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수레 / 월리엄 카를로스 월리엄스
붉은 손수레 하나
그것은 많은 것의
중심에 있다.
빗물에 젖어
번쩍이고
그 곁에 오가는
흰 털의 닭들 (김우창 역)
(원문) The Red Wheelbarrow / William Carlos Williams
so much depends
upon
a red wheel
barrow
glazed with rain
water
beside the white
chickens
[단상] 월리엄 카를로스 월리엄스(1883~1963)는 미국 뉴저지주 러더퍼드 출생으로 영국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系)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평생을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에즈라 파운드 등과의 교유에서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아 초기의 시집 『신 포도 Sour Grape』(1921), 『봄과 모든 것 Spring and All』(1923)으로 신선한 즉물적 시풍을 확립하였다. 과장된 상징주의를 배제하고 평명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객관주의 시를 표방하였으며, 시집 『브뢰헬의 그림, 기타』(1962)로 196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5부작 「패터슨 Paterson」은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의 원작이기도 하다. 이 밖에 《자서전 Autobiography》(1951)과 장편소설 《흰 노새 White Mule》(1937) 및 평론이 있다.
사물시-즉물시, 또는 피지컬(physical)한 시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을 배제하고 사물 자체의 물리적인 생명력과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여 존재론적 깊이와 여백의 미를 부여한다. 인용시를 보면 농가의 풍경이나 농가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집약되어 있다. 빗물에 젖어 반짝이는 붉은 손수레의 외바퀴(a red wheel barrow)와 그 주변을 오가는 흰 닭들이 풍경의 전부다. 단출한 전경이지만 여기에 입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색(色)이다. 레드(red)와 화이트(white)가 그것.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빗물에 젖어 섬광처럼 번쩍이는 금속성(바퀴)의 푸른 빛이다. 이런 색의 대비와 함께 동정(動靜)에 따른 상관적 사유와 이미지에도 우리는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멈춰 선 손수레와 흐르는 빗물이 그것. 시의 형식적 완결성과 특이점은 차치하고라도, 가장 중요한 해석과 감상의 요체는 도입부(“붉은 손수레 하나/ 그것은 많은 것의/ 중심에 있다.”)에 제시된 명제적 느낌에 있다. 이는 “많은 것이 붉은 손수레에 의존해 있다”(“so much depends/ upon// a red wheel/ barrow”)는 것으로, 붉은 색이 주는 강렬하고 생생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barrow’라는 말에는 수레 말고 ‘무덤-고분’의 의미가 있다. 이에 반해 물(water)과 알을 낳는 닭들(chickens, hens)에는 생명(성)이 있다. 모든 것의 중심으로서 손수레, 아니 시의 본질은 이처럼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멜란지(melange)로서 혼(混)에 있다. 그 중첩과 얽힘, 연결로서 새로움이거나 차원 상승에 있다.
사물과 색상, 가시와 비가시의 모든 것은 지금 손수레에 바퀴에 모여 있다.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 있는 수레, 낡고 초라하고 녹슨 수레의 외바퀴에는 고통의 시간, 삶의 우울과 광채가 서려 있다. 온갖 남루하고 버려진 것들이 걸쳐 있는 손수레는 다른 사물들의 쉼터와 위로의 장소로 거듭나 있다. 그것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그것들과 함께 고독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이 시간. 수레바퀴는 참 많은 바퀴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비어 있다. 그 비어있음의 충만은 사물-수레의 고유한 인격이다. 생명이다. 법륜(法輪), 즉 진리의 수레바퀴는 어떤가? 바퀴가 닿은 곳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슬픔과 괴로움과 번민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세상사의 모든 길은 수레로 바퀴로 이어져 손수레는 하나의 소우주다. 바퀴처럼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을 통해 회전한다. 슬픔이 고인 빗물이 햇살 아래 모래알처럼 반짝인다. 이 어둠의 빛은 이미지를 새로운 시의 형태로 변형시킨다. 바큇살에 빛나는 빗줄기는 모든 것에 더 새롭고 신선한 모습을 제공한다. 이 새로운 이미지의 발견과 비전은 윌리엄스가 한 편의 시에서 목표하는 바다. 수레 곁을 흰 닭들이 오고 간다. 무심(無心)이다. 왕래(往來)가 생의 전부라면, 무심과 무기(無記)는 얼마나 큰 선물인가, 은총인가!
바퀴의 공(空)이나 흰(닭)의 무(無)는 이 시의 중심 모티프로서 사물들의 사이와 연관(성)을 의미한다. 마다가스카르의 벌새가 미시시피 강의 홍수에 영향을 주듯. 모든 것은 하나의 중심으로 이어지고 바큇살처럼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손수레’와 ‘물’과 ‘닭’이 하나의 바퀴처럼 돌고 돈다는 것은 셋이 하나로 하나가 셋으로서의 삼일(三一)이다. 천부(天符)의 시는 이 삼일의 마음과 혼을 근간으로 한다. 다음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는, 윌리엄스의 또다른 시편이다.
꽃잎 가장자리에서 하나의 선이 시작된다/ 하염없이 가늘고 하염없이/ 단단한 그 강철의 존재가/ 은하수를/ 뚫고 들어간다/ 접촉도 없이-거기에서/ 올라간다-매달리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 멍 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그 장미」 부분
첫댓글 "붉은 손수레 / 월리엄 카를로스 월리엄스" 잘 읽었습니다. 새로움의 발견, 탁월한 글 입니다.
사물시-즉물시, 또는 피지컬(physical)한 시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을 배제하고 사물 자체의 물리적인 생명력과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여 존재론적 깊이와 여백의 미를 부여한다. ㅡ 시를 읽으니 즉발적이군요 ㅡ압축된 현재 ㅡ 그 시공의 사이를 오래 사유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법, 혹은 전혀 다른 시각적 끌어내기의 시적 감성이나 방향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단순과 정제의 묘법이 많은 차이를 낳았다는 점까지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