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장현종론 제14권
4. 변연기품(辯緣起品)③
4.3. 12연기(緣起)에 따른 윤회전생[3]
4) 3제(際)에 걸쳐 12연기를 설한 이유
어떠한 연유에서 3제(際)에 걸쳐 연기의 지분[支]을 건립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제와 후제와 중제에 걸친
다른 이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12지는 유정수(有情數)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으로, 3제(際)에 대한 그들의 어리석음[愚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44)
그들이 3제에 대해 어리석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나는 과거세에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何等]로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
나는 어떠한 방식[云何]으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45)
나는 미래세에 마땅히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로서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현재세에 있어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이러한 나는 어떻게(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누구(무엇)의 소유이며, 나는 당래 누구(무엇)를 소유할 것인가?”
바로 이와 같은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경에서는 오로지 유정의 연기를 설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3제의 연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무명과 행(전제), 생과 노사(후제), 그리고 ‘식’에서부터 ‘수’에 이르기까지(중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만약 어떤 필추(苾芻)가 온갖 연기(緣起)와 연이생(緣已生)의 법에 대해 참답고 올바른 지혜로써 능히 관찰하였다면, 그는 반드시 3제에 대해 어리석고 미혹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나는 과거세에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46)
그렇기 때문에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오로지 유정수에 근거하여 3제의 연기를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5) 3세 양중(兩重)의 인과관계
① 혹(惑)ㆍ업(業)ㆍ사(事)의 분별
비록 [유정수의 연기 중에] 12지(支)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세 가지와 두 가지를 자성으로 하니,
여기서 세 가지란 혹(惑,kleśa)ㆍ업(業,karma)ㆍ사(事,vastu)를 말하고,
두 가지란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그 뜻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는 번뇌이고, 두 가지는 업이며
일곱 가지는 사(事)이나 역시 결과로도 일컬어지는데
[전ㆍ후제에서] 결과를 생략하고 아울러 원인을 생략한 것은
중제에 의해 그 두 가지를 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전제(前際)의 원인인 무명(無明)과 후제의 원인이 되는 애(愛)와 취(取), 이와 같은 세 종류는 번뇌를 자성으로 한다.
전제의 원인인 행(行)과 후제의 원인이 되는 유(有), 이와 같은 두 종류는 업을 자성으로 한다.
그리고 전제의 식(識) 등의 5지(支)와 후제의 생ㆍ노사,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사(事)라고 이름하니, 혹과 업의 소의(所依)이기 때문이다.47)
나아가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또한 역시 결과로도 일컬어지며, 이에 준하여 볼 때 나머지 다섯 가지 역시 원인으로 일컬어지니, 번뇌와 업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중제(中際)에서는 널리 결과와 원인을 설하였으면서 후제에는 간략히 결과만을 [설하고], 전제에는 간략히 원인만을 [설한] 것인가?48)
중제는 알기 쉽기 때문에 널리 두 가지를 설한 것이지만, 전제와 후제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각기 생략하여 한 가지만을 설하였다.
즉 중제에 의해 전ㆍ후의 두 제의 [인과를] 추리하면 이미 널리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니, 설해 보았자 [번거롭기만 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49)
어떠한 까닭에서 [후제의 원인이 되는 번뇌로서] ‘애’와 ‘취’의 두 지분을 별도로 건립하게 된 것인가?
초찰나[初念]의 애[탐]를 ‘애’라는 말로 설하였기 때문으로, 바로 이것이 상속 증광하여 치성(熾盛)하게 된 것을 ‘취’라는 말로 설정하였으니, 상속하면 경계대상을 취하는 것이 더욱 강력[堅猛]하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경계대상에 대한 각기 초찰나의 ‘애’가 화합하여 다찰나[의 ‘애’(즉 ‘취’)]가 되기 때문에 오로지 두 찰나로 설하게 된 것이다.50)
어떠한 연유에서 현재는 온갖 번뇌가 존재하는 상태임에도 ‘애’ 한 가지로만 설하고,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은 것인가?
‘애’라고 할 경우, ‘애’의 미(味)와 과환(過患)을 알기 쉽지만, 그 밖의 다른 번뇌 중에서 이러한 상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애’는 바로 능히 후유를 초래하는 뛰어난 원인으로, 세존께서는 그것의 과환을 알게 하기 위해 [‘애’] 한 가지로만 설하였던 것이니,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대치의 도를 부지런히 추구하도록 하였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애’의 [초] 찰나와 [그것의] 상속(즉 ‘취’)이라는 두 상태의 차별로만 설하였을 뿐 그 밖의 다른 번뇌로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취’라고 하는 말에 온갖 번뇌가 모두 다 포섭되는 것이다.
② 혹ㆍ업ㆍ사의 상생(相生) 관계
만약 이러한 연기의 지분으로 오로지 열두 가지만이 존재한다면, 노사에 더 이상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대치도를 닦지 않고서도 생사에 끝이 있어야 할 것이며, 무명에 더 이상 원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다시 말해 무명이 바로 시초이기 때문에 생사에 시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무시무종이라 한다면)] 마땅히 그 밖의 다른 연기의 지분을 설정해야 할 것이며, 다른 연기의 지분에 다시 또 다른 연기의 지분을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무한소급[無窮]의 허물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부처님의 성교 또한 마땅히 훼손[缺減]되고 말 것이니, 응당 그와 같은 사실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힐난은 그렇지가 않으니, [세존께서] 설한 연기의 이치를 아직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에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惑)’으로부터 ‘혹’과 ‘업’이 생겨나고
‘업’으로부터 ‘사’(事)가 생겨나며
‘사’로부터 ‘사’와 ‘혹’이 생겨나니
존재 지분에 관한 이치는 오로지 이것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존재지분[有支]의 수(즉 12가지)가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며, 아울러 업(業)과 혹(惑)은 혹 어떤 경우에는 함께, 혹 어떤 경우에는 뒤에 생겨남을 나타내니, 이는 바로 혹이 혹을 낳을 때 업도 함께 생겨나거나 혹은 뒤에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존재의 지분을 모두 포섭하였으니, 앞에서 설한 힐난은 이미 잘 회통된 셈이다.
“혹(惑)으로부터 혹이 생겨난다”고 함은 ‘애’로부터 ‘취’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혹으로부터 업이 생겨난다’고 함은 ‘취’로부터 ‘유’가 생겨나고, ‘무명’으로부터 ‘행’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업(業)으로부터 사가 생겨난다”고 함은 ‘행’으로부터 ‘식’이 생겨나고, 아울러 ‘유’로부터 ‘생’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사(事)로부터 사가 생겨난다”고 함은 ‘식’의 지분으로부터 ‘명색’이 생겨나고, 내지는 ‘촉’으로부터 ‘수’의 지분이 생겨나며, 아울러 ‘생’으로부터 ‘노사’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로부터 혹이 생겨난다”고 함은 ‘수’로부터 ‘애’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지분을 설정하는 이치는 오로지 이 같은 사실에 따른 것으로, 노사(즉 事)는 ‘사’와 ‘혹’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이미 성취되었으니, 노사는 바로 현재의 4지(명색ㆍ6처ㆍ촉ㆍ수)와 같기 때문이며,
아울러 무명(즉 惑)이 ‘사’와 ‘혹’의 결과라는 사실도 성취되었으니, 무명은 바로 현재의 ‘애’ ‘취’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다시 또 다른 연기의 지분을 일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51)
그래서 경에서도
“이와 같이 순대고온(純大苦蘊)이 집기(集起)하였다”고 설하였던 것으로,
이는 바로 전후의 2제(際)는 서로를 발현(發顯)시킨다는 의미이다.52)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노사와 무명은 결과를 갖지 않고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유종(有終) 유시(有始)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는 결정코 인과를 포섭한다는 뜻이 두루 담겨있어 더 이상 [연기의] 지분을 설정하여 무한소급의 허물을 성취하는 일이 없으며, 부처님께서 두루 설하신 인과를 유실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성교를 훼손하는 과실도 없는 것이다.
6) 연기법과 연이생법(緣已生法)
세존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연기법(緣起法)과 연이생법(緣已生法)에 대해 설하리라”고 하였다.53)
이 두 가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여러 논사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 두 가지에 대해 해석하였는데, 『순정리론』 제28권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이것의 결정적인 뜻을 게송으로 말하면 [이와 같다].
[계경의] 뜻을 바로 설할 것 같으면, 이(12지) 중에서
원인으로서의 상태가 연기이고, 결과로서의 상태가 연이생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열두 가지의] 온갖 지분[支] 중에서 원인으로서의 상태[因分]를 설하여 ‘연기’라고 이름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을 연(緣)으로 하여 능히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繫屬)되는 중에 연기를 설하였기 때문이며,54)
이러한 연기의 뜻은 다만 ‘연’이라는 말로써 성립하였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무엇을 연기라고 한 것인가?
말하자면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아울러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테면 바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설한 다음 다시,
“이러한 [지분] 중의 법성(法性) 내지는 최후의 무전도성(無顚倒性)을 바로 연기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지분] 중의 법성’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되는 중에 원인으로서의 공능을 갖는 것을 모두 법성이라 이름하였다. 요컨대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인과가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되는 것이면서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곧 이와 같은 ‘성(性)’이라는 말은 ‘능히 낳는다[能生]’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로지 유위법의 존재[性]만이 이러한 법성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
비록 이 계경 중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되는 중에 원인으로서의 존재[因性]를 연기라 이름한다’고 바로 현시하지 않았을지라도 ‘……을 연(緣)하여’라는 말로써 연기의 뜻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원인으로서의 존재가 연기라는 명칭을 획득한 것임을 알아야 하니,
‘연’이라는 말은 다만 ‘능히 드러낸다[能顯]’는 뜻에서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원인은 능히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연’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아라한의 최후의 심ㆍ심소는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이니, 더 이상 드러내어야 할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뜻에 의해 연기라고 하는 말은 결정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繫屬)되는 중에 설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의 『승의공경(勝義空經)』중에서
“여기서 법가(法假)란, 이를테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음을 말한다”고 설하였으니,
승의(勝義)가 아니기 때문에 ‘가(假)’라는 말로 설정한 것으로, 이는 바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繫屬)된다는 뜻에 근거한 것이다.55)
[열두 가지의] 온갖 지분 중에서 결과로서의 상태[果分]를 설하여 ‘연이생’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은 다 연(緣)에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며, 결과란 바로 제법이 성취된 것[成辦]을 말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미 생겨난 법[已生法]은 이러한 뜻을 성취하였기 때문으로, 열반의 성취[成辦]도 이미 생겨난 것을 [증]득(證得)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이미 생겨났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결과(즉 이계과)라고 말하는 것이다.56)
혹은 다시 이를 연기의 갈래[門]로 설할 경우, 열반에 대해서는 그러한 논란이 허용되지 않으니,57)―만약 유위법으로서 결과의 뜻이 결정적인 것이라면 이는 바로 이것(즉 연기)에 의해 밝혀진다― 예컨대 사문과(沙門果)가 그러하다.
즉 과거ㆍ현재의 온갖 법으로서 결과의 뜻이 결정적인 것을 ‘연이생’이라고 말하지만, 법이 미래에 존재하여 결과의 뜻이 결정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간략히 말하면, 바로 법을 일으키는 존재[性]를 ‘연기’라고 이름하지만, 과거ㆍ현재의 제법은 ‘연이생’이라 이름하니, 결과의 뜻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인과 결과가 서로 계속(繫屬)되는 중에 원인으로서의 상태를 ‘연기’라고 이름하였다면, 결정적으로 결과가 되는 것을 ‘연이생’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여기서 원인을 ‘연기’라고 말한 것은 능히 연이 되어 온갖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여기서 결과[果法]를 ‘연이생’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ㆍ현재의 법은 연을 떠나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지분]은 두 가지 뜻(연기와 연이생)을 함께 성취하니, 모든 지분은 다 원인과 결과로서의 성질[因果性]을 갖기 때문이다.
비록 원인과 결과로서의 성질이 실체(實體,즉 법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뜻으로 설정하는 것이 상식에 벗어나지 않으니[非不極成], 보는 관점에 따라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58) 이는 비유컨대 원인과 결과, 아버지와 아들 등의 명칭(관계)과도 같다.59)
그런데 이러한 계경의 설에는 은밀한 뜻[密意]이 있지만,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은밀한 뜻을 설하는 일이 없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계경의 은밀한 뜻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생사에는 시작이 없으나 끝은 있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나타내어 이러한 두 가지 문구(즉 연기와 연이생)를 설하였던 것이다.
즉 연기를 말한 것은, 생사의 유전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때로부터 돌고 돌아 중단됨이 없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니, 그래서 순역(順逆)의 온갖 지분이 서로를 낳는다고 설한 것이다.
연이생을 말한 것은, 생사가 만약 대치(對治)를 획득할 경우 끝내 그것을 다하는 시기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니, 이를테면 만약 연(緣)이 있으면 후유는 다시 상속하여 일어날 것이지만, 그 같은 연을 결여할 경우 후유는 더 이상 상속 생겨나지 않는 것으로,
이에 따라 경에서는, “괴로움의 끝에 이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에서는 연기를 설하여,
‘이는 바로 가유[假, 즉 法假]이니, [다만] 인과의 상속(相屬)으로, 자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연이생을 설하여,
‘그것의 [법]체는 바로 실유[實]이니, 이는 바로 항아리의 소의(즉 진흙)와 마찬가지로 그것(연기)의 소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비달마에서는 두 가지 모두를 실유라고 설하니, 원인과 결과의 두 법체는 다 같이 실유이기 때문이다.
7) 무명(無明)에 대하여
① 무명의 명의(名義)
바야흐로 이러한 [연기에 대한] 논의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이제 다시 무명ㆍ명색ㆍ촉ㆍ수의 네 가지 지분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행ㆍ유와 애ㆍ취에 대해서는 「변업품(辯業品)」과 「변혹품(辯惑品)」(즉「변수면품」)에서 마땅히 널리 해석할 것이며, 식과 6처에 대해서는 「변본사품」에서 이미 널리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무명의 뜻과 그 상(相)은 어떠한가?
이는 바로 ‘명(明)이 존재하지 않는 것[明無]’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명이 아닌 것[非明]’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앞의 뜻을 취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비존재[無]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뒤의 뜻을 취한다면, 마땅히 안(眼) 등을 본질[體]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60)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종류의 해석은 이치상 모두 옳지 않으니, 다 같이 인정할 수 없기 때문으로, [무명 자체를 실유라 할지라도] 어떠한 허물도 없다.
두 가지의 경우를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별적인 실체[別物]로서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무명]이란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니
친구 아닌 이[非親]ㆍ비진실[非實]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친구에 대응하는 온갖 원적(怨敵)이나 친구와는 서로 반대되는 이를 ‘친구 아닌 이[非親友]’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한 이는 친구와는 다른 그 밖의 일체의 [유정] 중의 평등한 종류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친구의 비존재[無]라는 말도 아니다.61)
또한 진리의 말씀[諦語]을 ‘진실’이라고 이름할 때, 이것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거짓[虛誑]된 언론(言論)을 일컬어 ‘비진실’이라고 하니, 이는 진실과는 다른 그 밖의 일체의 색ㆍ향 등의 종류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역시 또한 진실의 비존재라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 이라고 말한 것은, 비백(非白)ㆍ비애(非愛)ㆍ비의(非義) 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아소낙(阿素洛,asura) 따위처럼 천(天) 등과 서로 반대되는 것을 ‘비천’ 등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천 등과는 다른 [모든] 것을 말하는 것도, 천 등의 비존재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62)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도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바로 명(明)에 대치되는 것으로서, ‘명’과 다른 [모든] 것도 아니며, ‘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명’의 비존재)도 아닌 것이다.
② 무명의 실유 논증
어떻게 그러함(무명이 개별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인가?63)
[계경에서] 식(識)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緣)에 따라 존재하며, 다른 것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진실된 논거[證,경증과 이증]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結) 등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악혜(惡慧)는 [무명이] 아니니, 견(見)이기 때문이며
[무명은] ‘견’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능히 혜를 더럽힌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무명을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누(漏)ㆍ액(軛)ㆍ폭류(瀑流) 등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4)
즉 그 밖의 다른 안(眼) 등이나 그 자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全無]은 ‘결’이나 ‘박’ 등의 사(事)로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법[有別法]을 설하여 무명이라 말한 것이다.6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악처자(惡妻子) 즉 아내가 사악할 경우 아내가 없는 것[無妻子]과 같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악혜(惡慧)도 마땅히 무명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명은 아니니, 그것은 바로 견(見)을 갖기 때문이다.
즉 온갖 염오혜를 일컬어 악혜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명이 아니다.66) ‘견’은 바로 추심(推尋, 推度 審慮의 준말)으로, 분명한 예지의 결단[猛叡決斷]이니, 그것(악혜)을 일컬어 우치(愚癡,즉 무명)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견’이 아닌 온갖 염오혜(이를테면 5식과 상응하지 않는 不共無明이나 탐ㆍ진ㆍ치와 상응하는 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명은 ‘견’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혜가 아니다].
무명이 만약 혜(즉 5견 이외의 악혜)라고 한다면, 마땅히 ‘견’과 상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두 가지의 혜 자체는 함께 상응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67)
그러나 ‘견’은 무명과 함께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니, 우치(愚癡)하지 않은 ‘견’은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치하지 않은 ‘견’이 전도되는 것은 무명과 상응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은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탐욕은 마음을 오염시켜 해탈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68)
즉 [무명이 만약 염오혜라고 한다면] 혜가 다시 혜 자체를 오염시킬 수는 없는 것으로, [마음과는] 다른 존재인 ‘탐’이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듯이 무명 역시 [혜와는] 다른 존재로서 혜를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역시 또한 ‘무명은 혜와 비록 상응하지 않을지라도 능히 오염시킬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예컨대 탐이 마음을 오염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과 함께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즉 심ㆍ심소법에는 등기염(等起染)이 없으며, 다만 [다른] 자성과의 상응염(相應染)만을 갖기 때문에 [어떤 법] 자체는 그 자체와 상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결정코 악혜가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거짓[假]되게 해명하여 말하기를,
“온갖 염오혜가 선혜(善慧)와 뒤섞여 청정하지 않게 하는 것을 설하여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함에도 어찌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였다.69)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옳지 않으니, 온갖 무루혜도 [그것과 뒤섞여 있으면] 마땅히 오염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염오함이 없는 혜[無染慧]가 염오함이 있는 혜[有染慧]와 뒤섞여 있을 경우, 마땅히 염오함이 있는 혜가 염오함이 없는 혜로 바뀌어야 할 것이니, 능히 대치하는 것[能治, 즉 염오함이 없는 무루혜]의 힘은 강력하지만, 대치되는 것[所治, 즉 염오함이 있는 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선혜가 바로 현행할 때 염오혜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온갖 염오혜가 바로 현행할 때 선혜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무엇이 능히 오염시킨다고 할 것이며, 또한 무엇을 오염시킨다고 말할 것인가?
만약 존재하는 것[有]과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 능히 서로를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필경 해탈을 획득하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훈습(熏習)을 멸할 때 바로 해탈한다’고 하는 경우, 훈습은 이치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마땅히 무엇을 멸해야 하는 것인가?70)
따라서 [계경에서]
“무명은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혜를 자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니, 여기에는 이치상 어떠한 경동(傾動)도 없는 것이다.
만약 실유의 개별적인 법[別法]을 설하여 무명이라 이름하였다면, 마땅히 이러한 개별적인 법의 자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알지 못하는 것[不了知]’이라는 실유의 법이 존재하니, 이것이 바로 무명이다.
그러니 어찌 번거롭게 달리 추구(推究)할 것인가?
[그렇다면] 마땅히 결정코 어떠한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야흐로 무명의 자성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오로지 박가범(薄伽梵)만이 일체법에 대해 올바로 알고, 올바로 설할 수 있다.
즉 [일체법의] 성(性) 혹은 상(相)이나 그 밖의 것은 오로지 [박가범만이] 모두 아는 것인데, 어찌 수고스럽게(쓸데없이) 따져 묻는 것인가?71)
그렇지만 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은 특성[相]을 관찰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혜의 공능을 손상시키니, 이는 바로 전도된 견[倒見]의 원인이다. 이는 관찰하려는 덕성[觀德]을 장애하는 과실로서, 알아야 할 법[所知法]으로 행전(行轉)하려 하지 않는(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며, 심ㆍ심소를 은폐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이것이 개별적인 법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인가?
탐욕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떠나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바로 해탈하게 된 것이며, 무명을 떠났기 때문에 혜가 해탈을 얻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72)
또한 이러한 무명은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니,73)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온갖 잡염(雜染)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명을 원인으로 하였기 때문에 온갖 잡염을 떠나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견(邪見)과 마찬가지로 인근(隣近)의 대치를 갖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온갖 사견이 끊어진 것은 정견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온갖 무명으로부터 떠나게 된 것은 명혜(明慧)가 일어났기 때문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이것을 한 가지 법[一法]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만약 어떤 필추가 있어 능히 한 가지의 법을 끊었다면, 나는 바로 그에게 ‘해야할 일을 이미 다 마쳤다’고 기별할 것이니,74) 이러한 [한 가지 법이란] 바로 무명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어두움[闇]과 마찬가지로 대치를 갖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바와 같다.
모든 유정이 능히 어리석음을 끊으면
더 이상 어리석은 것에 미혹되지 않으니
그가 어리석음과 미혹함을 전멸(轉滅)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떠올라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결정코 [명과는 다른] 별도의 법으로서, 무지(無知)를 본질로 하는 것이지 다만 ‘명’의 비존재가 아니다.
③ 염오무지와 불염오무지
그런데 이러한 무지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염오무지(染汚無知)와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무엇이 다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만약 능히 지혜[智]를 장애하는 것이면 이는 바로 염오무지이며, 불염오무지란 오로지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러한 두 종류의 무지의 차별상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해 보면 이러하다.
즉 이로 말미암아 어리석음[愚]과 지혜[智]의 차이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염오무지의 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로 말미암아 혹 어떤 경계에 대해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면, 이는 바로 두 번째 무지(즉 불염오무지)의 상이다.
또한 만약 이미 끊어졌다는 점에서 부처와 2승(乘,성문ㆍ연각)이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첫 번째 무지(염오무지)의 상이다.
그러나 만약 [염오무지는]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부처와 2승에 현행(行)하고 현행하지 않음[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두 번째 무지의 상이다.75)
또한 만약 어떤 사물[事]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면, 이를 일컬어 첫 번째 염오무지의 상이라 한다.
그러나 만약 제법의 맛[味]ㆍ세력[勢]ㆍ이숙[熟]ㆍ공덕[德]ㆍ수량(數量)ㆍ처소[處]ㆍ시간[時]ㆍ공통점[同]ㆍ차이점[異] 등의 상에 대해 능히 참답게 깨닫지 못한 것이면, 이는 바로 불염오무지인데, 이러한 불염오무지를 설하여 바로 습기(習氣)라고도 이름한다.
그런데 옛날의 논사[古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습기의 상(相)이라 함은 염오하지 않은 심소의 차별이다. 즉 그것은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법을 자주 익힐 때 인기되는 것으로, 일체지(一切智)가 상속 현행할 때에는 인기되지 않는데, 심ㆍ심소가 자재(自在)하게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바로 습기라고 이름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로지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아니니,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이 능히 원인이 된다고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은 종류(’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심과 심소를 총칭하여 습기의 불염오무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무지는 자성으로서 머무는[自性住] 마음 등을 본질[體]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음 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자성으로서 머무는 마음 등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도 역시 마땅히 불염오무지를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 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능히 차별 짓는 것[能差別]은 바로 무지라고 할 수 있기에 [그것이 마음 등에 의해] 차별되어지는 것[所差別]은 아닌 것이다.
지금 바로 보더라도 선ㆍ[불선] 등의 품류로 차별되는 심ㆍ심소 중에는 반드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그러한 차별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로 일체의 법이 [능히 차별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선한 품류 중에는 반드시 신(信) 등[의 심소]가 있고, 불선의 품류 중에는 무참(無慚) 등[의 심소]가 있으며,
염오한 품류 중에는 방일(放逸) 등[의 심소]가 있으니, 이와 같은 종류의 심ㆍ심소 중에 반드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존재하여 능히 차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역시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차별을 도모하니, 이것이 바로 불염오무지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그의 말을 살펴보건대 크나큰 과실이 있다.
즉 모든 이생(異生) 등의 심ㆍ심소법은 모두 맛ㆍ세력ㆍ이숙 등의 상을 참답게 깨닫지 못하였지만(다시 말해 불염오무지를 갖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그 밖의 다른 심소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찰나에 그러한 심ㆍ심소법은 차별되어 생겨나니, 마땅히 찰나찰나[念念] 중에 각기 다른 갖가지 무지의 법이 일어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에 다른 상[異相]이 있어 무지로 하여금 차별되게 하니, 이것으로 능히 마음의 품류를 차별 짓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반드시 불염오무지를 별도로 계탁(計度)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제법의] 맛ㆍ세력ㆍ이숙 등에 대해 부지런히 추구[勤求]하지 않는 해혜(解慧)와 다른 상의 법이 다 같이 원인이 되어 그 후 동류의 혜를 인기하여 낳으며,
이러한 혜는 해(解)에 대해 또한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음으로서 다시 원인이 되어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는 해혜를 인기하여 낳게 된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일어난 무시(無始) 이래 인과가 서로 거듭되어 익힌 것을 자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같은 맛 등의 경계에 대해 자주 익히더라도 해(解)에 대한 감능(堪能)의 지혜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인기된 저열한 지혜를 ‘불염오무지’라고 이름하며, 이것과 함께 생겨난 심ㆍ심소법을 총칭하여 ‘습기’라 한 것이니,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유정이 번뇌를 갖는 상태에서 소유한 염오함이 없는 마음[無染心]과 그 상속은 온갖 번뇌와 뒤섞여 훈습되며, 이로 말미암아 능히 번뇌에 따라 생겨난 기분(氣分, 기운)이 존재하기 때문에 염오함이 없는 온갖 마음과 권속(眷屬, 즉 隨行法)은 그것과 유사한 행상으로 차별되어 생겨난다.
즉 자주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서로 이어져 일어나기 때문에 허물을 떠난 소의신[離過身] 중에도 습기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는 영원히 끊어져 현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미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은 상태에서는 염오하고 염오하지 않은 마음과 통하는 상속 중에 그 밖의 다른 번뇌에 따라 생겨난 습성(習性)이 존재하는데, 이는 바로 ‘견소단의 번뇌의 기분(기운)’이다.
이 중에서 염오한 [마음의 상속에 존재하는] 것이면, 이를 유성(類性)이라 이름하는데, 금강도단(金剛道斷)에서 다 현행하지 않는다.76)
만약 염오하지 않은 [마음의 상속에 존재하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의 번뇌의 습기라고 이름하는데, 역시 그러한 금강도단에서는 근기의 차별(즉 성문ㆍ연각ㆍ불)에 따라 현행하는 경우도 있고 현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미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은 상태라면, 오로지 염오하지 않은 마음의 상속 중에 그 밖의 다른 번뇌에 따라 생겨난 습성(習性)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바로 ‘수소단의 번뇌의 기분(기운)’으로, 수소단의 번뇌의 습기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는 유루이기 때문에 무학은 이미 끊었지만, 근기의 승열(勝劣)에 따라 현행하는 경우도 있고 현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세존은 이미 법의 자재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번뇌와 같은 것은 필경 현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만을 유독 ‘선정(善淨)[의 마음]이 상속하는 분’이라 일컬은 것으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행(行)에 어떠한 오류나 과실이 없으며, 불공법(不共法)과 삼념주(三念住) 등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77)
또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밀의(密意)로서 ‘오로지 부처만이 홀로 무학과를 획득하였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