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봄 집회 하나님 경륜의 중심
2. 구속된 백성으로 성막을 건축함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 (출3:12)
창세기 1장과 2장의 계시는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가지고 하와를 만들었다는 말씀으로 결론지었다. 하나님 갈망이 당신을 표현할 사람을 갖는 건데 한 사람을 갖는 것이 아니고 단체적인 사람으로, 전 인류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었다 할 때의 그 하와는 하나님을 표현할 전 인류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시가 발전해서 출애굽기에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여 그 백성들로 하여금 성막을 건축하게 하는 그런 역사가 시작된다.
창세기에서는 개인적인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출애굽기에 오면 백성으로 단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생각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어디 그런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만 있겠는가. 다른 나라에도 얼마든지 있고 다른 역사에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낸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이다. ‘바로의 손에서 구출한다’ 이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다. 바로는 성경에서 사탄의 화신으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에게 종이 됐다는 것은 사탄의 종이 됐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탄에게 종이 됐다는 것은 인류가 사탄에게 종 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사탄에게 종이 된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그들은 밥을 먹기 위해 애굽을 내려갔었는데 결국 거기에 붙들여 400년 동안 바로를 위해 봉사하는 종이 되게 되었다. 바로를 섬기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국고성이란 것은 나라의 창고이니까 나라가 얼마나 부자인가를 묘사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바로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쓰여 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진 인간이 결국 사탄에게 종이 되어 사탄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 지고 있는 그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결국 사탄의 종된 인류의 대표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의 종된 이스라엘을 구출한 것은 사탄의 종된 인류를 하나님께서 구출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된 인생, 그것이 바로 인생의 불행이고 저주이고 비극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어진 인생이 그 목적에서 어긋나버렸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그 목적에서 어긋난 것은 무가치하고 비참해지게 된다. 우리가 고물상에 가 보면 버려진 물건들이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것들이 다 유용하기 때문에 만들었지만 어느 날 필요가 없게 되어 고물로 처분한 것이다. 이것들은 용광로에 들어가 완전히 자기 형체가 없어지고 새로운 형체로 다시 거듭나지 않는 한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사탄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바로 저주이다.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서 고통을 한다고 묘사되고 있는 것은, 결국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류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바로의 종이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의 종된 것과 뜨거운 불에 끓고 있는 것을 분리하여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분리할 일이 아니고 하나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옥이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지옥이 없다 하는데 지옥이 있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사탄을 섬기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인생의 목적에서 이탈되어 버린 것이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인생들을 보면 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옛날 비하면 너무나 잘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더 잘 살게 될 것이다. 온 세계가 지금 잘살자고 노력하고 있다. 어제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2주년 즈음 국정연설을 했는데 들어보니 다 잘 될 것 같았다. 그대로만 된다면 정말 다 잘될 것 같다. 전보다 훨씬 좋은 나라가 될 것이고 좋은 사회가 될 것이고 좋은 형편이 될 것이다.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좋아진다고 봐야지 나빠진다고 볼 수는 없다. 점점 더 잘살게 될 것이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환경하고 지금은 비교할 수 없다. 옛날에 살던 동네를 가보니까 내가 살던 동네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27세에 나왔는데도 가보니까 그렇게 초라할 수 없다. 그 때는 왜 그 집이 그렇게 좋았던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너무 좋아졌다는 뜻이다. 그 집은 그대로 있는데 너무 좋은데 살다보니 오두막처럼 우스워보였다. 국회의원 출마했던 사람이 살던 집인데 대구 시내에서 그런 집 찾아보려면 드물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인생의 목적에서 이탈되어 있다.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른다. 자기들 스스로는 잘살기 위해 살고 있다. 잘살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류는 결국 자기가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다. 그래서 목적에서 이탈된 사람이다. 아무리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잘살고 있다하더라도 결국은 바로의 종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벽돌로 꼭 찍어야만 불행이고 가마솥에서 고기를 먹지 못해야만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사탄을 섬기고 있고 사탄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바로 비극이고 불행이다. 그들은 마치 잡혀 온 포로들이 적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처럼 비참한 상태이다. 포로들은 잡혀오면 아군을 위해 일하는 대신 적군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 그보다 비참한 일은 없다. 꼭 그와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결국 사탄에게 포로가 되어서 자기가 할 일이 아닌 전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하나님을 방해하고 거부하고 하나님을 헐뜯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비극이다. 이런 백성을 구출해 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는 것이 출애굽의 언약이고 약속이다. 단순히 벽돌 찍는 사람을 데려다 사무 보는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사탄에게 종된 사람을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오면 벽돌을 찍다가 사무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를 섬기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문제이다. 교회 와서도 여전히 내가 바로를 섬기고 있다면 교회 온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내가 왜 교회 와 있는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된다.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안맞고 교회만 아니면 잘살텐데 교회가 자꾸 걸리는구나 하고 될 것이다. 목표가 전혀 다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세상의 어떤 것에서 우리를 한 단계 높여주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세상을 섬기던 사람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우리를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할 때 그 방법을 보면 유월절이라는 방법으로 구속을 했다. 우리가 강자에 서 있는 사람을 해방시키려면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배하고 있는 자를 파괴시키고 노예된 자를 불러내려면 지배하고 있는 자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져야 된다. 지금 북한의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을 풀어내려면 북한 보다 강한 힘을 가져야 풀어낼 수 있지 그보다 더 약한 힘을 가지고서는 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낼 때는 전혀 반대로 유월절이라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했다. 이것은 역사의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서 유월절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냈는가? 세상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서는 힘이 있어야 해방을 시키는 것이지 힘이 없으면 해방 시킬 수 없다. 연합군이 일본에 비해 힘이 우세했기 때문에 일본에 잡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지 만일 그들이 졌으면 우리는 더욱더 일본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지금 완전히 일본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면 저 북간도로 밀려나가 대구에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정책이 그러했으니까. 일본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 옮기고 한국 사람들은 저 북간도로 옮기는 계획이었다. 지금쯤은 아마 우리는 대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 어디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연합군이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연합군의 힘이 일본의 힘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항복을 하고 우리를 내놓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세상의 전쟁은 힘의 전쟁이다. 힘이 약하면 그것은 정의라도 소용없다. 옳은 나라가 이기고 그른 나라가 지는 그런 법은 없다. 세상에서는 반드시 힘이 있는 나라가 이기게 된다. 일본이 더 정당해서 우리를 침략한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더 옳아서 우리를 지배했던 것도 아니다. 힘이 있었기 때문에 지배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어떻게 바로의 지배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풀어내어 오는데 있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풀어내어 왔는가? 이것이 우리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굳게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대대손손 이것을 전해 와서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서 애굽을 나왔다고 수천년 동안 계속 전하고 있다. 이것은 거짓말을 만들어서 전한다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한 가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사탄과의 전쟁에서는 가능하다. 바로와의 전쟁에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사탄에게 얽매인 사람을 빼오려면 유월절이 꼭 필요하다. 사탄은 원자폭탄으로 없앨 수가 없다. 일본군은 원자폭탄 하나로 항복을 시킬 수가 있는데 사탄은 원자폭탄 100개가 있어도 항복시킬 수가 없다.
사탄은 오직 유월절로만 밖에 항복시킬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상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 그 역사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한 역사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다만 사탄에게 종된 백성을 하나님께서 건져올 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유월절을 통해서만 빼내올 수가 있다. 우리도 예를 들어 강한 자에게 붙잡혔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나를 풀어주어야 풀려나오지 그렇지 않고서는 풀려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탄에게 메여 있었다면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유월절이 없이는 해방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이상한 진리이다.
사탄과의 전쟁, 여기에는 오직 유월절 밖에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목표가 바로의 나라보다도 더 강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다면 분명히 바로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구출해 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이유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하기 위해 불러냈다. 사탄의 거처인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 하나님 거처가 되게 하기 위해 불러낸 것이다. 목적이 전혀 다른 것이다. 오늘 우리를 불러내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불러낸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메여서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내서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게 하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분명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부름을 받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교회는 세상과 대항하고 전쟁해서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지려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포로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구나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기독교가 한참 내려오다가 금방 변질되었던 이유가 다른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세상에서 핍박을 많이 받다 보니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국교가 되었고 교황이 황제를 지배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황제들이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에 안수를 받고 서품을 받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의 제후들이 와서 임명장을 받고 가고 교황이 인정을 해 주어야 왕이 되는 이런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얼른 보면 기독교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완전 승리하여 만왕의 왕이 됐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모든 나라의 제후들이 와서 교황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당신이 나를 독일의 왕으로 인정해 주어야 됩니다‘, ’영국의 왕으로 인정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교황이 인정하면 왕이 될 수 있고 교황이 인정하지 않으면 왕이 될 수 없었다. 완전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승리가 아니고 유월절이 승리가 아니다. 방법이 아주 틀린 방법이다. 그것은 세상적인 방법과 똑 같은 방법이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는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노선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의 종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의 종된 인류를 구출한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지 그렇지 않고는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서 빗나갔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달고 저주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로마의 국권보다는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로마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독립시켜줄 사람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라는 사람이 왔으니까 그들은 예수를 볼 때 실망했을 뿐 아니라 분노했던 것이다.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우리를 구출한다 하느냐, 너는 우리를 조롱하는 놈이라고 했다. 죄 없는 사람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머리를 긋고 저주를 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했기 때문에 예수를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독립투사라고 생각을 해보자. 일본으로부터 해방받기 위해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 사람들 속에 대한민국을 구출해 주겠다고 온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만일 예수 같은 사람이었다면 누가 제일 먼저 돌로 쳐 죽였겠는가? 독립운동에 제일 먼저 앞장선 사람이 아니겠는가. 자기는 지금 목숨을 버려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데 유월절이나 이야기하고 있으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저주한 것이다.
바로의 종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구출한 것은 세상적인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이신 당신의 표현으로서의 한 백성을 갖기 위한 것이지 결코 세상의 어떤 것하고도 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혈과 육에 관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권세와 정사를 잡은 자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어떤 힘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정사를 잡고 있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사탄과 싸우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그 근원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 근원이 사탄에게서 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부간에 한참 싸우다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말씀을 다시 들어보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우리 둘이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 뒤에 매니저가 있어 싸움을 시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싸움하고 매니저는 돈 가져가는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치고 박고 싸우는 있는 동안 매니저들은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면 치고 박고 싸운다. 박치현 형제가 개를 키운다. 평생 싸움만 하는 개다. 이 개는 개만 봤다하면 죽기 살기하고 싸운다. 죽을 때까지 싸우기만 한다고 한다. 싸우는 개를 보니까 싸우다가 두 놈이 지치면 둘이 서로 베고 누웠다가 일어나 또 싸운다. 완전히 그로기가 되어가지고 둘이 드러누웠다가 힘이 좀 나면 다시 일어나 또 싸운다. 죽을 때까지 싸우기만 한다. 개들은 왜 싸우는지 모른다. 뒤에서 매니저들이 돈 놓고 돈 먹기 하는지 모르고 둘이 죽을 때까지 열심히 싸운다.
사탄의 종 된다는 것을 이런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뭘 하다가 잠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싸우다가도 잠시 한번 멈추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뒤에 하나님이 있는가, 사탄이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 받은 것은 온 인류가 사탄의 손에서 구출 받은 것에 대한 예표이다. 유월절로밖에는 사탄의 손에서 구속해낼 수가 없다.
사탄은 왜 우리를 유혹했는가? 왜 우리를 속였는가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를 속였다.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누가 유혹하지 않는다.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을 유혹하는 법이다. 또 돈을 벌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혹하지 않는다. 돈을 벌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유혹하는 법이다. 증권하다 망한 사람 노름하다 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왜 거기에 말려 들어가는가 하면 자기는 뭔가 판단력도 있고 남보다 좀 뛰어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든지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말려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혀 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런 재주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대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걸려든다.
아담은 왜 걸려들었는가?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걸려든 것이다. 이 사람이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벗어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다. 완전히 망한 후에 그때서야 이제 안되는구나 하고 나온다. 그런데 그때도 재수가 없어서 안됐다든가 형편이 안좋아서 안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형편이 달라지면 또 한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나온 사람은 다시는 안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유월절밖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어린양이다. 나는 흙으로 지어져서 숨이 코에 붙어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그 자리에 가야 유혹을 벗어나게 되지 그렇지 않고서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 노름하다 늘 진 사람도 항상 운이 나빠서 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운수 돌아오기만을 계속 기다리면서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재주 없다는 생각을 못한다. 화투장이 머리에 올라갔다가 발가락에 갔다가 손바닥에 붙었다가 귀에 붙었다하는 이런 사람 앞에서도 자기는 운수가 나빠서 졌다고 생각한다. 재주가 모자라다는 생각을 안한다. 그러니까 살림 팔아먹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속은 이유는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유월절로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하나님이 유월절을 재정해 놓았다는 것은 육신적인 전쟁이 아니고 세상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도 역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리 믿으려 했다가도 안믿어 지고 믿으려 했다가도 또 정신 차려 보면 안믿어진다. 좀 흥분하면 믿어지지만 제 정신 가라앉으면 안믿어진다. 그래서 믿음을 일으켜 보려고 노력을 한다. 왜 그런가? 지금 그런 현실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양으로 구속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현실이 없다. 현실이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믿어지는 것이다. 사탄의 손에서 벗어나 본 사람은 어린양이 아니고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영원히 그렇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리이다. 변할 수가 없는 그런 진리이다.
앞으로도 어떤 사람도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유월절이 없이는 벗어날 수 없다. 오늘 기독교가 사탄의 손에서 벗어나려 해도 유월절 없이는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가 유월절을 갖지 않는 이상 사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많이 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월절이 없으면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름으로 사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된다. 사탄의 영광을 돕게 된다. 자기는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항상 사탄과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구라파나 선진 국가에 가보면 기독교 선진 국가인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잘된 나라들이다. 남는 것은 세상만 남았다. 예수는 어디 간데가 없다. 지금은 예수가 필요가 없게 되어버렸다. 예수는 굳이 필요 없어도 되고 기독교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되었다. 은연 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속아서 결국은 사탄의 영광만을 만들어내고만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인구의 4분의 1정도인데 시간이 지나면 기독교 문화가 정착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예수 없이도 기독교 문화로 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미 벌써 그렇게 되는 집안도 있다. 4~5대째 기독교 집안도 있는데 이미 벌써 기독교화 되어 예수 그리스도는 있으나 없으나 기독교화된 문화 속에서 잘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월절이 없는 한 기독교는 개혁될 수 없다. 유월절이 없는 한 기독교는 바뀌어 질 수가 도저히 없다. 왜? 사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인생도 이 유월절이 없이는 이 사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바로 이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였다. 그런 후 그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의 성막을 건축하게 하였다. 출애굽기의 목표는 성막을 건축하는 데에 있다. 출애굽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막을 건축하는 데에 있다. 구속하는 백성으로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내용이다.
아담을 가지고 하와를 만든 것이나 구속받은 백성으로 성막을 건축하게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아담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구속했기 때문에 이 구속받은 백성으로 성막을 건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막을 건축할 수 없다. 그들은 그래서 광야로 나오게 되었다. 광야는 어디인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중간지대를 묘사한다. 애굽도 아니고 가나안도 땅도 아닌 중간지대이다. 중간지대는 광야이고 산이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 그곳이 광야이고 땅과 하늘 사이 그것이 산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어디서 만났는가? 산에서 만났다. 하늘과 땅 가운데서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처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세상에는 애굽이 통치하고 있는 곳이므로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할 수 없다.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해야지 성막을 건축하겠는가. 못한다. 가나안 땅은 가나안 7족이 점유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거기서도 성막을 건축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광야에서 성막을 건축하게 된다.
이 광야는 어떤 곳인가? 인생의 극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는 그런 곳이 광야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 광야이다. 당장에 애굽에서 가져온 밀가루가 다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고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는 만나를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모래사막 속에서 하나님이 물을 주시지 않으면 물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 바로 이 광야가 되었다. 여기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처를 준비하게 된다.
왜 그렇게 되는가? 우리가 세상의 어떤 것을 만들어 내려면 이런 곳에서는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세상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려며 좋은 조건이라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좋은 재료도 있어야 되고 좋은 환경도 있어야 되고 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 거처는 이런 곳에서 준비되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살면서 무엇을 경험했겠는가? 오직 하나님 밖에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내일 천당에 간다 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늘 지금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천당에 안간다면 예수를 왜 믿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아직 광야에 안나가본 사람들이다. 광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내일 천당을 위해 오늘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왔는데 거기서는 내일 천당이 있냐 없냐는 문제되지 않고 오늘 지금 밥을 먹느냐 못먹느냐 오늘 지금 물을 마시냐 못마시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환경에 가면 오늘은 고생하더라도 내일 천당에 가면되겠지 할 것 같지만 정말로 극한 상황에 봉착하면 아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지금 당장에 물을 마셔야 되고 지금 당장 밥을 먹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물을 마시고 눈이 밝아졌다는 말이 나온다. 사람이 완전히 기진맥진하고 탈진하고 수분이 떨어지게 되어 물을 마시고야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극한 상황이면 그렇게 말이 나왔겠는가. 요즘 의학적으로 말하면 완전히 탈수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너무나 더운 지방이니까. 이런 곳에서 결국 하나님 당신 거처를 마련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은 누구든지 자기가 초로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 집이 될 수 있다. 광야에서 아침에 보면 이슬이 내려 있다. 사막지대에 이슬이 오니까 선인장 같은 것이 살아 난다. 이슬이 있다가 햇빛이 나면 싹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이슬과 같은 것이구나를 매일 같이 볼 것이다. 우리 인생이 흙에서 나왔다는 것이 알아질 때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로서 감사가 되고 내가 바로의 종된 사람이었구나를 알 때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감사하다. 그래야만 하나님 거처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거처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참 이상하게도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떠난다. 인생은 초로와 같다는 것을 알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 집으로 준비가 된다. 혹시 여유가 좀 많고 넉넉해서 하나님도 좋지만 이것도 좋다고 되신 분이 있어 나태하다 광야로 내몰려 물 한모금만 먹으면 살겠다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 보다 지금 우리의 많은 선배들이 조상들이 걸어온 길을 보고 ‘아~ 인생은 초로와 같은 것이구나!’,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복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안부르겠는가. 사실 생각해 보면 다 부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 귀에는 그것이 부름으로 들리고 어떤 사람 귀에는 부름으로 안들리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안불러서 그런 것이 아니고 부르는데 부르는 소리가 안들린다는 것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 할 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계시록에 나온다. 누가 귀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 귀가 있다. 그런데 들을 귀가 없다는 그 말이다. 하나님이 불러도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린다. 부르심이 들리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양 떼를 치고 있다가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았다. 거기서 양을 치고 있던 사람이 어찌 모세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많은 사람이 양을 치고 있었을 것인데 그 중에서 모세 한 사람이 부름을 받았다. 들을 귀가 있었다는 것이다. 왜 들을 귀가 있었겠는가? 그는 광야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광야에 있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광야에 있을 때 들린다. 나도 광야에 있을 때 부름을 받았다. 물 한모금만 먹어도 되겠다 할 때 내일 일을 걱정할 만한 여유가 없을 때 그 때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았다. 그 전에 불렀으면 나는 못 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내 할 일을 잘하고 있을 때 불렀으면 여러 가지 핑계도 있고 여러 가지 망설임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전혀 여유가 없는 자리에서 부르시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하는 그냥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은 참 지혜로우신 분 같다. 나를 불렀던 그 친구가 참 지혜로웠다. 늘 봤었고 늘 놀고 했는데 그전에는 전혀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셨으니 네가 하나님을 위해 이제 일할 생각이 없는지 일할 생각이 있다면 내가 길을 주선 하겠다 이런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이 말이 하나님 음성이구나 하고 들렸다. 그 친구가 기회를 보고 있다가 말했는지 하나님이 시켜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적절한 시기에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 음성으로 들렸다. 좀 여유가 있었으면 전혀 안들었을 것이다. 여유가 있었으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싫어서라기보다도 여러 가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특별히 좋은 환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었으면 한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완전히 끝났을 때 불렀다. 그 친구가 볼 때 그렇게 봐서 그랬는지 하나님이 봐서 딱 그 때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낚시질을 할 때도 고기들이 배가 부를 때는 낚시 밥을 아무리 넣어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물이 맑아도 안걸린다. 물이 맑아질 때는 썰물로 내려갈 때라 고기들이 낚시 밥 옆에 와서 앞은 안먹고 뒤꼭지만 뜯어 먹는다. 다 안다 이 말이다. 물이 돌 때는 물이 흐려지는데 그 때는 고기들이 앞인지 뒤인지 모르고 물어 걸리는 것이다. 그 때 낚시를 잽싸게 채야 한다. 아마도 하나님도 잽싸게 챈 것 같다. 입 댈 때 채지 않으면 또 뜯어 먹고 고기들이 가버린다. 민물낚시 하는 사람들은 던져 놓고 껌벅껌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아당기지만 바다에서는 그렇게 낚시해서는 안된다. 예민하게 손끝에서 감각을 느끼고 있다가 잡아채어야 한다. 그래야만 걸리지 그렇지 않으면 가버린다.
하나님도 우리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그 때 딱 거는 것 같다. 그래서 아가미가 딱 걸린 것 같다. 나도 그렇게 된 것 같다. 어찌 꼭 그 기회에 불렀을까. 평생 그 친구가 그런 말을 안했는데 어찌해서 그 말을 했을까? 갑자기 편지가 와서 그 말을 했다. 요즘 어떻게 사는가 잘 사는가 평생 편지 안하는 친구가... 글씨가 좀 악필이 되어 남에게 죽어도 편지를 안하는 성질의 친구이다. 편지를 써도 거두절미하고 할 말만 몇 줄 쓰고 말아버리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가 왜 갑자기 편지를 썼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꼭 시켰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것은 광야에서 부른다고 생각한다. 편안하게 오징어 발 씹고 있는 곳에서 부르는 곳이 아니라 광야에서 나를 부르신다. 그 부르심 속에는 영광이 보인다. 어떤 영광이 보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주를 보고 왔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갈대야 우르에서 나올 때 결코 자신이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그런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환경 속에서 그는 분명히 뭔가 자기의 모든 것이 다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다. 이 때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하시면 그것보다 더 만족이 없고 그것보다 감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 내가 그의 거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그냥 마귀의 소굴, 사탄의 소굴이 될 것인데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그의 거처이다. 그래서 이 광야에 나온 백성들을 가지고 성막을 건축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광야에 나왔으니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개척해서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겠는가 이것을 연구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 한 석달 쯤 되었을 때 제 3월에 성막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일년간 동안 성막을 지어 제 2년 일월 일일 날 성막이 세워졌다고 말한다. 첫 해에 나와 한 2개월 동안 광야 생활을 하다가 성막건축이 시작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서 유월절이 첫 해의 정월 초하룻날이고 성막을 건축한 날이 두번째 해의 정월 초하룻날이다.
그래서 순전히 그들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 나온 백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구속을 받고 광야에서 사는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백성이 되었다. 계시록 14장 3절 4절에 보면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이라는 말이 있고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표현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결국 땅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고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어린 양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이다. 어린 양으로 대신 죽어 나온 사람들이다. 어린 양으로 구속을 받은 백성들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 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 속한 이 사람들이 하나님 집을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예물을 드림으로써 성막 건축이 시작된다. 출애굽기 36장을 보면 “자원하는 예물을 드렸다” 그리고 그것이 연하여 드림으로 말미암아 너무 많아 일을 못하게 되어 일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드림으로써. 어떻게 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넘치도록 가지고 왔을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예물은 모두 애굽에서 취한 것들이다.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실이나 모두 애굽에서 다 취해 온 것들이다. 자기들의 귀중한 소유물들이었다. 그것을 다 내 놓는데 전혀 아깝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아깝지 않았을까? 그들은 광야에 있는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건축되어야 할 백성들이었고 광야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광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금을 씹어 먹고 살겠는가 은을 씹어 먹고 살겠는가. 오직 하나님만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런 사람들의 것을 받아 자기 거처를 만들었다.
피조물 중에 사람은 가장 귀중한 존재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라는 그런 존재이다. 아담 중에 아담의 갈빗대는 아담의 생명에 속한 것이다. 가장 귀중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하와를 만들었다. 아담의 가장 귀중한 것으로 하와를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성막을 건축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가장 귀중한 것 안에 그분이 거하심을 볼 수 있다. 우리 귀중히 여기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거처를 건축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드린 예물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드려지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이 드려져서 교회가 건축된다. 우리가 간증을 하는 것은 자기 푸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소출을 드리는 것이다. 가장 귀중한 소출은 무엇인가? 금보다 귀중하고 은보다 귀중하고 동보다 귀중한 것들이다. 인생이 살고 있는 이유가 오직 그 열매 하나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인격의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갈빗대를 드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결국 하와를 건축하고 성막을 건축하게 된다.
교회가 풍성할 때는 어떤 때인가? 우리의 예물들이 풍성할 때 교회가 풍성하다. 예물이 연하여 나올 때이다. 시간이 없어 2분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너무 많아서이다. 모세에게 가서 하는 말이 너무 연하여 들어와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으니 제한해 달라고 한 것처럼 우리 교회도 연하여 나오기 때문에 밥도 먹고 잠도 자야하기 때문에 2분으로 제한한 것이다. 이는 우리 교회가 풍성하다는 뜻이다. 세상 교회에 가면 할 말이 없어 서로 밀다가 그만이다. 우리가 드린 아름다운 예물이 결국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증 중에 거하신다.
우리의 열매, 사람들 가운데 구속함을 받은 그 첫 열매, 하나님과 어린 양에 속한 어떤 부분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니까 우리가 그것을 내놓는데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다른 곳에서 보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산에 가서 본다든지 하늘에 가서 본다든지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거처 안에서 하나님을 봐야 한다. 하나님이 거하신 곳이 딱 정해져 있으니 그 거처 안에서 하나님을 봐야 한다. 이 백성 중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은 너무나 당연하신 분이고 구속받고 광야에 나온 백성 안에 거하신다. 오늘 우리가 구속받고 광야에 있는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의 이런 조건이 있고 저런 조건이 있어 교회생활을 잘하고 못한다는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개는 그래도 직장도 있고 해서 교회생활을 잘하겠지 하는 문제도 아니고 또 반대로 아무개는 이런 저런 문제가 많으니까 교회 아니면 안되겠지 하는 문제도 아니다.
교회문제는 구속받고 광야에 있는 사람의 문제이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가서 성막을 완전히 세우게 된다. 광야에서 성막을 세우기는 하지만 이는 이동식 성막이다. 정착은 가나안 땅에 가서 비로소 하게 된다.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자기 혼자 홀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막으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시게 된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 제시장들이 먼저 궤를 메고 물을 밟았다. 그래서 물이 갈라지면 백성들이 그 뒤를 따라 갔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가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 따라 갔다는 말인데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영체로 가신 것이 아니라 궤라는 형식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막을 통해서 갔다는 말이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성막과 함께 움직이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서 구름이 뜨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구나 하여 자기들도 움직이고 성막에서 구름이 딱 가라앉으면 서고 하였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주 쉬웠다. 구름만 보면 되니까. 그런데 그 구름이 어디 있는가? 성막위에 머물러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개인이 영성이 높아 기도를 많이 하여 신령하니까 하나님의 뜻을 안다든가 하는 이런 문제가 아니고 교회와 함께 계신다. 구름은 교회 위에 머물러 있다. 교회를 보면 하나님이 동으로 가고 있는지 서로 가고 있는지를 안다. 이런 날이 오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새 언약의 내용은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그 날 이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 어떻게 어린아이로부터 어른까지 하나님을 알겠는가? 신령한 사람들이 아니면 도저히 모른다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어린아이로부터 어른까지 다 알겠는가? 그것은 교회 위에 머물러 있는 구름 때문이다. 성막의 구름이 머물러서 그것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어린아이도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누구나 다 볼 수 있다. 성막 위의 구름이 움직이면 하나님이 움직이고 앉으면 그냥 앉는 것이다 하면 하나님을 못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로 오늘 그 구름은 교회 위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날엔가는 교회가 하나님을 그냥 누구나 쉽게 보게 하는 그런 집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 갈 때 신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막으로 들어갔다. 이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 백성과 함께 성막과 함께 들어갔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늘 재림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다시 오실 것인가? 교회와 함께 다시 오신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성막과 함께 들어가신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신 것은 교회와 함께 온다. 교회 없이 절대로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 오실 수가 없다. 그분은 교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성막을 먼저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성막의 사정이 곧 이스라엘 백성의 군대의 사정이었다. 성막이 사정이 좋으면 이스라엘 군대의 사정이 좋고 성막의 사정이 나쁘면 이스라엘 군대의 사정이 나빴다. 그래서 성막의 움직임에 따라 법궤의 움직임에 따라 전쟁에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가? 오늘 교회를 따라서 하나님은 움직이시고 그리스도는 움직이시고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주님께서는 승리하시기도 하고 패배하시기도 할 수도 있고 교회와 함께 그분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지금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가 열 처녀에 비유해서 다섯 처녀도 있고 신약성경을 읽으면 계속해서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 그날이 가깝다 이런 말들이 계속 나오는데 그럼 내가 잠 안자고 깨어 있으면 깨어 있는 것인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로 우리가 준비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은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다. 다스릴 수가 없다. 예수님은 교회가 없이는 다시 올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창세기에서는 하와이고 출애굽기에서는 성막이다.
오늘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당연하다.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 있고 교회생활을 하고 교회로 건축되어 나가고 교회로 짜여져 나간다는 것은 그냥 내 어떤 성질의 문제, 내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와서 짜여 지려고 하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생긴다. 거리낌도 생기고 부딪힘도 생긴다. 혼자 살았을 때는 편했는데 교회 오면 오히려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혼자 살 때는 누가 이래라 하는 말도 없고 저래라 하는 말도 없다. 그런데 집을 지으려고 생각하니까 집을 짓는 자리에 오니까 깎여져야 되고 잘라져야 되고 쪼개져야 되는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가 올 때마다 참 괴롭다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깎여져야 되고 다듬어져야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교회 오면 교회는 건축이 되는 곳이다. 자연히 잘라질 것은 잘라져야 하고 깎아져야 할 것은 깎아져야 되고 다듬어져야 할 것은 다듬어져야 한다. 건축을 하려면. 그럴지라도 건축이 되어야지 건축이 안되면 그냥 버려진 나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깎아지는 것이 싫다 하면 버려지는 것이고 나는 잘라지는 것이 싫다 하면 버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이 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냥 버려져 나두면 섞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야적장 같은 곳에 가보면 건축하다 놓아 둔 재료들이 있는데 그냥 썩어버린다.
우리는 건축의 재료로써 건축 안에 들어갈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건축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집이 될 수가 있고 하나님 경륜의 중심 안에 올 수가 있다. 점점 짜여 질수록 더욱 든든하고 확고하게 짜여 져서 하나님의 거처로써 변함없는 위치가 이루어지게 되고 우리 자신이 거기에서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격의 완성은 혼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혼자 도를 닦고 도를 통해 점잖은 사람이 된다고 해서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이 완성되려면 짜여 져야 완성이 된다. 인격이라는 것은 왜 필요한가? 짜여 지려고 필요한 것이다. 혼자 살려면 인격이 필요 없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려면 인격이 필요 없다. 내가 다른 사람하고 살려고 하니까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인격은 최종적으로 교회 안에서 완성된다. 교회로 짜여 지면서 내가 완성되어 지는 것이니까 내가 그 짜여 지기를 것을 싫어하면 나는 결국 버려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경륜의 중심은 오늘 성막을 통해서 교회 안으로 흐르고 있다. 성막을 우리가 자세히 본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중심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신 곳이고 이것이 오늘 교회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막만 확실히 안다면 교회를 금방 알 수가 있다. 기도합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탄의 종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바로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알든지 모르든지 자의든지 타의든지 간에 내가 사탄을 위해 종 노릇 하던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불러내시고 우리를 구속하셔서 당신의 집이 되게 하고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고 당신의 성막이 되게 해서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중심에 두시고 당신의 목표 안에 두셔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목표를 이루시려고 하시는 것을 감사하고 그 목적 안에 두셔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목적대로 당신의 의도대로 당신의 방식대로 우리가 건축되기를 원하고 당신이 지향하는 대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새로 지음 받은 새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성막으로 당신을 모시는 백성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