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2014년 8월호) ‘이케다 다이사쿠 칼럼’
루이 나폴레옹의 부인 프랑세즈와의 만남 ②
전진! 이 한마디에
영웅의 로망과 혼백 담겼다
모든 사람이 영웅의 기백으로 일어설 때
‘민주주의’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어…
나폴레옹이 지나온 삶의 궤적은
지금 싸우는 민중에게 ‘길은 열린다’고 가르쳐줘
1993년 가을 도쿄 후지미술관에서 열린 ‘大나폴레옹展–영웅의 생애와 궤적’ 개막식에 함께 참석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가운데)과 프랑세즈 나폴레옹 여사(맨 오른쪽).
끝까지 영웅과 ‘고난을 함께한’ 사람도 영웅이다.
황제의 막냇동생 제롬 공의 부인 카타리나는 뷔르템베르크의 공주였다. 나폴레옹 집안이 기울어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이혼을 권했다. 애초에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이혼은 당연하지 않은가? “딸이여, 앞으로 어떤 박해가 너에게 쏟아질지 모른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남편과 옥좌를 나눠 가졌습니다. 따라서 유배지도 비운도 함께 나누겠습니다. 제가 남편과 함께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엎드려 간청합니다.”
일행과 나눈 대화중엔 ‘워털루 전투의 패인’도 화제가 되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낙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섬에서 나폴레옹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내몰렸다. 단 한 사람의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간수 3천 명의 눈이 동원됐다.
아내도 자녀도 어머니도 형제도 만날 수 없다. 스트레스, 운동 부족, 몸을 해치는 열대 기후…. 수신인이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책도 반입이 금지됐다. 섬 밖에서는 전 유럽에 나폴레옹을 중상하는 팸플릿이 뿌려졌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래도 “내가 질소냐!” 하고 도약했다. 엘바 섬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참고 견딘다 해도 작은 혼은 불행의 무게에 익숙해져 얌전히 굳어버린다. 큰 혼만이 불행이라는 큰 바위를 발판으로 우뚝 솟는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오전 2시의 용기’를 말했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 먼 한밤중, 어둠과 고독 속에서 ‘새벽’이 올지도 의심스러운 추위 속에서 그래도 ‘이까짓 것!’ 하며 용기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나폴레옹은 ‘마지막 전쟁터’에서 ‘마지막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엘바 섬 때와 달리 싸움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었다.
이번의 전쟁터는 ‘미래’였다. 비정한 운명을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면서 ‘나의 진실’을 전해 남기고자 맹렬하게 회상록을 집필했다.
나를 비판하려면 해도 좋다. 녀석들은 거인의 어깨를 짓밟고 서서 “나는 이렇게 높이 올라올 수 있다!”고 자만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무리는 시대의 조류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인류는 내 이름이 몇 세기 동안이나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무대를 떠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평온’이 찾아왔는데 그와 함께 ‘공허함’이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 부르봉 왕정이 부활했지만, 대중은 노쇠한 왕정에 실망했다.
당시 대부분 가정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군 병사가 있었다. 노병들은 현재가 불우할수록 나폴레옹 시대의 추억을 떠올렸다.
황제와 함께 있으면 거기에는 ‘영광’이 있었다. ‘꿈’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보답을 받는다는 ‘보람’이 있었다. 고생은 많았지만 “인생은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불타오르는 ‘대정열’이 있었다!
병사들에게 나폴레옹을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역이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이름을 ‘나폴레옹’이라고 짓는 사람도 많았다.
아이들은 화롯가에서 졸랐다. “얘기해 주세요, 할아버지. 나폴레옹 이야기….”
젊은이들은 동경하는 인물을 만날 수 없음에 애를 태우며 한탄했다. “너무 늦게 태어났다!”
나폴레옹을 적으로 여기던 시인 샤토브리앙도 이렇게 썼다. “살아 있는 나폴레옹은 세계를 잃었지만 죽은 나폴레옹은 세계를 지배한다.”
시대는 바뀌어 1830년 7월 혁명. 부르봉 왕조는 다시 무너졌다. 나폴레옹이 죽은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공이 로마의 병상에 있던 어머니 레티치아에게 다급히 달려왔다. “황제의 동상을 다시 (파리의) 방돔 광장 원기둥 위에 설치한데요!”
몰락과 함께 황제의 동상은 쓰러져 있었다.
황제의 동상이 다시 원기둥 위에!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앞이 안 보이는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황제 폐하, 파리 귀환!”
냉대 속에서 아무리 곤궁에 빠져 있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를 배반한 자들에게 동정을 구하지 않겠다”고 했던 다부진 어머니였다.
나폴레옹 옹호한 빅토르 위고의 열변
2005년 12월 3일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200주년을 기념하는 재연행사가 당시 전장이었던 체코 남부 슬라프코프에서 열렸다. 나폴레옹으로 분장한 참가자(맨 앞) 일행이 전투 장면 재연에 나서고 있다.
1806년 ‘콰드리가’를 탈취하는 나폴레옹. 콰드리가는 승리의 여신이 전차(戰車)를 모는 조각상으로 독일의 국가적 명예를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 위를 장식한다.
그러나 집안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때문에 누구든 싫어도 정치적인 존재가 되었다. 나폴레옹 일가의 구성원은 제정(帝政) 부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주도한 국외 추방이라는 쓰라림도 경험했다.
그런 가운데 1847년, 제롬 공과 가족이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귀족원에서 연설한 사람이 시인 빅토르 위고 의원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말하는 나폴레옹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종교를 다시 일으킨 일이며 민법전을 제정한 일이고 프랑스를 자연의 국경을 넘어 넓힌 일입니다. 그것은 마렝고의 승리, 예나의 승리, 바그람의 승리, 아우스터리츠의 승리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한 사람이 위대한 한 국가에 가져다 준 가장 호화로운 권력과 영광스러운 선물이었습니다. 귀족원 여러분, 이 위인의 아우가 지금 프랑스에서 죽고 싶다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소인배여, 언제까지 위인을 채찍질할 생각인가!
너희가 나폴레옹이 이룬 것 이상의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
연설을 들으면서 연단 아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늙은 병사가 있었다. 그는 예전에 나폴레옹 군대의 대대장이었다.
나폴레옹 비 알릭스 드 포레스타라는 남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이다.
다섯 살 때 파리로 갔다. 미래에 일어날 운명의 ‘전조’일까, 학원 연극제에서 황제가 가장 사랑한 나폴레옹 2세(로마왕)역을 연기했다. 로스탕이 쓴 시극(詩劇) <새끼 독수리>이다. 나치스 점령 하였다.
그 무렵 미래의 남편 루이 나폴레옹 공은 레지스탕스(저항운동)의 용자로서 싸우고 있었다. 스무 차례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포레스타는 스물세 살 봄날에 제롬 공을 만났다. 금세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제롬 공이 ‘나폴레옹의 후계자’라고 생각하면 기쁨보다 공포가 먼저 엄습했다. 나폴레옹, 이 ‘위대한 이름’을 짊어진 무게가 얼마나 컸을까. 게다가 이때 제롬 공은 국외에 추방된 몸이었다.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 폐병원(廢兵院)에서 열린 ‘나폴레옹 회고전’ 개회식 때 제롬 공의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포레스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어머니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공주였다. 힘겨운 일을 겪어오셨다. 아버지인 국왕이 나폴레옹 집안과 결혼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인생의 로망은 ‘전진’ 속에 있다
공주는 참았다. 기다렸다. 그리고 국왕이 붕어(崩御)한 이듬해 두 사람은 맺어졌다. 열여섯 살 소녀 때 만나 22년이 지났다.
그렇게 강인한 제롬 공의 어머니는 포레스타에게 질문을 마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공주보다 뛰어난 여성입니다!”
1949년 여름, 루아르 지방 작은 마을에서 가까운 사람만 모여 결혼식을 올렸다. 작은 새가 명랑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 뒤, ‘나폴레옹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로서 강하게 꿋꿋이 살아오셨다.
나폴레옹에 관한 책 출판, 전시회 등 여러 행사 때마다 남편과 함께 유럽은 물론 러시아, 미국, 남아프리카, 세인트헬레나 섬 등 전 세계를 여행했다.
결혼 때 맹세는 ‘공익에 몸을 바치는 일’이었다. 신체장애아 학교(파리)와 국제적십자 박물관(스위스 제네바)도 창설했다. 자녀도 넷을 두었다.
인생, 어차피 사는 것이라면 마지막에 “아, 한평생 재미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남겼다. “그렇다 해도 내 생애는 어쩌면 이렇게 소설 같을까.”
나폴레옹은 지위를 잃었다. 명성을 잃었다. 가족도 잃었다. 고생해서 얻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다는 말이냐. 처음부터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
나폴레옹의 인생에는 ‘실패’는 있었지만 ‘정체(停滯)’는 없었다.
‘모순’은 있었지만 시대의 모순을 거울처럼 비춘 인물이었다.
‘결점’은 많았지만 반짝이는 매력과 뗄 수 없는 일체였다.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영광일 때도, 몰락할 때도, 승리할 때도, 패배할 때도 언제나 “이까짓 것”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전진!” 그러므로 인생이 로망이 되었다.
로망이기에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다.
“전진!” 이 한마디에 빛이 있다. 날개가 있다. 청춘이 있다. 건설이 있다. 민중의 개가(凱歌)가 있다. 어둠을 가르는 검이 있다.
‘전진’ 이 한마디에 영웅의 혼백이 작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영웅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서민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다.
모든 사람이, 모든 남녀가 영웅의 기백으로 일어설 때 ‘민주주의’에 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궤적은 지금 싸우는 민중에게 외친다.
‘길’은 열린다, 용기를 내라!
월간중앙(2014.9)루이 나폴레옹의 부인 프랑세즈와의 만남②.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