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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니체의 윤리학: 내활적 역량에서 긍정의 윤리학으로
들뢰즈 사상의 진화(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1993)
마이클 하트, 김상운과 양창렬, 갈무리, 2004, P.477.
- 하트(Michael Hardt, 1960-),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서른셋에 썼다.]
하트가 논문을 진행하는 순서로서 벩송, 니체, 스피노자의 방향이라고 한다. <첫째, 우리는 니체 연구에서 발전된, 내활적 역량(Efficient Power, 자신을 현시하는 내부적 힘)이라는 개념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법과 사법주의(juricidism)에 대한 공격의 기초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스피노자 연구를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공통개념(common notions)에 대한,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천에 대한, 그리고 권리에 대한 탐구를 발견하는데, 이로서 들뢰즈는 법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정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jus) 대 법(lex). 이것이야말로 법률주의(legalism)와 사법주의(juridicism)에 대항하는 들뢰즈의 입장을 훨씬 더 적절히 정식화하는 것이다. (103) [집단(대중)과 공동체에서 도덕론의 문제와 사회 제도와 국가에서 정의에 관한 법률제도의 문제에 대하여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견해로는, 통시적으로 스피노자, 니체, 벩송 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통시적으로 보는 경우는 시대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스피노자 시대는 아직 중력의 법칙이 나오지 않고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수학적 논리를 동원한다. 그런데, 니체는 국가주의가 기조를 이룬 헤겔의 시대가 가고, 진화론과 사회학의 여러 체계가 등장하는 시기였다. 사회학 다음으로 심리학의 발생의 전성기에 있었던 벩송은 새로운 형이상학의 생성을 실행하는 시기이다. 공시적으로 보면, 세 철학자는 안에서 밖으로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형이상학과 존재론적으로 깊이는 벩송에 있고, 인간적 측면에서 깊이는 스피노자,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안면에서 표면으로 나아가 높이로 향하는 길을 간 것은 니체이다. 즉 공시태 상, 깊이에서 높이로 전반적인 폭을 가진 철학자는 벩송이고, 인간(영혼)적 측면에서 깊이에서 높이로 향한 철학자는 스피노자이며, 사회와 문화의 이면에서 표면으로 또 높이로 나간 철학자가 니체이다. (52LKJ)
하트가 보기에 들뢰즈가 철학사에서 적들을 설정했다고 한다. 헤겔 우파와 신칸트주의 인식론자들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적들이 아니고, 형상형이상학 보다는 형상형이상학을 이용하고 그것으로 과학 또는 지식을 확충하여 세력을 넓게 가지고 있는 앵글로색슨 철학을 뜻한다. 이런 철학사적 지적은 벩송뿐만이 아니라 자연주의 또는 깊이(심층) 인식론이 지닌 공통적인 관심이자 귀결이다. 이런 관심은 형상의 철학이 배타 또는 배제의 철학으로 전쟁의 철학이 되었던 점을 파헤쳐서 세계가 평화와 공존의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프랑스 안에서도 이런 관심은 애국주의가 아니라 인도주의자들이고, 파랑이가 아니라 빨강이이라는 점이다. 현재 프랑스 마크롱 정부는 빨강이 계열의 분홍색도 아니고, 건전한 파랑이라가기 보다 파랭이 짓을 한다. 그래서 18년 12월에 노란 조끼들(les gilets jaunes)들이 우리나라 촛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트럼프가 파랭이가 아니라 파랑이로서 전쟁에서 이득보다 경제에서 이득에 관심을 갖고서 시리아에서 미군 철수를 단행하였다. 북미(김정은-트럼프)도 노랑 관점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전쟁공포를 통한 미국의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고 있다. 이 전쟁극대화 또는 공포극대화가 높이 철학이다. 우리는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로 가기 위해 깊이 철학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52L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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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들뢰즈의 철학사상: 철학에서의 도제수업 13
제1장 베르그송의 존재론: 존재의 긍정적 운동 45-103
제2장 니체의 윤리학: 내활적 역량(Efficient Power)에서 긍정의 윤리학으로 105-173.
Ch. 2 Nietzschean Ethics: From Efficient Power to an Ethics of Affirmation 26-55
2.1 The Paradox of Enemies
2.2 The Transcendental Method and the Partial Critique
Remark: Deleuze’s Selection of the “Impersonal” Nietzsche
2.3 Slave Logic and Efficient Power
Remark: The Resurgence of Negativity
2.4 Slave Labor and Insurrectional Critique
Remark: The Will to Workers’ Power and the Social Synthesis
2.5 The Being of Becoming: The Ethical Synthesis of the Efficient Will
2.6 The Total Critique as the Foundation of Being
Remark: The End of Deleuze’s Anti-Hegelianism
2.7 Pathos and Joy: Toward a Practice of Affirmative Being
00. 105
들뢰즈의 니체 연구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를 들뢰즈 자신의 기획이 발전해가는 맥락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1962)은 들뢰즈의 지적 삶에 있어서 ‘8년의 구멍’의 구체적 결과물이다. (105)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 틀 안에서 윤리학적 지평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는 뒤이은 스피노자적 실천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또는 진정 필연적으로) 만드는 질문들을 밝혀 준다. (106)
1절. 적(敵)들의 역설 106. / 2.1. The Paradox of Enemies
베르그송 연구에서처럼 니체 연구에서도 들뢰즈의 분석은 헤겔에 대한 적대에 의해 추동된다. 하지만 이제 앞(1장 1절)에서도 논의한 바 있었던 들뢰즈의 삼각구도 만들기(triangulation) 전략은 보다 복잡하고 모호한 것이 된다. (106) [기계론에 대한 들뢰즈의 베르그송식 도전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명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존재가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존재는] 미[비]결정적이어야 한다. 존재론적 결정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차이의 본성에 대한 분석에 의존한다.“(이 책 53) - 비결정의 필연성은 아페이론의 비결정성으로 플라톤의 명제이다.]
“니체가 칸트에 대해 맺는 관계는 맑스가 헤겔에 대해 맺는 관계와 같다. 맑스에서 변증법이 그러하듯이, 니체에게는 두 발로 서게 하는 것이 문제이다. ... 변증법은 본래 칸트적 형태의 비판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비판 그 자체가 처음부터 물구나무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면, 변증법을 다시 발로 서게 만들거나 또는 어떤 형태로라도 변증법을 ‘할’ 필요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108) [물구나무선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전복(la subversion)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니체는 처음에 디오니소스의 실재적인 적을 아폴로에서 소크라테스로 변경한다. 하지만 이는 불충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너무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시초에는 분명성에 의해 그는 다소 아폴론적이었다가 결국에 약간은 디오니소스적이다.” 소크라테스가 그저 가장 가까운 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날 때 니체는 예수에게서 근본적인 적을 발견한다. (111) [니체가 아폴로 방식이 소크라테스이라고 보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플라톤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퀴니코스 측면을 보아야 한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깊이에서 높이로 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예수라는 이의 복음서에는 깊이가 아니라 표면에서 상층과 관계를 본다. 니체는 표면에서 상층으로 방향설정으로 바뀐다. - 카톨릭은 상층이 표면으로 내려옴을 주장한다(천상의 평화가 우리 이웃들과 함께!). 이런 주장은 갈릴레이가 실증적으로 잘 설명해 놓았다. (52LKJ)]
“디오니소스와 예수, 또는 짜라투스트라와 예수 사이의 대립은 변증법적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 대립이다.” (111)
1953(스물여덟) 『경험주의와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 PUF
1953 본능과 제도(Instincts et institutions)을 아셰뜨(Hachette) 출판사에서 출판하다. 이것은 깡길렘이 주관하는 총서에서 들뢰즈가 텍스트를 모아서 펴낸 책이다.
1956(서른하나) 들뢰즈(Gilles Deleuze), "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 dans Les Etudes bergsoniennes 4, Paris, PUF, 1956, pp. 77-112.
1956 Gilles Deleuze, "Bergson" dans Les Philosophes célèbres, sous la direction de Merleau-Ponty, Paris, Mazenod, 1956. pp.292-299(457).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마즈노(Mazenot)사전의 출판의 기회에, 그에게 베르그송의 항목을 집필할 것을 권했다.
1956(서른하나) 결혼하다. (1960년 아들 줄리앙, 1964년 딸 에밀리가 있다)
1957-60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사학과에서 조교를 지내다.
1957(서른둘) 기억과 생명(Mémoire et vie, 1957)(Textes choisis), PUF, 1957,
[삼각구도란 들뢰즈가 벩송을 통해 한편으로 기계론과 플라톤주의, 다른 한편으로 칸트(니체의 적대자로)를 구성한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유물론 + 관념론 = 목적론이거나, 원자론 + 관념론 = 주지주의이거나 간에 표면에서 상층으로 방향에는 삼각형이 그려질 수 있다. 그만큼 깊이에도 삼각형은 아니지만(부채살) 그에 상응하는 위상이 그려질 수 있다. 표면 위의 삼각형을 인격성으로 표현한 것이 프로이트이고 인격성의 내면을 무의식이라 한 것으로 생각해보면, 형이상학, 인식론, 심리학이 같은 구도를 가졌음을 보게 될 것이다. (52LKJ)]
2절 초월적[선험적] 방법과 부분적 비판 112 / 2.2. The Transcendental Method and the Partial Critique
칸트가 철학에 대해 행한 엄청난 공헌은 내재적 비판을 총체적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 기획[내재적 비판]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의 역할은 칸트의 오류들을 바로잡고 칸트의 기획을 구해내는 것이다. (112)
칸트의 비판[비판론]은 총체적이 되는 데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이 되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요컨대 총체적이 되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긍정적일 수 있는 가능성도 차단된다. (113)
이렇듯 투시주의(perspectivism)를 불러들이면서 칸트의 초월적 방법을 공격하는 것은 니체가 플라톤적 관념론에 대해 행한 공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들뢰즈는 철학적 탐구에 생명을 불어넣는 ‘질문의 형식’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한다. (115)
다시 한 번 공격의 초점은 초재적(transcendental, 선험적) 방법이다. ‘Qu'est-ce que?’는 특히 초재적 질문이다. (115-116)
‘Qu'est-ce que?’라는 물음은 두 가지 오류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추상적이다. (1) 그것은 운동의 동학[역동]에서보다는 정적인 퀴디타스[본질, 본체]에서 본질을 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성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만을 드러낼 수 있다.) (2) 그것은 형상인이나 목적인(정의와 진리의 형식, 유일한 정의와 유일한 진리의 형식)을 실재에 질서를 부여하는 원칙을 가정한다. 우리를 의지와 가치의 영역으로 데려가는 ‘Qui?'[누구]라는 물음은 존재의 내재적 동학[역동]을, 분화의 내부적, 내활적 힘을 요구한다. (117)
2.2.1. 논평: 비인격적 논평에 대한 들뢰즈의 선택 117 / Remark: Deleuze’s Selection of the “Impersonal” Nietzsche
그렇지만 우리는 ‘누구?(Qui?)’라는 물음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니체에게 있어서 이 물음이 구하는 답은 개별 주체나 집단적 주체 속에서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전(前)주체적 힘이나 의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휴그 톰린슨(Hugh Tomlinson, 1954-)은 ‘who’가 ‘qui’의 번역어로서 기능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 (117) [선험적 권능에서 온자아가, 잠재적 권능의 발현에서 자아들이 있다. 이 온자아와 자아들은 전주체적이다.]
하지만 나는[하트] 비록 이러한 선택이 들뢰즈에게 필연적인 것일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바로 이 ‘비인격적’ 측면으로 인하여 들뢰즈가 니체 안에서 윤리적, 정치적 광맥을 개발함에 있어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119)
3절 노예의 논리와 내활적 역량 119 / 2.3. Slave Logic and Efficient Power
[내활적 역량은 효과인(efficient cause)의 변형이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는 칸트와 플라톤이라는 가장 가까운 적들에 대한 들뢰즈의 니체적 공격을 고찰했다. 근본적인 적인 헤겔에 대한 직접적인 니체적 공격은 처음에는 베르그송적인 형식 속에 나타난다. (119) [앞에서 소크라테스도 가까운 적이라고 한다.]
일단 우리가 베르그송적 논증들이 이러한 논의의 기반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들뢰즈가 니체에게서 베르그송적 대안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니다. “부정과 대립과 모순이라는 사변적 요소들을, 니체는 차이라는 실천적 요소로 대체한다.” .. ‘사변적 요소’는 이제 ‘실천적 요소’와 대립한다. 사실 들뢰즈의 사유에서 니체의 도래는 베르그송적인 이론 무대를 아주 중요한 기여로 변형 시킨다. (121)
힘[권능]들의 지평으로 이러한 이동은 우리가 앞서 베르그송 연구의 둘째 국면에서 주목했던 들뢰즈 사유의 경향을 표식한다. 가치의 영역으로 위치전환(transposition)은 존재론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우리 궤적의 출발점을 표식한다. (121) [둘째 국면; 이 책 48, 65, 73, 95]
이 새로운 지형에서, 우리는 두 개의 철학적 방법을 대표하는 극적 등장인물들을 갖는다. 추상적인 사변의 노예 대 구체적 파토스와 실천의 주인. .. 분명 들뢰즈는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 1887)을 헤겔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으로서 독해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헤겔에 대한 공격인가? 우리가 주인과 노예를 다루고 있으므로 들뢰즈의 표적은 정신현상학이거나 아니면 아마도 정신현상학에 대한 꼬제브(Alexandre Kojève, 1902-1968)의 대중화된 판본이라는 게 분명한 것 같다. (122)
장 발(Jean Wahl, 1888-1974)은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에 대한 매우 신중하고도 지적인 연구에서 이러한 공격이 지닌 약점을 지적한다. “정신현상학에는 니체의 비판에 저항할 수 있는 어떤 아주 심오한 내용이 없다는 말인가?” (122)
여기에 제시된 니체적 공격을 헤겔의 논리학에 반대하는 논쟁의 연속으로 독해한다면, 니체의 공격에 대한 좀 더 적합한 견해를 얻을 수 있다. (123) - [논리학에 대한 공격은 변증법의 배제측면인데 비해, 정신현상학에 대한 공격은 (주노관계에서) 역전의 측면이 있다. (52LKJ)]
노예는 부정적인 가치평가의 논리라는 역할을 맡는다. ‘너는 사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주인의 추론법은 그 역이다.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사악하다.” 들뢰즈는 두 경우에 있어서 ‘그러므로’의 상이한 기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것의 논리적 운동 문제로 훌륭하게 되돌려 놓고 있다. (124)
노예 추론법의 (‘그러므로’에 포함되어 있는) 둘째 부정은 순수하게 논리적인 부정인 반면, 첫째 부정(‘너는 사악하다’)은 부정적 가치평가(evaluation)이다. (125) [노예 추론법에서 후건은 논리적인데 비해, 전건은 이미 부정적 가치 평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노예의 역량이 매우 실재적이며, “항상 강자들을 약자들로부터 방어해야만 할” 정도로 노예의 역량이 역사 속에서 더 우세한 개념이라고 말한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126-127) [루소는 힘이 가장 센 자가 최강자라는 개념은 허구라고 한다. 최강자는 어떤 경계[결정된 것] 내에서 만 있지, 자연이란 총체 속에서는 최고 힘세다는 개념은 없다고 했다. - 니체가 루소를 여러 번 인용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서양 철학의 가장 엄밀한 유물론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은 요점을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 “잠재적 실존(ens in potentia)과 현실적 실존(ens in actu)의 구별은 ... 우주 안에 있지 않지만 우주 안에 실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진정으로 하나의 존재(a being)라는 것을, 혹은 우주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이 또한 하나의 존재(a being)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being)를 가능성(potentiality)과 현실성으로 구분할 때 ...” (127-128)
역량에 대한 이러한 담론에 니체가 기여하고 있는 것은 가치평가이다. 그는 역량의 표방에 내부적인 역량을 고귀하다고 판단한다. (129) [여기서 역량이란, 나의 용어로는 권능이다.]
역량의 분성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이미 상당히 윤리학을 암시하고 있다. 들뢰즈는, 니체와 칼리클레스에 애한 흥미로운 비교 ... / “칼리클레스는 자연과 법을 구별하려고 애쓴다. 그는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것을 법이라고 부른다. 이런 뜻에서 법은 약자들의 강자들에 대한 승리를 표현한다. 니체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승리라고 덧붙인다. 사실상 힘을 분리시키는 모든 것은 반작용적[반응적]이고, 또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힘의 상태도 반작용적[반응적]이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능력 끝가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작용적[적극적]이다 모든 힘이 끝까지 가는 것은 법이 아니라, 법의 반대이기조차 하다.” / 이 구절은 스피노자의 정치적 글쓰기가 갖는 지형과 매우 흡사한 지형을 제시한다. [우선] 첫째 스피노자는 역량 = 덕 = 권리[droit]라는 등식을 긍정하며, 그러고 나서[둘째] 정의(jus)를 법(lex)에 대립시킨다. (129-130)
2.3.1. 논평: 부정성의 부활 132 / Remark: The Resurgence of Negativity
스티븐 훌게이트(Steven Houlgate 1954-)가 헤겔, 니체 그리고 형이상학 비판에서, 노예의 논리에 대한 들뢰즈의 비난에 대해 반응한 것을 막간극 식으로 논평하는 것은 우리가 제시했던 논점이 지닌 중요성의 틀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132)
훌게이트는 들뢰즈의 니체주의에 맞서 두 가지 중심적 반격을 가하고 있다. (1) 그것[들뢰즈의 니체주의]은 결정을 위해서는 헤겔의 부정적 논리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 (2) 그것의 자기(self)에 대한 개념화는 진정한 내면성을 성취하기 위한 요구 사항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132-133)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훌게이트는, 결정을 원한다면 부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33)
훌게이트는 우리에게 왜 들뢰즈가 헤겔의 정신 현상학의 주인과 노예를 직접 다루지 않기로 선택했는지에 관한 한 가지 이유를 보여준다. 그것의 전체 영역이 내면성과 자기-의식의 질병을 촉진시키는 쪽으로 정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135) - [논리학과 백과사전의 변증법은 변증법적 논리에 준한다. 정신 현상학에는 논리학을 넘어서 삶의 과정 또는 역사의 과정이 있다. (52LKJ)]
4절 노예의 노동과 반란적 비판 136- / 2.4 Slave Labor and Insurrectional Critique
장 발이 주장한 대로,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에는 니체적 비판을 벗어나는 보다 풍부하고 심오한 어떤 것이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들뢰즈는 이미 우리에게 적합한 니체적 공격을 위한 무기를 제공했는가? 들뢰즈의 니체적 도전을 헤겔 자신의 지형 위에 갖다 놓음으로써 {들뢰즈의 니체적 도전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헤겔의 노예는 ‘주인은 사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라고 추론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헤겔의 노예 추론법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노동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독립적인 자기-의식[자의식]이다’라고 설정할 수 있다. (136) - [노동하는 자의식은 독립을 지향할 수 있지만, 노동 없이 향유하는 주인은 예속의식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헤겔은 이 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즉시 응답한다. “순수한 대자 존재의 이러한 계기는 노예에게 또한 명시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에게 그것{순수한 대자 존재의 계기}을 자신의 대상으로서 실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예의 의식은 단지 원리상으로만 안정적인 모든 것의 용해인 것이 아니다. 노예는 자신이 섬기는 가운데 이것{안정적인 모든 것의 용해}을 현실적으로 산출한다.” (138)
하지만 노예의 노동의 대상은 노예의 부정에 저항하며, 그리하여 영구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은 .. 저지당한 욕망, 억제당한 소멸(fleetingness)이다.” [노예의]죽음과 마찬가지로 주인의 욕망은 그 부정이 너무 철저해서 헤겔의 목적들에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총체적 파괴이며 관계성의 종결이다. (139-140)
첫째 계기, 즉 노예가 죽음과 대면하는 것은 노예의 삶의 고정성을 와해시켜 버리고 노예가 보편자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준비될 때 둘째의 [계기], 노동의 명시적 계기에서 노예는 그의 참된 자기-실현을 성취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의식하게’된다. (140) [자의식에서 즉자의식으로..]
우리가 텍스트를 엄밀히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독해한다면 주인-노예의 드라마는 부정의 두 가지 형식 사이에 있는 갈등을 잘 설명한다. 주인의 부정은 그것의 대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관계성을 끝장내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악당의 역할을 맡는다(주인은 자신의 욕망[탐욕]/ 소비에 있어서 타자의 죽음을 초래 한다). 반면 노예의 부정은 부분적 파괴를 수행하고 그 대상(그 노동에 있어서 노예)을 영속화하기 때문에 영웅이다. 주인의 부정은 역량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망설이지 않으며 모든 힘을 다해 공격한다. 반면 노예의 부정은 억제의 모델이다. ‘저지당한 욕망, 억제 당한 소멸.’ 바로 이것이 들뢰즈의 니체가 마침내 논의에 진입할 수 있는 지점이다. (142) [위 주60 참조]
[눌려있는 욕망은 균열의 틈을 내며 분출한다. 이 분출은 삼각구도의 형식과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결정(경계)에 포획되지 않고 경계선을 따라 흐른다(탈주한다). (52LKJ)]
논의는 다시 한번 역량의 본성으로 되돌아온다. ... 한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분리된 역량이 있는데, 헤겔적 반영, 오캄의 가능성 속의 존재자(ens in potentia), 또는 스피노자의 권력(potestas)이 그것이다. 또 한편으로 자신의 현시에 내부적인 역량이 있는데, 오캄의 현실 속의 존재자(ens in actu)와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 권능)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논리적 용어들에서 ‘내활적’ 역량의 개념을 방어하기 위해서 변경된 스콜라철학적 논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144) - [하트는 들뢰즈를 네오토미즘 식으로 몰고 갈 의도가 있다.
... 노예의 ‘교육’은 부분적 부정이 지닌 비판적 방법을 드러낸다. 비판의 첫 계기는 노예가 죽음과 가장 가깝게 대면하는 것, 또는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이 계기는 파괴적 계기(pars destruens)이다. 그렇지만 노예의 ‘본질적 본성’이 보존된다는 점에서 제한된 파괴적 계기(pars destruens)이다. 이러한 대면은 이전의 안정된 상태들의 고정성(fixity)으로부터 노예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며, 노예로 하여금 노예의 노동을 통해 비판의 둘째 계기인 구성적 계기(pars construens)를 조작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 둘째 계기는 온당히 구성적 계기(pars construens)이지 않다. 이것은 실제로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적이다. 노예는 이 둘째 계기 속에서 창조되거나 또는 실질적으로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의식[자각]하게 된다.’ (144-145)
오로지 주인의 작용적인{적극적인} 부정, 억제되지 않은 공격, 적의 죽음만이 총체적 비판으로, 따라서 긍정적이고 독창적인 창조를 할 수 있는 기회로 나가게 할 수 있다. “사멸하고 극복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파괴로서의 파괴는 창조자를 큰 소리로 알린다.” 그래서 역량의 두 유형들 사이의 차이는 비판의 두 유형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145-146)
우리는 마치 노예가 논리적 입장을 연기하는 비인격적 힘이었다는 듯이 헤겔의 논증을 독해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발견한다. (146)
물론 우리는 주인이 이 운동을 구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드라마의 논리가 그 관계성[differential relationship]에서 노예의 위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노예의 본질은 예속(sevitude)을 포함해야 한다. 비판의 첫째 계기(죽음에 대한 공포, 주인에 대한 관계)는 노예가 자신의 활동에 더욱 몰입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둘째 계기(노동)는 그것의 순수한 표현이다. 노예의 노동은, 정확하게 말해서 비판적 교육을 통해 살아남고 정화되는 것이다. (146-147) - [비판적 교육이라기보다, 강요의 노동에서 자기노동으로 자각하는 것이 자기의식의 발전이 아닌가.]
맑스주의 사상의 전통이 제시한 많은 해석들은 이러한 헤겔적 명제를 (직접저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찬양했다. 노동자는 그/녀의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기 때문에 찬사를 받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노동자는 노동이 그/녀의 본질로서 긍정되는 정도만큼만 해방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의 스타하노프식 ‘존엄성’이다. 맑스는 이와 전혀 관계가 없다. (147) - [이마에 땀을 흘리는 것은 본질로 삼는 것이 종교성이 아닐까?]
둘 다[들뢰즈의 니체와 맑스] 실재적 본질을 노동이 아니라 힘[권능]이라고 인식한다. 역량, 힘에의 의지, 살아있는 노동, 창조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 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구성적 계기(pars construens), 즉 구축적ㆍ변형적 힘이 들어설 여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성 가치들의 본질을 공격하면서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비판을, 무제한적 파괴적 계기(pars destruens)를 감행해야 한다. (148)
노동자가 참된 긍정의 지점, 자기-가치화(self-valorization)의 지점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공격은 노동자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을, 가치들을 겨냥해야 한다. 예속에 대항하여, 노동에 대항하여.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맑스주의적인 노동자주의의 입장 속에서 나타난다. “자본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신이 자본인 한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항해 투쟁해야 만 한다. ... 노동에 반한 노동자의 투쟁, 노동자인 한에서의 자기 자신에 반대해서 벌이는 노동자의 투쟁.” 노동자가 노동을 공격하는 것은, 노동자인 한에서의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사멸하고자하고 극복되기를 원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가운데 자신의 본질로서 제기되어 왔던 그 관계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148-149)
총체적 비판은 필연적으로 반란적 비판이다. 그리고 기성의 ‘본질’에 대한 무제한적 파괴만이 참된 창조를 허용할 수 있다. 들뢰즈의 니체는 레닌이 ‘반란의 기예’이라고 부르는 것의 예언자로서 나타난다. (149)
2.4.1. 논평: 노동자의 힘에의 의지와 사회적 종합 150 / Remark: The Will to Workers’ Power and the Social Synthesis
니체와 철학(1962)은 1968년의 노동자들에 대한 비시대적 찬송가인가? 들뢰즈의 독해를 통해, 우리는 실천적 비판의 역량, 급진성, 창조성에 입각해보았을 때, 니체와 맑스(그리고 심지어 레닌) 사이에 놀랄 만큼 강력한 합류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150)
난니 발레스트리니(Nanni Balestrini, 1935-)의 소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Vogliamo tutto, 1968: We Want Everything) .. 이 소설은 1960년대 말 피아트 공장의 한 노동자에 대한, 그리고 노동자의 권력(Potere Operaio)라는 정치 운동을 형성함에 있어서 그가 어떻게 연루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고 있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이탈리아 소설이다. (150)
결국 이 집단적인 파괴적 표현, 이 강렬한 폭력의 계기는 이어지는{후속적인} 기쁨과 창조를 위한 가능성을 연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움직였던 것은 분노를 훨씬 넘어서 기쁨이었다. 마침내 강해진 것의 기쁨. 이 요구들이, 이 투쟁이, 모든 사람의 요구였고, 모든 사람의 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의 기쁨.” 이 부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로서, 투쟁이 사장들과 노동에 대한 증오에 이끌려진 파괴적 계기(pars destuens)로부터 자신들의 역량을 느끼는 데 있어서 노동자들의 기쁨이라는 구성적 계기(pars constuens)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바로 이 핵심부에서 투쟁은 주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자정’의 시간, 니체적 변이(transmutation)의 시간이다. (153-154)
나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변이가 지닌 두 가지 요소들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전체의 비판적 운동은 집단성이 확장되는 운동과 필연적으로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단성이 확장되는 운동과 필연적으로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공통성과 집단적 활동 속에서의 자신들의 표현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은, 욕망의 확장적이고 일관된 신체{몸체}를 합성{조성}하면서, 공간적이거나 사회적인 종합의 형식을 띤다. (154)
오히려 노동자들의 역량과 그들의 기쁨은 바로 그들이 함께 의지(will)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하나의 강력한 배치를 형성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둘째 요소는 변이가 노동자들의 실천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비판을 ‘현실화’할 때, 공장과 거리에서 행동에 돌입하는 바로 그 때, 그들은 기쁨과 창조의 구축적 계기를 성취한다. (155)
5절 생성의 존재: 내활적 의지의 윤리적 종합 155 / 2.5 The Being of Becoming: The Ethical Synthesis of the Efficient Will
들뢰즈는 니체의 종합의 문제에 접근할 때 또 다시 다양체에 대한 긍정과 변증법에 대한 공격으로 되돌아온다. “헤겔은 복수주의{다원주의}를 비웃고 싶었다.” 일자와 다자의 변증법은 일자의 통일성 속에 쉽사리 회유할{치유할} 수 있는, 다양체에 관한 거짓 이미지를 설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베르그송 연구의 둘째 국면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다(이 책 1장 3절). (155-156)
우리는 들뢰즈의 니체에서도 똑같은 공격을 발견한다. “복수주의는 때로는 변증법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변증법의 가장 잔인한 적이자 유일하게 지독한 적이다.” 복수주의 또는 다양체는 이것이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변증법에게는 그렇게도 위험스러운 것이다. (156)
“놀이에는 주사위 던지기에서와 같은 두 계기가 있다. 던져진 주사위와 다시 떨어지는 주사위.” 주사위 던지기의 두 계기는 일자와 다자의 변증법에 대해서 니체의 대안이 갖는 기본적 요소들을 구성한다. 놀이의 첫째 계기가 이해하기 더 쉽다. 주사위의 던져짐은 바로 통제의 거부이기 때문에, 우연(chance)과 다양체에 대한 긍정이다. (156-157) [우연은 비결정성이며, 무작위에 가깝다. 운수나 기회의 우연(chance)와 다르다.]
하지만 주사위가 다시 떨어지는 [둘째] 계기는 보다 애매하며 보다 복잡하다. “한 번 던져진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며, 그 주사위가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존재가 생성에 의해 긍정되고 통일성이 다양체에 의해 긍정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의미에서 필연은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 (157) [땅에 떨어진 결과는 아자르(le hasard)이며, 필연이다. 자연의 상태는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이지만, 생성은 필연이다. 필연이 아니면 생성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영원회귀는 이것이 ‘선택적 존재론’인 한에 있어서 하나의 윤리학이다. 그것이 선택적인 까닭은, 모든 의지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은 오로지 한번만 일어난다. 오로지 긍정만이 회귀한다. 영원회귀는 존재로서의 긍정적 의지의 선택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존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의지되어야 한다. (159-160)
“영원회귀는 여기서 어떻게 선택을 수행하는가? 선택하는 것은 바로 영원회귀의 사유(thought)이다. 그것은 의지함(willing)을 전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 윤리적 의지는 그것의 회구에 대해 전적이며 내부적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항상 하라.” 존재로서의 영원회귀는 윤리적 의지처럼 내활적(efficient) 의지이다. (160)
끝으로 순수한 존재는 니체에게 있어서 달성된 상태(achieved, state)로서, 목적성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리아드네라는 등장인물에서 제시된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아리아드네의 사랑은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지만 긍정자체를 긍정하기 위해서 아리아드네를 취한다. “존재의 영원한 긍정이여, 나는 영원히 당신의 긍정입니다.” 디오니소스의 긍정은 생성의 존재를 표식한다. .. 아리아드네의 긍정은 이중긍정이다(“‘예’에 응답하는 ‘예’”)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나선형의, 무한한 긍, n번째 역량으로 올려진 긍정. 아리아드네의 순수 존재의 창조는 윤리적 행위이며 사랑의 행위이다. (161-162)
6절 존재의 기반으로서의 총체적 비판 162-165 / 2.6 The Total Critique as the Foundation of Being
내활적, 긍정적 의지의 이러한 윤리적 지형 위에서, 들뢰즈는 총체적 비판의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한 번, 이제 가치평가에 입각해서 - ‘변이’로서 – 다시 제기한다. 들뢰즈는 이번에는 일신된 칸트적, 스콜라적 용어들의 조합을 통해 비판을 제시하다. 실제로 변이는 칸트주의에서 스콜라철학으로, 말하자면 지식의 비판에서 존재의 기반으로 나아간다. (162)
“나는 허무주의를 힘에의 의지의 인식이유(ratio cognoscendi)로 이용하는 사람을, 그러나 힘[권능]에의 의지 속에서 존재이유(ratio essendi)를 – 이 속에서 인간은 극복되고 따라서 허무주의는 패배 당한다 – 발견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존재는 인식[앎, 지식] 보다 일차적이다. 아리아드네처럼, 짜라투스트라는 존재를 존재의 창조와 긍정을 사랑한다. 외면성, 긍정, 내활적 힘에의 의지. 이것이 존재를 지지해주는 ratio{근거, 까닭, 이유}이며, 이것이 바로 짜라투스트라가 사랑한 것이다. (165)
2.6.1. 논평: 들뢰즈의 반헤겔주의의 종결 165-168 / Remark: The End of Deleuze’s Anti-Hegelianism
이 장 처음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니체 연구의 중심적 목표가 ‘변증법 그 자체에 대한 대립’이 될 변증법적 대립에 대한 대안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165)
이러한 ‘대립’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헤겔 자신이 예시해 놓은 형태란 말인가? 버틀러는 질문에 대해 엄밀히 헤겔적인 방식으로 대답한다. (166) [들뢰즈는 헤겔식으로 질문하지 않았고, 그래서 단절이 있다.
들뢰즈의 니체 독해를 통해 우리는 버틀러의 명제에 대한 적합한 대답을 구성할 수 있는 두 가지 논점을 살펴본 바 있다. [하나의 응답] 총체적 비판이라는 들뢰즈의 정식화는 두 가지 상이한 유형의 대립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직접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변증법적 대립은 그 적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제약당하고 부분적인 공격이다. (166) - [버틀러가 헤겔의 변증법에 관해 논문을 썼는데 그래서 여기 제시되었지만, 들뢰즈와 다른 견해이다. - 하트가 변증법 또는 이항 대립의 반대자로 들뢰즈를 세운 것이, 나로서는, 잘못이라 생각한다. 들뢰즈는 헤겔의 반대 또는 대립이라는 차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차히이다. 즉 다른 형이상학을 한다. (52LKI)]
하지만 들뢰즈는 우리에게 둘째 응답을 제공한다. 우리는 들뢰즈 사유의 진화를 통해 나아가면서 들뢰즈가 헤겔주의를 다룰 수 있는 지형이 계속해서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으며, 변증법에 대한 공격이 점점 더 간접적으로 되어가는 것을 보아왔다. 일자와 다자에 대한 베르그송적 공격과 주인-노예 관계에 대한 니체적 공격은 헤겔의 담론이 완전히 제거된 평면에서 수행된다. (168) [그 평면이 나중에 등장하는 “고른면”인데 플라톤의 아페이론 영역과 같다. 이 고른면에서 생성은 변증법과 연관이 없어진다. 말하자면, 고른면, 지속, 파동, 결 등이 혼재하는 깊이(심층)로부터의 철학은 다른 방식(생성)이지 변증법이 아니다. 말하자면 심리학에서서처럼 발전론이 아니라 생성론이다, 우주론이 아니라 우주발생론이듯이.]
변증법에 대한 총체적 대립의 발전은 들뢰즈에게 있어 지적인 치료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헤겔을 몰아내어 주었으며 사유를 위한 자율적 평면[고른 평면, 매끈한 공간]을 창출해내었다. 더 이상 반헤겔적인 것이 아니며, 아주 간단히 말해 변증법을 망각한 그런 평면[플라노메네] 말이다. (168) [이 평가 하트가 잘 본 것이다.]
7절 파토스와 기쁨[환희]: 긍정적 존재의 실천을 향하여 169 / 2.7 Pathos and Joy: Toward a Practice of Affirmative Being
기쁨의 철학은 필연적으로 실천의 철학이다. 들뢰즈의 니체 독해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실천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그 용어들은 결코 명백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들뢰즈의 니체가 무엇이 아닌지는 매우 명백하다. 그것은 의식의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오성의 재편성(reformation)도 지성의 개선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내면성의 구축이 아니라 긍정의 역량을 통한 외면성의 창조이다. (169)
들뢰즈는 외면성을 정교화함으로써 스피노자적 명제를 재발견한다. “힘에의 의지는 변용{촉발}될 수 있는 역량(pouvoir d’être affecté)으로 표방된다.” 스피노자는 신체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과 그것의 변용할 수 있는 역량 사이의 긍정적 관계를 인식한다(이 책 3장 7절 참조). (169-170)
“차이[히]는 행복하다는 것, 다양체, 생성, 우연은 그 자체로 기쁨의 적합한 대상이라는 것, 오로지 기쁨만이 되돌아 온다는 것, 바로 이것이 니체의 실천적 가르침이다. .. (스피노자를 제외하고) 루크레티우스 이래 사람들은 결코 철학을 특징짓는 비판적 계획을 그렇게 멀리까지 진전시키지 못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의 고통을 폭로했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정립하기 위해서 영혼의 고통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고발했다. 스피노자는 슬픔, 슬픔의 모든 원인, 그 슬픔 가운데서 그들의 권력의 기초를 마련하는 자들을 고발했다. 니체는 원한, 가책, 그것들에게 있어 원리의 구실을 하는 부정의 권력을 고발했다.” (171)
기쁨의 실천적 철학의 이러한 역사(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니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들뢰즈의 니체에게는 슬픈 수동정서{정념}에 반(反)하는 실천적 투쟁의 발전을 가로막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첫째]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비인격적’ 독해는 실천이론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자(agent)에 대한 우리의 개념화를 힘들의 상호작용으로 제한시키기 때문이다. .. 둘째로, 들뢰즈의 니체 연구는 실천이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데, 그 이유는 그것이 공간적이거나 사회적인 종합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72-173)
니체적 종합, 즉 영원회귀는 힘[권능]에의 의지를 시간 속에 투사하는 시간적 종합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기쁨의 실천이 사회성(sociality)의 평면 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 따라서 니체와 철학의 마지막 절은 들뢰즈의 진화에서 다음의 항해(航海)를 이미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적 긍정에서 스피노자의 실천으로의 항해(航海). (173) - [하트는 니체의 시간 종합에서 스피노자의 사회적 종합으로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니체의 표면에서 상층으로 과정을 스피노자의 심층에서 표면으로 과정을 거쳐야 들뢰즈의 심층에서 표면으로 생성(표현)과 표면에서 상층으로 발산과 수렴을 ‘현실화’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52LKI)
(15:24, 52LLA)
1962 들뢰즈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을 출간(PUF)하다. 푸꼬는 1983년 회고에서 들뢰즈와 평생 공유한 문제의식을 이렇게 정식화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니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1963 Gilles Deleuze, “Mystere d'Ariane”(sur Nietzsche), in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caise d'études nietzschéennes, (March 1963), 12—15,
1965 들뢰즈 니체(Nietzsche)를 출판(PUF)하였다. 여기서 니체의 텍스트를 발췌 편집하였다.
1965 Gilles Deleuze, “Klossowski ou les corps-langage”, in Critique, n°214, mars 1965. 의미의 논리 부록으로 Phantasme et littérature moderne: III. Klossowski ou les corps-langage.
# 인물들 ****
아리아드네(Ariadne, Ἀριάδνη) 크레타 섬의 공주, 그녀는 실꾸리(μίτο της Αριάδνης 'Ariadne's thread')를 주어 테세우스를 도왔다가 버림받는다. 다른 버전에서 그녀는 버려진 섬에서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된다.
난니 발레스트리니(Nanni Balestrini, 1935-), 밀라노 태생, 이탈리아, 작가, 시인, 시각예술가.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Vogliamo tutto, 1968: Nous voulons tout: We Want Everything)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헝거리 유대계와 러시아 유대계의 후손. 예일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1984년), 나중에 출판, Butler, Judith (1999) [1987]. “Subjects of desire: Hegelian reflections in twentieth-century France.” « Sujets du désir: Réflexions hégéliennes au vingtième siècle en France». 미국의 철학자, 젠더 이론가, 그의 저작은 정치 철학, 윤리학, 여성주의, 퀴어 이론, 문학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2006) [1990]), 《바디스 댓 매터》(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칼리클레스(Calliclès Καλλικλῆς 전480년경 활동) 아테네 정치적 인물인데 플라톤의 작품 고르기아스 에서만 등장하며, 실존인물인지 가공인지 정확하지 않다고 fr.wiki는 서술한다. 귀족적 도덕의 옹호자. / 칼리클레스는 공정이란 관념이 약자들이 강자를 속이기 위해서 고안해낸 속임수이며 강자는 약자를 정복하고 약탈하는 권리를 지닌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을 물리칠 만한 강력한 논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고르기아스는 마무리되고, 플라톤의 이어지는 대화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일련의 응답이라한다.
카리브디스(Charybdis)는 안타이오스의 누이이며 바다의 여신이자 엄청난 여자괴물이다. 그녀의 부모는 어머니는 땅과 창조의 여신이자 지모신인 가이아이며 아버지는 바다의 신이자 올림포스의 중심인 포세이돈이다. 포세이돈과 가이아의 장녀이다. 남동생 안타이오스가 있다. 메시나 해협 일대의 와류가 의인화된 존재로 생각된다.
훌게이트(Steven Houlgate 1954-), 영국 워릭대 교수(University of Warwick), 헤겔 전공. 헤겔, 니체 그리고 형이상학 비판(Hegel, Nietzsche, and the criticism of metaphysics, 1986).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프랑스 소설가, 수필가, 철학자, 번역가, 배우, 화가. Nietzsche et le Cercle vicieux (1969)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1902-1968) 러시아 태생, 프랑스 철학자, 정치인.
레닌(Vladimir Ilitch Oulianov, dit Lénine, 1870-1924), 러시아/소련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전99-전55) 고대 로마의 시인, 철학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카를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독일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 이탈리아 윤리, 정치 철학자. 《맑스를 넘어선 맑스(Marx au-delà de Marx : cahiers du travail sur les “Grundrisse”, Bourgois, 1979)》 윤수종, 1994, 《야만적 별종(L'Anomalie sauvage : puissance et pouvoir chez Spinoza, PUF, 1982)》윤수종, 1997. 《제국(Empire (en collaboration avec Michael Hardt), Exils, 2000)》 윤수종, 2001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Guillaume d'Ockham, v. 1285-1347), dit le « Docteur invincible » et le « Vénérable initiateur » (Venerabilis inceptor), 논리 철학자. 영국 신학자. 프란치스코 수도자, 유명론자. 토마스주의와 스코틀랜드 학파와 경쟁자.
스타하노프(Alekseï Grigorievitch Stakhanov, 1906-1977) 소련의 광산노동자. 그의 이름은 스탈린 체제 선전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스킬라(Σκύλλα)는 그리스 신화의 카리브디스와 함께 2대 괴물 중의 하나로 좁은 해협의 양옆에 살았다. 그녀는 원래 굉장한 미인이었으나, 바다괴물인 글라우코스의 사랑을 거부하는 바람에 마녀 키르케에 의해 저주를 받아 머리가 6개인 공포스러운 바다 괴물로 변하고 죽은 후에도 암초로 변해 항해자들을 괴롭혔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이다.
휴그 톰린슨(Hugh Richard Edward Tomlinson, 1954-) 영국 법정변호사, 질 들뢰즈 저술의 영어 번역자로 알려져 있다(7권의 번역이 있다). 주로 입문서를 번역했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 1931-) 카나다 철학자, 정치철학, 철학사, Hegel, 1975.]
마리오 뜨론띠(Mario Tronti, 1931-) 로마태생, 이탈리아 철학자. 노동자들과 자본(Operai e capitale, 1966: Workers and capital)
장 봘(Jean André Wahl, 1888-1974) 마르세이유 출신, 철학자, ENS출신, 1910년 철학교수자격 1등, 유태인의 박해를 피해 2차대전 중 미국에서 가르쳤다. 소르본 교수, 쟝켈레비치의 친구. Le Malheur de la conscience dans la philosophie de Hegel (1929), Études kierkegaardiennes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