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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0권
11. 번뇌론[5]
11.16. 잡번뇌품(雜煩惱品)
[문] 경전 중에서 3가지 번뇌[漏]인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를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답] 욕심 세계 중에서 무명을 제외한 나머지 온갖 번뇌를 욕루라 하고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유루도 역시 그와 같으며, 세 가지 세계의 무명을 무명루라 한다.
[문] 모든 번뇌는 어떻게 자라나는가?
[답] 하요 중이요, 상의 법이기 때문에 더욱 자라난다.
또 물질 등의 수승한 인연을 얻기 때문에 모든 번뇌는 더욱 자라난다.
[문] 이 세 가지 번뇌를 어찌하여 일곱 가지 번뇌[七漏]라고 하는가?
[답] 사실상의 번뇌는 두 종류가 있다.
견도(見道)에서 끊는 것은 모든 번뇌의 근본이요,
수도(修道)에서 끊는 것은 모든 번뇌의 결과이다.
다섯 가지는 번뇌를 돕는 인연으로서 합하여 일곱 가지라 하는데 바로 이것이 번뇌이다.
부처님은 뜻에 따라서 3루(漏)라 하고, 4류(流)라 하고, 4박(縛)이라 하고 4취(取)라 하고, 4결(結)이라고 말씀하셨다.
[문] 4류란 욕류(欲流)와 유류(有流)와 견류(見流)와 무명류(無明流)라 하는데 그 내용은 무엇인가?
[답] 견(見)과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욕심 세계의 온갖 번뇌를 욕류라 하며,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유류도 역시 그와 같다.
모든 소견을 견류(見流)라 하고 무명을 무명류라 한다.
[문] 유(流)의 중에서는 어찌하여 따로 견류(見流)를 말하고서도, 루(漏)의 중에서는 말하지 않았는가?
[답] 외도는 대부분이 소견에 표류를 당한다. 그러므로 유의 중에서 따로 말한 것이며 물에 떠서 흘러가기 때문에 유(流)라 하고 세 가지 세계에 얽매기 때문에 박(縛)이라고 한다.
[문] 4취는 욕취(欲取)와 견취(見取)와 계취(戒取)와 아어취(我語取)이다. 그 무엇을 말하는가?
[답] 나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말에만 고집하므로 아어취라 한다.
만일 사람이 나라는 소견이 있으면 곧 두 가지 치우침이 생겨서 나는 항상하다 하기도 하고 수상하다 하기도 한다.
만일 “결정코 무상하다” 한다면 다섯 가지 욕락[次樂]만을 취하면서 내생이 없기 때문에 금생의 쾌락만을 집착하게 된다.
만일 “결정코 항상하다”고 하면
우둔한 근기는 계행을 고집하여 내생의 쾌락을 희망하고
근기가 조금 영리한 사람은 생각하기를
“만일 신(神)이라는 것이 항상하다면 고통과 쾌락도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죄와 복도 없으리라”고 하리니
그 때문에 삿된 소견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나라는 말만으로 인하여 4취가 생기게 된다.
[문] 4결이라 함은 탐심내는 몸의 맺음[貪嫉身結]과 진심내는 몸의 맺음[瞋恚身結]과 계취의 몸의 맺음[戒取身結]과 이것만이 진실하다고 탐착하는 몸의 맺음[貪著是實取身結]이다. 어느 것이 그것인가?
[답] 남의 것을 탐내다가 그 사람이 주지 아니하면 성을 일으켜 치고 때리게 되는데 이것은 세속 사람의 투쟁의 근본이어서 즐거움을 따르는 치우침이라고도 한다.
만일 사람이 계행을 지키고 이 계행을 닦아 청정을 얻으려하면서
“이것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것은 거짓말이다”고 하면
이 소견은 바로 출가한 사람의 다툼의 근본이어서 괴로움을 때로는 치우침이라고도 한다.
다섯 가지 쌓임을 몸이라 하는데 이 4결은 반드시 몸과 입을 필요로 하여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몸의 맺음이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4결은 나고 죽는 일을 얽어매기 때문에 맺음이라 한다”고 한다.
[문] 5개(蓋)는 탐냄과 성냄과 수면(睡眠)과 들뜨고 뉘우침[掉悔]과 의심[疑]이다. 무엇이 그러한다.
[답] 사람은 모든 욕심에 탐착하기 때문에 성냄이 따른다.
마치 경전에서
“애욕으로부터 성냄과 질투 등의 번뇌와 치고 때리는 등의 악업이 생기는데 모두 다 탐욕 때문에 생긴다”고 함과 같다.
이 사람의 몸과 마음은 탐냄과 성냄에게 무너져서 여러 가지 일에 지치면 잠을 자려하고
이 사람은 잠을 자서 잠깐 쉬었으면 탐냄과 성냄이 도로 생겨서 그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 선정을 얻지 못하게 하며,
바깥 반연에 따라 들뜨게 되고 깨끗하지 못한 법을 짓는 사람이라 마음은 항상 근심하고 뉘우치며, 산란한 마음과 후회하는 마음 때문에 마음은 항상 의심이 생겨서
해탈하는 법이 있지만 왕자(王子)가 아이라왈(阿夷羅曰) 사미(沙彌)에게 말하듯 하지 못한다.
[문] 무슨 이유로 개(蓋)라 하는가?
[답] 탐냄과 성냄은 계율 풍류를 가리고 들뜸과 뉘우침은 선정 품류를 가리고 수면은 지혜품류를 가린다.
어떤 사람은 이 개(蓋)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것은 착한 것이요, 이것은 착하지 않다”고 설명하면
그 사람은 그 안에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을 낸다.
이러한 의심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품류를 가리게 된다.
이 5개에서 세 가지 법은 힘이 강하기 때문에 따로 개라하고, 두 가지 개는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두 가지 법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또 이 두 가지 개는 생기는 인연이 한결같다. 그러므로 합하여 설명한다.
수면의 인연은 다섯 가지 법이니
단치리(單致利)와, 기뻐하지 아니함과, 찡그리고 기지개를 킴과, 음식을 조절하지 못함과, 마음이 꺾여 물러나는 일들이다.
들뜨고 뉘우치는 인연에는 네 가지 법이니,
고향 생각[親里覺]과, 국토 생각[國土覺]과, 죽지 않으려는 생각[不死覺]과, 과거에 놀고 즐기면서 말하고 웃던 것을 추억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내는 인연이라 한다.
약(藥) 또한 같기 때문에 수면은 지혜로 약을 삼고 들뜨고 뉘우침은 선정으로 약을 삼는다.
가리움도 같기 때문에 두 가지가 합하여 개가 된다.
이 다섯 가지 법은 혹은 개이기도 하고, 혹은 개가 아니기도 하는데,
욕심 세계 매임[繁]의 착하지 않은 것이 개라하고 그 밖의 것은 개라 하지 아니한다.
다섯 가지 하분결(下分結)의 탐냄과 성냄과 계취(戒取)는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에 하분(下分)이라 한다.
마치 소의 계[牛戒]를 지녀서 성취하면 소가 되고 성취하지 못하면 지옥에 들어감과 같다.
의심은 욕심 여윔을 장애하고 몸에 대한 소견[身見]은 바로 넷째의 근본으로서 이것이 다섯째가 된다고 한다.
또 탐냄과 성냄 때문에 욕심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견으로는 나라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취는 하등의 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의심은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 탐냄과 성냄 때문에 욕심 세계를 뛰어나지 못하며 막상 뛰어난다 할지라도 도로 끌려오게 된다.
그 나머지 세 가지로는 범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하분이라 한다.
다섯 가지 상분(上分)이라 함은
들뜸은 선정을 파괴하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게 사라지지 않는데 이 들뜸은 모양을 취함[取相]에 따르는 교만 때문에 생기게 된다.
이 모양을 취하는 마음은 무명으로부터 생기며, 그러므로 형상 세계의 염착[色染]과 무형 세계의 염착[無色染]이 있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배울 것 있는 이가 이것으로 상품의 행으로 삼기 때문에 상분이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번뇌는 배울 것 있는 것이 마음에서만이 말하는 것이요, 범부를 위해서는 아니다.
[문] 들뜸을 무엇 때문에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에서의 번뇌라고 하면서 욕심 세계에서는 말하지 아니한가?
[답] 저 세계 중에서는 거친 번뇌가 없기 때문에 들뜸이 환하게 알아진다.
또 이 들뜸은 선정을 무너뜨리는 데에 힘이 있기 때문에 번뇌라 한다. 이 상분을 끊으면 해탈을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은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 안에서 해탈했다는 생각을 내는지라 그것을 막기 위하여 상분의 번뇌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5간(慳)이라 함은
주처에 대한 간탐[住處慳]과 주택에 대한 간탐[家慳]과 보시에 대한 간탐[施慳]과 칭찬에 대한 간탐[稱讚慳]과 법에 대한 간탐[法慳]이다.
주처에 대한 간탐이라 함은 나 혼자만이 이곳에서 살고 다른 사람은 살지 못한다는 것이며,
주택에 대한 간탐이라 함은 나 혼자만이 이 집에 드나들고 다른 사람은 쓸데없다는 것이요,
설사 다른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 중에서 제일 우월하다”는 것이다.
보시에 대한 간탐이라 함은 나 혼자만이 이중에서 보시를 얻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말라는 것이요, 설혹 준다 하더라도 “나보다 더하지는 말라”는 것이며,
칭찬에 대한 간탐이라 함은 나 혼자에게만 칭찬하고 다른 사람은 칭찬하지 말라는 것이요,
설혹 다른 사람을 칭찬하더라도 나에게보다는 더하지 말라는 것이며,
법에 대한 간탐이라 함은 나 혼자만이 12부(部)의 경전 뜻을 안다는 것이요,
또 깊은 이치를 알면서도 감추고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문] 이 다섯 가지 간탐에는 어떠한 허물들이 있는가?
[답] 이 사는 처소 따위는 많은 사람의 공동 소유이며, 이 사람은 기왕에 자기 집을 버리고 공동의 소유 안에서 다시 감탄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라, 이것이야 말로 못된 번뇌이다.
또 이 사람은 해탈의 안에서 마침내 분수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공동 소유인 법에서 조차 오히려 버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어떻게 자기의 다섯 가지 쌓임을 버리겠는가?
또 이 사람은 아귀 등의 모든 나쁜 곳에 떨어져 가 난다.
또 이 사람은 이것이 마음을 덮었으므로 교만을 부리며 다른 착한 사람을 경멸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
또 남의 보시를 방해하기 때문에 설령 사람의 몸을 얻는다 할지라도 빈궁한 이가 된다.
또 간탐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사람의 공덕과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품을 단절시키기 때문에 무거운 죄를 얻는다.
만일 법을 아낌녀 장님 따위의 죄를 얻으리니, 이른바 나면서부터 장님이 되고 죄악 많은 곳에 가서 나서 자유를 얻지 못하며, 성태(聖胎)를 잃고 3세와 10방의 모든 부처님의 도둑이 되어 생사에 왕래하고 항상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어진 사람을 멀리한다. 어진 사람을 멀리하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함이 없다.
악은 세 가지의 악을 말한다. 악(惡)과 큰 악[大惡]과 악 중의 악[惡中惡]이다.
악이라 함은 살생과 도둑질 따위를 말하여
큰 악이라 함은 자기가 죽이거나 또한 남에게도 죽이게 하거나 자기가 인색하거나 또한 남에게 인색하게 하는 것들을 말하며,
악중의 악이라 함은 자기가 법을 아끼거나 또한 남에게도 법을 아끼게 하는 따위이니, 이 사람은 법을 아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에 떨어지게 하고 또한 불법의 도를 멸망하게 한다.
경전 중에서
“주처에 대한 간탐에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아직 오지 아니한 착한 비구를 오도록 하려 하지 아니하고, 이미 온 사람에게는 얼굴상을 찡그리고 좋아하지 아니하여 그를 보내버리려 하고 승단(僧團)에 보시한 물품을 감추고, 승단에 보시한 물품을 내것이라는 마음을 내는 일 들이다.
집에 대한 간탐에도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집을 탐착함으로써 속인과 함께 근심과 기쁨을 같이하고 속인이 복을 지으려는 것과 받는 자의 보시 얻음을 방해하며, 이 두 가지를 못하게 하기 때문에 바로 이 집에 와 나되 뒷간의 귀신이 되는 일이다.
보시에 대한 간탐에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항상 살림살이가 모자라고 두 사람의 이익을 파괴하며 어진 사람을 헐뜯고 마음에는 항상 근심과 괴로움을 품는다.
칭찬에 대한 간탐에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칭찬함을 들으면 마음이 항상 시끄럽고 흐려지며, 백 천의 세상에서 항상 깨끗한 마음이 없으며 어진 사람을 꾸짖고 헐뜯으며, 자기가 자기 몸을 뽐내며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고 항상 나쁜 이름을 얻는 일이다.
또 온갖 간탐에는 다 이러한 허물이 있으니,
많은 물품을 쌓아 모으고 여러 사람을 두려워하며, 많은 사람이 미워하므로 마음이 항상 시끄럽고 흐리며, 몸이 항상 외롭고 하천한 집에 태어나는 등의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일이 다섯 가지 간탐에서 오는 허물이다.
다섯 가지 마음의 울타리[心栽]라 함은
부처를 의심하고 법을 의심하고 계율을 의심하고 교화를 의심하고 어떤 비구가 부처님이나 여러 거룩한 분에게 칭찬을 받으면 이 사람을 나쁜 말로 헐뜯는 등의 이것을 다섯 가지라 한다.
부처를 의심한다 함은 생각하기를
“부처가 거룩한가 부란나 등이 거룩한가”라고 하는 것이며,
법을 의심한다 함은
“불법이 우월한가 폐타 등이 우월한가”라고 하는 것이며,
계율을 의심한다 함은
“부처님이 말씀한 계율이 우월한가 닭이나 개 따위의 계율이 우월한가”라고 하는 것이며,
교화하는 것을 의심한다 함은
“아나파나(阿那波那) 등의 교화하는 방법은 열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며,
나쁜 말로 헐뜯는다 함은 성내는 마음으로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어진 사람에게 덤벼들고 괴롭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 다섯 가지 법으로 자기의 마음을 망쳐버린지라 모든 선근을 심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울타리[心栽]라고 한다.
[문]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처님에게 의심을 내는가?
[답] 이 사람은 많이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심을 낸다. 만일 많이 들었다면 의심은 곧 엷어지리라.
또 이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부처님의 법과 다른 법을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의심을 낸다.
또 이 사람은 법에서 맛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심을 낸다.
또 폐타 등의 경을 듣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했으면서 남이 칭찬함만을 들었기 때문에 존귀하다는 마음을 낸다.
또 이 사람은 세상마다 삿된 의심이 치우치게 많았는지라 마음이 항상 흐리기 때문에 부처님을 의심하는 것이 마치 부처님의 시자인 소나찰다라(蘇那刹多羅)와 같다.
또 이 사람은 삿된 소견이 많은 사람과 함께 사업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의심을 내도록 된다.
또 이 사람은 위타화가라나(違陀和羅那) 등의 삿된 소견의 경서를 읽고 외웠기 때문에 바른 지혜를 무너뜨렸는지라 의심을 낸다.
또 이 사람은 모든 법의 이치에 기뻐하면서 삿된 생각을 내는지라 경을 지은 이의 의사를 얻을 수 없어서 이 때문에 의심을 낸다.
또 이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공덕을 얻을 수 없는지라 이 인연 때문에 부처님들에게 의심을 낸다.
다섯 가지 마음의 속박[縛]이라 함은 사람이 몸의 욕심을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몸을 탐착하고 다섯 가지 욕락을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욕락을 탐착하며,
또 재가한 사람과 출가한 사람이 어울려서 성인이 말씀한 이 치안에서 마음에 기뻐하지도 않고 조그마한 이익되는 일을 얻어도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다.
이 가운데의 네 가지 속박은 탐욕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사람이 안으로 몸의 욕심을 여의지 못하면 밖으로 물질 등의 욕심 안에서 탐착을 낸다. 그러므로 여러 시끄러움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인이 말씀한 이치의 적멸한 법을 보인 가운데서 마음이 기쁘거나 즐겁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계행을 가짐과 많이 들음과 선정을 닦는 등의 조금의 이익되는 일 중에서 스스로 만족하다고 여긴다. 이 조그마한 이익되는 일에 탐착하기 때문에 큰 이익을 잃는다.
지혜 있는 사람은 적은 일을 탐착함으로써 큰 이익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사람은 여덟 가지 어려움[八難]을 여의거나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 때문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을 더해야 한다.
또 범부의 법은 믿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 구족한 인연을 여의었다 할지라도 혹시 남은 인연이 있으면 마침내 성스러운 도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면 출가한 과보를 얻어서 죽을 때에도 후회가 없을 것이며,
또한 자기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게 하리라.
또 이 사람은 공덕 중에서조차 오히려 탐착하지 아니하거늘 더군다나 나쁜 법이겠는가? 그러므로 바른 행[正行]이라 한다.
또 범부로서의 허물되는 일에 더럽힘이 없으리라.
[문] 무엇을 범부의 허물이라 하는가?
[답] 경전 중에서
“범부는 스무 가지에 스스로 마음을 굴복 받아야 하리니,
생각하기를
‘나는 형용과 의복이 속인과 다를 뿐 텅 비어서 아무 얻은 것이 없구나.
나는 장차 착하지 못한 그대로 죽게 되겠구나. 장차 큰 공포의 바다에 떨어지게 되겠구나. 장차 무서운 곳으로 가게 되겠구나.
무서움이 없는 곳을 모르겠구나. 또한 도를 모르겠구나. 선정을 얻지 못하였구나.
자주자주 몸의 고통을 받는구나. 여덟 가지 어려움을 여의기 어렵구나. 원수와 도적이 늘 따르는구나. 모든 갈래[道]가 다 열렸구나.
아직 악도를 벗어나지 못하였구나. 항상 한량없는 소견에 구속당하는구나.
5역죄를 아직 막아 누를 능력이 없구나. 기나긴 생사가 아직도 끝이 없구나.
짓지 아니하면 죄도 복도 얻지 못하겠구나. 선과 악은 서로 대신할 수 없구나.
선한 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뒤에 안온할 수 없다. 지은 선과 악은 마침내 없어지지 아니한다. 나는 장차 조복하지 못한 채로 죽게 되겠구나’고 하라”고 하였다.
이 스무 가지 법은 더럽힐 수 없는 바다.
또 해야 할 것이면 이 사람은 이미 끝마쳤기 때문에 마음으로 뉘우칠 것이 없다.
만일 탐착하면 재가거나 출가의 법이거나 간에 다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작은 이익의 일곱 가지 번뇌[七使]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문] 모든 번뇌를 무엇 때문에 부림[使]이라고 하는가?
[답] 생사가 상속하는 가운데서 항상 중생에게 따르기 때문에 부림이라고 하는 것이니,
마치 유모가 항상 어린 아이에게 따르는 것과 같고
학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함과 같고
부채가 날로 늘어감과 같고
쥐에게 물린 독기를 제거하지 못함과 같고
달군 쇠의 검은 모양과 같고
씨앗에서 싹이 돋음과 같고,
스스로 종의 문서[奴券]가 따르는 것과 같고
일을 판단하는 데의 증인(證人)과 같고
지혜가 점점 쌓임과 같고
업이 항상 모아짐과 같고
불길이 항상 계속함과 같다.
이와 같이 차례로 상속하고 늘어가기 때문에 부림이라 한다.
[문] 이 부림은 마음과 서로 응하는가, 서로 응하지 않는가?
[답] 마음과 서로 응한다. 왜냐하면 먼저 말한 탐냄 따위의 부림의 모양은 이는 모든 불미의 모양이어서 기쁨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만일 기쁨이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아니한다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이 기쁨이 만일 즐거운 느낌 중에 있으면 탐냄의 부림[貪使]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 탐냄을 염착(染著)이라고도 하는데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한 것 안에는 염착이라는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부림은 마음과 서로 응하는 줄 알 것이다.
[문] 그렇지 않다. 모든 부림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
“어린아이는 음욕에 대한 마음조차 없거니 하물며 음욕을 행할 것인가? 그러나 역시 욕심의 불미에게 부림을 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생각[思]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아니하나, 역시 반연하는 의식이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경전 중에서
“몸에 대한 소견이 끊어지는 때에는 모든 부림도 함께 끊어진다”고 하였다.
또 성도(聖道)와 번뇌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가 생기면 마음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부림은 끊어진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도가 무엇을 끊을 것인가?
또 만일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부림이 없다면 범부와 배울 것 있는 이로서 만일 선한 마음과 무기(無記)의 마음에 있을 때에는 바로 아라한이어야 한다.
또 부림은 얽음[纏]의 원인이 되어 부림에서 얽음이 생기고 얽음을 얻으면 부림이 치솟는다. 그러므로 모든 부림은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줄 알겠다.
또 사람이 착한 마음과 무기의 마음에 있을 때에도 역시 부림이 있다[有使]고 한다. 만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부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부림이 있다고 하였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부림은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아니한 줄 알겠다.
[답] 그렇지 않다.
그대는 “어린애는 욕심은 없으면서도 또한 탐냄의 부림이 있다”고 하나 그 일이 옳지 않다.
어린애는 아직 탐냄을 제거하는 약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탐냄을 끊지 못하였으며 그러므로 탐냄의 부림에 부림을 받는 것이니,
마치 귀신 병에 걸린 사람이면 비록 병이 발작되지 아니할 때에도 역시 귀신 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함과 같다.
왜냐하면 그가 아직 주술이나 약초(藥草)를 구해서 병을 치료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나흘 걸이 학질[四日瘧]이 이틀 동안은 발작하지 아니할지라도 역시 학질 걸린 사람이라 함과 같으며
쥐에게 물린 독기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에 뇌성(雷聲)을 하면 발작함과 같다.
그와 같이 언제나 마음 가운데의 부림 없애는 약을 얻지 못한지라 끊어지지 않았다 한다.
그 밖의 물음에도 또한 통틀어서 대답하였다.
그대는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아니하여도 또한 반연하는 식(識)이 머무른다”고 하나, 역시 부림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몸에 대한 소견은 부림과 함께 끊어진다”고 하나,
그대는 “얽음[纏]이 마음과 서로 응하여 아직 생기지 아니하였을 때도 끊어진다”고 하나
부림도 또한 그와 같다.
비록 성도(聖道)를 닦을 때에는 없다손 치더라도 역시 “끊었다”고 하는 것인, 서로 반대되는 법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도(道)와 번뇌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나 역시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범부와 배울 것 있는 이로서 만일 착한 마음과 무기의 마음에 있을 때에는 바로 아라한이어야 한다”고 하나,
아라한은 이미 끊었지마는 이 사람은 아직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고기 끊는 법[斷肉法]을 받지 않았으면 고기를 먹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고기를 끊었다 하지 못함과 같다.
또 무명과 삿된 기억[邪念]과 삿된 생각[邪思惟]이 있기 때문에 아직 끊지 못한 번뇌가 생기는 것인데 아라한은 이런 일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그대는 “얽음을 얻으면 부림이 치솟는다”고 하나, 그 일이 옳지 못하다.
모든 번뇌는 하와 중과 상의 법으로 치솟는 것이요, 얽음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대는 사람이 착한 마음과 무기의 마음에 있을 때에도 부림이 있다고 하나 역시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림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들 때문에 탐냄 등의 모든 부림은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
여덟 가지 삿된 도[邪道]라 함은 삿된 소견으로부터 삿된 선정까지이다. 사실대로 모르는 뒤바뀐 소견 때문에 삿된 소견이요, 내지 삿된 선정이라 한다.
[문] 바른 생활[正命]과 삿된 생활[邪命]은 다 같이 몸과 입의 업을 여의지 않았거늘 무엇 때문에 구별하여 말하는가?
[답] 삿된 생활은 출가한 사람의 끊기 어려운 바라 이 때문에 구별하여 설명한다.
삿된 생활이라 함은 아첨과 속임 등의 다섯 가지 법으로써 이것을 얻기 때문에 삿된 생활이라 한다.
요약하여 말하건대 모든 출가한 사람으로서 하지 않아야 되는 생활 방법이니, 예를들면 나라의 공무에 종사하거나 장사하거나 병을 고쳐 주는 등의 직업으로 받지 않아야 할 중생의 금전이나 곡물들을 받으면 다 삿된 생활이라 한다.
또 비니(毘尼)에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써 생활하면 다 삿된 생활이라 한다.
경전 중에서
“우바새는 다섯 가지의 판매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함과 같다.
[문]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
[답] 법답게 구걸(求乞)하여 그것으로 살아갈 것이요, 삿된 생활은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착한 법을 무너뜨리고 도를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도를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되
“불법 안에 드는 것은 도를 수행하기 위해서요,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착한 법을 즐기는 사람은 깨끗한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또 비구는 비구의 법 안에 머물러야 하며 만일 삿된 생활을 하면 비구로서의 법이 아니다.
11.17. 구결품(九結品)
애욕[愛] 등은 아홉 가지의 맺음[結]이다.
[문] 무엇 때문에 모든 소견 중에서 별도로 두 가지 고집[取]을 말하는가?
[답] 계에 대한 고집[戒取]은 놓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떠다니던 나무쪽이 소용돌이 물 가운데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기 어려운 것처럼 이런 사람도 역시 그러하다.
생각하기를
“나는 이 계를 지녀서 장차 천상에 가서 나야 한다”고 하여
이 때문에 깊은 못에 던지거나 불에 뛰어들거나 스스로 높은 데서 떨어지는 등의 갖가지의 모든 고통을 받는다.
또 세간 사람은 계에 대한 고집 안에서 그 허물되는 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맺음[結]3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 계에 대한 고집에 의하여 여덟 가지 바르고 성스러운 도를 버린다.
또 이것은 바른 도도 아니요, 청정한 도도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을 따르는 치우침[隨苦邊]이라 한다.
또 계에 대한 고집은 출가한 사람의 속박이며 모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재가한 사람의 속박이다.
또 계에 고집한 그 사람은 아무리 여러 가지로 출가한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공연한 짓이라 얻어지는 것이 없다.
또 계에 고집한 사람은 금생에도 쾌락을 얻지 못하고 내생에는 큰 고통을 받는 것이니 마치 소의 계행을 가지다가 성취하면 소가 되고 실패하면 지옥에 떨어짐과 같다.
또 이 계에 대한 고집으로 인하여 바른 도와 바른 도를 수행한 이를 비방하게 된다.
또 계에 대한 고집은 바로 모든 외도들의 교만을 일으키는 고장이어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이 법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한다.
또 계에 대한 고집 때문에 96종의 차별되는 법이 있게 된다.
또 계애 대한 고집은 그것이 거치른 소견이기 때문에 많은 중생이 행하게 되고 지혜의 도는 미묘하여 알기 어려우므로 세간 사람은 이것을 행하여 이익 얻는 줄을 알지 못한다.
또 이 소견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이 법을 행한다.
또 이것을 중대한 나쁜 소견[重惡見]이라 하는데 바른 도를 거역하고 그른 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소견에 대한 고집[見取]이라 함은 삿된 법을 탐착하여 버리거나 여윌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소견에 대한 고집의 힘이며,
또 소견에 대한 집착의 힘 때문에 모든 맺음은 견고하여진다.
[문] 제석문경(帝釋問經) 중에서 무엇 때문에 “하늘 사람에게는 간탐[慳]과 시새움[嫉]과의 두 가지 맺음만 있다”고 말하였는가?
[답] 이 두 가지 번뇌는 가장 비루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중생의 배고픔과 목마름의 괴로움을 보고도 간탐하는 마음 때문에 불쌍히 여겨 구제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얻는 것을 보면 역시 질투하는 마음을 내어 뜨거운 번민을 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빈천하고 추루하며 위덕이 없는 곳에 떨어진다.
또 석제환인(釋提桓因)에게는 이 두 가지 번뇌가 치우치게 많아서 자주자주 마음을 괴롭히는지라 부처님은 그를 위하여 말씀하셨다.
또 이 두 가지 번뇌는 바로 중한 죄의 인연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맺음으로 인하여 중한 악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 세 가지 독[三毒] 중에서는 탐냄과 성냄이 중한 죄를 일으키는 것이며, 탐냄과 성냄이 치성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맺음은 남녀를 괴롭히고 또 여의어 버리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선한 마음을 깊이 닦으면 영구히 시새움을 끊을 것이요,
보시를 깊이 닦으면 그런 뒤에야 간탐하는 마음을 모두 끊게 되기 때문이다.
업과 과보를 보지 않으면서도 무거운 물건을 버릴 수 있으면 이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마치 사람은 자기 아들이 자기보다 나은 일을 하는 것을 보아도 마음이 오히려 기쁜 생각을 갖기 어렵거늘 더군다나 원수거나 도둑이겠는가?
이 두 가지 맺음은 미움과 사랑 때문에 깊어져서 끊어 없애기 어렵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이 유독 따로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