽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는가?”한탄하였다고 한다.
역시 1504년 연산의 갑자사화에 이세좌와 세 아들, 삼촌 이극균까지 광주이씨 남정네들이 참화를 입었다.
-> 종침교 표지석( 종로 내자동 223, 기념물 180))
Tips; 종침교( 양천 허부인의 지혜): 폐비윤씨를 폐한 후 사사하려 논의할 때, 허종은 우찬성(의금부도사),
아우 허침은 세자시강원 필선(형방승지)로 입궐의 명을 받았으나, 허부인이 아우들에게 금일 참가한 이들은
훗날 큰 화를 받을터이니 부디 부름에 응하지 말도록 사람을 넣었다.
허종은 입궐 중 대궐 앞 다리에서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입궐하지 아니하고, 아우 허침은 조모상을 당했다며 불참한 덕에 형제가 모두 갑자사화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후에 다리이름이 종침교가 되었다.
훗날 형제 모두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형은 우의정, 아우는 좌의정까지 올랐다.
▶1482(성종 13년) 8/17일: 의금부에서 윤씨의 어미 신씨와 윤구는 장흥, 윤우는 거제, 윤후는 진도에 유배하도록 아뢰었으나, 윤후를 제주도로 유배하도록 고쳐서 명하였다.
윤씨의 염장에 있어서 승정원이 아뢰기를 택지와 택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산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예조에 명하여 장지와 장례일시를 택정하게 하였다.
또한 대비의 분부로 관곽을 내려주고, 여의(女醫)로 하여금 여러 일들을 돌보게 하였다.
폐비윤씨는 유배지 경기도 장단(현 망우리묘지)에 묘비조차 없이 매장되었다.
▶1483(성종 14년) 2월, 경복궁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다.
▶1484(성종 15년) ‘윤씨지묘’라는 묘비 세우도록 성종이 허락하다.
▶1488(성종 19년) 장지의 풍수가 불길하다는 지적에 한성부 천장산(회기동)으로 이장하다.
▶1494(연산 즉위) 12월, 성종(38세)이 승하하자 연산이(20세) 즉위하다.
▶1495(연산 1년) 3월, 성종의 선릉 지석(誌石)초안을 보고 생모가 폐비윤씨임을 알게 되다.
▶1504(연산 10년) 3월, 폐비를 제헌왕후로 추증하고 묘를 높여 ‘회릉(懷陵)’으로 하다.
-> 회릉 석물 02 (무인석의 웅장함이 대단하다.)
▶1504(연산 10년) 03~ 10월, 갑자사화로 훈구와 사림 모두의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다.
▶1506(연산 12년) 9월,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정이 성공하면서 연산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가고, 폐비윤씨의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된다... 여기까지.
-> 연산군 강화 유배지(강화 교동)
폐비윤씨가 윤호의 딸(후 정현왕후)와 함께 간택후궁인 숙의로 궁에 들어올 즈음 이미 공혜왕후는
병이 깊었다. 성종은 당시 17세의 나이로 막 여인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그 앞에 19~ 22세(?)의
함안 윤숙의(폐비윤씨)와 12세의 파평 윤숙의(정현왕후)가 있었던 것이다.
두 분 윤숙의 사이에서 여인으로서는 파평 윤숙의가 게임이 될 수 없었었지만 배경에 있어서는 미미한 집안의 함안 윤숙의 쪽은 어미의 사촌이 당시 영의정 신숙주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파평 윤숙의는 내명부의 최고 어른이신 파평윤문의 대모이신 정희대왕대비의 친척으로 2살 때부터
대비가 궁에서 직접 소일삼아 키어왔었고, 당시 병조참의인 부친과 이조판서인 윤필상 등 권문세도
파평윤문의 여식이었다.
두 분의 간택후궁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엄귀인과 정귀인 두 여인이 성종이 채 어른이 되시기 전부터
모셔왔다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고, 어쨌든 함안 윤숙의는 자신의 열세함을 미모와 함께 ‘순풍, 순풍’ 왕자생산 공장으로써의 능력까지 발휘하며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듯하다.
실록에 간단히 한 줄로 표현되었지만, 성종 6년 5월에 죽은 왕자 이효신은 연산의 친형이다.
즉 공혜왕후의 승하는 성종 5년 4월 15일이고, 이듬해 5월 함안 윤숙의가 낳은 왕자 이효신이 卒하였다. 기록은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만에 죽었다고 되어있다.
함안 윤숙의가 왕자 이효신을 회임하였을 때는 = 다섯 달(150일)+ 임신기간(280일) => 430일.
성종6년 5월에서 430일 전으로 돌아가면 성종5년 2월 중순이다...
공혜왕후의 죽음이 임박하여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삼전(三殿: 정희대왕대비, 인수왕대비, 안순
왕후)대비들까지도 걱정으로 하루걸러 왕비의 안위를 살피고 있을 때 회임한 것이다.
성종 7년,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이 시작되면서 정희대왕대비, 인수대비와 첫 번째 갈등이 시작된다. 사랑에 푹 빠진 20살의 청년 국왕은 자기의 여인을 중궁으로 왕비로 채택하였다.
중궁으로 책봉당시 함안 윤숙의는 연산을 임신 중이었으므로 대비전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시어미되는 인수대비는 불편한 속내를 함안 윤숙의가 중전이 된 후 드리는 헌수를 거절하는 것으로
내보이며 앞으로 닥쳐올 고부간의 심각한 갈등을 암시하였다.
성종의 뜻대로 동년 8월, 숙의윤씨는 인정전에서 중궁으로 봉하여 졌고, 이어 11월에는 뜻한 대로 원자까지 탄생하면서 폐비윤씨의 승리로 모든 것이 일단락 지어지는 듯하였다.
1473년 3/19일에 궁으로 들어와서~ 1476년 11/07일, 여기까지가 제1막이다.
인수대비를 정점으로 한 궁중여인들의 중궁에 대한 집요한 반격이 이루어진다.
이른바 성종의 연심을 흩트리기 위한 여인들의 육탄 물량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명분이야 자손을 넉넉히 두기 위함이니 누구 하나 탓하는 이 있을 수 없고, 공식적으로 9명의 부인이
허락되는 조선의 국왕 자리가 아니겠는가?
어려서부터 수렴청정 때 이미 여인을 알게 된 나랏님, 평상시에도 여색을 가까이 하고 즐기셨는데,
턱 잔치상을 펼쳐 주니 물 만난 고기로다. 완전히 푸~욱 빠져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때부터 연산의 이복동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계비 정현왕후(前 파평 윤숙의) 소생의 진성
대군과 신숙공주을 제외하고도 무려 14남 11녀가 1492년까지 줄줄이 탄생되었다.
폐비윤씨는 두려움에 친정어미 신씨를 불러 상의하는 등 나름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성종 8년 3월, 왕의 총애를 지속적으로 독차지하기 위한 비방과 후궁들의 회임을 막기 위해서 비상
(砒霜)을 폐비윤씨가 침소에 은익하고 있다가 성종에게 직접 발각되면서 사단이 일어났다.
결국 원자가 태어나 백일이 조금 지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와 인수대비의 명령으로 중전에서 폐하는 문제를 논하게 되었고 논란 끝에 폐비윤씨는 빈(嬪)으로 격하된다.
아울러 주도한 어미 신씨는 작첩을 회수당했고, 불쌍하게도 시킨대로 시행한 아랫것들만 변을 당하게 되는데, 시종 삼월이가 죄를 홀로 뒤집어쓰고 교수형을 당하면서 목숨을 잃고, 사비는 장(杖) 1백대를
맞은 후 변방 관가의 노비가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성종의 윤씨에 대한 사랑은 식은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심한 짜증과 히스테리에 염증을 느끼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인수대비의 의도대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그 해 6월, 폐비윤씨의 생일임에도 하례도 없이 옷감으로 떼우고,
성종 9년의 신년하례식은 중궁이 몸이 불편하다며 회례연 없이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찬밥이 이제는 얼음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 일제에 의해 완전 파 헤쳐진 서삼릉 지역. (대부분이 비공개지역이다.)
폐비윤씨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비록 원자는 어려서 병약은 하였지만 잘 자라 주고 있었고,
또 하나의 히든카드로 왕손을 회임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삼월이 사건’ 후 꼭 1년 뒤 폐비윤씨의 두 번째 왕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폐비윤씨가 기대했던 반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록에는 왕자의 탄생기록조차 보이질 않는다.
사건이후 몇 번이고 화해의 무드를 이루려 시도하였으나 왕자 한 분만 더 회임했을 뿐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다시 폐비윤씨의 탄일이 돌아왔건만 역시 전년과 마찬가지로 이런 저런 이유로
하례(생일잔치상)는 다시 정지하였고 표리(안감과 겉감을 포함한 한 벌 옷감)만 올리면서 넘어간다.
그 초라한 생일날이 바로 폐비윤씨의 운명의 날이 되었다.
그 날, 평소와 다름없이 후궁의 처소에서 지내고 있는 성종에게 ‘요거이는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 끝에 폐비윤씨가 이판사판으로 들이닥치면서 심한 부부싸움이 벌어진다.
중궁의 위치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투기)을 보인 폐비윤씨에 대해 마지막 남은 정(情)까지도 사라진(= 情나미가 떨어진) 성종도 지존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 함께 폭발하고 말았다.
실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후대에 쓰여진 ‘기묘록’에는 중궁이 부부싸움 끝에 손톱으로 용안에 상처를
내었고 이를 알고 대노한 인수대비에 의해 쫓겨났다고 전하나 그런 내용은 없다.
실록에는 다음 날, 급히 성종이 대신들을 소집하였고, 직접 폐출을 명한다.
반대하는 승지들을 모두 벌하면서까지 강하게 고집하여 당일로 폐출교서를 내리고, 이어 종묘에 까지 고하면서 출궁시키니 폐비윤씨는 당시 4살짜리 원자와 백일도 채 되지못한 왕자를 두고 홀로 사저로
내 쫓기고 말았다.
가장 큰 바람막이였던 영의정 신숙주는 이미 4년 전에 죽었으니 힘이 되어줄 배경이 전혀 없어 속수무책이었고, 설상가상 폐출 일주일 후 핏덩이 둘째 왕자까지 졸(卒)하고 말았다.
원자의 생모를 내친 것에 대한 신하들의 강한 반대와 궁궐 안 별처에 조처하자는 건의 등도 모두를 무시하고 성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폐출 3일 후, 성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모친 인수대비가 써 내린 고부간의 갈등으로 가득한 언문교지를 내보이며, 소소한 일까지도 조목조목 거론하며 직접 폐출의 연유를 모두 설명하면서 폐출시킨 것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한다.
특히 인수대비께서는 2년 전 ‘삼월이 사건’ 이후 행여 주상전하가 해(害)를 당할까 마음이 두려워 가슴
앓이가 생겼던 것이 오늘에야 비로소 쾌차되었다면서… “내가 살아있을 때에야 변(變)이 없겠지마는,
내가 죽으면 난(亂)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卿) 등은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라며 방치했을 경우 윤씨로 인해 향후에 닥쳐올 불행을 막기 위한 사전 조치였음을 강조하며 마무리 지었다.
-> 선릉 권역 내에 있는 성종 계비 정현왕후릉.
1480(성종 11년) 10월, 파평 윤숙의(19세)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다시 2년 여 세월이 지나면서 원자가 7살에 이르자 드디어 성종의 마지막 카드가 던져진다.
‘기묘록’에 의하면 성종이 폐비윤씨의 생활상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를 알아챈 인수대비를 비롯하여
궁중의 여인네 세력들이 이간질하여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허위보고를 하게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노한 성종은 구제불능의 판단으로 사약을 내리게 되었다고 전하나, 실질 실록에서는 원자가
장성함에 따라 곧 세자로 책봉되어야 하므로 하나, 둘씩 폐비윤씨를 옹호하는 세력이 생겨나는 조짐이 보이자 폐비윤씨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벌하고, 계속 생겨날 후일의 근심을 애초에 없애기 위해 폐비
윤씨를 사사하기에 이른 것을 보인다.
1482(성종 13년) 8월16일: 좌승지 이세좌에 命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1473년 3/19일, 19세에 궁으로 들어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3년여 만에 원자까지 출생하며
국모에 이르렀으나 3년을 못 넘기고 부녀자 칠거지악 중 ‘말이 많고, 순종하지 않고, 또한 투기심이
심하다.’ 하여 중궁의 자리에서 서민으로 폐출되고 말았다.
폐출 후 다시 3년이 지나면서 아들 연산이 세자에 책봉되기 전에 완전히 사사당하고 말았다.
처음 묘비석도 없이 지금의 망우리 산자락에 매장되었다가, 2년이 지나서야 ‘윤씨之묘’란 묘비 하나
얻어 세웠고, 다시 4년 후에 순전히 세자에 행여나 좋지 않을까 하는 풍수지리적 노파심 덕(?)에 회기동 천장산으로 이장되었다.
생모의 죽음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연산에 의해 사후 23년이 지나서야 회기동 천장산 묘터에
거대한 ‘회릉(懷陵)’으로 조성되었다. 생모의 죽음을 애달퍼하며 왕릉보다 더 큰 규모로 호화롭게 꾸며드렸지만, 겨우 이듬해에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懷墓)’로 되고 말았으니 ‘능(陵)’으로 겨우 2년여를 불렸을 따름이다…
오늘날 서삼릉의 한 귀퉁이로 1969년에 이전되어 ‘회릉’ 당시의 화려한 능(陵)의 모습만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회묘’의 화려함이 마치 추한 모습을 곱게 분단장하여 가리어진 모습으로 보여짐에 더욱 애절하게만 느껴진다.
-> 폐비윤씨의 태항아리 및 태지석 (고궁박물관).
폐비윤씨는 처음부터 가야할 길이 아니었다. 평범한 후궁의 삶을 살았더라면 화(禍)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젊어 처음 어린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가능성을 엿보았고, 연이어 회임이 되면서
자신감까지 갖게 되었지만… 이루어진 첫 사랑에 대한 혹독한 댓가인가?
여인을 완전히 알게 된 성종은 원자 생산이후에는 완전히 벌, 나비가 되어 정신없이 꽃밭에서 이 꽃,
저 꽃 찾아다니며 왕성한 절륜을 과시하시니, 아무리 중궁이라도 여인의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아비 성종은 천성으로 생겨먹은 것이 그러한데 거기에 투기심을 내보이니 처음에는
몸이 떠나고, 이어서 원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라도 너무 빨리 지아비의 마음마저 떠나고 말았다.
(성종의 색탐(色貪)일화 가제 ‘조선의 요부전’에서 소개할라요.)
본인은 물론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인물도 두뇌도 없었고, 장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이라도 있었다면
자제심과 인내력으로 버티면서 기다렸으면 당신의 세상이 분명 열렸을터인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소위 일반 아낙네와 같은 수준의 히스테리와 강짜를 국왕에게 퍼부니 부부싸음이 잦아지고, 나름 대책이랍시고 질 낮은 사술에 현혹되어 ‘삼월이 사건’과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솔직히 자신의 명줄을 스스로 재촉한 꼴이 되고 말았다.
내명부 삼전(三殿) 중 비록 까막눈이지만 왕실의 최고 어른이신 정희대왕대비는 같은 파평윤문으로
파평 윤숙의를 어려서부터 키워오셨던 분이고, 대단한 먹물 출신의 너무 똑 부러지는 독빈 인수대비는 덕종이 졸지에 요절함에 따라 일단 야망을 접고 사가에 나와 절치부심, 드디어는 야심차게 지아비 대신 차남 성종을 시어머니 정희대비, 사돈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국왕으로 만들어 낸 장본인이 아닌가?
이 두 분을 비롯하여 내명부의 무수한 여인네들 중 폐비윤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은 구중궁궐 어느 한 구석에도 없었다.
오로지 믿는 곳은 원자의 생모라는 그 위치 하나 만이 폐비윤씨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몰락하게 된 최고의 원인은 성종의 변심이다.
궁중의 여인네들이 이간질을 하든 할메나 어머이가 무엇이라 중궁에 대한 책을 잡더라도 처음 중궁으로 책봉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감싸안았다면 이렇게까지 비극적으로 결말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폐비윤씨는 서투른 야망만 가졌을 뿐 참으로 어리석은 인물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집안이 한미하고, 주변에 도움이 될만한 힘이 없어서… 모두 틀리지는 않았지만 정답도 역시 아니다.
성종의 마음이 떠난 것이 가장 결정적이지만, 윗 어른들의 인정도 받지못하고, 지아비의 사랑까지도
놓쳐 버렸다면 이제는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忍’ ‘忍’ ‘忍’ 으로 인내하며 자신이 꽃 피울 세월을 기약이 없어도 기다려야 하건만 조바심에, 성질에 기다릴 줄을 몰랐던 것이다.
변심한 지아비를 원망이야 할 수 있으련만 모든 것은 잘못된 처신으로 망쳐버린 오직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원자뿐이 아니라 세월 역시 당신 편이란 것을 왜? 몰랐던거요??
“모든 것은 그건 너~ !! 요거이가 아니라오. 모두가 내 탓이요, 당신 탓이란 말이요!!”.
♣Epilogue: 조선시대에 혼인을 하면 일반 사대부는 물론 평민까지도 벙어리 3년에 귀머거리 3년, 맹인 3년의 시집살이를 각오하였다는데, 하물며 궁궐 내에서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어찌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할 짓거리 다하며 살 수가 있었으리오…
아마도, 바보라면 아주 순 백치이고, 성깔이라면 완존 개차반이었을 것이다.
흔히 연산군이 폭군이 된 것은 생모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유를 든다.
근데… 이상해도 아주 많이 이상하다.
연산이 반정으로 쫓겨난 것은 1506년 9월이고, 생모의 복수랍시고 훈구와 사림파를 싸잡아 몰살시킨
것은 1504년 3월, 갑자사화 때 일이다.
즉위해서 10년 만에 생모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비로소 알게되었다고?? 그걸 믿으라고??
그 열쇠는 유자광이 일으킨 무오사화에 담겨있지만, 다음 야그로 준비한 EP#13에서 연산군의 허울을
벗기면서 모두 밝혀질 것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으로다 “커밍~~~ 순, 투 비 컨티뉴~~~”이다. ^L^· 秀
|
첫댓글 앗!드뎌 올라왔군요~~기다렸는뎅^!
빨리 가게 출근해서 읽어 봐야징!!^^감사드려요#~^^♥
이번 주는 일이 좀 있어서시리 ... 별일도 아닌데도, 시간만 죽이고 그러네요.
ㅇ와아..완전 한편의 대하소설이네요.
저 점심약속 있어 나가는 중이라..다시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저도 기다렸는데, 정말 재미나게(?) 잘읽었습니다...
저도 많이 기다렸었는데, 역쉬...
잘 읽고 갑니당...
하나아저씨는 다음 구상도 짜여 있나부넹~!
"조선 요부전" 은 언제쯤 세상밖으로 나올려나요?
아무튼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성의 여인탐구탐색섭렵기 일원으로 조선요부전저도 세상 밖으로 나올 날 기대기대..
하늘같은 왕의 용안에 손톱자국 내었단 일화도 있지요~
윗글에도 다 써있걸랑요
기다린다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한 아침입니다.
어제 미국서 온 친구와 영화 '관상'을 봤어요..단.수양대군 세조까지 이어지며 김서니 사육신이니..살살 나오는 역사를 토대로 하면서 관상을 주제로 한 미로운 영화였지요.
하나님의 요즘 올려주시는 역사탐구 요 얼마 전..혹은 현재도 이어지는..한명회도 나오는 문
어찌 이정재는 그리 수양역을 잘 소화하는지..좀 피 튀기는 계유정난 잔혹한 장면만 빼면 이렇게 태조부터 샅샅이 조분조분 재미있게 역사를 훑어주시는 하나또하나님 덕분에 알고 영화를 보니 쉽게 이해되고 또 안봬주는 것까지 보이더라구요.
우리부부는 사실 영화 별루 안좋아 해서요. 종합예술인데도 왜? 그리 안가게 되는지
이기회에 하나아저씨보고 관상보러 가자고 그래볼까요?
어제 엔터김님 댓글보고 관상영화를 뒤져보니 픽션이라고.....
그래서 어떤 전개로 풀어갔나~~? 그런 마음이 들어 함 가보까~~그러는 중입니다.
우리는 영화관보다 인터넷으로 보는 것을 좋아해서요.
어릴때 왕비열전이란 라듸오의 프로를 정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새록거리며 나네요
현명한 어머니는 자식의 목숨을 건지고 또 예나 지금이나 왜 고부지간은
같은 여인네들끼리 고통을 주는지 밉다고보면 다 미운법인데 ........
이 긴 내용들을 정리하시는라 얼마나 수고를 하셨을지? 이 더운날씨에요
감사히 읽고 보고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하나님 뒤에서 수고해주시는 하나언니님도요 ㅎㅎ
더 현명한 엄마와 아내와 시어머니가 되도록 노력을 다짐하면서요
안수대비 채시라 드라마 본게 생각나요 참 재밌게 잘쓰시느라
엄청 수고가 많으십니다. 경희대 회기동이 회릉에서
관상 영화도 보고픕니다.감사를
사람 팔자 차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으니,,,,,,,,
유용한 글이었으며 넘 넘 재미있게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김도님~~~ 하나아저씨 우리는 부부가 함께 가입이되어 있어서요. 전 "또하나"라고 부릅니다.
지난 겨울부터 갑자리 얼굴이 안좋아져서요. 몇년전 구안아사에 걸렸었거든요. 다시 재발을 했는지~~
조심하느냐고 글을 안쓰시네요. 하루 빨리 재기 하시길~~
@하나또하나 아 하 , 그러시군요.
요즘 구안아사는 병도 아닐텐데요. 빨리 쾌유하시기를 빌께요.
저는 님의 글이 넘무 감명깊어 옮겨다 놓고 여러번 읽고 있읍니다.
다른세계에 눈뜨게 해주신 님께 넘넘 감사드려요,
화이팅입니다.
@하나또하나 요즘 연속극 일요일 저녁 정도전 끝나고
시사저널 ; 그날 ; 이란 프로에 폐비윤씨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이 나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어요.
제가 그프로를 좋아한답니다.
@김 도 저도 감사드리며 한줄메모장에 남겨주시는 글
아주 즐거이 읽는답니다.
@김 도 그러시군요. 저도 역사프로는 아주 좋아 하지요,
김도님 만나게 되면 이야기가 한 보따리 되겠어요.
그날을 즐겁게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