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소복히 쌓인 거리, 형형색색의 네온싸인 불빛 사이를 울려 퍼지는 경쾌한 캐롤, 구세군의 자선남비의 종소리, 예쁜 그림에 온갖 장식을 하여 만든 X-마스카드, 온갖 장식과 색색의 전구들로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밀랍으로 정교하게 만든 마구간과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인형,...상업주의에 물든 키치(Kitsch)크리스마스에 연상되는 모습들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1~14) 그러나 이 날의 속 사정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사53장~)(빌2/6)(눅2/11~)
이런 의미에서 구세주의 탄생은 우리에게 분명 감사가 넘치는 기쁜 일임엔 틀림없으나, 잠시, 왜? 이러한 일을 계획 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뜻과 그 은혜를 헤아려 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분의 마음의 원대로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을 따라 자유롭게 장차 될 일을 불변하게 정하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서두>
하나님은 자기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근심하사 결국 이 옛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십니다(창6/ 5~7),
인간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든 하나님의 최대 걸작품입니다, 이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푸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죄 할 것을 알고도 그것을 막으실 수 없었다면 전능하시지도 않으며, 주권자도 아니시다.” 또 우리가 범죄 하는 것을 중지시킬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면, 사랑이 많은 분도 아니시며, 자비하신 분도 아니시다”..투덜 투덜...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변명(辨明)일 뿐, 하와를 유혹한 뱀이 선악과를 따서 강제로 그들에게 먹인 것이 아니며, 또한 감쪽같이 속여서 따 먹게 한 것도 아니요, 그들 판단에 따라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따서 먹었습니다, 설마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선택에 대해, 또한 강요되거나 기만된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있어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즉 완벽히 프로그래밍 된 “로버트”), 그러나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같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런 파트너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존귀하신 하나님이 부여하시고 인정하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입니다,
또한 타락에 개입하셔서 물리적 강압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막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으십니다,
어쩜, 홍수의 심판으로 배약한 인간을 진멸하고 다시 창조 할 수도 있었으나,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을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존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노아의 일곱 가족은 남기십니다, 이것이 천사도 흠모하고 시기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자기사랑이시기도 합니다,
이 남겨진 노아의 가족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의 구속사(救贖史)는 시작됩니다, 즉, 홍수가 잦아진 뒤“노아의 번제를 받으신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9/13)
그러나 이 말씀엔 무언가의 뼈가 있습니다(言中有骨) 홍수 전이나 홍수 후나 악(惡)하긴 마찬가지인 타락한 인간들에 대해 이제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타락한 인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모종의 적극적인 방도를 의중에 두신 말씀 같습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전적타락에도 불구하고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59/13) 이 악(惡)하되 불쌍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자비의 완전한 표현이 내포된 구속(救贖)의 계획(計劃)을 세우신 바, 이 계획의 선포가 바로<무지개 언약>이요, 그 계획이 실행되고 완성되는 현장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인 듯합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 무지개(캐쉐트)란 히브리어 뜻 속엔 “활“이란 의미가 있답니다, 무지개가 뜬 모습은 마치 하늘 하나님을 향해 당겨진 활시위와 비슷한 바,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하나님의 자해(自害)>라고 표현 합니다, 노아의 홍수가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패역한 인간을 보며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 같다면, 구름속에 걸린 무지개는 온통 사랑뿐인 하나님 가슴을 향해 쏘아진 공의의 활시위 같습니다,
어쩜,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 <무지개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 어린 양 예수가 세상이라는 번제단에 제물로 드려지는 날이랍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독생자 예수를 못 박아 죽이는 하나님의 이 아픈 마음을 <약속의 자녀>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마음에 까지 느끼게 하십니다,(창22장)
한마디로 아기예수의 이 땅에 오심은 부패된 인간본성의 회복을 원하시는“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여호와(렘9/24)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요,“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반역한 아담(호6/7)을 향한 하나님의 화해의 손길이요, 평화의 선언입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적당히 대충 신앙생활 하는 무식하나 용감한 신앙인이 아닌, 몸과 마음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는 유명하나 겸손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외아들의 목숨까지도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결코 포기 하지 않고, 그의 영광의 나라까지 우리를 기필코 끌고 가실 줄을 믿기에(사43/1~2)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임도 알아야 합니다(히10/31) 믿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