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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은 혼자서 구십사세까지 자력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석 달 전에 춘천에 계시는 장모님을 집으로 모셔 왔다. 장모님은 얼굴은 작고 키도 작으신데 몸은 약간 부하신 편이었다. 구십오세이신 장모님은 건강하시고 정신이 맑으셔서 춘천의 동부시장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셨다. 기억력이 좋으시고 매사에 관심이 많아 아들과 며느리는 물론 손주들의 직업, 수입 등 온갖 것에 관심이 많으셨다. 정치에도 관심이 높으셔서 TV를 보시다가 모르시는 내용은 꼭 묻곤 하셨다. 장수하시는 분들의 정신적 특징인 것 같았다.
장모님이 계신 아파트는 같은 층의 한 집을 경로당으로 만들어 항상 경로당에 가서 쉬시곤 했다. 그 아파트는 노인들이 많이 사시는데 동부시장이 몇 걸음 옆에 있고, 근처에 병원들도 많아 생활하시기에 편리했다. 원주에 사는 효자인 작은 처남은 항상 자주 들러 어머니를 살폈다. 물론 구리에 사는 큰 처남도 가끔 찾아뵈었다. 이제는 직장인이 된 손주들도 가끔 찾아뵈었다. 작년부터는 명절이나 생신이 아니라도 너무 연로하신 게 걱정이 되어 우리 부부도 자주 찾아뵙곤 했다.
장모님은 아들딸들이 가져온 과일이나 음료를 동네 분들과 나눠 드셨다. 그리고 보훈가족 유족연금으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손주들의 혼사에 몇백만 원씩 주시기도 하고, 찾아오는 피붙이들에게 차비나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그러시는 것이 삶의 기쁨이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돈을 쓰시지 않았다. 겨울에도 난방온도를 높게 하지 않고 전기장판 위에서 생활하셨다. 물까지도 아껴 쓰시는 극도의 절약 생활을 하신 것이다.
장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던 중 K 대 병원에서 피가 탁하다고 하여 처방한 약을 드신 때문인지 코피를 연이어 너무 많이 흘리셨다. 그리고 기력이 급속히 저하되셨다. 이제는 혼자 사시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우리가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항상 다니시던 의원에서 약을 받아 집으로 모시고 왔다. 큰딸 집에 오시게 된 것이다. 두 처남은 모두 맞벌이라,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있는 우리가 모시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둘이 각각 서너 시간씩 일하니 돌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일흔이 넘었으니 결국 노인이 노인을 돌보게 된 것이다. 나는 아내의 마음을 읽고 집으로 모시는 걸 찬성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형님 집에 계시다가 부천 성모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위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전에 살갑게 모시지 못한 불효가 한이 된 까닭도 있었다. 나는 결혼 이후 의무처럼 어머니께 매달 용돈을 드렸을 뿐이었다. 나도 살기에 바빠 여행을 안 갔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 한번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여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미국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효도한 것이 나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렸을 때 어머니 말에 순종했고, 속을 한번도 썩여드리지 않았지만, 독립해서는 오히려 불효한 아들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나나 아내가 가끔 어머니를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단 며칠이라도 모시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와서 한밤도 마음 편히 주무시지 못할 남모르는 사정도 있었다.
어머니께 불효한 나에게 늦게나마 장모님을 모실 기회를 주어진 것이다. 장모님은 국가유공자 배우자라서 연금이 나오니 모시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춘천 동부시장 옆에 사시던 아파트는 오래전에 큰 처남에게 주셔서, 큰 처남이 어머니가 남긴 장롱이며 여러 가지 주방 기구며 침대 등을 업체를 불러 치우고 수리를 하여 세를 놓았다. 입으실만한 옷가지들은 골라서 집으로 가져왔다. 장모님은 쓰시던 냉장고를 동네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다. 이웃들은 필요한 것들을 챙겨갔다. 그런 것들을 주시라고 하면서도 냉장고를 주신 것은 내내 아쉬워하셨다. 물건을 아끼고 절약하시는 게 습관이 되셨고 옛날 어른이라 아까워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혈성 섬망이 오신 장모님의 회복
오실 때만 해도 출혈성 섬망이 심하셔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출혈성 섬망은 치매로 악화될 수 있다고 하나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치매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한다. 장모님은 딸은 알아보았지만, 나는 가끔 잘 알아보지 못하셨고, 헛것을 보기도 하셨고, TV에 나오는 인물을 산 사람으로 착각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간이식 부작용으로 반송장이 되어 6개월여 만에 퇴원했을 때 효과를 본 영양탕을 사다 며칠을 끼니마다 드렸더니 열흘쯤 되자 정신이 돌아오셨다. 그러나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나 말씀하시는 모습이 완전히 정상은 아니셨다. 약을 드셨지만, 음식을 드시고 토하시를 자주 하셨다.
장모님은 춘천에 계실 때처럼 거실의 소파 앞에 자리를 잡아 드렸다. 나는 즐겨 앉거나 눕기도 했던 소파를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TV는 자연인 프로를 좋아하셔서 장모님이 깨어 있으실 때는 자주 채널은 자연스럽게 60번과 66번으로 고정되었다. 둘이 살던 집에 장모님을 모시게 되어 다소 불편함과 비좁음을 느꼈다.
혼자 주무시다 화장실 가기도 어렵고 또 다치실 수도 있어서 아내가 거실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섭다고 혼자 자기 싫다고 하신 이유도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화장실에 드나드시다가 두 번이나 넘어지셨다. 팔에 멍이 들고 다리에 멍이 들어 아파하셨고, 멍은 한 보름쯤 지나자 풀렸다. 얼마나 아프셨을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머리를 부딪히거나 고관절을 다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 후엔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보살펴드려야 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휠체어를 임대했다. 남동구에 여분이 없어 서구에 있는 것을 빌려왔다. 서로 협조하여 공유하는 식으로 운영하는 덕에 어렵지 않게 휠체어를 빌렸다. 절차도 간단하고 친절하여 고마웠다. 모든 공무원이 이렇게 국민을 위해 융통성 있게 행정업무를 집행한다면 좋을 것이다.
장모님과 인천대공원 산책
우리 집이 인천대공원 바로 아래 장수동이어서 비가 안 오면 거의 매일 녹음이 우거진 대공원에 갔다. 이 대공원은 넓기도 하려니와 야트막한 산까지 있어 지난 몇 년간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데 일조한 곳이다. 나는 늘 이런 인천대공원 아래 동네에 사는 것이 행복했다.
저녁이면 휠체어를 타고 집에서 나와 호숫가 길을 빙 돌았다. 온갖 장미가 피어있는 장미원에 가면 장모님은 즐거워하셨다. 제주도는 한번 가보셨지만, 이런 장미원을 평생 한 번도 못 보셨다고 하니 얼마나 여유 없는 고단한 삶을 사신 것일까? 나의 어머니도 그러셨고, 아마 이 시대의 할머니들은 대개 그런 어려운 삶을 사셨을 것이다. 이런 어머니들의 희생 아래 지금의 장년들이 성장해 온 것이다.
장모님은 휠체어를 타고 가시면서
"00이가(작은 아들) 나한데 '엄마가 내가 어렸을 때는 나를 먹여주고, 안아주고, 오줌 똥을 치우며 키워주었으니, 엄마가 늙으면 내가 엄마를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 모셔서 아기처럼 돌봐줄 게 '라고 했어요."
두번이나 그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후에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집에 와 계실 때 내가 그 이야기를 어머니를 뵈러 온 처남에게 들려주자, 정신이 온전하시지 못한 상태에서도 찾아뵈러 온 작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면서
"너는 그러고 싶어도 00 엄마가 있으니...."
라고 말을 흐리셨다. 장모님의 이미 효자인 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신 것이다. 처남은 그말을 듣고 마음이 괴로운 것 같은데 아닌 척하며 농담처럼 말을 돌렸다.
"난 기억이 안나요."
사실 막내인 처남은 이번에 어머니가 드시고 싶어하는 이모님(장모님의 동생)이 만드신 무짱아찌를 가지러 춘천까지 다녀온 것이었다. 이어서 장모님이 흘리듯이 말씀하셨다.
"너는 효자야."
그 말씀이 어머니께 마음껏 효도하지 못한 내 마음을 깊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장모님은 아내의 권유에 따라 앞뒤가 맞지 않지만, 작은 아들을 위해 띄엄띄엄 어눌하게 기도하셨다. 또 아내가 이름은 호명하는대로 큰 아들과 곧 결혼할 손녀, 그리고 결혼해야 할 큰 손자를 위해 기도하셨다. )
해가 져도 매미의 합창은 짧은 삶을 아쉬워하듯 대공원을 가득 채웠다. 매미는 6년 동안 애벌레로 땅속에 살다 나와서 겨우 일주일 남짓 산다고 하니 노래가 한층 더 애절한 것일까? 더구나 그 짧은 동안 대를 이어야 하니 짝을 찾느라고 마치 발악하듯이 저렇게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나 보다 생각했다. ‘사람이 대를 잇고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 있는 것들이 후손을 남긴다는 것은 참 거룩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매미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그래도 긴 편이 아닐까? 그리고 행복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매미는 애벌레 때도 땅속에서 오로지 제힘으로 온갖 위험을 겪고 살아남아 힘겹게 나무둥치에 기어올라 부화해야 하니 말이다.
올여름은 너무 더워 우리는 주로 해가 진 후에 대공원을 산책하게 되었다. 대공원은 숲이 우거져 바로 아래 우리가 사는 동네보다 온도가 2~3도 낮다. 인천 시내나 부천 시내보다는 3~4도 낮다. 우리는 저녁 때나 밤에 산책했지만, 그래도 공원의 수은등 아래에서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는 여러 색깔의 장미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피스, 루나로사, 섹시레드, 클레오파트라, 퀸 메리 등
장모님께 나는 이야기를 했다. 가을이면 인천대공원의 단풍은 무척 아름답다고, 그리고 봄이 되면 길 양쪽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도록 빽빽이 피어나는 왕벚나무의 벚꽃이 여의도 윤중로와는 비교가 안 될 만치 대단하다고. 바람이 불면 온통 온몸에 쏟아지는 분홍색 벚꽃비를 맞을 수 있다고.
장모님은 나중에는 공원에 갈 때마다 둘만 가라고 하셨다. 내가 집에서부터 언덕길로 휠체어를 밀며 올라가는 게 미안해서였다. 나는 말씀드렸다. "저도 이 사람도 매일 공원에 운동하러 가야 하고, 또 이렇게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 다리에 근육이 생겨 당뇨에도 좋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더워서 대공원의 상아산에 오르기는 어렵고. 힘은 들지만, 휠체어를 미는 게 다리 근육을 튼튼하게 하여 건강에 도움이 되니 말이다. 물론 다녀오면 휠체어가 아니라도 너무 더운 여름이라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입원과 간병
그런데 집에 모신지 석 달이 되자 차츰 식사를 하지 못하시게 되어 기력이 다시 쇠잔해지셨다. 잡수신 것을 토하는 일도 잦아졌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드리며 밥을 못 드실 때는 영양음료와 두유, 과일즙을 드렸지만, 결국은 누워서 일어나시지 못하게 되었다. 급속하게 저혈당이 오고, 치매까지 더해져 처음에 오실 때처럼 돌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아내가 발톱의 무좀이 없어지도록 매일 발을 씻어드리고 약을 발라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아무리 잘 모시려고 애를 써도 노환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는 8월 말부터 장모님은 식사를 잘 못하시게 되었다. 그전에도 1차 병원 2차병원에 휠체어로 모시고 가서 진료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위급한 것 같아 119로 구급차를 불러 부천 S병원 응급실로 갔다. 사용료가 무료인 데다 구급대원들은 참 친절했다. 미처 담요를 못 가져왔다고 하니 담요를 빌려주었다. 다음 날 가져다주니 '어르신이 괜찮세요.'라고 안부를 물었다. 음료수 몇 개를 사갔는데 손이 부끄러웠다.
몇 시간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응급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 심장내과의 입원이 결정되었다. 요즈음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동결을 주장하며 파업하여 큰일인데 그래도 병원을 지키는 분들이 있어 고마웠다. 얼마 전에 지금의 3차 병원인 S병원 심장내과에서 진료받았던 것이 입원에 도움이 되었다. 장모님은 당뇨가 지병인데 심방세동이 있는 터라 심장 기능이 약해져서 폐에 물이 많이 찬 상태였다. 노환이기도 했다. 이미 춘천에 계실 때도 그런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고 계셨던 것이다.
입원하시는 동안 간병인을 두지 않고 우리가 간병하기로 했다. 의사와 자주 접촉하며 치료 추이를 보려는 것이었다. 낮에는 내가 몇 시간 교대하고, 저녁때부터 밤, 그리고 오전에는 아내가 간병했다. 요즘 간병인은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하루 14만 원 내외, 움직일 수 없는 환자는 거기에 만원을 더한다고 했다. 막상 중환자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간병인까지 둔다면 암이 아닌 경우 의료보험 헤택을 받아도 상당히 큰돈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생활보장대상자가 아니면서 가난한 가정은 정말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장모님은 등급이 높은 국가유공자 가족이라 특별한 검사비 외에는 병원비가 거의 무료였다.
간병하는 두 주 동안 아내와 나는 둘다 몸무게가 1.5KG 넘게 빠졌다. 매일 낮에 교대를 하며 몇 시간동안 간병하다 보니, 새삼 7년 전에 내가 서울대병원에서 간이식 부작용으로 6~7개월 입원하여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아내 혼자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간병한 것이 너무도 큰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는 경제적으로도 몹시 힘든 상태였으니 아내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교회 친구 조집사는 나를 만나면 한동안 “송권사를 업고 다녀야 해!”라고 말하였다. 정은 많지만, 평소에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건강을 되찾으면서 사소한 일로 가끔 다투는 때가 있었다. 아직도 나의 못된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고쳐야 할 일이다.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하나? 집으로 모셔야 하나?
장모님은 두 주 만에 퇴원하시게 되었다. 밥도 겨우 아기처럼 먹여드리고, 토하시는 걸 받아내고, 기저귀를 차셨으나 흘러나오는 대변을 아내가 다 치웠다. 정신은 맑을 때도 있지만, 치매 상태거나 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다.
우리는 처남들과 함께 전화로 상의하며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앞으로 집에서 모셔야 하나? 아니면 요양병원에 보내드려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큰 병이 없으시고 거동이 가능하신데 자녀들이 모시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할 중병이 아니라면, 요양병원이 아닌 요양원이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니 그런 경우 이곳을 선택하는 것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다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은 미리 실버타운을 선택하며 편안한 노후와 함께 좀 더 낫게 죽음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남들은 이 문제에 대해 '누나와 매형이 알아서 하시라.'고 했다. 모시지도 못하는데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견을 말하지 않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요양병원에 가신다고 해도 보훈대상자 유족이라 비용은 그리 많이 들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요양병원에 모시면 우리는 고생(?)하지 않고 자주 찾아가 뵙기만 하면 될 일이다. 면회가 어렵다는 소문이 있어 직접 전화해보니 면회도 미리 예약하면 한 회에 4인까지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어머니께 가장 좋은 일인지를 계속하여 고민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론적으로 집에서 모시다가 집에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도에 크게 아프시면 병원에 오고 가면서 말이다. 죽음교육이나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집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죽음이라고 배웠지만, 막상 내일이 되니 이리 할까? 저리 할까? 고민의 연속이었다. 다만 장모님께서 ‘연명치료의향서’를 써서 등록해 두셨으니,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의미없이 연명치료를 하시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는 생각이어서 집으로 모시기로 한 것이다.
요양병원, 요양원, 주야간보호센터
요양병원은 의료법에 의하여 설치되는 곳으로 치료가 주목적이다. 그러므로 상주하는 의사가 있다. 그리고 병상이 30개 이상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양원은 노인복지법에 의해 설치되는 곳이므로 요양이 목적이다. 그러니 당연히 의사는 없어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도 상주 의사에게 치료는 받지 않지만, 기저귀를 차시고 생활하시는 분도 많다고 한다.
노인이 건강하시면 종교생활도 가능하다. 일부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은 대개 거기서 봉사자들이 나와 친절하게 노인을 돌보기 때문에 상당한 장점이 있다.
또 주야간보호센터가 있는데 주야간보호센터도 요양이 주목적이며 요양원보다 돌보는 시간이 짧다 그러므로 대개 낮이나 야간에 어르신을 돌볼 사람이 없을때 이용하게 된다. 대개 주야간보호센터는 노인를 차에 태워 모셔다 드리고 저녁 때면 모셔오게 된다. 그러나 센터에 따라서는 반드시 1종 면허를 가진 기사를 두게 되어있지만, 보호자가 직접 이일을 하기도 한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주간보호센터는 전적으로 경영자에 따라 돌봅의 질이 달라진다. 그리고 비용의 크고 작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비용이 차이는 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의 수준과 함께 노인에 비례하여 요양보호사가 많은가 적은가에 따라 좌우된다.
또 가끔씩 보도되는 학대 사례가 일부 좋지않은 시설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노인들은 이;런 곳에 가시는 것을 꺼리고 한번 들어가면 그곳에서 죽는다는 소문 때문에 제 정신일 때는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마음이 신념이 도신 분이 아니면 한사코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또 식사의 질 문제도 노인을 모시는데 상당한 문제가 된다. 비용이 싸면 당연히 음식을 만드는 비용도 싸기 때문이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소하시게 되는 노인들은 요양등급을 받은 경우이기 때문에 주소가 그곳으로 옮겨지고 요양비도 그곳에 지급된다. 그러므로 보호자는 요양등급의 차이나 요양등급을 밪지못한 경우 등 조건에 따라 본인 부담금을 보통 60만원에서 400만원까지 부담하게 된다. 간병인의 비용도 몇인실이냐 즉 한명의 간병인이 몇분의 노인을 돌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특히 거동이 상당히 어렵거나 치매노인은 돌보기가 어려우므로 간병비용을 더 부담하게 된다.
노인에 대한 요양비용은 요양병원의 경우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하며, 요양원의 경우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부단하기 때문에 수급자별로 본인부담금이 차이가 난다.
병원이나 요양원, 그리고 주야간요양센터에 입소하는 비용은 천차만별이므로 여러군데 전화를 걸어 알아보는 것이 좋다. 다만 가정의 경제사정에 따라 노인의 마지막 돌봄마저 차이가 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죽음과 장례
장례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보고 상의했다. 막상 돌아가시게 되어 알아보고 의견을 조율하려면 힘들기 때문이다. 장례는 인천이나 부천에서 하고, 화장은 인천가족공원묘지 화장장에서 하기로 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춘천에서 태어나셔서 춘천에서 사시다가 전혀 생각하시지도 못한 타향 인천에서 마지막을 딸고 함께 하다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천공원묘지에는 유골을 분골하여 유골함에 넣어 안치하는 수목장, 잔디장, 영안당 등이 있고, 유골을 그곳에 뿌릴 수 있는 산골 장소가 설치되어있다.
물론 장례 비용도 알아보았다. 장례식장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인천과 부천의 겨우 몇백만원에서 천삼백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머지않아 장례를 치룰 것 같은 서민들은 조목조목 상세히 알아보아 소위 바가지를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서민이라고 한 것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분들을 이야기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 중에 장례비를 무두 부담할 만한 자녀가 있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족들은 괜찮겠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유족들의 경우에 장례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조에 드신 분들은 상조회사에서 알아서 할 것이니 장례식장이나 식비 부담 정도만 알아보면 될 것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화장하게 된다면 장모님의 유골은 국가유공자인 장인이 묻힌 대전현충원으로 가게 될 것이다. 살아계신 분을 두고 돌아가실 때를 예상하여 이것저것 알아보는 것이 그리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미리 준비하여서 나쁠 것은 없기 때문에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다.
죽음교육에 관해
나는 6년 전에 각당복지재단에서 죽음교육강사가 되고 한국 싸나톨로지 협회에서 1년간 공부하고 시험을 거쳐 미국 ADEC의 싸나톨로지스트가 되었다. 그때 이후 죽음에 관한 책을 삼십여 권을 읽었다. 나는 죽음교육강사와 애도상담강사가 되었지만, ‘유언과 상속’이란 주제로 몇 군데에서 강의를 10회 미만 했을 뿐 막상 죽음에 대해서는 강의를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분야에 교수도 많고, 호스피스에서 오랜 기간 봉사하신 훌륭한 봉사자도 많아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는 강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관련단체에서 때때로 ‘죽음교육강사’니 ‘애도상담강사’니 하여 강좌를 개설하고, 마치 자격을 얻으면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죽음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된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일반인을 대상으로 적은 참가비를 받고 본부에서는 상설강좌를 운영하고, 각 지역에서 돌아가며 특강을 개설하는 게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각설, 이번에 나는 장모님을 통해 돌봄과 죽음에 대해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경험이 직간접적으로 다른 분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
집에서 죽는 것과 호스피스병원에서 죽는 것
각설, 우리나라에서 노인의 경우 근래에는 80% 내외가 병원에서 돌아가시고, 나머지는 사고사 또는 집에서 돌아가신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죽음은 집에서 가족들과 살다가 죽는 것이었다.
집에서 돌아가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는 먹을 수 없어 기진하게 되고, 대개 폐에 물이 차서 호흡을 못하여 죽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 어른들은 돌아가실 때가 되면 곡기를 끊으셨다. 스스로 곡기를 끊는 분도 있었다. 사실 사람이 곡기를 끊어 기진하게 되면 정신을 잃고 고통에서도 어느 정도 놓여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사가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죽음의 방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연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병원의 이해마저 얽혀 연명치료를 조장하는 병원과 소위 부모님을 자연스럽게 죽지도 못하게 하는 효자 효녀들이 있으니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겠다. 또 병원에 입원한 경우 소생의 가능성이 없더라도 가족이 계속 치료받기를 원하면 의사는 치료를 거부하면 처벌을 받게 되니 한편으론 법적인 미비점이라고도 생각된다.
집에서 돌아가시는 경우에는 대개의 노인이 바라는 바이지만, 돌보기도 몹씨 어렵고, 돌아가실 경우 119나 경찰에 신고하면 조사나 필요시 검시를 받는 경우도 있다하니 그런 절차 때문이라도 요양병원행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말기암으로 치료 불가능이란 의사의 선고를 받은 경우는, 집에 가서 돌아가시거나 호스피스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시는 것,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집에서 돌보기 어렵다면 호스피스도 생각해 볼만 하다. 왜냐하면 호스피스병원에도 의료보험은 적용된다. 호스피스는 연명치료는 하지 않고, 영양공급과 고통을 줄이려고 합법적인 마약성 진통제(비용이 상당히 싸다고 한다)를 투여하여 고통을 줄인다. 인공적으로 심장을 뛰게 하거나, 호흡을 하게 하거나, 적극적인 치료행위를 하여 의미없이 목숨을 연장시키지 않는다. 즉 환자에게 각종 검사를 시행하고, 피를 빼고 하는 행위를 하지않는다.
실제로 나는 병원에서 환자의 아들이 오랜동안 코마상태에 빠진 아버지가 계속 치료받기를 원하여 각종 검사 등에 고통받는 것을 보았다. 의사는 이미 살릴 수 없다고 여러번 설득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제세동기로 멈추어가는 심장을 살리려고 충격을 주면 갈비뼈가 부러진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런 제세동기를 사용할 때 연약한 환자의 몸이 펄쩍 공중에 튀어로르는 참혹한 광경을 보기도 했다.
말기암으로 치료 불가능한 환자가 입소할 수 있는 호스피스 병원에서는 환자가 거동할 수 있으면 각가지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등 직원들과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잘 받아들이며 잘 준비할 수 있게 하고, 사는 동안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많은 봉사자들이 그곳에서 환우들을 가족처럼 돌보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환자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일년까지도 사는 분도 있다고 한다.
편리한 의료기구의 임대 제도
장모님은 입원 2주 만에 휠체어를 타고, 교통약자 서비스를 이용해 차를 불러 집으로 모셨다. 이때 의사의 의견서가 필요했다. 집에 오니, 부축해 드려야 하지만 요도에 줄을 빼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 보시는 것이 너무 시원하다고 하셨다.
업체에서 이동용 산소발생기를 빌려 코에 낀 채로 퇴원했고, 집에도 이미 산소발생기를 설치해 놓았다. 의료용 침대도 미리 빌렸는데 보험 혜택으로 각각 만 원 미만의 비용이 들었다. 장모님의 경우는 설치비는 별도로 받지 않고 설치해 주었다. 환자의 의료요양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휠체어까지 그렇게 빌렸으니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는 정말 잘 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말 그대로 거지(생활보장대상자)가 아닌 경우, 중환자로 입원하면 집이 한 채 달아난다고 하니 말이다.
가족들을 만나는 일
장모님이 퇴원하여 집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손자 손녀, 아기인 증손자까지 찾아왔다. 장모님은 너무 기뻐하셨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신도 맑아지시는 것 같았다. 한동안 손자와 손주며느리, 손녀와 약혼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간다고 집을 나서자, 그 뒷모습을 보시며 장모님은 눈물을 훔치셨다. 아마 내가 사랑하는 저 아이들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혹 마지막은 아닐까? 라거나, 이제 머지않은 죽음을 예상하니 마음이 약해지셔서 피붙이를 만나기만 해도 눈물이 나시는 까닭일 것이다.
현재 장모님은 스스로 수저를 들어 식사하실 수 없어 아내나 내가 먹여드리는 상태이다. 죽도 드리고, 과일도 갈아 드린다. 그러나 드신 것을 자주 토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잠깐 다른 일을 보노라면 스스로 일어나셔서 화장실로 가셔서 우리를 놀라게도 하지만, 여전히 부축해야 하고, 혼자 움직이시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혹시 움직이시더라도 다칠 수 있어 위험하다. 눈을 뗄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이런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나에게 오지 말기를 기도한다.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아내를 힘들게 하지 않고 빨리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실 이런 소망은 모든 노인들의 마지막 바램이다.
오늘은 주일이라 예배드리러 가는 동안 고맙게도 제 사업장에서 토요일까지 애써 일하는 큰딸이 우리가 예배드리고 오는 동안 외할머니를 돌봐주었다. 항상 일하며 살림하느라고 바쁜 딸에게 외할머니까지 부탁한다는 것이 마음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교대로 교회에 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부득이 부탁하면서도 너무 미안했다. 큰딸은 외할머니를 잘 돌봐드렸다. 마침 정신이 맑으셨는지 대화도 적지않게 나누었다고 한다. 밥도 떠 먹여드려야 하는 아기가 된 외할머니지만, 외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시는 대화였다고 했다.
이번 추석에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들이 날을 바꾸어 찾아뵈러 올 것이다. 만나시는 동안 식사를 잘 하시고 건강하시고 정신이 맑으시기를 기도한다.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과 봄의 왕벚나무 벚꽃 잔치를 보실 수 있기를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니, 장모님이 언제 돌아가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하는 아내를 보며 장모님의 건강이 회복되셔서 이 가을에 세상에 태어나는 증손자 유준이의 동생도 한번 보셨으면 좋겠고, 인천대공원의 아름다운 가을 단풍 구경도 하시고, 봄에 떼를 지어 잔치날처럼 피어나는 왕벚나무의 벚꽃 비를 실컷 맞아보시고, 몇 번 더 아들들과 손자 손녀들을 맑은 정신으로 보시는 기쁨을 맞보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다.
장모님은 이제 그만 죽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부르셔야 갈 수 있어요, 식사를 잘 하시면서 우리와 사시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세요."
나는 손을 잡고 말씀 드렸다.
실상 지금 장모님의 마음이 미래에 내 마음이나 같을 것이다. 나는 당뇨환자이니 더 늘고 병들어 식사를 제대로 못하게 되면 의식을 잃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고통없이 데려가시기를 기도한다.
나와 아내는 성당에 다니시면 외웠던 주기도문을 지금도 잊지 않고 외우실 수 있는 장모님이 어느 날 주무시다가 편안하게 하나님의 품으로 가시기를 기원한다.
보내는 피붙이들의 슬픔을 남겨둔 채......
9/26
장모님은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시고 있다. 가끔 다른 소리를 하시지만, 일주일 전부터는 식사도 혼자 하실 수 있다. 다만, 화장실 가실 때는 부축이 필요하다.
연세가 구십오세라 내일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건강이 좋아지시기 너무 감사하다.
병원에서 의사의 권유대로 요양병원에 갔더라면 아마 건강이 더 나빠지셔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그저 연명하고 계실거란 생각이 든다. 그동안 가족들이 차례로 여러번 와서 뵈었지만, 아마 그것도 예약해야 되니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될 수만 있으면 어르신은 가족이 모셔야 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은 종일 간병인을 채용하더라도 그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양병원의 간병인은 아무래도 남이라 제 부모처럼 살갑게 간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제 네이버블로그에도 실었습니다. 다만, 제 블로그에는 제가 쓴 시를 다 싣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