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정도론 1권
7.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隨念](1)
7.1.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
2.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가운데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을 수행하기를 원하고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가진 수행자는 적절한 거처에 조용히 혼자 머물면서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① 아라한(Arahan, 應供)이시며
② 바르게 깨달으신 분(Sammā-sambudda, 正等覺者)이시며
③ 영지(靈知)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Vijjā-caraṇa-sampanna, 明行足)이며
④ 피안으로 잘 가신 분(Sugata, 善逝)이며
⑤ 세상을 잘 아시는 분(Lokavibū, 世間解)이며
⑥ 가장 높으신 분(Anuttara, 無上士)이며
⑦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Purisadammasāthi, 調御丈夫)이며
⑧ 신과 인간의 스승(Satthā devamanussānaṁ, 天人師)이시며
⑨ 부처님(Buddha 佛)
⑩ 세존(Bhagavā, 世尊)이시다.(A.iii.285)”라고 불ㆍ세존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3. 여기서 이것이 계속해서 생각하는 방법이다.
‘그분 세존께서는 이런 이유로 아라한이시고, 이런 이유로 완전히 깨달으신 분(正等覺者)이시고 … 이런 이유로 세존이시다’라고 계속해서 생각한다.
이러저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이와 같다는 말이다.
(1) 아라한(Arahan, 應供)
4. 이 가운데서
‘①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ārakattā)
② 적(ari)과
③ 바퀴살(ara)을 부수어버렸기 때문에(hatattā),
④ 필수품 등을 수용할 만하기 때문에(arahattā)
⑤ 비밀리에(raha)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abhāvā)’
–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이라고 계속해서 생각한다.
5.
① 그분은 모든 오염으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서계시며 도로써 장재성향을 포함한 오염원들을 부수었다. 이와 같이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ārakā) 아라한이시다.
그분은 [오염원들을] 멀리 여의어
그것을 거느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결점들을 거느리지 않은 주인이시기 때문에
아라한이라 한다.
6.
② 이 오염원이라는 적들을 도로써 죽여버렸다. 이와 같이 적들을(arīnaṁ) 죽였기 때문에(hatattā) 아라한이시다.
탐욕 등으로 불리는 모든 적들을
주인께서는 통찰지의 칼로 죽여버렸기 때문에
그러므로 역시 아라한이라 한다.
7.
③ 윤회의 바퀴가 있으니,
그것은 무명과 존재에 대한 갈애로 이루어진 바퀴통을 가졌고,
공덕이 되는 행위 등의 바퀴살을 가졌고, 늙음ㆍ죽음의 테두리를 가졌고,
번뇌의 일어남으로 이루어진 차축에 궤어있고, 세 가지 존재의 수레에 묶여있고, 무시이래로 회전해왔다.(M.i.55참조)
세존께서는 그것의 모든 바퀴살을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의 두 발로 계의 토양에 굳건히 머무시면서 믿음의 손으로 업을 부수는 도구인 지혜의 도끼를 쥐고 부수셨다.
이와 같이 바퀴살을(arīnaṁ) 부수었기 때문에(hatattā) 아라한이시다.
8. 혹은 윤회의 바퀴는 그 시작이 알려지지 않은 윤회의 회전이라고들 한다.
무명은 뿌리이기 때문에 그것의 바퀴통이다.
늙음ㆍ죽음은 최후이기 때문에 테두리다.
나머지 열 가지[조건 따라 생긴] 법들은 무명이 뿌리이고 늙음ㆍ죽음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바퀴살(arā)이다.
9. 이 가운데서 괴로움(苦) 등에 대해 알지 못함이 무명(avijjā)이다.
욕계의 무명은 욕계의 상카라(saṅkhāra, 行)들에게 조건이 된다.
색계의 무명은 색계의 상카라들에게 조건이 된다.
무색계의 무명은 무색계의 상카라들에게 조건이 된다.
10. 욕계의 상카라들은 욕계의 재생연결에게 조건이 된다.
이 방법은 나머지에도 적용된다.
11. 욕계의 재생연결식은 욕계의 정신ㆍ물질(nāma-rūpa, 名色)에게 조건이 된다.
색계에서도 이와 같고 무색계에서는 정신에게만 조건이 된다.
12. 욕계의 정신ㆍ물질은 욕계의 여섯 감각장소(saḷāyatana, 六入)에게 조건이 된다.
색계의 정신ㆍ물질의 색계의 [눈과 귀와 마노의] 세 가지 감각장소에게 조건이 된다.
무색계의 정신의 무색계의 [마노의] 하나의 감각장소에게 조건이 된다.
13. 욕계의 여섯 감각장소는 욕계의 여섯 가지 감각접촉(phassa, 촉)에게 조건이 된다.
색계의 세 가지 감각장소는 색계의 세 가지 감각접촉에게 조건이 된다.
무색계의 하나의 감각장소는 무색계의 하나의 감각접촉에게 조건이 된다.
14. 욕계의 여섯 가지 감각접촉은 욕계의 여섯 가지 느낌(vidanā, 受)에게 조건이 된다.
색계의 세 가지 감각접촉은 색계의 세 가지 느낌에게 조건이 된다.
무색계의 하나의 감각접촉은 무색계의 하나의 느낌에게 조건이 된다.
15. 욕계의 여섯 가지 느낌은 욕계의 여섯 가지 갈애( taṇhā, 愛)의 무리(kaya)에게 조건이 된다.
색계의 세 가지 느낌은 색계의 세 가지 갈애의 무리에게 조건이 된다.
이러한 곳의 이러한 갈애는 그 각각의 취착(upādāna, 取)에게 조건이 되고,
취착 등은 존재(bhava, 有)등에게 조건이 된다.
16. 어떻게?
여기 어떤 자는 감각적 욕망들을 즐기리라 생각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을 조건으로 몸으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말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마노로 삿된 행위를 한다.
삿된 행위를 가득 채웠기 때문에 다시 악처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kamma-bhava, 業有)이고, 그 업으로 받은 무더기들(五蓋)이 재생으로서의 존재(upapatti-bhava, 生有)이다.
무더기들이 생산되는 것이 태어남(生)이고, 성숙해감이 늙음(老)이고, 무너짐이 죽음(死)이다.
17. 어떤 자는 천상의 복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같은 방법으로 선행(善行)을 한다.
선행을 가득 채웠기 때문에 다시 천상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이 방법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18. 다시 어떤 자는 범천의 복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취착을 조건으로 자애(慈)를 닦고 연민(悲)과 더불어 기뻐함(喜)과 평온(捨)을 닦는다.
닦음을 원만히 했기 때문에 범천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이 방법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19. 어떤 자는 무색계의 복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같은 방법으로 공무변처 등의 증득(等至)을 닦는다.
닦음을 원만히 했기 때문에 그곳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이고 그 업으로 받은 무더기들이 재생으로서의 존재이다.
무더기들이 생산되는 것이 태어남이고, 성숙해감이 늙음이고, 부서짐이 죽음이다.(M.ii.263 참조)
이 방법은 나머지 취착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20. 이와 같이
“무명이 원인이고, 상카라들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이 둘 역시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조건을 파악함에 대한 통찰지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무명이 원인이고, 상카라들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이 둘 역시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조건을 파악함에 대한 통찰지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이다.(Ps.i.50)”라고 이 방법으로 모든 구설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21. 이 가운데서 무명과 상카라(行)들이 하나의 요약이고,
알음알이(識)와 정신ㆍ물질(名色)과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入)과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이 하나의 요약이고,
갈애(愛)와 취착(取)과 존재(有)가 하나의 요약이고,
태어남(生)과 늙음ㆍ죽음(老死)이 또 하나의 요약이다.
처음 한 개의 요약은 과거이고,
중간의 두 개의 요약은 현재이고.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미래이다.
무명과 상카라들을 언급함으로써 갈애와 취착과 존재도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법들은 과거의 업의 회전이다.
알음알이 등 다섯은 현재의 과보의 회전이다.
갈애와 취착과 존재를 언급함으로써 무명과 상카라들도 여기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법들은 현재의 업의 회전이다.
태어남과 늙음ㆍ죽음을 언급함으로써 알음알이 등이 지적되었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 법들은 미래의 과보의 회전이다.
이들은 이런 측면에 따라 스무 가지가 된다.
상카라들과 알음알이 사이에 하나의 연결이 있고 느낌과 갈애 사이에 하나의 연결이 있으며 존재와 태어남 사이에 하나의 연결이 있어서 [연결은 모두 세 가지이다].
22. 이처럼 세존께서는 네 가지 요약과 삼세와 스무 가지 측면과 세 가지 연결을 가진 연기를 모든 측면에서 알고 보고 깨닫고 통찰하셨다.
“그것을 알았다는 뜻에서 지혜이고 꿰뚫어 안다는 뜻에서 통찰지이다.
그래서 ‘조건을 파악함에 대한 통찰지가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이다’라고 한다.(Ps.i.52)”라고 설하셨다.
세존께서는 이 법들의 조건에 대한 지혜로 이 법들을 있는 그대로 아시고 그들에 대해 역겨워하고 탐하지 않고 해탈하셨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종류의 윤회의 바퀴의 바퀴살들을 부수었고, 쳐부수었고, 파괴시키셨다.
이와 같이 바퀴살들(arāna ṁ)을 부수었기 때문에(hatattā) 아라한(araha)이시다.
지혜의 칼로 윤회의 바퀴살들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의 주인을 아라한이라 부른다.
23.
④ 최고의 보시를 받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옷 등의 필수품과 특별한 예배를 수용할만하다.
여래가 출현하시면 권세 있는 신과 인간은 다른 곳에 예배하지 않는다. 사함빠띠 범천이 보석의 화환을 수미산만큼이나 여래께 공양했고, 다른 신들과 빔비사라 왕과 꼬살라 왕 같은 사람도 힘을 다해 공양했다.
세존이 열반하신 후에도 아소카 왕이 그를 위해 9억 6천의 재산을 보시하고 인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사원을 건립했다. 그러니 다른 특별한 예배를 말할 필요가 있으랴.
이와 같이 필수품 등을 수용할만하기 때문에(araha-tta)아라한이시다.
필수품과 더불어 특별한 예배를
세상의 주인께서는 수용할만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런 뜻에 적절하게 아라한이라 한다.
그러므로 승자께서는 이 이름을 가질만하다.
24.
⑤ 세상에서 영리함을 뽐내는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오명을 두려워하여 몰래 악을 행하지만 그분은 결코 이와 같이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raha-abhavato) 아라한이시다.
여하신 분은 악업에 대해 비밀이란 것이 없다.
밀이 없기 때문에 그분을 아라한이라 부른다.
25. 이와 같이 모든 곳에서
그분은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오염의 적을 부수었기 때문에 성현이시고
윤회의 바퀴의 바퀴살을 파괴했고
필수품 등을 수용할만하고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아라한이라 부른다.
(2) 바르게 깨달으신 분(Sammā-sambuddha, 正等覺者, 正遍智)
26. 바르게(asmmā) 그 스스로(sāmaṁ)모든 법들을 깨달으셨기 때문에(nuddhatta) 바르게 깨달으신 분(Sammā-sambuddha, 正等覺者)이라 한다.
그분은 모든 법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으셨다. 완전히 알아야 할 법들(즉, 사성제)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즉, 고제)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버려야 할 법들(즉, 집제)을 버려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실현해야 할 법들(즉, 멸제=열반)을 실현해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닦아야 할 법들(즉, 도제)을 닦아야 한다고 깨달으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Buddha)다(Sn.58)”
27. 더욱이
‘눈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고,
그것의 근본 원인으로 그것을 생기게 하는 과거의 갈애는 일어남의 진리(集諦)이고,
이 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멸의 진리(滅諦)이고,
소멸을 잘 아는 도닦음이 도의 진리(道諦)다’라고,
이와 같이 [눈 과 눈의 일어남 등의] 구절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모든 법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으셨다.
이 방법은 귀와 혀와 몸과 마노에도 적용된다.
28.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위 구문을 다음의 법수들에도] 적용시켜야 한다.
형상(色) 등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
눈의 알음알이(眼識) 등 여섯 가지 알음알이의 무리
눈의 감각접촉(觸)등 여섯 가지 감각접촉
눈의감각접촉 등에서 생긴 여섯 가지 느낌(受)
형상의 인식(想)등 여섯 가지 인식
형상에 대한 의도(意思) 등 여섯 가지 의도
형상에 대한 갈애(愛) 등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
형상에 대해 일으킨 생각(尋) 등 여섯 가지 일으킨 생각
형상에 대한 지속적인고찰(伺) 등 여섯 가지 지속적인 고찰
물질의 무더기 등 다섯 가지 무더기
열 가지 까시나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隨念)
부풀은 것의 인식 등 열 가지 인식
머리카락 등 서른두 가지 형태
열두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處)
열여덟 가지 요소(界)
욕계의 존재 등 아홉 가지 존재
초선 등 네 가지 禪
자애를 닦음 무량함(無量)
네 가지 무색의 증득(等至)
역관으로 늙음ㆍ죽음으로부터 시작하고 순관으로 무명으로부터 시작하는 연기의 구성요소(名支)들.
29. 이제 이것이 연기의] 한 구절을 결합한 것이다.
늙음ㆍ죽음은 괴로움의 진리이고, 태어남은 일어남의 진리이고,
이 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멸의 진리이고, 소멸을 잘 아는 이는 도닦음이 도의 진리이다.
이와 같이 [사제의 구절을 낱낱이 들어 모든 법들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았고 적절하게 깨달았고 원만하게 깨달으셨다.
그래서 설하셨다.
‘바르게 그 스스로 모든 법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라 한다라고.
(3) 영지(靈知)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Vijjācaraṇasampanna, 明行足)
30. 영지(明)와 실천(行)이 구족하기 때문에 영지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明行足)이라 한다.
여기서 영지란 세 가지 영지(三明)도 있고 여덟 가지 영지도 있다.
세 가지 영지는 「바야베라와 경」(Bhayabherava Sutta, 怖駭經,M4/i.22이하)에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하고,
여덟 가지는 「암밧타 경」(Ambaṭṭha Sutta, D3/i.100하)에서 설한대로 알아야 한다. 거기서 위빳사나의 지혜와 마음으로 이루어진 신통과 함께 여섯 가지 특별한 지혜(六神通)를 더하여 여덟 가지의 영지를 설하셨다.
31. 실천(行)이란 계(戒)로 절제함, 감각기능(根)들의 문을 단속함, 음식에서 적당량을 앎, 깨어있으려는 노력, 일곱 가지 진실한 법, 네 가지 색계선이라는 이 열다섯 가지 법들이라고 알아야 한다. 불사의 경지로 가기 때문에 실천이라 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마하나마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들은 계를 가진 자다.(M.i.355)”라고 모든 것은 『중부』 의 중간 50개의 경들에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세존은 이런 영지와 실천을 갖추었기 때문에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이라 불린다.
32. 세존이 영지를 구족하심은 일체지(一切知, 全知 sabbaññutā)를 원만히 하신 뒤 성취하셨으며, 실천을 구족하심은 크나큰 연민(大悲)을 원만히 하신 뒤 성취하셨다.
그분은 일체지로 모든 중생들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아시고크나큰 연민으로 해로운 것을 피하게 하고 이로운 것을 행하도록 권장하셨다.
마치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지 않은 [외도]들의 제자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 등을 하면서 [나쁜 도닦음을 가지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나쁜 도닦음을 가지지 않고 좋은 도닦음을 가지는 것이다.
(4) 피안으로 잘 가신 분(Sugata, 善逝)
33. 행함이 아름답기 때문에, 멋진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바르게 가셨기 때문에, 바르게 설하시기 때문에 [피안으로] 잘 가신 분 (善逝)이시다.
여기서 ‘감(gamana, 행함)’도 ‘갔음(gata)’이라고 한다.
세존의 가심(행하심)은 아름답고 두루 청정하고 나무랄 바가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성스러운 도(ariya-magga=八正道)다. 그 성스러운 도로써 안은(安檼)한 곳으로 집착 없이 가셨다. 그러므로 행함이 아름답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다.
그분은 불사의 열반인 멋진 곳으로 가셨다. 그러므로 멋진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다.
34. 각각의 도로써 버린 오염원들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바르게 가셨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예류도로 버린 오염원들도 다시 오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다 … 아라한도로 버린 오염원들로 다시 오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다.”
혹은 연등불의 발아래서 수기를 받은 이래로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실 때까지 30가지 바라밀을 완성하여 바른 도로써 일체 중생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시고,
감각적 욕망들을 즐기고 자기를 괴롭히는 상견과 단견의 양극단에 빠지지 않고 바르게 가셨다.
이처럼 바르게 가셨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다.
35. 그리고 그분은 바르게 설하신다.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바르게 설하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다.
여기 이것을 확증(sādhaka)하는 경이 있다.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옳지 않고 이익을 줄 수 없다고 여기는 말이 남들에게 사랑스럽지도 못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여래는 그 말이 사실이고 옳더라도 이익을 줄 수 없다고 여기면 또 그것이 남들에게 사랑스럽지도 못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실이고 옳고 이익을 줄 수 있는 말이라도 그것이 남들에게 사랑스럽지도 못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기서 그 말을 해줄 바른 시기를 안다.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옳지 않고 이익을 줄 수 없다고 여기는 말이 남들에게 사랑스럽지도 마음에 드는 것일지라도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여래는 그 말이 사실이고 옳더라도 이익을 줄 수 없다고 여기면 비록 남들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일지라도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실이고 옳고 이익을 줄 수 있는 말이 남들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면 거기서 그 말을 해줄 바른 시기를 안다.(M.i.395)”
이와 같이 바르게 설하시기 때문에 바르게 가신 분이라고 알아야한다.
(5) 세상을 잘 아시는 분(Lokavidū, 世間解)
36.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시기 때문에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고유성질에 따라, 일어남에 따라, 소멸에 따라,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셨고, 경험하셨고,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도반이여, 나는 태어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그런 곳을 직접 가서 세상의 끝을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렇다고 나는 그런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도 괴로움의 끝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가진 이 한 길 몸뚱이 안에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 있음을 천명한다.
여행으로써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는 자, 슬기로운 자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 청정범행을 완성한 자
고요한 자, 그는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S.i.62)
37. 세 가지 세상이 있다.
① 상카라(行)들의 세상과
② 중생의 세상과
③ 공간의 세상이다. 이 가운데서
“하나의 세상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Ps.i.122)”라고 전승되어온 구절에서는 상카라들의 세상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영원하다 혹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M.i.426)”라고 전승되어온 구절에서는 중생의 세상을 알아야 한다
“달과 해가 운행하여
사방을 비추고 빛나는 한
천 개나 되는 세상, 그곳까지도
그대의 지배력(vasa)은 미칠 것이다.(M.i.328)”
위 구절에서는 공간의 세상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38.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하나의 세상: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
두 가지 세상: 정신과 물질.
세 가지 세상: 세 가지 느낌,
네 가지 세상: 네 가지 음식.
다섯 가지 세상: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
여섯 가지 세상: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入).
일곱 가지 세상: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
여덟 가지 세상: 여덟 가지 세간 법.
아홉 가지 세상: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
열 가지 세상: 열 가지 장소.
열두 가지 세상: 열두 가지 감각장소(十二處).
열여덟 가지 세상: 열여덟 가지 요소(界)(Ps.i.122)”라고,
상카라들의 세상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39. 모든 중생들의 습성을 아시고, 잠재성향을 아시고, 행위를 아시고, 결심을 아시며, 눈에 때가 적은지 많은지, 기능(根)이 예리한지 둔한지, 행실이 바른지 나쁜지,
가르치기 쉬운지 어려운지,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중생의 세상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40. 중생의 세상처럼 공간의 세상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하나의 우주(cakkavāḷa, 輪圍山)는 종횡으로 각각 1천 2백만 3천 4백 5십 유순(yojana)이다. 그 주위는
일체의주위는 3백6십만이고
일만 3백5십의유순이다.
41. 이 가운데서
이십사만이 있으니
이 만큼의 두께를 가진 것을 땅이라고 말한다.
그 [땅을] 지지하는 [물은]
사십팔만이 있으니 이 만큼 두께의
물이 바람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그 [물을] 지지하는
바람이 허공을 상승하는 것은 구십육만이 있으니
이것이 세상의 전체 크기이다.
42. 이와 같이 굳게 서있을 때,
모든 산 가운데 최고 높은 수미산(Sineru, Sk. Sumeru)은
대해 속에 8만4천 유순이나 잠겨있고
그만큼수면위로솟아있다.
수미산의 크기 보다 차례대로 각각 절반 크기로
깊이와 높이를 가졌고 갖가지 신비한 보석으로 장엄된
유간다라, 이사다라, 까라위까, 수닷사나
네미다라, 위나따까, 앗사깐나의큰산맥
중심이 같은이 일곱의 큰 산들이
수미산 주위를 에워 싼다.
4천완의 거처이고, 신들과 야차가 머문다.
히말라야 산의 높이는 5백 유순이고
종횡으로 3천 유순이며
8만4천 봉으로 장엄 되어 있다.
나가라고 불리는 잠부 나무가 있으니
그 줄기는 1유순을 에워 싸고
줄기의 가지들은 주위에 50유순이나 뻗쳐 있으며
백요자나의 넓이와 그와 같은 크기로 솟아있다.
이잠부나무의 거대함으로 인해
잠부디빠(염부제)라는 이름을 얻었다.
43. 잡부 나무의 크기는 아수라들의 짓뜨라빠딸리야 나무와, 가루다들의 심발리 나무와, 아빠라고야나(西牛貨洲)에 가담바 나무와 북쪽 꾸루의 깔빠 나무와, 동쪽 위데하의 시리사 나무와 삼십삼천(帝釋天)의 빠리찻따까 나무와 같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빠띨리, 삼발리, 잠부, 신들의 빠리찻따까
까담바, 깝빠나무, 시리사가 일곱 번째이다”
우주의 바위산이 바다 속 깊이와
수면 위의 높이가 각각 8먼2천 유순으로
전세상을에워싸고섰다.
44. 이 세상에서 월륜은 49유순이고, 일륜은 50유순이다. 삼십삼천(帝釋天)의 영역은 일만 유순이고, 아수라와 무간 대지옥과 잠부디빠의 영역도 그와 같다.
아빠라고야나는 7천 유순이도 뿝바위데하도 그와 같다.
웃따라꾸루는 8천의 요자나다. 여기서 각각의 큰 섬은 각각 500개의 작은 섬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모두는 하나의 우주(cakkavāḷa, 輪圍山)이고 하나의 세계(lokadhātu)이다.
그들 사이에 로깐따라야 지옥이 있다.
45. 이와 같이 그분은 공간의 세상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그러므로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시기 때문에 세상을 아시는 분(世間解)이다.
(6) 가장 높으신 분(Anuttara, 無上士)
46. 자신의 덕보다 더 뛰어난 자가 없기 때문에 이 보다 더 높은 자가 없다. 그러므로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이시다.
같은 방법으로 계의 덕(guṇa)으로 모든 세상을 능가한다. 삼매와 통찰지와 해탈과 해탈지견의 덕으로도 또한 그러하다. 계의 덕으로도 같은 자가 없고, 같은 자가 없는 [과거 부처님들과] 같고, 비할 수 없고, 닮은 자가 없고, 대적할만한 사람이 없다 … ㅐ탈지견의 덕으로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상세히 말씀하셨다.
“신들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한 세상에서 …신과 인간을 포함한 사람들 중에 나보다 더 계를 구족한 자를 보지 못했다.(S.i.139)”
또 「악가빠사다 경」(Aggapasāda Sutta, 最上信樂經, A.ii.34) 등에서는 “나는 스승이 없다(M.i.171)”라는 등의 게송을 상세하게 인용해야 한다.
(7)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Purisadammasārathi,調御丈夫)
47. 길들여야 할 사람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이다.
길들이다, 가르치다는 말이다.
여기서 길들여야 할 사람들이란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길들이기에 적당한 축생의 수컷들과 인간의 남자들과 사람이 아닌 남성들을 뜻한다.
세존께서는 아빨랄라 용왕, 쭐로다라 용왕, 다나빨라까 코끼리 등의 축생의 수컷을 길들이셨고 독이 없게 하셨고 귀의처와 계에 굳게 서게 하셨다.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 젊은 바라문인 암밧타, 뽁카라시띠, 소나단다, 꾸따단따 등의 인간의 남자를, 또 알라와까, 수찔로마, 카랄로마 야차와 제석천왕 등의 인간이 아닌 남성들을 갖가지 길들이는 방법으로 길들이고 가르치셨다.
“께시여, 길들여야 할 사람들을 부드럽게 가르치기도 하고, 강하게 가르치기도 하고, 부드럽고 강하게 가르치기도 한다.(A.ii.112)’라는 경을 상세하게 인용해야 한다.
48. 다시 세존께서는 계 등이 이미 청정한 자들에게 초선 등을 [설하시고] 예류자 등에게는 높은 도의 수행을 설하시면서 이미 길 들여진 자들도 길들이신다.
혹은 [앞의 무상사를 여기 가져와서] 사람을 잘 길들이는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 調御丈夫)으로 단 하나의 구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세존은 길들여야 할 사람들이 단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아 8방으로 걸림 없이 달릴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에 가장 높은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이라 부른다.
“비구들이여,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진 코끼리는 오직 한 방향으로 간다.(M.iii.222)” 라는 경을 상세하게 인용해야 한다.
(8) 신과 인간의 스승(Satthā devamanussānaṁ, 天人師)
49. 현생과 내생과 궁극적인 뜻(열반)으로 적절하게 가르치기 때문에 스승이시다. “대상(隊商)을 삿타(satta)라 한다.
세존은 대상의 지도자(satthavāha)이시다.
대상의 지도자는 대상들로 하여금 사막을 건너게 하고,
도적들이 들끊는 사막을 건너게 하고,
야수들이 극성을 부리는 황무지를 건너게 하고,
먹거리가 없는 황무지를 건너게 하고,
물 없는 사막을 건너게 하고,
넘어가게 하고 벗어나게 하고, 잡고서 건너가게 하고 안은한 곳으로 이르게 한다.
이와 같이 세존은 스승이시고 대상의 지도자로서 대상들로 하여금 사막을 건너게 하시고 태어남의 사막을 건너게 하신다.(Ndl.446)”라는 등의『닛데사』 (義釋)의 방법으로 여기서 듯을 알아야 한다.
50. ‘신과 인간들의(devamanussānaṁ)’라는 합성어는 ‘신들의 그리고 인간들의(devānañ ca manussānañ ca)’로 풀이된다.
이것은 최고로 수승한 자들과 [향상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을 상징하여 설했다. 그러나 세존은 축생들에게도 가르침으을 설하셨기 때문에 스승이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세존으로부터 법을 듣고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의] 강하게 의지하는 원인을 얻은 후 그 강하게 의지하는 원인으로 두 번째 생에 도와 과를 수용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51. [전생에 개구리였던] 만두까(Maṇḍūka, 개구리)라는 신의 아들 등이 여기서 그 보기이다.
세존께서 각가라( Gaggarā)의 강변에서 짬빠 시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개구리 한 마리가 세존의 목소리에서 표상을 취했다.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눌리면서 서있었다.
그는 죽어 곧 바로 삼십삼천의 12유순이나 되는 황금 궁전에 태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고
‘오, 참으로 내가 여기 태어나다니! 내가 어떤 업을 지었을까.’하고 살펴보다가,
세존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궁전과 함께 세존께 가서 세존의 발아래 절을 올렸다.
세존께서는 아시면서 물으셨다.
“이런 신변과 이 만큼의 수행원으로
광휘를 드날리며 아름다운 안색으로 사방을 비추면서
어떤 자가 나의 발 아래 절을 하는가?
“저는 전생에 물에서 사는 개구리였습니다.
설법을 들을 때 목동이 저를 죽였습니다.(Vv.49)”
세존은 그에게 법을 설하셨다. 8만 4천의 중생들이 법을 관통하였다. 신의 아들도 예류과를 얻은 뒤 미소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9) 부처님(Buddha 佛)
52. 알아야 할 것을 전부 깨달았기 때문에 해탈의 구경에 이른 지혜를 가진 부처님이시다.
혹은 사성제를 그분 스스로 깨달았고 또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도 부처님이시다.
이 뜻을 설명하기 위해
“사성제를 깨달은 분이기에 부처님이시다.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시다.(Ndl.457)”라고 시작하는 전체『닛데사』 의 방법 혹은 『무애해도』의 방법을 상세하게 인용해야 한다.
(10) 세존(Bhagavā, 世尊)
53. 세존이란 [계 등의 모든] 덕으로 뛰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중생들 가운데 최상이요. 존경받는 스승의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세존이란 최고라는 단어요.
세존이란 최상이란 단어이다.
존중과 존경에 적당한 분이시니
그래서 그분을 세존이라 한다.”
54. 혹은 네 가지 이름이 있다.
① 상황에 따른 것
② 특징에 따른 것
③ 표상에 따른 것
④ 우연히 생긴 것이다.
우연히 생긴 [이름]이란 세간에 통용되는 말을 빌리면 ‘제 멋대로 생긴 것’이다.
이 가운데서 상황에 따른 이름이란 송아지, 길들여야 할 [어린] 소, 멍에를 멘 소 등이다.
특징에 따른 이름이란 막대기를 가진 자. 일산을 가진 자, 상투를 튼 자, 손을 가진 자(코끼리) 등이다.
표상에 따른 이름이란 세 가지 영지(三明)를 가진 자, 여섯 가지 수승한 지혜(六神通)를 가진 자 등이다.
시리왓다까(Siri-vaḍḍhaka, 복을 늘리는 자), 다나왓다까(Dhana-vaḍḍhaka, 부를 늘리는 자) 등은 단어의 뜻에 상관없이 생긴 우연히 생긴 이름이다.
55. 여기서 세존이란 표상에 따른 이름이다.
이것은 마하마야[왕비]에 의해서도, 숫도다나 대왕에 의해서도, 팔만의 친척에 의해서도, 삭까(제석)나 산뚜시따(도솔) 등의 뛰어난 신에 의해서도 지어진 것이 아니다.
법의 사령관인 [사리뿟따 존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
“세존이란 이름은 어머니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다 … 세존이란 해타라의 구경에 이른 분인데 이것은 제불세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일체지를 얻음과 함께 실현하신 개념(paññatti)이다.(Ps.i.174;Ndl.143)”
56. 이 이름의 원인인 그 덕들을 드러내기 위해 다가진 분, [한적한 곳에 자주 가는 분
[필수품을] 수용하는분, [법을] 분석하는분.
[탐ㆍ진ㆍ치를] 부순분, 존경받을분, 축복받은분
여러 가지 바른 방법으로 자신을 잘 닦은 분
존재를 종식시킨 분, 그분을 세존이라 부른다.”
그리고 『닛데사』(義釋, Ndl.142)에서 설한 방법대로 여기서 각 단어들의 뜻을 알아야 한다.
57. 이것은 다른 방법이다.
① 행운을 가진 분
② [마라를] 부순 분
③ 복을 [구족한] 분
④ 분석하는 분
⑤ 수행을 가진 분
⑥ 존재에서 여행을 버린 분
그래서 세존이시다.
① 행운을 가진 분
58.
[① 행운을 가진 분]:
세간적인 행복과 출세간적인 행복을 생기게 하는 보시와 지계 [바라밀] 등 피안에 이른 행운(bhāgya)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바갸와(bhāgyavā, 행운을 가진 자)라고 말할만하나 바가와(bhagavā, 세존)라 부른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음의 첨가와 모음의 삭제(Kāshika 6. 3. 109)”등 어원의 특징을 취하거나
혹은 문법적인 방법으로 ‘삐소다라 등)pisodarādi)”의 [예문을 가진] 삽입하는 특징을 취하기 때문이다.
② 마라를 부순 분
59.
[② 마라를 부순 분]:
그런데 ㅡ분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잘못 마음에 잡도리함, 양심,없음, 수치심 없은, 성냄, 적의, 얕봄, 비교함, 질투, 인색, 속임수, 사기, 완고함, 뻔뻔스러움, 자만, 거만, 허영, 태만, 갈애, 무명, 세 가지 해로움의 뿌리, 삿된 행위, 오염, 더러움, 바르지 못한 인식, 일으킨 생각, 희론, 네 가지 전도, 번뇌, 매듭, 폭류, 속박, 나쁜 길, [4종 필수품의] 갈애에 대한 취착, 다섯 가지 마음의 황폐, 얽매임, 장애, 즐김, 여섯 가지 분쟁의 뿌리, 갈애의 무리, 일곱 가지 잠재성향, 여덟 가지 삿됨, 갈애를 근본으로 한 아홉 가지, 열 가지 해로운 업의 길, 62가지 삿된 견해, 108가지 갈애의 행위로 분류되는 백 천 가지나 되는 모든 괴로움과 열병과 오염을 부수셨다.
혹은 간략하게 설하면 다섯 가지 마라를 부수었다.
즉, 오염원의 마라, 무더기(蘊)의 마라, 업형성력(abhisaṅkhāra)의 마라, 신의 마라, 죽음의 마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을 부수었기 때문에 박가와(bhaggavā, 부수어버림을 가진 자)라 부를만하나 바가와(bhagavā, 세존)라 부른다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탐욕을 부수었고(bhagga) 성냄을 부수었고
어리석음을 부수었고 번뇌 없는 분이시다.
그분의 모든 법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세존(bhagavā)이라 부른다.”
60. 행운을 가진 분(bhāgyavā)이라는 [단어로] 백 가지 공덕의 특징을 가진 물질의 몸을 성취하신 것을 나타낸다.
결점을 부수어(bhagga) 법의 몸을 성취하신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행운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존경함을 나타내고, [결점을부수었기 때문에] 현자들이 존경함을 나타낸다.
같이 하여 재가자들과 출가자들이 의지할 만한 상태를 나타내고,
그들이 의지할 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남을 얻는 것을 나타내며,
물질적인 보시와 법의 보시로 도움을 받는 것을 나타내고,
세간적인 행복과 출세간적인 행복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③ 복을 구족한 분
61.
[③ 복을 구족한 분]:
세간에서 복(bhaga)이라는 단어는
① 지배력과 ② 법과 ③ 명성과 ④ 영화와 ⑤ 소원과 ⑥ 노력,
이 여섯 가지의 경우에 통용된다.
① 세존께서는 자기의 마음에 대해 최고의 지배력을 가졌고,몸을 극히 작게 만들고 극히 가볍게 만드는 등 세간에서 알려진 지배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측면에서 구족함을 가지셨다.
② 그와 마찬가지로 출세간적인 법을 가지셨다.
③ 삼계에 두루 퍼져있고 진실한 공덕으로 얻은지극히 청정한 명성을 가지셨다.
④ 물질의 몸을 보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눈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사지를 구족한 영화를 가지셨다.
⑤ 그분이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 그것이 자기에게 이롭든, 남에게 이롭든-그 모든 것을 그대로 성취하기 때문에 소원성취라고 이름하는 소원을 가지셨다.
⑥ 모든 세상이 존경하는 원인인 바른 정진이라 부르는 노력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런 복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imehi bhagehi yuttattā) 세존이라 하고, 복을 가진 자(bhagā ssa santi)이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세존(bhagavā, 福者)이라 한다.
④ 분석하는 분
62.
[④ 분석하는 분]:
모든 법들을 유익함(善) 등 세 가지로 분류하셨고,
유익한 법 등을 무더기(khandha, 蘊), 감각장소(āyatana,處), 요소(dhātu, 界), 진리(sacca,諦), 기능(nidriya,根), 연기(paṭicca-samupāda, 緣起) 등으로 분석하셨고,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괴롭다는 뜻, 형성되었다는 뜻, 불탄다는 뜻, 변한다는 뜻으로 분석하셨고,
일어남의 진리를 쌓음의 뜻, 근원의 뜻, 묶는다는 뜻 억압한다는 뜻으로 분석하셨고,
소멸의 진리를 벗어남의 뜻, 멀리 여읨의 뜻, 형성되지 않음의 뜻, 불사의 뜻으로 분석하셨고,
도의 진리를 출구의 뜻, 원인의 뜻, 본다는 뜻, 탁월하다는 뜻으로 분석하셨기 때문에,
분석하는 분(vibhattavā)이라고 부를만하나 세존(bhagavā)이라 부른다고 알아야 한다.
⑤ 수행을 가진 분
63.
[⑤ 수행을 가진 분]:
천상에 머물, 신성한 머묾, 성스러운 머묾과, 몸으로 떨쳐버림, 마음으로 떨쳐버림, 마음으로 떨쳐버림, 무더기의 떨쳐버림과, 공한 해탈, 원함 없는 해탈, 표상 없는 해탈과, 다른 세간적인 법과 인간을 능가하는 출세간적인 법들을 가까이 하고 반복하고, 많이 [공부]지으셨기 때문에,
수행을 가진 분(bhattavā)이라 부를만하나, 세존(bhagavā)이라 부른다고 알아야 한다.
⑥ 존재에서 여행을 버린 분
64.
[⑥ 존재에서 여행을 버린 분];
세 가지 존재에서 갈애라 불리는 여행을 버렸기 때문에 ‘존재에서 여행을 버린 자(bhave-su vantagamano)”라고 부를만하나,
‘바와(bhava, 존재)’라는 단어에서 ‘바(bha)”라는 글자와, ‘가마나(gamana, 감)’라는 단어에서’가(ga)’라는 글자와, ‘완따(vanta, 버림, 토함)’라는 단어에서 ‘와(va)’라는 글자를 장음으로 만들어 가져와서 ‘바가와(bhagavā, 세존)’라 부른다고 알아야 한다.
마치 세간에서 ‘메하나사 카사 말라(mehanassa khassa mālā)’라고 부를만하나,
[‘메’와 ‘카’와 ‘라’를 가져와서] ‘메칼라(허리끈)’라고 부르듯이.
65. 그가 이와 같이
‘그분 세존게서는 이런 이유로 아라한이시고, 이런 이유로 완전히 깨달으신 분(正等覺者)이시고 … 이런 이유로 세존이시다’라고(§3) 부처님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여래를 의지하여 올곧아진다.)A.iii. 286)”
[마무리]
66. 이와 같이 탐욕 등에 얽매이지 않아서 장애들을 억압하고 명상주제를 향하고 올곧은(uju) 마음을 가질 때 부처님의 덕을 향해서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일어나다.
부처님의 덕을 따라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을 할 때 희열(喜)이 생긴다.
그의 마음에 희열이 생길 때 편안함(輕安)을 통해 몸과 마음의 불안들은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편안함의 가까운 원인은 희열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편안하게 가라앉을 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행복(樂)이 일어난다.
행복한 자는 부처님의 덕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삼매에 든다.
이와 같이 차례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부처님의 덕은 심오하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부처님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전념하기 때문에 이 禪은 본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근접에만 이른다.
이처럼 이것은 부처님의 덕들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이라 부른다.
67. 이러한 부처님을 계속해서 닦는 비구는 천인사(Satthāra)를 존중하고 천인사에 순종한다.
믿음이 깊어지고 마음챙김이 깊어지고 통찰지가 깊어지고 공덕이 깊어진다.
희열과 기쁨을 커지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천인사와 함께 사는 것 같은 인식을 얻는다.
부처님의 공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항상 몸속에 지니고 있을 때 그의 몸도 타뵤처럼 예배를 받을 만하다.
그의 마음은 부처님의 경지로 향한다.
계를 범할 대상을 만날 때 마치 면전에서 천인사를 대하는 것처럼 양심과 수치심이 나타난다.
더 이상 통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어도 선처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항상 게을리 하지 말지니
이처럼 큰 위력(anubhāva)을 가진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이것이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