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 09
이 시간에는 주로 참선(參禪)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중략>
참선 공부는
우리가 가령 수영을 한다 할 때는
물에 들어가서 실지로 헤엄을 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참선공부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가 닦아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실참실수(實參實修)라,
정말로 우리 몸으로 부딪혀서 참선을 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대강 이치로 체계가 서야 흐트러짐이 없고
또 능률도 빠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덮어놓고 공부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 모두가 다
어느 분야에서나 세밀하게 밝혀 놓은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들을 충분히 참구해서
우리의 부질없는 분별시비(分別是非)는
끊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많이 해 보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지만,
사실 맨 처음부터서 쑥쑥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불교 전문 술어로 하면 도거(棹擧)와 혼침(昏沈)입니다.
도거(Auddhatya)란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이고,
혼침(Styand)이란
앉으면 꾸벅꾸벅 졸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졸아버리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똑같아서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그야말로 참 맑고 청정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만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참선을 좀 했다 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는 분별시비가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생활을 할 때는 안 나오다가도
정작 참선이라 해서 들어앉으며,
과거에 섭섭했던 일, 미워한 일, 좋은 일들이
자꾸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머리나 몸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습인(習忍)이라,
익힐 습자, 참을 인자, 오랫동안 공부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몸에 배여 습관성이 생깁니다.
처음에 참선공부 할 때 좀 안 된다 해서
그냥 놓지를 말으십시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란 것은 무한공덕(無限功德)이라,
무한공덕이 들어있는 생명체(生命體)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향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근기(根機)나 선근에 따라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만
보통 차원에서는 이른바 경안심(輕安心)이라,
경안(輕安)이라는 것도 불교전문 술어인데
여러분들께서는 외워 두십시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는 다른 헛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경안이 서야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내 몸을 어느 정도 조복(調伏)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으로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겠습니다마는
한 십 년쯤 선방에서 고생고생해야
경안이 좀 나오는 것 같아요.
좀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으나,
몇 십 년 된 사람도
역시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은
참선에 들어가면 몇 십분도 못 되어 끄뻑 끄뻑 좁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경안이 못 나온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스님네들은 경험들도 많고 해서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처음으로 참선을 배우는 일반 재가 불자님들은,
참선공부, 이것은 불도의 정문(頂門)이라,
부처님 가르침의 이것이 정문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다른 가르침은 방편설도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는 법문도 많지만은
참선 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마음 떠나서 부처를 구하면 이것은 사도(邪道)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직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직설법문이기 때문에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를 하던지 간에
종당에는 우리가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자라면 다 해야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선을 해야 됩니다.
가사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깥에다 설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바로 내 마음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신불(法身佛) 차원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하면
참선이라고 봐야지요.
참선을 불교인만 닦는 전유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의 우수한 점이라던가 발전적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또 수용해야 합니다.
저 쪽 기독교 인구도 지금 17 – 8억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대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일승법문(一乘法門)으로 인도해 가면서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또 그네들이 나가는 공부도 역시 참선공부로 유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본뜻도 하나님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 지어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요,’ 하는 대목들을
우리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볼 때는
부처님 경전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고,
특히 법화경(法華經)과 유사한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이든 간에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특히 참선공부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열어서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 아님이 없다,
앞서 시간에 배운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잠시간 인연(因緣) 따라서 모양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항시 의심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하나일망정,
현상만 볼 때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고
나와 네가 분명 다르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지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현상만 보니까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
본 성품자리, 본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혼연일체(渾然一體)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은
물질로 생각하니까 다르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의 현상이요,
마음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현상적으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달리 했을 뿐
진여불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만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크고 작고하더라도
작은 파도나 큰 파도나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어떻게 상황이 바꿔지던 간에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너나 나나 모두가 같은 몸이요,
같은 몸이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거기에서 참다운 자비(慈悲)가 나오고
참다운 도덕심(道德心)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강사가 아닙니다.
어찌 됐던 참선하는 선사이기 때문에 강의는 잘 못합니다마는
그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고 이해하시리가 믿습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대목들만 딱딱하게 일러주고
본인들이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참선하는 사람들의 방법인데,
여기는 미국인지라
또 미국의 풍토는 다르지 않습니까.
더러 타이르고 밝히고 해서 납득을 시켜야 하는 자리이므로,
특히 재가불자님들은 그런 것을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참선한다고 해서 제 방식으로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 선(禪)이란 것은
특히 문자를 되도록 절감을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편의상 말을 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하여 될 수록 읽어가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4. 선(禪)
선(禪 : Dharma, Zen) 정(定 : Samadhi)
선(禪)은 관(觀)을 위주(爲主)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爲主)하나
합(合)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선정(禪定)이라 함.
사유수(思惟修), 기악(棄惡), 정려(靜慮), 공덕총림(功德叢林), 심일경성(心一境性),
현법락주(現法樂住) 등의 이름이 있음.
또한 선종(禪宗)의 선(禪)은 명(名)은 사유정려(思惟靜慮)의 뜻을 취하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으로서 바로 불심(佛心)을 의미함.
선(禪) 이것은 이른바 Zena,
우리 한국선은 세계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선은 많이 알려져서 그 사람들이 Zen,
그러니까 서구 쪽에서도 선을 Zen이라고들 발음합니다.
그리고 선(禪)과 정(定)을 구분을 하는 분도 있고
구분 않고 합해서 선정(禪定)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禪)은 관(觀)을 위주로 하고,
관(觀) 이것은 관찰(觀察)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定 : samadhi)은 이른바 삼매(三昧)에 든다고 하지요.
삼매(三昧)란,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삼매입니다.
독서도 역시 독서만 열심히 하면 독서삼매라 하는 것이고,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을 삼매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의 정(定)은,
그냥 나쁜 생각으로도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있는 것인데,
나쁜 생각이 아니라 정념(正念)으로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이른바 사마디(samadhi)란 말입니다.
정념(正念)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의 본래성품(本來性稟)자리,
본래 성품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닙니까.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오로지 우리 마음을 머무르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사마디(samadhi)라고 합니다.
선(禪)은 그 자리를 주로 관찰(觀察)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조(觀照)를 한다는 말입니다.
가사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은 우주법신(宇宙法身)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禪)은 관찰을 위주로 하고
정(定)은 지(止)를 위주로 하나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 통칭도 합니다.
합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妙體)를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정혜균등이란 말을 참선 배우는 사람들은 꼭 외워 두셔야 됩니다.
정(定)은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정이라고 하고,
즉 고요한 것을 정이라 하고,
또 혜(慧) 이것은 참다운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그런 지혜(智慧)를 혜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지혜는 보통 지식적으로 아는 지혜가 아니라
참다운 반야(般若)의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여기 있는 정혜(定慧)의 혜에 해당합니다.
정(定)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념(正念)이라,
정념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이 정(定)이란 말입니다.
정혜균등(定慧均等)이란,
정과 혜가 평등하게 나가는 것이고,
고요한 것은 정이고 혜는 비춰보는 것인데
무얼 비춰보는고 하면은 실상(實相)을,
우리 불성(佛性)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지런히 되어야 참선의 진도가 빨라집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본래면목, 우리 불심(佛心) 자체는
원래 정⋅혜가 같이 구족해 있는 것입니다.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 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적으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게끔
정과 혜가 가지런히 균등하게 나가야
이른바 개안(開眼)이 빠르단 말입니다.
정에만 치우치고 혜에만 치우치더라도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부 진도가 더딘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중도(中道)를 추앙합니다.
중도란 것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자리를
제대로 참구하는 것이 중도란 말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이 바로 중도인 것이고,
우리 본래면목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공도 있고 유도 있고 다 갖춰있겠지요.
그래서 참선할 때는
꼭 고요하니 우리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정(定)과
또는 우리 불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혜(慧)와 같이 아울러 나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만 많이 하고
혜 쪽으로만 치우쳐서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六組檀經)의 부촉품(咐囑品)에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을 제가 드렸지요.
일상삼매 이것은 혜에 해당합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인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이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그리고 일행삼매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일행삼매이고 정(定)에 해당합니다.
좀 어려운 법문이나
기본적으로 알아 두시면 공부하실 때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 정, 혜
또는 간단히 천태식으로 말하면 지관(止觀)이라,
그칠 지(止)자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우리 불심(佛心)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지혜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공부도 거기에 맞게 해야
우리 번뇌의 습관성을 빨리 녹이고서
참다운 진여불성을 견성(見性)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선정을 사유수(思惟修)라,
사유수란 것은 정사유(正思惟)라,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바르게 생각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유란 것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뚜렷이 생각해야
그것이 정사유(正思惟)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이라,
버릴 기(棄), 모질 악(惡), 악을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공덕(禪功德)입니다.
사유수라는 것은
바른 생각을 관조함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악심이나 나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정려(靜慮)라,
고요할 정, 생각할 려. 고요히 조금도 삿된 생각 없이
바르게 참다운 진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선정의 뜻풀이입니다.
공덕총림은 무엇인고 하면,
공덕, 이것은 자기나 남이나 누구나 간에
유익되게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총림 이것은 그야말로 수풀모양으로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무한공덕(無限功德)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공덕이 거기에서 우러나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하나의 참선공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아까 기악, 악을 없애는 것도
참선을 하면 차근차근 사람이 선량(善良)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 가니까...
마땅히 진여불성자리는 만능의 자리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겠지요.
자타(自他)라는 구분도 역시 참선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자기 모서리가 끊어져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래가 무아이기 때문에.
공덕총림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마음이 하나로 묶인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나오지만은
마음이 정화가 되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영원적인 그 맑은 생각,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생각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부처님 경계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이것 역시 참선공덕입니다.
우리가 지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의 재미있는 것은 속락(俗樂)이라,
세속적인 오욕(五慾) 같은 것은 재미는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안락인 것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안락이 아닙니다. 법락
이것은 공부를 해서
원래 우리 불성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을 얻으므로
참다운 안락이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신통자재(神通自在)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법락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지요.
현법락주라, 법락이 나온다는 말이고
아까 얘기한 경안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환희심(歡喜心)에 차서 닦아 나가는 것이 경안인데,
그것 역시 법락입니다.
그것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법락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법락이 나타나는 것이 현법락주(現法樂住)인데
참선이라는 뜻에서 이런 등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종(禪宗)의 선(禪)은
고요히 생각도 하고 사유(思惟) 정려(靜慮)하는 뜻을 취하고 있으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열반묘심은 불심(佛心)입니다.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근본자리,
본래면목 자리인 불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선정이라고 할 때는
관찰도 하고 그러겠지만
선종(禪宗)에서 선이라 할 때는 훌쩍 뛰어 넘어
이것저것을 다 초월한 하나의 불심을 바로 선이라고 합니다.
불심만을 문제시하고 견성만을 문제시하는 그런 것이
선종(禪宗)의 선(禪)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의 교리 내에서 보통 선정이라고 할 때와
선종에서 '선' 할 때는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상충하지 않고 같이 화해가 되어
더불어서 발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 내에서
부질없는 소모를 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무슨무슨 종파가 50종파요,
일본도 지금 80종파라 합니다.
더구나 미국은 종교박람회장 같아서
불교도 지금 별의 별 파가 다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각축하고 다투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른 쪽을 이해도하고 살피기도 해야겠지요.
제 입장도 그런 처지에 입각해서
근본선도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또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도 참고를 해야 되고,
일본의 임제종(臨濟宗)이나,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의미도 알아야 되겠으며,
또는 화두 없이 잠자코 비춰보는 묵조선(黙照禪)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윤곽만 살폈지마는
그런 것을 다 취급을 했습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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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길상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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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하고 맑아집니다
현법락주 - 말할수 없는 참다운 안락이 옵니다
행복한 마음과 어느 것에 기울지 않는 고요와 평정심으로 살아갑니다
본래 부처이기에 본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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