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의 자(字)는 응지(應之)요, 호는 휴휴당(休休堂)이시며
남양홍씨 익산군파 16세이신, 한성부(漢城府:서울) 윤 (尹:시장) 홍심(洪深)의 아들이시며,
조선 전기의 유명한 문신으로서,
황희 정승과 쌍벽을 이루는 명재상(名宰相)입니다
선조님은
문종 1년(1451)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시고
같은 해 증광 문과시(增廣 文科試: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보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 하신 후
문신(文臣)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호당(湖堂)〉으로 선발 되셨습니다
임금의 특명을 받은 젊은 문신이 공부에만 전념하게 하였던 독서당(讀書堂)으로,
호당 출신만이 대제학(大提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 홍문은 10명의 호당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습니다
휴휴당휘 응(休休堂諱 應),
허백당휘 귀달 (虛白堂諱 貴達),우암공휘 언충(寓菴公諱 彦忠), 석벽공휘 춘경(石壁公諱 春卿),
율정공휘 천민(栗亭公諱 天民), 졸옹공휘 성민(拙翁公諱 聖民), 하의공휘 적(荷衣公諱 迪),
학곡공휘 서봉(鶴谷公諱 瑞鳳), 청계공휘 위(淸溪公諱 威), 휘 상간(諱 相簡)
그 후 사간원 우정언(右正言), 집현전 수찬(修撰), 응교(應敎) 등을 거쳐
1460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에 이르시고
1463년에 도승지(都承旨: 왕명 출납을 맡아 보던 정3품)에 발탁 되셨으며.
이후 이조 참판, 형조 판서(1465) 우찬성(右贊成) 등의 관직을 역임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종 즉위년 (1468)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잘 다스린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이 되시고,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해지셨으며,
얼마 후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의 품계를 받으셨고.
성종 3년(1472)에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봉해지시고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의 품계를 받으셨으며
1479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정1품) 품계로 우의정에 오르신 후,
백성들에게 청렴 청빈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시며
오랬 동안 선정을 베푸시므로서 만 백성으로부터 추앙을 받으시다가,
1485년에는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4도(道) 순찰사로
활동하셨으며,
같은 해 좌의정(左議政) 겸 세자부(世子傅: “세자 시강원”의 정1품 벼슬)에 오르셨습니다.
선조님은 정승(오늘날의 총리)직에 오르신 후,
약 8년이라는 긴 기간을 훌륭히 재임하신 분으로,
세종임금 때의 〈황희〉정승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대 재상 중에서
〈최 장수(長壽) 정승(政丞)〉의 기록을 세우신 분입니다
(조선시대 정승의 평균 재임 기간은 2년 반이었습니다)
한편, 선조님은1463년(세조 9) 도승지로 재직 시,
영응대군(英膺大君: 세종 임금 8남, 서화(書畵)에 능하였음)과 함께
《명황계감(明皇誡鑑)》을 국역(國譯; 한글로 번역)을 하시므로서, 한글 창제이후,
우리 “글” 훈민정음을 발전시킴에도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명황계감(明皇誡鑑)》: 세종의 명으로,
박팽년 등이 편찬한 책으로,당나라 현종과 양귀비(楊貴妃)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그림을 그리고 여러 기록을 붙였으며,
세종임금이 손수 그 내용을 노래로 짓고 그림을 그린 책입니다
또한, 선조님은 글씨도 당대의 명필로 명성을 날렸으며
선조님이 모간(摸刊)한 필적이《해동명적(海東名蹟)》에도 남아있습니다
.
선조님은 돌아가신 후,
성종(成宗)임금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셨으며 시호는 충정 (忠貞)입니다
※ 배향(配享): 임금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충신을,
임금 묘정에 제향(祭享) 할 때, 함께 제사를 올리는 공신을 말 합니다
또한,
선조님은 경북 선산에 불천위(不遷位) “부조묘”에서 매년 음력4월4일, 첨종이 함께 제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