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시 역동驛洞의 유래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 마을은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고려시대부터 경안역(慶安驛)이 있던 곳이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개성에서 남으로 피난하면서 경안역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던 기록이 역사서에 있으며,
신하들은 개성으로 군사를 수습하여 들어가 싸우자고 하였으나,
공민왕은 세가 불리하니, 안동安東으로 가자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경안역을 떠나 실촌읍 삼합리에서 여러 달 동안 묵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역촌'(驛村) 또는 '역말'이라고 불러왔다.
모든 역사서(歷史書)에 나오는 경안역(慶安驛)이 바로 이 마을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 이름은 역촌(驛村)이라 하였고, 지금도 역동(驛洞)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경안역은 소로(小路)에 있는 역(驛)으로서
처음에는 역승(驛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중종(中宗)(1500년대) 때에 이를 확장하여
중로(中路)가 되면서 찰방(察訪)(정6품직)을 두었으니,
문관(文官)으로 외직(外職)에 참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방직(地方職)이 아니고, 국가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자리였다.
아울러 경안역에서 관리하는 산하(傘下) 역이 7개 있었다. 관할 7개 역명은 다음과 같았다.
덕풍역(德豊驛) 광주 동부면에 있었다.
신진역(新津驛) 여주 동쪽 5리에 있었다.
안풍역(安豊驛) 여주 남쪽 30리에 있었다.
양화역(楊花驛) 여주 서쪽 15리에 있었다.
오천역(午川驛) 이천 서쪽 25리에 있었다.
아천역(阿川驛) 이천 북쪽 20리에 있었다.
유춘역(留春驛) 음죽(陰竹) 동쪽 5리에 있었다.
경안역에는 말(馬)이 35필이 있었는데,
상등마(上等馬)가 9필,
중등마(中等馬)가 3필이며,
하등마(下等馬)가 23필이었다.
역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역전(驛田)이 74결 57부 7속이 있었는데,
모두 경안면(慶安面)에 있었다.
또한 5일장인 경안장(慶安場)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는데,
그 때에도 3일과 8일에 장이 섰다는 기록이 있고, 경안역(慶安驛)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안천변(京安川邊)에 형성되어 있는 이 마을은 제방을 축조하기 전에는 홍수가 지면,
물난리를 겪었던 마을이나,
1930년대에 4년여의 공사 끝에 제방이 축조되면서 홍수의 피해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 마을은 경안동과 연접해 있어서 지금은 마을의 경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장터 말과 함께 경안이라는 하나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남서쪽으로는 장지동과 접해 있다.
- 광주시 제공 -
2018.12.12.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