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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이주일
-이주일, 나의 이력서
* 웃기고 나서 ‘웃기는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안 받으려면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아느냐.(“웃기는 데 무슨 돈이 드는 건 아니니 버는 돈마다 순수입이 아니냐”는 한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이주일(코미디 황제)
* 국민을 웃기면서 번 돈으로 많은 세금을 낼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냐.(80년대에 그는 해마다 납세 1위를 기록하는 가장 인기있는 연예인이었다.)
* 1972년 생활고로 내가 찾은 곳은 경기 구리시 갈매동에 있던 캐비닛 공장이다. 내가 1992년 구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은 이 인연 때문이다. 공장 관리인으로 취직은 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내 고질병인 노름 병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 밤 노름에 매달리다 보니 빚은 대추나무 연걸리듯 늘어 5,600원이 됐다. 훗날 구리에 출마하면서 “이 빚을 갚기 위해 구리에 왔습니다”라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인연 때문이다. 어쨌든 큰 아들 창원이의 도시락까지 못 싸줄 정도로 생활은 어려웠고, 나는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 “저런 얼굴을 어떻게 무대에 세웁니까?” “이건 뭐야? 우리 쇼를 뭐로 보고 이러느냐?”며 단장은 내게 발길질까지 했다. 비틀비틀 한참을 걸어간 나는 눈에 보이는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전날 아내에게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어떻게 집에 들어가나. 소주 반 병을 시켜 놓고 질질 짜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또 내쫓았다. 내가 유명해진 뒤에는 이 얼굴로도 영화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에 출연할 수 있었지만, 무명 시절의 나는 그 ‘죄송한’ 얼굴 때문에 설움도 참 많았다.
* 가수 하춘화는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주인공이다. “시간 약속만큼은 절대 깨뜨리지 말라”는 프로 의식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나는 15세 연하인 그녀를 공주님처럼 모셨다. 하춘화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유명한 이리역 폭발사고이다. 지금 생각해도 생생하고 끔찍한 현장이었다. 정말 전쟁이 난 줄 알았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이리역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삼남극장에서 막 오프닝 멘트를 끝내고 돌아선 순간이었다. ‘꽝’ 하는 폭발 음과 함께 극장 지붕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극장 단원도 나도 모두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하춘화부터 찾았다. 불길이 치솟는 난로 옆에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머리에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지만 무조건 그녀를 들쳐 업고 뛰었다. 그녀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3~4m의 극장 벽을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쓰러졌다. 이때 14명이 죽었고 나는 뒷머리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4개월 후 퇴원을 하자 나의 평생 매니저이자 연예계의 대부 최봉호까지 말했다. “저 놈 진짜 의리가 있다.”
* 연예인이란 이름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무명이면 그만큼 홀대 받기 마련이다.
* 인기는 유흥업소에서 더 두드러졌다. 나는 계약금 1억원에 월 출연료 1,000만원을 받고 최씨의 서울구락부에 나가기로 했는데, 출연 첫 날 아주 일을 보겠다는 손님이 장사진을 이뤘다. 웨이터들은 예약석 팻말을 세워놓고 뒷돈까지 받았고, 인근 유흥업소 마담들은 나와 놀게 해달라고 매니저 최봉호씨에게 압력을 넣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에 15군데를 뛰면서 한 무대에서 500만원을 받는 인기와 명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해 8월 갑자기 연예인 숙청작업이 몰아쳤다. 코미디언 배삼룡, 가수 나훈아, 탤런트 허 진 등 16명과 함께 ‘저질’로 낙인 찍혀 하루아침에 방송사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 나는 ‘저질이다’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 한번 봐라”며 한 방 먹이고 싶었다. 나는 자선 모금 공연을 성공시키며 다시 재기하며 1981년 1월 MBC ‘웃으면 복이 와요’와 KBS ‘100분 쇼’를 통해 당당하게 TV에 복귀했다. 이렇듯 천당에서 지옥을 오고 간 1980년은 정말 잊지 못할 한 해인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해 하반기 종합소득세로 1,401만원을 낸 일이다. 물론 연예인 중 1위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세금이라곤 오물세나 주민세밖에 내보지 못한 내가 그런 고액을 냈다는 게 지금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데뷔 초 시청자들에게 말씀 드린 대로 ‘뭔가 보여드린’ 셈이다.
* 밤업소에서는 보통 2시간을 무대에서 보냈다. 말이 2시간이지 웬만한 코미디언은 배겨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내가 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지방 극장 쇼에서 보조MC로 활약한 경력 때문이다. 주연 배우가 사정이 있어 제 시간에 출연하지 못하면 나 같은 보조MC는 어떻게 하든지 그 빈 시간을 때워야 한다.
* 저질 코미디라는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점잖게 진행했던 첫 번째 디너쇼는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품위 있는 사람도 웃을 때는 배꼽 빠지도록 웃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 후 12월 13일 같은 장소 힐튼 호텔에서 다시 열린 디너쇼. 그때는 6·29선언 이후 정치 코미디가 유행하던 때라 나도 꽤 노골적인 정치풍자로 무대를 휘젓고 다녔다. 물론 지난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야한 음담패설도 빼놓지 않았다. 관객은 땀을 뻘뻘 흘릴 만큼 웃어댔고 급기야 커튼 콜까지 나왔다. 그날 깨달은 것이 ‘정치와 섹스 이야기처럼 짜릿한 소재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 디너쇼를 본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나를 불러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쇼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어요. 마치 수소폭탄이 훑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평생 이처럼 여한 없이 웃기는 처음이에요.” 그날 밤 김 회장의 웃음소리는 진짜 그칠 줄 몰랐다.
* 하루는 술집 사업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고심했다. 평소 사업에는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 시도하다가 본업까지 마감한 동료 연예인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트클럽 운영에 관한 한 나만 믿으면 된다”는 최씨의 끈질긴 설득이 성공을 거뒀다. 총공사비 30억원에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인 800평짜리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은 이렇게 탄생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이트클럽을 꾸몄다. 최씨와 함께 홍콩, 대만, 미국 유명 나이트클럽 10여 군데를 현지 시찰했고, 세계적인 실내장식가인 중국계 미국인 칼슨에게 인테리어를 맡겼다. 당시 내 꿈은 “이 업소를 전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업소로 만들어 노인복지와 불우이웃 돕기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 나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6월 21일 친구 박종환 감독이 청소년축구 4강 신화를 이루고 귀국한 환영만찬회 날이다. 그는 아들 창원이를 저 세상에 먼저 보내고 실의에 차있는 나에게 “인생을 바꿔보라”며 이렇게 말했다. “주일이, 정치 한번 해봐. 그러면 아들 생각도 잊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죠”라고 대답했다. 정치를 해보라는 말을 현대그룹의 문화센터에서 강사 일을 맡아보라는 권유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정 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나는 몹시 시달렸다. 내가 1972~73년 캐비닛 공장장으로 일할 당시 가족과 함께 머물렀던 경기 구리시 갈매동, 내가 이 인연으로 구리에서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정보기관에서는 그때 내 노름빚이 5,600원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소름이 좍 끼쳤다. 국민당이 내게 구리 지역구 공천을 준 것도 아닌데…. 무엇보다 내가 내 입으로 14대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 무서웠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언론과 주위 사람들이 나를 정치 쪽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고도의 정치 술수라든가 거창한 시나리오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외압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하고 싶다. 한 시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모진 외압이 나와 내 가족을 엄습했다. 아내는 그때 심장병까지 얻었고, 딸들은 이민을 가자고 졸랐다.
* 나는 출마를 회피하기 위해 돌연 홍콩으로 가족과 함께 출국했다. 다음날 저녁 현지 한국식당에서 한국신문을 봤다. ‘이주일씨 돌연 출국, 억측 무성’이라는 큰 제목 하에 별의별 이야기가 다 씌어 있었다. “정부와 여당이 이주일씨를 사실상 강제 출국시켰다”는 내용의 국민당 성명서도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내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체 윤곽이 잡혔다. 일개 연예인인 나를 중심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한편으로 국민당과 정주영 대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살겠다고 홍콩으로 온 내가 측은하기까지 했다. 한 가족을 수십 일 동안 떨게 한 권력에 대한 반발심도 생겼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진짜 정치란 걸 해봐? 정주영 대표의 안부 전화에 그 전까지의 두려움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남자가 태어나서 한번 해볼 만한 일이다, 나라고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순간 출마를 권유했던 구리 지역 사람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홍콩 강제출국이 오히려 나의 정치입문 결심을 굳힌 셈이다.
*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는 몸싸움에서 이긴 여당에 이끌려 SBS 사옥으로 갔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날 밤 10시 내가 출연한 SBS ‘뉴스 쇼’는 여당이 나를 출연시키기 위해 급조한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외압은 없었고 출마도 안 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또 한번 좌절했다. 겁이 났다.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 출마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쉬기 위해 홍콩으로 갔을 뿐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정 대표와 개인적인 관계는 유지하겠으나 정치는 절대로 안 할 생각입니다.” “봉두완 전 의원으로부터 출마 권유는 받았지만 끝까지 연예인으로 남겠습니다”는 맘에도 없는 말도 했다.
* 나는 후배 연예인이 출마할 때면 이렇게 충고하곤 했다. “제발 화려한 연예인 티를 내지 말라”고. “많이 걷고 많이 신경 쓰고 그러면서 물은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입술도 부르트고 눈도 충혈돼 동정표를 받을 수 있다. 되도록 연예인도 유세장에 부르지 마라. 주인공이 희석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구석이 있어야 찍는다.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져야 표를 주는 법이다. 시도 때도 없이 똑똑하기만 해서는 거부감만 생긴다. 내 선거유세 때는 친구 박종환을 제외하고는 다른 연예인은 거의 부르지 않았다. 화려한 연예인 얼굴에 괜히 유권자 시선만 분산되기 때문이다. 한번 더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면 진짜 멋있게 뛸 자신이 있는데…
* 유세장 풍경은 진짜 재미있었다. 원래 유세장에는 많아야 1,000명이 모이는데 내가 가는 유세장에는 최소 1만 명 이상이 모였다. 상대 후보가 이를 비꼬듯 말했다. “보시라. 정주일 후보가 현대 직원을 모두 동원했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만약 당신 집이 양조공장을 하고 직원이 50명인데 당신이 출마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직원들이 오지 않으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다른 후보는 “느닷없이 딴따라 한 명이 이 곳 구리에 철새처럼 날아와 물을 흐려놓고 있다”며 나를 깎아 내렸다. 가만히 있을 이주일인가. “구리가 공기 좋고 인심 좋으니 철새가 날아온 것 아니냐?” 유권자들은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결국 그 후보는 유세 마지막 날에는 유세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유세였다. 상대 후보가 원고를 읽고 있었는데 마침 운동장 옆의 철길로 경춘선 열차가 지나갔다. 열차 굉음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후보는 계속 자기 이야기만 했다. 그날 외신기자 10여 명이 나를 취재하기 위해 온 탓 정신이 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차례 때도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나는 연설 대신 물을 마시고 연단에서 다리 운동을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사람들은 또 한번 뒤집어졌다. 하라는 연설은 안 하고 달밤에 체조를 한 격이니 안 뒤집어질 수가 있나. 열차가 지나 간 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당선되면 우선 이곳에 방음벽부터 만들겠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진 것은 물론이다.
* 어떤 후보는 내 외모에 대해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오리궁둥이로 까불던 놈이 구리 시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눈 깜짝 안 하고 차분히 응수했다. “당신 아드님도 제 오리걸음을 보고 따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듣기에는 아드님이 아주 훌륭하게 잘 자랐다고 하던데요.” 그 후보는 할 말을 잃었다.
*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3월23일이 왔다. 이미 판세는 내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3당 모두 ‘이주일 우세’를 예상했다. 정주영 대표는 이날 구리시 덕현아파트 부지에서 열린 정당연설회에서 “현 정부는 두 명의 정 서방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말하며 확실한 표 다지기에 나섰다. 나도 연단에 올라 마지막으로 한마디했다. “여러분, 내일 투표용지에 ‘이주일’ 이름이 없다고 찍지 않으면 저는 엉망진찬이 됩니다. 정주일, 아시겠죠?”
* 드디어 개표가 시작됐다. 나는 박빙의 리드를 지키다가 밤 11시 30분께 완전히 승세를 굳혔다. 내가 2만 5,751표, 전 후보가 1만 8,142표, 민주당 조정무 후보가 1만 2,900표. 일개 코미디언이 현역 의원인 전 후보를 무려 7,609표 차이로 따돌린 것이다. “처음 후보 등록을 하러 구리시청에 왔을 때 시청이 아니라 면사무소인 줄 알았습니다. 국회에 진출하면 가장 먼저 낙후된 이곳을 시민들이 정을 붙일 수 있는 위성도시로 가꾸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지해준 지역 주민들을 위해 우선 오리걸음부터 고치겠습니다.” 대한민국 처음으로 코미디언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국회는 소문처럼 살벌한 곳은 아니었다. 하긴 여야 의원들을 지연과 학연으로 연결짓다 보면 모두 형동생 사이가 아닌가. 본회의장에서 죽이네, 살리네 싸우다가도 문 하나 열고 휴게실에 들어가면 “너, 너무 한 것 아냐?” “그러는 형님은요?”라고 농담까지 건네는 곳이 바로 국회다. 그러나 나를 보는 의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코미디언까지 국회의원이 되다 보면 의사당이 더러워지고 말 것’이라는 눈치였다. 더욱이 나나 정주영 대표, 김동길 의원 모두 그들 눈으로 보면 모두 ‘외지인’이니 그 괄시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나를 반기고 환영해준 사람은 휴게실과 안내 데스크의 아가씨, 국회 경비원, 사무처 여직원 뿐이었다.
* 나는 점점 국회의원이 된 데 대한 기쁨보다는 실망과 환멸을 느껴야만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 만나는 게 괴로웠다. 지역구에서 돌잔치가 열려도 불려가야 했고, 장례식에 가면 상주들은 무조건 내가 밤을 세워주길 원했고 술까지 계속 먹이면서 괴롭혔다. 내가 다른 국회의원이었어도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다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선 후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민당 동료 의원들의 당선사례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문제는 그들도 나를 동등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행사를 빛낼 연예인으로 대한 것이었다. 참으로 참기 힘들었다. 연예계 생활보다 더욱 바빴다. 그것도 의정활동이 아니라 남 뒤치다꺼리로 말이다. 그렇다고 연예인 때보다 돈을 더 벌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구당 관리에 진짜 많은 돈이 들어가야 했다. 내가 왜 국회의원이 됐을까? 마음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다.
* 어쨌든 국감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국감 이후 동료 의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이면 다른 분야에서도 최고’라는 인상을 심어준 모양이다. 한 의원은 “스타는 역시 스타”라고 나를 추켜세웠다. 국감 전 나를 보기만 하면 웃던 교육부 공무원들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고 내가 자료 요청을 하면 바짝 긴장할 정도가 됐다. 1994년 민자당으로 옮겨 문체공위에서 활동할 때에도 국감만큼은 항상 순위에 들 정도로 잘 했던 것 같다.
* 정주영 후보는 왜 대선에 나섰을까. 나는 그가 기업을 하면서 정치인들에게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툭하면 실시하는 세무조사에 큰 염증을 느낀 것 같다. 그가 평소 “평생 세금 한번 안 낸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면 되겠어? 직업도 없었고 장사도 안 해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소가 웃는다, 소가 웃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선 자금을 지구당에 풀지 않았고 너무 현대 맨들에게만 의존했으며 이 같은 배경에서 터진 정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이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아파트 값을 반으로 내리겠다”는 공약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그가 “대통령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소문 하나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리 경제가 중요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나, 이것이 당시 유권자들의 생각이었다.
* 국민당은 창당 2개월 만에 국회의원을 31명이나 탄생시킨 돌풍의 주역이 2년도 안돼 당 존립 자체를 걱정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치의 무상함을 느꼈다. 내 신세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듯했다. 하늘같았던 정주영 회장은 미국에 가서 안 돌아오지, 주요 당직자들은 이미 다 탈당을 했지…. 누구보다도 끈끈한 동지애를 외치던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빠져나갔다. 의리 없는 게 연예계라고 욕하지만 내가 겪은 정치판은 연예계보다 더 심했다.
* 내가 여당으로 옮기고 나서 느낀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공약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 그리고 당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면 야단만 맞는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사안은 당정간에 이미 결정돼 있기 마련이어서 분위기 파악 못한 내가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다가 욕을 먹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 1996년 1월 29일 나는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마침내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국회의원 선거일(4월 11일)을 두 달여 앞둔 때였다. “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4년간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 “적과 동지의 구분조차 모호한 정치판에 회의가 들었다. 연예인 후배들이 정치를 한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겠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내가 쏟아낸 말들이다.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후배 이덕화가 15대 총선에 나선다고 했을 때 참 기가 막혔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 캠프에서 뛰었던 이덕화가 광명갑에 신한국당(95년 12월 민자당에서 개명)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이었다. 내 험한 꼴 옆에서 다 지켜봐 놓고도 출마하는 것을 보면 역시 정치가 마약보다 더 중독성이 강한 모양이다.
* 인생을 살면서 몇 번인가는 억울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미국에서 유학 중인 딸들을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구해서 구입한 집이 말썽이 되어 54만 달러(6억 8,000만원) 상당의 호화주택을 불법 매입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적이 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매달 1,200달러씩 20년인가, 30년을 갚으면 내 집이 되는 조건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한꺼번에 53만 달러를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996년 초 이 집이 호화주택으로 소문이 났다. 이 사건은 결국 1997년 12월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원과 추징금 2억 7,560만원을 선고받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참 억울하기만 하다. 더욱이 내가 정치를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하자마자 이 사건이 터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이 오싹해진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주일
* 1996년 5월 29일 14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났다. 4년간의 외도가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런 후회가 없다. 정치인 생활을 해본 것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한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평생을 코미디언으로만 살았다면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멋진 의정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정 의원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국민을 대표해 정치를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 의원은 이미 국민 전체를 즐겁게 해준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이 말대로 4년을 보냈는지는 국민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다.
* 1997년 방송복귀 후 진행을 맡은 SBS ‘이주일의 투나잇 쇼’의 첫 녹화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잠깐 박장대소가 터졌을 뿐 전체 녹화장 분위기는 내가 봐도 썰렁하기만 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시청률 1위였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시청률 1위를 달렸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방송무대에 적응하기까지에는 근 한 달이 걸렸다. 화려한 넥타이를 맸다가도 ‘이거 너무 튀는 것 아냐?’라는 생각 때문에 그냥 풀업리고, 멋진 콤비 양복을 입었다가도 “야하다”는 아내의 말에 점잖은 감색 양복으로 바꿔 입고…. 4년 동안 몸에 밴 국회의원 때를 벗는 게 그렇게 힘든 줄은 정말 몰랐다.
* 암 선고를 받은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암이란 놈이 참 고약한 병인 것만은 분명하다. 몸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아 질병을 일으키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다. 항암치료를 잘 받으면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암보다는 암이 유발하는 염증과 고통이 무섭다. 그러나 3개월 사형선고를 받은 내가 월드컵 경기장을 찾아가 응원까지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은 이진수 국립암센터 부속병원장과 의사, 간호사 덕분이다. 아니,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주위 분들의 성원과 격려 덕택이다. 우리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한 것이 국민 성원과 응원 덕분이듯 말이다.
* 한번은 기(氣)치료를 받으러 계룡산에 갔다가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아진 적도 있다. 나는 몸이 더 망가진 채 곧바로 입원을 하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코미디도 그렇지만 암 치료도 한 우물만 파야 한다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좋은 기운까지 같이 빠져나간 것 같다. 현대 의학이든 한방이든 몸이 나으려면 어느 하나만 밀고 나가야 하는 법이다. -이주일
* 요즘은 내가 암에 걸린 세가지 요인을 이렇게 꼽는다. 담배, 술, 스트레스. 누구에게나 이 세 가지는 건강의 적이다. 특히 담배는 내 손 곁을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던 독약이었다. 하루에 보통 두 갑. 무명시절 안주도 없이 막소주를 들이키며 앉은 자리에서 한 갑을 피우곤 했던 그때가 너무나 바보스럽다. 다음에 내가 또 금연CF에 출연한다면 담배 피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라는 내용을 내보내고 싶다. 담배를 피면 손가락질 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금연 못하면 다른 일도 못합니다. 큰 일 절대 못합니다. 그리고 흡연이 자신에게만 피해를 줍니까? 가족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겁니다. 그런데도 왜 그걸 못 끊으십니까?”
* 요즘 안타깝게도 금연 열풍이 한풀 꺾였다는 소식입니다. 담배 피시는 분들, 대체 왜 그러십니까? 혹시 “이주일 보니까 폐암도 별 것 아니네. 오늘 내일 한다더니 아직 멀쩡하잖아?”라고 생각한 겁니까. 그분들은 아마 제가 죽어야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믿을 것 같습니다. 국민 건강을 위해서는 제가 빨리 죽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제발 제가 죽는 날이 금연광고가 성공하는 날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 나는 원래 건강 체질이었다. 지금까지 병원이라는 곳은 어쩌다 한두 번 가는 곳이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축구 한 게임을 거뜬히 뛰었던 내가, 5분을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던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솔직히 누가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있나. 나랑 친한 여무남 대한 역도연맹회장은 언제나 내게 “내가 지금 집에 돌아가다 죽을 수도 있고 당신이 10년 더 살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간호하는 가족들도 지치기는 나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면 아내는 몹시 운다. “내가 죽기를 바르느냐?”고 야단을 치면 더 서럽게 운다. 전에 들었던 스님 이야기가 맞다. 가족은 병간호를 안 하는 법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떨어져서 간호를 해야 한다. -이주일
* 한때는 암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 안에 폭탄을 집어넣어서라도 그 놈을 깨부수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은 암도 코미디나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코미디는 내가 이겨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즐기는 상대다. 암 역시 코미디이고, 내 몸은 코미디언인 셈이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최소한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 연예계가 아무리 겉으로는 막 가는 동네처럼 보여도 전에는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이 있었다. 지금처럼 선후배도 없는 그런 난장판이 아니었다. 더욱이 누구에게 경조사가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와 밤새우는 것은 보통이었다. 지금처럼 방송사 취재진을 끼고 병문안을 찾아오는 그런 후배들은 없었다. 연예계가 이처럼 돼 버린 것은 물론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한번 스타가 되려면 최소 10년은 고생을 해야 했는데 요즘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제작자 눈에만 잘 띄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 전에는 극단이나 방송사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러니 나도 스타가 된 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말 온갖 노력을 다 했다.
* 땅 사기 사건을 당한 후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자고로 어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친절을 베풀면 그 사람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 결론은 훗날 내 정치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
* 박종환 감독과 고교 졸업 후 다시 만난 게 1966년 겨울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열린 재경 춘천고 동문 모임에서였다. 당시 나는 지방극단을 좇아 다니는 3류 연예인, 박 감독은 대한석탄공사 축구팀의 갓 부임한 코치였다. 우리는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꽁치 한 마리를 굽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야, 배고파 딴따라 짓 못하겠다.” 그러면서 그 동안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줄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또 야단을 쳤다. “이 자식이, 운동선수는 뭐 별 볼일 있는 줄 알아? 어차피 나선 길이니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야 할 것 아냐?” 내가 서울 상계동 단칸방에서 살 때 집사람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쌀 가마와 미역 다발을 사 들고 찾아온 박 감독, 지금도 1주일에 한번씩은 몸에 좋다는 지역 특산물을 갖고 분당 집으로 찾아오는 박 감독. 그는 나의 진정한 친구이다.
* 지금도 내게 어머니(元春玉, 1987년 작고)는 흥이 많으신 젊은 아낙네의 모습 그대로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새벽같이 포구에 나가 생선을 사다가 머리에 이고는 행상 길에 나섰다. 밤늦게 지쳐 돌아온 어머니는 그래도 항상 두 가지 선물을 들고 오셨다. 위장병을 얻어 드러누우신 아버지(鄭命壽, 1970년 작고)를 위해서는 각종 약초를, 가난 속에서 기가 죽어있던 아들에게는 세상의 희한한 풍물 이야기를. 그리고 흥이 나시면 벽장 속에 숨겨뒀던 가짜 안경이녀 플라스틱 코·이빨 등을 꺼내 우스꽝스런 얼굴로 광대놀이까지 해보이셨다. 내가 ‘코미디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득한 그 시절, 소도구로 배고픈 아들을 웃겨주셨던 어머니 덕이라고 생각한다.
* 내가 암에 걸린 것은 물론 담배 때문이지만 더 큰 원인은 술이다. 나뿐만 아니라 술 좋아하던 선배 코미디언 중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시명(朴時明), 서영춘(徐永春), 이기동(李起東), 양 훈(楊 薰), 양석천(梁錫天)…. 송 해(宋 海) 선배만 빼놓고는 다 돌아가셨다.
* 술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1980년대 초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와 조용필이 부산에서 따로따로 공연을 가진 어느날 내가 전화를 걸었다. “용필아, 술 한 잔 하자.” 그리고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한 살롱에서 만나 양주를 몇 병 비웠다. 여기서 끝냈어야 했는데 내가 “낭만을 즐기자”며 술 궤짝과 안주를 가지고 해운대 백사장으로 갔다. 촛불까지 켜놓고 그야말로 낭만을 즐겼다. 게다가 용필이가 ‘촛불’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기까지 하나 술 맛이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러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우리가 반쯤 물에 잠긴 것도, 해가 뜬 것도 몰랐다. 완전히 변사체였다. 백사장에서 우리를 발견한 아주머니들의 웅성대는 소리만 들렸다. “이 사람, 조용필이다.” “아이다. 톱 스타 조용필이 왜 여기 이러고 있노?” “맞다. 여기 이주일도 있다 아이가.” “아이라니까. 그런데 참 비슷하게 못 생겼대이.”
* 박종환 감독과 백담사를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친해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얼마 전 분당 집에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3월 초였을 것이다. 측근 몇 명을 데리고 와서 1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그때 그가 내게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암은 불치병이 아닙니다. 정 의원은 국민을 행복하게 해줬으니 반드시 건강을 되찾을 것입니다. 몇 십년 동안 자기 몸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하늘이 그 기회를 주신 것이라 생각하세요.”
* 내가 TV 데뷔 후 처음으로 의상협찬을 해준 사람은 ‘김봉남’으로 알려진 앙드레 김이다. 내가 아는 그는 대한민국의 숨은 외교관이다. 주한 외교사절의 이취임식 때면 그는 언제나 만찬을 열어 외교사절 부인들에게 멋진 드레스를 2벌씩 선물한다. 주한 외교사절 사이에서 ‘앙드레 김 없이는 인수인계가 안 된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내게 자주 들려준 말이 하나 있다. “유명해진 스타에게 내 옷을 선물하는 것을 30년 넘게 해왔다. 그들이 내 옷을 입을 때 나는 가장 기쁘다. 그 이상의 이유는 없다.” 나이 일흔이 돼오는 그를 더 이상 코미디 소재로 삼지 말아달라고 후배 연예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 아들 창원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는 내게 이렇게 말해 혼이 난 적이 있다. “아버지, 친구 놈들은 다 자가용 타고 다니는데, 저도 포니 중고라도 한 대 사주세요.” 나는 그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단을 쳤다. “그렇게 자가용 타고 싶으면 내 차를 타. 내가 버스 타고 다닐 테니까 네가 벤츠를 타라구. 건방진 녀석.” 이렇게 엄하게 키운 아들 놈인데 술을 먹고 기사랑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으니 그 야속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 연예계에는 문병이냐 문상, 결혼식을 죽어라고 안 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 부친상이나 모친상에 가보면 된다. 십중팔구 영안실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한 경우에는 다음날 아침 운구할 사람조차 못 구해 쩔쩔 매는 경우도 있다. 조화가 아무리 많이 놓여있으면 뭐 하나. 모든 인간관계는 자기가 베푸는 만큼 돌아오는 법이다. 폐암 보도 후 한결같이 병실을 찾아준 분들이 너무 많다. 과분하다. 주위 사람들의 경조사라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간 내 지난 삶의 보답인 것 같다.
* 몸이 아플수록 이상하게 힘들게 살아온 지난 삶이 많이 생각난다. 쇼 단장에게 발길질을 당한 일, 300원짜리 완행열차를 타고 울며불며 서울로 올라온 일…. 나는 그 한맺힌 삶을 어떤 식으로 잊으려 했을까. “너, 나 괴롭혔으니까 그대로 당해 봐라”는 식이었을까.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나는 내게 발길질을 해댔던 그 쇼 단장의 자녀에게 해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줬으며 독립투사 이우석 옹을 수양아버지로 모신 일,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000원을 내놓은 일, LA 흑인폭동 때 큰 피해를 입은 현지 한인방송 라디오 코리아에 2억원을 내놓은 일도 내 나름의 한풀이였다. 나는 내 한과 가슴의 상처를 일종의 보은(報恩)으로 치료해왔던 것이다.
* 축구와 나는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축구는 우직하고 와일드한 종목이어서 마음에 든다. 나는 춘천고 축구부에서 라이트 윙으로, 박종환 감독은 풀백으로 뛰었다. 믿는 분들은 별로 없겠지만 그 때는 내 실력이 박 감독보다 뛰어났다. 경기를 읽는 눈이나 패스의 정확성에서 한 수 앞섰다. 만약 내가 축구를 계속 했더라면 박 감독의 좋은 라이벌이 됐을 것이다. 이런 내 축구인생 증에서 가장 감회가 깊은 순간은 역시 198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무궁화축구단 주최로 열린 자선 경기였다. 연예인들의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3만 관중이 들어찬 그날, 후반 동점 상황에서 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 내가 정말 그림 같은 중거리 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관중의 환호에 답하며 400m 트랙을 두 바퀴나 돌았다. 골을 넣고 운동장을 돌 때의 그 기분…. 안 겪어본 사람은 정말 모른다.
* 나는 보통 사람이고 국회의원은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다. 나와 그들의 생각은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국회의원은 대통령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대통령을 견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독제가 안 된다. 국민들로부터 무조건 욕만 얻어 먹는 국회의원이지만 우리가 크게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의원들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어서 이 사회에 만연한 불신 풍조를 없애야한다. 정치인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정치인 여러분, 제발정신 좀 차리세요. 한심합니다. 국민에게 불신만 주는 정치는 그만 하세요. 웃음을 주는 정치를 하세요. 아무리 답답해도 제가 다시 정치를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중병에 걸린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잠시 잊고 산 것에 대한 벌 같다. 셋방을 전전하며 150원짜리 자장면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전기 많이 쓴다고, 빨래 하다 수돗물 많이 쓴다고 집주인의 괄시를 받던 그 시절을 유명해지고 나서 깜빡 잊은 것이 잘못이었다. 집주인 눈치 보느라 제대로 켜지도 못했던 전등불이 방송사의 화려한 조명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사과궤짝을 화장대로 사용하면서도 행복했던 그 과거를 기억해야 했다. 금호동 그 집에서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은 생각 간절하다.
* 직장인은 정년이 있고 퇴직금이 있다. 연예인은 50, 60대가 돼도 스타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 선수는 그렇지 않다. 전성기라고 해봐야 고작 10년이다. 국내 선수의 몸값이 1억원을 넘어선 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과거 최고의 스타 대접을 받았던 선수 중에서 지금 하루 세끼를 걱정해야 하는 원로 체육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우리는 다짐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과 태극전사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오늘의 영광을 있게 한 옛 선수와 지도자들을 지금이나마 제대로 대접하겠다고. 19년 전 4강 신화의 주인공을 한명씩 불러본다. 김풍주, 이문영, 문원근, 유병옥, 장 정, 최익환, 노인우, 김판근, 김종건, 김흥권, 강재순, 신연호, 김종부, 최용길, 이태형, 이기근, 이승희, 이현철, 그리고 박종환 감독. 그대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축구가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면서 살려는 현대인의 아픈 점을 맹타했다는 지적이다. 서로 잘났다고 우겨대는 세상에서 이주일의 솔직함이 돋보였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20년 동안 빛 못 본 인생들의 한을 내가 대변했다고,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는 방송출연 정지를 당한 나의 자조적 인생관이 대중에게 큰 공감을 얻은 것이다. -이영수(이주일연구회 대표) [삐딱한 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