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9~1213(1212) 신왕국 19왕조 3번째 왕이다.
람세스 2세는 자기 아버지 곁에서 부관과 지명후계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왕이 되기 위한 고도의 훈련을 쌓게 했으며, 그가 왕의 특권 과 명예를 누리도록 했다.
람세스 2세는 청년기가 시작되자 아버지가 하렘에서 간택해준 두 명의 왕후를 받 아 들였다.
그들이 바로 이시노프레와 왕의 사랑을 받았던 우아한 네파르타리로 서, 그녀들이 낳은 자녀들은 정통 후계자가 되었다.
테베의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 "위대한 왕비. 두 땅의 여주인" 네파르타리-메렌무 트는 람세스 2세 옆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9왕조의 네페르타리 왕비
(람세스 2세의 부인)
람세스 2세는 우아한 네파르타리의 모습을 묘사하게하는데 싫증을 느끼지 않았 다.
그녀의 섬세한 모습은 그가 세운 온갖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네파르타리는 50대에 죽었는데, 람세스 2세는 그녀에게 왕비의 무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무덤 을 주었다.
그는 히타이트족의 공주 두 명과도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네 명의 딸들과도 결혼했다.
그 중 하나는 이시노프레의 딸로서, 벤 타나트라는 아시아풍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자녀(대장에 기재된 50명이하의 아들과 50 정도의 딸)를 작위를 받은 부유한 관리로 임명했다.
많은수의 왕자는 람세스 2세의 추정 상속자가 되었으나 , 그들은 대개가 람세스 2세가 세상을 뜨기 전에 먼저 죽었다.
열세 번째 아들 메렌프타가 람세스 2세가 죽고 왕위를 계승했고, 람세스 2세의 아 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들은 "왕자 고고학자" 라고 불리는 이시노프레가 낳은 케 무아세이다.
케무아세는 멤피스에 거주하면서 프타 신의 대사제로서 람세스 2세의 특별한 경 애와 보살핌을 받았다.
어린 람세스 2세와 호루스 신
(시기 : 신왕국시대 제19왕조, 높이 : 231cm, 폭 : 64.5cm)
어린아이로 표현된 람세스 2세를 호루스 신이
보호하는 모습의 이상은 람세스 2세 시대에
왕의 모습을 표현하는
새로 운 양식이었다.
람세스의 통치
람세스는 끊임없이 왕국의 전반적인 복지를 염려했다고 한다.
나라의 복지는 무엇 보다도 신들을 만족시킴으로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신을 씻기고, 기름칠을 하고, 옷을 입히고, 치장하고, 먹이고, 물을 주는 매일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신 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신들에게 바쳤던 음식은 사제들에게 분배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모든 지방(42개의 "노모스"-지방)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여러 축제 때 신에게 경배드리기 위해 소와 양, 거위를 잡았으며, 수확한 열매 도 바쳤다.
이리한 양식들은 모두 의식이 끝난 뒤 군중에게 분배되었다.
이들은 그밖에도 정기적으로 월급과 식량 배급을 받았다.
피라미드시대 이후 파 라오와 국민들은 암묵적인 계약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왕은 신들에게 작용함으로써 국민에게 안전과 생계를 보장하여 주고 국민은 군주에게 복종과 존 경과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국가가 번영을 누릴 때에는 왕은 신전과 행정부 및 사법부뿐 아니라, 가장 낮은 계 층의 국민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래서 군인의 월급이 오르고, 장인의 보수가 많아졌다.
이러한 관대함은 노동에 대한 열의를 촉진했다.
왕위에 오른 뒤 람세스 2세가 처음 시작한 공식 행동은 카르낙의 아몬이 성스러운 나룻배를 타고 룩소르 신전을 방문하는 행사인 종교 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남쪽 에 있는 수도 테베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세티 1세가 진행하다 중단된 대신전 건설 사업도 재개했다.
람세스 2세는 방대한 건설 사업을 지시했다.
국민들에게 위대한 왕으로 보이고 싶 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저기에 아몬을 위한 신전을 세웠고, 성벽을 쌓아 국경 수비를 굳건히 했다.
즉위한지 4년째 되는 해, 그는 잃어 버린 이집트 땅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갔다. 첫 번째 원정은 시리아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지방 군주 들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는 베이루트 근처 알칼브 강에서 멈췄으며, 비석 을 세우고 이 전쟁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비문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지워지고 지금은 람세스 2세의 이름과 날짜만 남아 있다.
카데시 전투
람세스 재위 5년 여름 둘째 달의 아흐렛날 본격적인 원정이 시작됐다.
목표는 카데시에 자리잡고 있는 히타이트족 이었다. 오론테스 강 유역에 있는 요새 카데시는 히타이트족의 중심지였다.
람세스 2세의 주력 부대는 각각 5000여 명의 전차 부대와 보병 부대로 이루어진 아 몬, 라, 프타, 세트라는 이름을 지닌 4개 사단으로 되어 있었다.
왕은 "전나무 계곡" 에 있는 식민지인 람세스-메리아몬에 도착하여, 해안길이나 베카평야를 통해 카데 시로 갔다. 카데시에 있는 산악지대에 멈추었다가 북쪽, 샤브투나라는 도시쪽으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강의 여울목에 통로가 있었다.
두명의 베두인족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당시까지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들 부족이 파라오에게 충성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 가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알레포 부근에 있다는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당연히 그들은 이집트군의 위치를 조정하고 람세스가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와탈리가 보낸 첩자였다.
함정에 빠진 파라오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북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아몬 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라 사단은 샤브투나의 여울목을 건너고 있었고, 프타 사단과 세트 사단은 그 보다 더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사로잡힌 두 명의 히타이트 포로가 태형을 받고 히타이트 군대가 아주 가까운 요새 뒤에 숨어 있으며, 금방 처들어 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시실을 자백했다.
프타사단에게 이 급보를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 다. 진을 치는데 몰두해 있던 아몬 사단은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한 소대의 히타이트 군마들이 나타나 샤브투나의 여울목에 있던 라 사단을 공 격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람세스는 갑옷을 입고 자신의 애마들이 이끄는 마차를 올라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마치 몬투처럼 싸워 적의간담을 써늘하게 했다.
아무르에 머물러 있던 이집트 분견대, 네아린족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 침착을 되찾은 이집트 부대의 도움을 받아 파라오를 도와 싸웠 던 듯하다. 어쨌든 그곳에 있었던 람세스의 자녀들이 비교적 안전했던 점으로 보아 이집트 진영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다음날 아침, 고생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집트 군대는 다시 싸울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은 람세스에게 화친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제안을 받은 참모부는 파라오에게 그 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 결과 군대는 방해를 받지 않고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람세스가 등을 돌 리자마자 무와탈리는 벤테시나를 폐위시키고 아무루의 통제권을 다시 빼앗는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은 주변의 나라와 도시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15년간을 더 싸우며, 대립했다.
그들의 영향권하에 있는 나라와 도시들은 무력에 의한 강요를 이기지 못하거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종주국을 바꾸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주로 아무루와 우피의 종주권을 놓고 전쟁을 치렀다. 람세스 8년과 9년에 람세스의 군대는 다푸르까지 전진하여 투니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제국은 다른 전선에서도 이민족과 싸워야만 했다. 아시리아가 히타이트를 위협하고 있었던 반면, 이집트는 서쪽에서 리비아에 대항해 왕국을 지켜야 했다. 게다가 큰 위기가 하티를 약화시켰다. 무와탈리가 죽고 나서 두 명의 후보가 왕위를 놓고 싸웠다. 무르실 3세라는 칭호로 통치한, 우르히-테슈브로 불렸던 무와탈리의 서자와, 그의 숙부이며 합법적인 후계자였던 하투실 3세가 그들이다. 결국 하투실 3세가 승리를 거둔다. 우
르히-테슈브는 변방으로 유배되어 람세스 치 하18년에 이집트로 망명했다. 하투실 3세는 조카를 추방할 것을 요구했으나 람세스는 이를 거절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았지만, 하투실 3세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막강하게 커지 는데 압박감을 느껴 람세스와 평화협상을 한다.
히타이트 국제조약
평화협상 끝에 람세스 2세와 하투실 3세는 람세스 치하21년에 은탁자위에 국제 공 식언어인 아카드어로 쓰여진 조약에 서명한다.
점토판 위의 복사본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에 보관되었으며, 파피루스에 이집트어로 번역한 것도 피람세스의 고문 서실에 보관되었다.
또 카르낙 벽의 거대한 비문에도 새겨졌다.
두 강대국은 양국 간에 전쟁을 영구히 중지하며 상호 양보하는데 동의했다.
즉, 이집트는 아무르를 포기하는 대신에 우피 지방을 보존하며, 페니키아항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하여 파 라오의 밀사가 우가리트까지 난 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이 조약은 현대적인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평화에 대한 약속과 형제애, 불가침 과, 상호협력 협정, 두 나라의 왕권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 조약이 있은 후로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수십년 간 평온한 행복을 누렸다.
전쟁이 끝난 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의 맏딸과 결혼을 한다. 나중에 그는 히타이트의 둘째 공주와도 결혼을 했다.
람세스 2세는 대신전을 완공했을 뿐 아니라 라메세움이라고 알려진 자신의 장례 신 전도 만들었다.
또, 아비도스에 있는 세티 1세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신전을 지었으며, 수도인 테베에는 큰 신전 네 개와 작은 신전 여러개를 세웠다. 람세스 2세는 누비아에도 최소한 여섯 개의 신전을 지었다. 그는 누비아 신전 벽에 공식 기록과 시의 형태로 카데시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그림 을 그려 넣었는데, 그 시는 파피루스에도 남아있다. 람세스 2세는 그 어떤 파라오보다 신전을 많이 건설했으며, 그 중에 아부심벨 신전 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람세스의 마지막
기원전1213년 경 최후의 희년을 맞기 하루전날 밤에 람세스 2세는 67년간의 통치 를 마감하고, 파람세스에서 사망한다.
그곳에서 그의 시체는 70일 동안 방부처리를 받았다.
장례 행렬은 성대한 예식 속에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테베에 도착하여, 람세스 는 영원한 거처에 안치되었다.
왕국의 모든 영역에서 람세스 2세 시대는 파라오의 역사에 최후의 절정을 이룩한 빛나는 시기였다.
이집트 제국의 힘, 그리고 정치, 종교, 문화적 명성, 왕중의 왕이 며,신이기도 한 람세스 2세의 영광, 행정의 효율성, 신전과 그 주위의 화려함, 웅장 하고 화려한 수많은 기념물, 보편적인 평화와 번영 등 이 모든 것을 그 후의 파라오 에서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람세스 2세의 열세 번째 아들이며, 그의 후계자였던 메란프타는 람세스 2세 사후 몇 년 동안은 연속성을 유지했으나, 그후 냉혹한 멸망을 맞았다.
왕권다툼으로 제 19왕조는 멸망하고 왕국은 위엄 있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외침 의 위협 속에 생활 수준은 급격히 저하되고, 내부적으로는 부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