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자주방위의 최선은 오직 통일 뿐
-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잇는 진정한 애국·애족 지도자 -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양정자
올해는 경술국치 114주년, 3.1절 105주년, 광복 79주년, 정전협정 7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3.1절은 매국노를 제외하고 사상, 종교,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우리나라 독립을 외친 날이고, 8.15 광복절은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기뻐하던 날입니다. 그런데 이번 79주년 광복절 기념식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두 쪽으로 갈라져 치러졌고, 한국전쟁이 멈춘 지 7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 평화는 완성되지 않고 격차만 커졌으며, 서로 주적이라며 대화의 통로마저 막아버린 상태입니다. 동북아의 국제 정세 역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구상이 현실화되면서 한·미·일 vs 북·중·러의 냉전적 구도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국내 정세, 세계 정세 모두 조금의 타협도 없이 자기측만 옳다며 극과 극을 향해 달리며 자신과 상대 모두 상처를 입고 있어 너무 가슴 아프고 기가 막힙니다.
미국과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비롯한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가 한국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강변합니다. 우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한국이 아니라 북한을 염두에 둔 것이고, 커져가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처는 한국에게도 절실한 과제라는 논리를 폅니다. 이러한 논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한국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북미관계와 북일관계 개선을 유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단 한반도 문제의 악화와 한국 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집단적 자위권을 비롯한 일본의 우경화에 더없이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이 사안에 대한 현명한 대처의 기본입니다. 이에 따라 우선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처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 전략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통일이 되면 6자회담의 장기적 비전인 동북아 평화체제로 가는 문도 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미·일 동맹 사이의 아시아 패권 경쟁과 이 사이에 낀 한국의 딜레마를 완화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큼이나 분명한 역사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 망동으로 20세기 아시아에는 피와 눈물이 흘렀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단 때문에 한반도에는 아직도 피가 흐릅니다. 아시아에는 아직도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영혼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1985년 필자가 인도 타밀나두주 벨로르시에 있는 크리스찬카운셀링 센터에 교육 교환프로그램(Exchange program) 참석차 갔다가 그곳에서 안내해주는 최고산(最高山)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Tribe)이 사는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부족들의 생활 상태는 너무나 비참한데 그곳까지 가는 도로가 너무나 잘되어 있어 놀라고 신기했습니다. 그 도로는 영국이 통치할 때 건설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높은 산까지 도로를 놓은 것은 그곳에서 나는 생산물을 수탈해 운반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가 막혔습니다.
일본이 놓은 철도와 산업시설, 일본어 교육, 한국어 말살정책, 제도개선 등등이 우리나라의 문명 수준을 높이고, 근대화를 시켜주기 위해서였을까요?
1989년 한국을 방문한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 씨는 한국은 침략국이 아니기 때문에 10년 안에 통일될 수 있지만 침략국인 독일의 경우는 주변의 강대국들이 독일의 통일을 원치 않아 통일이 쉽게 안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통일이 어려우리라던 독일이 통일이 되었습니다.
전범국인 독일이 그렇게 빨리 통일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독일은 나치가 인류문명에 끼친 죄를 깊이 회개하고 전후 부흥한 경제로 국가, 민간 차원을 가리지 않고 가난한 자,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세계 각국을 도왔습니다. 둘째, 독일은 스스로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들은 남이 알게 모르게 동쪽의 민족에게 끝없이 베풀며 교류를 증대시키고 민족공동체의식을 일깨웠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서독의 무한한 사랑에 동독이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난립해 있던 리더와 조직이 각기 다른 여러 군소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을 설득해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을 성공시킨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잇는 지도자가 분명히 계실 것을 믿습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이며 다재다능했던 분입니다. 미국을 기반으로 전세계를 누비벼 독립운동을 펼쳤고, 동포들의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한인들의 슈퍼맨’ 같은 인물이자,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최초로 하나의 통합을 이끌어낸 ‘최고의 해결사’이기도 했습니다.
1878년 안창호 선생님은 평안도 대동강 하류 도룡섬(현재의 북한 평양 인근)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16세가 된 1894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인 평양도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자 힘없는 조국이 강대국들의 전쟁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며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처음으로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알기 위해 한양으로 와서 선교사가 설립한 학원에 입학해 공부하셨습니다. 24세에 본인이 꿈꾸던 ‘국민 교육’을 실현하기에는 스스로 부족함을 느껴 선진국의 교육을 제대로 공부하여 교육 전문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당시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는 매일 먹고 살기에도 바빠 청소나 위생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해서, 미국인들 사이에 한국인들은 불결하다는 이미지가 팽배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목표를 바꿔 개인의 공부를 잠시 뒤로 미루고 ‘한국인들의 생활방식과 이미지’를 개선시키는 작업에 앞장서기로 결심, 한국인 거주 지역을 찾아가 동포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직접 청소를 대신해주고 화분을 심는 등 환경미화에 앞장서 한국인 이미지를 개선하고, 직업 알선, 삶의 태도 등을 교육하여 한국 동포들이 저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선생님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한반도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벌어지고, 이에 고무된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추진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하게 됩니다. 41세의 선생님은 임시정부 수립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가셨고, 행동력과 자금동원력을 인정받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오늘날의 행안부장관)이라는 요직에 추대되며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맡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한인 독립운동세력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만이 아니었습니다. 경성에는 이승만의 한성정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동휘의 대한국민의회 등 리더와 조직이 각기 다른 여러 군소 임시정부가 난립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열된 체계에서 하나된 독립투쟁은 불가능했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이승만과 이동휘를 간곡히 설득하여 1920년 마침내 상하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설립하는데 성공합니다.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맡았습니다. 정작 원조 상하이 정부의 리더였던 안창호 선생님은 서열상 크게 떨어지는 한직인 노동국 총판 자리를 맡는데 그쳤습니다. 측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이것은 오직 애국심에서 나옴이요, 결코 사욕이 있음이 아니다”라며 본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기꺼이 양보했습니다.
학계에서는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을 안창호 선생님의 대표적 업적이자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로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통합 임시정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분열된 독립투쟁의 동력은 크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의 희생으로 통합 임시정부는 비로소 하나된 독립투쟁의 초석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분단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의 손에 의하여 되었지만 통일을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뜻을 하나로 모아 통일을 이루도록 국내외로 압력을 가한다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내서나 외국에서 내놓고 우리나라의 통일을 지연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적이 없는 국민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의 국민으로 남아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통일국가에서 살 자격이 있는 국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