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평 하늘
길에서 가끔 보는 사람이 있다. 머리까지 누일 수 있는 긴 휠체어에 앉아 집 마당에 나와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그’인지, ‘그녀’인지도 애매한 모습이다. 휠체어는 각도 조절이 가능한 중증 환자용이다. 그의 몸이 지면에서 삼십 도 정도 들려 하늘을 향하고 있다. 상태를 보아하니 스스로 나온 것 같진 않고, 보호자가 앞마당에 내어놓아 준 듯하다. 저러다가 비가 오면 어쩌려고 환자를 밖에 놔둔 건지. 차가 다니는 길옆에, 저렇게 성치도 않은 사람을 방치해 둔 건 과연 올바른 건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그를 봤다. 굵은 비는 아니지만, 보슬비가 내리는 날도 집 밖에 나와 있었다. 그가 걱정되어 그 집 앞을 살펴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그러다가 멀리서부터 휠체어가 보이는 날엔 차 속도를 줄이고 더욱 유심히 그를 관찰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왜 휠체어를 탄 채로 집 밖에 나와 있을까?
볕이 좋은 날이었다. 그날은 휠체어가 길 쪽에 더 가까이 놓여 있었다. 난 그의 얼굴을 볼 요량으로 속도를 줄여 천천히 그 곁을 지나갔다. 그런데 처음으로 본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스티븐 호킹. 서양인의 얼굴을 잘 구분 못 하는 내 눈엔 그 둘이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다. 작고 여윈 몸, 비스듬히 기울어진 머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곳에만 꽂혀있는 눈동자. 그 파란 눈동자를 따라 나도 고개를 들었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건 영화 제목이기도 했다. 얼마나 사람들이 하늘을 보지 않았으면 그런 문구가 공공연하게 내걸렸겠나 싶다. 요즘은 아예 눈을 스마트폰에 붙여두고 사니 하늘 볼 일이 더 줄었다. 누구나 하늘을 매일 보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 착각이다. 주목하는 무언가의 배경으로 하늘이 보이는 거다. 우리 눈이 감지하는 시야 한계선 안에 들어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늘을 본 것 같긴 한데 그 하늘이 어땠는지, 구름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비행기가 떠갔는지, 새들이 떼 지어 날아갔는지, 이런 구체적인 장면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관심 영역 밖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저 하늘을 보는 게 아니라 마음 자체를 하늘에 걸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려본다. 하늘 한 평, 두 평, 세 평… 점점 넓어지는 하늘의 평수. 생각의 폭도 넓어진다. 하늘을 본다는 건 다른 걸 볼 때와는 다르게 미지한 곳까지 날 끌어간다. 무한한 넓이 때문이다. 땅은 하늘을 만나 지평선을 이루고, 바다는 하늘을 만나 수평선을 이루는데 하늘은 무얼 만나 그 끝을 볼 수 있을는지. 우주라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우주에 있는 해, 달, 별은 그냥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하늘과 우주의 경계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그의 하늘은 고작 세 평. 작은 방에 갇힌 채, 고개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그에겐 눈에 보이는 천장의 넓이가 시야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래서 보호자는 그를 바깥에 내어놓았는지도 모른다. 세 평 하늘에서 벗어나 한계가 없는 진짜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호킹 박사도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하늘로, 우주로 자꾸 날아갔다. 루게릭병에 걸려 비록 몸은 휠체어에 붙박여 있었지만 유일하게 자유가 허락된 신체 부위, 뇌를 통하여 그의 긴 여행은 이어졌다. 저 하늘 너머 우주에 도착한 그의 생각들이 블랙홀에 빠졌다가 나오기를 여러 차례. 중력이 없는 그곳에선 몸이 자유롭게 떠올라 유영했다. 태양에서 달로, 화성에서 지구로 옮겨 다녔다. 갈 수 없는 곳은 없었다. 그곳이 아직 인류의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곳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를 봤다. 아직도 휠체어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그는 어쩌면 지금 우주의 끝을 돌아 집으로 귀환하는 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