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물감 / 청화 김나현
꼬리 아홉개 달린 불여우 같은
여름이 주택단지 햇빛마을에 누웠다
언덕 위 하얀집 펜스엔
영국 장미가 한 가득 흔들리고
옆집 뜨락엔 조용히 국화가 핀다
길 건너 벽돌 담장 위엔
주렁주렁 홍시가 짙어가는 공존의 공간
계절 품속 계절은
어디쯤 아련히 오고 있었을까요
시월이 기울 무렵
천 개의 물감이 쏟아진다
마지막 그곳이란
채색옷 입은 마른 가슴에 대하여
궁금증이 흠뻑 젖는 날이면 어느새
온 몸은 낙엽처럼 갈지자로 걷는다
짧은 계절마저 잃을까
일찍 철든 단풍은 피를 토하고
푸른 곳곳마다 가을장마 지겠다.
얼음강 / 청화 김나현
흐름이 멈춘다는 건
마치 죽음과도 같아
움직일 수 없는 자존감
얼음 신세 되어 누웠을 때
하늘은 안다
태산 품은 강 인고의 눈물을
하늘은 안다
바윗돌 같은 진주빛 두께를
강아 우지 마라
우렁차게 토해낼 새 날 오리니
지난했던 단단함
도도(滔滔)히 바다에 이르라
태양은 광선을 쏟아붓고
빙점은 봄으로 환원 중이다.
가슴 바위 / 청화 김나현
바람을 맞으러
출근길 산책로를 걷는다
적색길 초록 잎새 사이로 다문다문 서 있는 바위들
잘려 버린 사금파리에 대한 책임을 다하 듯 조각석 자세로 스치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수없는 행인과 견공이 오가도
단단한 가슴은 숭숭 뚫린 구멍뿐
강물은 바위의 눈물 가루를 닦아서
어디론가 달려간다
계절이 두 번 바뀌어도
글쟁이는 너른 가슴에
시 한 줄 새기지 못했는데
담쟁이가 세필로 시를 써내려 간다
산책로에 시화전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