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바람 속 공명, 그 순평한 노래
- 정양주 선생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찔레꽃 향기가
어깨를 토닥였다
혼자 놀지 마라
혼자 우는 눈물 맛에 취하지 마라
어깨 부축이며 함께 살아온 사람들 이름을 세다
지난밤 스무 살까지 다녀온 나는
강가에서 붉게 일렁이는 별을 본다
- 정양주 시 「별을 보러 강으로 갔다」중에서
별을 보러 강으로 간 사내.
혼자 우는 눈물 맛에 취하기도 하는 남자.
어느 날 피아골 밤하늘을 우러르다 고개를 꺾어
아스라이 섬진강 백사장에 내린 별 하나 굽어보면서
가만가만 제 어깨를 토닥여주기도 하는 화갑 넘은 지아비.
그 깊은 산 그 별빛 어스름을 다 걸어 나오지만
아직 생의 찔레꽃 향기 달착지근한 풋노인.
지상의 삿된 언어와 허튼 욕망을 일찌감치 내다버린
갈바람 같고 댓바람 같은 우리들의 오랜 벗
나랏말 선생님 서있습니다.
정양주 시인입니다.
흐르는 세월 속 봄꿈 같지만
시인은, 시세 어두운 나에게 언제나
눈금 바른 저울대 같았습니다.
사물의 무게를 따라 추를 걸어 팽팽히 멈춘 순간
옳거니! 무릎을 탁 쳐서 둘레를 환하게 열어줍니다.
이치에 밝고 알음에 막힘이 없다는 말씀.
우리 인생도 저울눈 꼼꼼한 대지팡이 하나와
단단히 조여 맨 짚신 한 켤레의 여행길인지 모릅니다.
걸어서 하늘까지 벌고 달고 재고 따져서
나 벗고 식구 입히고 세상 잘 닦는 길 말이에요.
정 선생은 참 화순하고 순천한 지성을 가졌습니다.
和順한 마을에 태어나서 順天의 길을 살아가는 듯
세상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모든 아이를
평화롭게 기르는 사상으로
빛나는 선각의 참교육자 길을 걸었습니다.
‘지난밤’ 스무 살까지 다녀온 그 총각선생님 말이죠,
속으로 흘러온 골짜기의 물을 만나
갈수록 맑아지는 강물처럼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로
저렇게 내일이 맑아진다면
산 구비마다 함께 따라온 모래들이
넉넉한 모래밭 이루고 강물을 품어
남은 기억을 가끔 반짝이게 한다면
- 시「하류로 가고 싶다」중에서
강물 속으로 흘러 서로 굽이치며 일어서고
몸을 섞고 등을 기대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날이 맑아져서 이제는 기꺼이
그 하류를 흘러가고 싶다는,
하늘 높고 땅 넓은 바람결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 숨 그 목성 그 가락으로 시대와 역사의 물길을 열어
먼 훗날 가끔은 순모래빛 추억의 곳간으로 반짝이고 싶다는 바램은
또 얼마나 감사한 고백입니까.
날마다 길에서 길을 묻고 날마다 시에게 시를 물어
본성의 가장 깨끗하고 깊은 경지를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산악 지리산을 짓쳐 섬진강 백사장의
형제들 앞에 오늘 물별처럼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순정했던 그의 청춘은 한여름 우레와 폭풍우를 만나
쓰러지고 일어서며 굽이치고 여울져 우렁우렁
남도의 순천한 어느 마을 하나로 새 고향을 삼습니다.
그곳에서 단호히 대나무 숲머리로 높았습니다.
숲 선두에서 죽척 눈금으로 불의와 맞서 싸웁니다.
무거운 쇠 추를 끌어당겨 민주화운동의 전방을 지키고
청죽 마디마음의 중심을 때려 참교육의 울림을 확장합니다.
진정 눈물이어라
두려움으로 타는 입술 깨물어
진달래꽃 속살 터뜨리며 달려와 힘차게
깃발을 꽂고 선 오늘은
진정 눈물이어라 불꽃이어라
1988년 순천교협창립 즈음에 부친
정양주 선생님의 시편 한 줄기죠.
양주 아우님...
선암각에서 연수하고 지리산 정상에서 화합하던 시절
꿈인가 하면 꿈 아니요 꿈 아닌가 하면
꿈 아닌 것 또한 아닌
그 눈보라 속 붉디붉은 얼굴들 피어오릅니다.
윤채영선생님, 김영식선생님, 서인환선생님, 김미선선생님
앞서 가시고 뒤따르는 길에서 오늘 양주선생과 함께한
이 정년의 한 소식 태워 하늘 가득 사뢰고 싶습니다.
앞서신 님이여! 우리도 언제고 하얗게 세어 눈 날리는 날
헤어진 눈물 다 거두고 죽총 끝으로 앉아나 봅시다.
머리오리는 소쇄하니 창공을 쓸고
비목비초의 안을 굽어보는 무심 하나면 아니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생사를 여읜 신성을 가졌습니다.
존재의 집은 본디 비어 있고 지극하여 걸림이 없다지요.
그 경계에서 다시 만나 맑은 술 한잔 올리고 싶습니다.
순평한 정양주 선생 뒤태를 빌려
퍼뜩 정신이 차려지는 이름들 모셨습니다.
인제 우리 원년동지들의 교무실도 거진 비어갑니다.
우리들 인생의 한나절을 즐겼던 추억과
지금도 조용히 걸어오고 있는 참세상의 희망을 묶어
남은 후반의 행운과 안녕의 인사를 나눕시다.
지금 나는 나뭇잎 속으로 스며듭니다.
잎을 매단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은 가볍게 나를 태워
울렁거리고 흔들거리고 빙글빙글 돌다
울컥 눈물 쏟습니다.
그 눈물로 나는 처음 쓴 시를 고쳐 쓰고,
울렁이는 가슴으로 꽃잎을 밀어 올리고,
빙글빙글 흔들리며 숲을 이룹니다.
이집에서 오래 살아야겠습니다.
- 시「봄날 서시」중에서
나뭇잎 속으로 내가 스며들어 흔들거리다 눈물 쏟고
그 눈물로 시를 고치고 고친 시의 집 속에서
실로 오래 오래 잘 살기 바랍니다.
할 일이야 헬 수 없다 하여도
새 세상엔 새 바람이 또 불어올 것이니 수심으로
황망히 몸 상하지는 맙시다.
끝없이 실덕거리며 깝치는 정치의 파랑 속에 표류하지 않고
깊은 바다의 숨으로 결을 고르자 합시다.
등대처럼 환히 웃으면서 말이죠.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
정양주 선생님의 정년 축의에 갈음합니다.
2023, 2. 21.
김진수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