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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32 쉽고 가벼운 제자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서른두 번째로 제목은 “쉽고 가벼운 제자도”입니다.
제목이 “쉽고 가벼운 제자도”이니 제가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트윈폴리오의 멤버였던 윤형주 씨가 우리 귀에 익은 CM송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마 제일 유명한 CM송이 이 노래일 겁니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오란씨~.” 하늘에서 별을 따다 주랴, 달을 따다 주랴!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그게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상사병입니다. 사람들이 약도 없다고 말하는 이 상사병에 걸리게 되면 상대방이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더구나 그 사람이 나에게 마음 문만 열어준다면 정말 하늘에 올라가서 별이라도 따올 기세지요.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그런 마음으로 막 불탑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한 번만 미소만 지어준다면 내가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 모든 걸 다 헌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일이 잘 돼서 막상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상황이 좀 달라집니다. 그때 어떤 모습이 나타나게 되냐 하면 “왜 저 사람은 나만큼 사랑을 안 하는 거지?” 이런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전쟁이 시작되지요. 좀 더 세월이 지나게 되면 서로 무관심해집니다. 그럼 처음에 상사병을 앓을 때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다줄 것 같던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사랑이 식어서냐?
저희 아버님이 이북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실 때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염참섭 씨가 담임선생님이었답니다. 그래서 다들 월남하신 후에도 염창섭 선생님을 찾아뵙고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런 자리를 쭉 오래 가지셨는데 그 분이 결혼에 대해서 한 말이 있답니다. 저희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이 그 얘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연애는 아름다운 오해고 결혼은 참담한 이해다.”
상사병에 걸려서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다줄 것 같던 그 마음이 왜 점점 스러졌는가? 막상 그 사람과 연애도 하고 결혼생활도 하다보니까 신비감도 사라지고 흥미도 사라지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가? 그런 면도 있겠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그 상사병이 사실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다줄 것 같은 마음이 사실은 그 사람을 향한 게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거란 말이지요. 상사병도,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사실은 그 사람을 보면 자기가 좋겠다는 마음인 것이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 근원적인 뿌리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별을 따다줄 것처럼 신실한 마음이 생긴 것이 사실은 저 근원을 보면 그 사람을 향한 신실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신실함이었던 거지요.
육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우상숭배,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삶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상사병조차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를 섬기는 행위, 자기를 섬기는 마음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속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데...’라면서 속지요. 같이 살아보면 본색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가 하는 거지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로 규정하셨는데 이것이 성경의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이 식욕을 채우기 위함이나 식욕을 채울 수 없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 끝없이 갈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심지어 상사병의 대상이었던 사람과도 결혼하고 나면 또 어그러집니다. 끊임없이 타는 목마름으로 밑이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삶이라는 규정이 성경의 인간론의 가장 바탕이 되는 규정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쉰다는 것은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인 안식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성경에서의 안식은 곧 노동입니다. 안식이자 노동이고 노동이자 안식인 것이 성경의 안식이란 말이지요. 엿새 동안은 노동하고 하루는 쉬는 안식일은 구약에서 상징으로 제시되는 개념이고 신약에서 진리가 밝혀지면서 안식은 곧 노동을 의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은 자기를 위한 노동을 자기 힘으로 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이 되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기 때문에 안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멍에와 짐이 교체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멍에와 짐을 제거시키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다른 멍에로 바꿔주시고 다른 짐을 들게 하신다는 겁니다. 멍에를 매고 짐을 드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종류가 달라지고 여건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의 짐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제자들이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이 주신 짐을 지고 살아가는 제자도의 삶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제자가 되기 전에 메고 있던 멍에와 들고 있던 짐은 무거운 것이고 수고로운 것이었는데 이제 내가 주는 멍에와 내가 들려주는 짐으로 바뀌게 되면 그것은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앞에서 제가 상사병을 말씀드렸는데 우리를 상사병 환자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상사병 환자로 만드시니 하늘의 별을 따려고 장대를 들고 밤새 하늘을 휘젓는 그 일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사병 환자가 자기가 사모하는 그 사람을 위해 하늘에서 별을 따러 다닐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노동일까요? 노동이 아니지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서 선물을 사고 꽃다발을 사들고 케잌을 들고 쫓아가는 것이 희생일까요? 헌신입니까? 아니지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지요.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연모하는 사람을 위해 하늘의 별을 따러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것도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그야말로 행복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인간이 미쳤나, 별 따러 다닌다고 저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힘들지도 않나? 싶지만 그 사람에게는 전혀 힘들지 않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첫째 이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임하게 되어 마치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뛰어다녀도 힘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감당치 못할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장 15절에서 예언하신 대로 한 마리 지렁이와 같던 우리가 산을 부수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권능, 즉 은사가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서 그 일을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자들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령의 권능, 즉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가 임하기 때문에 제자도는 쉽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지고 천국에서 받을 보상을 생각하며 내가 오늘 이렇게 피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간다고 하면 이건 뭐가 잘못돼도 대단히 잘못된 거예요. 성경의 약속과 맞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한다든가 헌신한다든가 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사도 바울의 표현도 헌신이나 금욕이나 절제나 이런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절제로 번역된 엔크라테이아를 제가 자기 통제 능력으로 번역했는데 그 의미는 자신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기를 통제해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극기나 금욕, 절제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기가 기뻐서 자기를 통제하고 활용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제자도는 그리스도의 마음 즉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권능 즉 성령의 은사 때문에 쉽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예수님의 멍에와 예수님이 주신 짐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멍에를 메고 그 짐을 지고 가는 삶이 바로 상사병 환자로서 뛰어다니는 삶인데 그 상사병의 대상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별을 따서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불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들 서로 다른 말을 하니까 이게 아주 어려워지는 것인데 왜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주장들이 혼란스럽고 특히 오늘날에는 보수기독교와 진보기독교가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뜻이 성경적이라고 서로 충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그 고정된 틀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이기적인 자와 이타적인 자와 공동체 지향적인 자가 다 성경이 다르게 보이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전제가 돼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셋이 다 다른 것이지요.
이기적인 사람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상사병에 불타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우상숭배지요. 이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엄청나게 열심을 냅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헌금 등등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별 말썽을 다 부리지요. 상대방을 마구 정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너희들 나처럼 새벽기도 맨날 나와? 나처럼 기도 많이 해? 이렇게 주변을 정죄하면서 자기는 용사라는 둥 별 소리를 다 하면서 온갖 문제는 다 일으키고 탐욕스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가장 모범적으로 한다는 평을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왜 하겠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 상사병이 걸린 거지요. 그래서 자기를 위해 그렇게 미친 듯이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미쳐 있으면 별짓 다 합니다. 철야기도? 365일 할 수 있어요. 불타는 그 욕망으로 새벽기도 빠지지 않는 것은 우습지요. 집 팔아서 헌금하는 것도 우스워요. 더 큰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투자를 하는데 그 정도를 못하겠어요? 당연히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거지요. 모티브를 저울에 달아보신다. 네가 신앙생활을 도대체 왜 하느냐? 스가랴 7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들이 금식을 왜 하느냐? 너희들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교회 우상주의에 빠져서 교회를 위해 물 불 안 가리고 헌신하는 것도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왜 교회 우상주의에 빠지느냐? 자기가 본질적인 우상이기 때문에 교회 우상주의에 빠지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교회우상주의에 빠지는 그런 오류가 있는 것이지요.
그와는 달리 쉽고 가벼운 제자도, 즉 하나님을 향한 상사병에 걸린 사람의 특징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상급 받으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 가려는 야무진 꿈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할지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본질적으로 그걸 말씀하시는 것인데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귀한 대우를 받고 나중에 천국 가서 상급을 받고 삼층짜리 맨션에서 사니 어쩌니 하는 그런 얘기들이 다 그거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신앙생활이고 종교생활인 거지요.
한편 공동체 지향적인 사람들은 민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불태우는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미독립선언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60프로니 70프로니 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이 사람들의 행동 기준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세상 윤리도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 윤리지요. 그리고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국민 윤리와 충돌합니다. 이 사람들의 우상은 자기를 포함한 자기 민족과 국가입니다. 숭배의 대상인 우상을 자기 자신에서 약간 확대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휴머니즘, 박애 정신을 내세우는 이타적인 사람들은 오늘날 진보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데 이 진보기독교인들은 인류공동체가 우상입니다. ‘아! 그것 참 바람직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도 속을 파내보면 결국 자기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우상숭배인데 인간의 의로 아름답게 포장한 겁니다. 그래서 거룩해 보이고 고결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섬기는 것은 자기 의입니다. 그러나 그 의의 실체는 고작 이웃에 대한 적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사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가 세워지는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공의, 즉 쩨다카와 정의, 즉 미쉬파트를 행하는 자들의 공동체로 표현되고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제자 공동체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공의와 정의는 신약의 아가페인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율법으로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던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계시되었으나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진리를 드러내시면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계시하신 공의와 정의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행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깨닫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구분하면서 공의와 사랑이 하나님의 두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비유하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하신 공의와 정의가 바로 신약에서 말씀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공의를 행할 수 있도록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이 땅에서 세워지고 확산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앓게 되는 상사병의 두 번째 대상은 새로운 피조물인 자기가 됩니다. 이것은 자기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우상숭배하는 대상은 자기의 옛사람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 자신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열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지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나는 그때부터 운수대통이다, 또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내가 다 차지할 수 있다고 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자기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데 누가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소망하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에 의해 상사병에 걸리게 된 자들만 그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앓고 있는 상사병의 두 번째 대상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기 자신, 날로날로 더욱 새로워지는 새로운 피조물인 자기 자신입니다.
이 상사병의 세 번째 대상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앉으나 서나 공동체의 지체들을 생각하는 상사병을 앓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의 상사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어 가지만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이 상사병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아놓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상사병이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자기를 위한 상사병도 아니었고요.
저와 정진호 집사님이 하도 카톡을 자주하니까 허전도사가 수다맨들이라고 하면서 또 수다를 시작했냐고 하면서 웃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정진호 집사님께 알려드리고 싶고, 의논하고 싶고 합니다. 어떤 수다를 떨겠어요? 항상 우리 형제자매님들에 대한 수다지요. 자매님들 신앙이 자라는 것이 참 보기에 아름답다, 연동흠 형제님 일이 저렇게 진행되어서 참 좋다, 한휘석 형제님에 대해서 같이 걱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함께 할 것인지 의논하고 등등의 수다입니다. 형제자매들에 대해서 상사병을 앓는 것인데 이 상사병이 변질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듯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섬김이고 종노릇이고 사랑입니다.
그 다음 네 번째로 지금은 세상에서 육에 속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 될 사람들에 대해 상사병을 앓습니다. 그게 누가 될지는 모르지요. 나중에 보면 ‘아! 저 사람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지만 우리가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누군지 미리 알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상사병이 우리 안에서 항상 불타오릅니다. 그래서 혹시 이 사람인가? 혹시 저 사람인가? 하면서 찾아다니는 겁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상사병 환자가 하늘의 별을 따러 온 산을 밤새 헤매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 변치 않는 상사병의 특징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피스티스, 즉 신실함과 충성심입니다. 믿음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직스러움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에서 별을 따다 바치려고 작대기를 들고 온 산을 밤새도록 뛰어다니는 상사병에 불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평생을 간단 말이지요. 신실하게.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피스티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피스티스로 피스티스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피스티스, 신실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요. 이 미쁘심이 한자로 신실이고 그것이 바로 피스티스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에무나입니다. 이 신실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신실함이 없어요. 인간은 조석변개합니다. 왜?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도 조석변개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조석변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사병마저도 잠깐 지나가는 열풍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즉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피스토스한 자, 신실한 자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피스티스가 우리에게 옴으로써 우리가 만성 상사병 환자로 변해가는 겁니다.
그레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늘에서 별을 따다 주려고 작대기를 들고 밤새 산을 쫓아다니는 것이지요.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야! 저 인간 좀 봐라. 저거 힘들지도 않나?”라고 하겠지만 상사병을 앓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고 감격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도는 이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산다는 것이 힘든 일이 아닙니다. 기쁨이고 감격이고 즐거움이고 그리고 안식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야! 어떻게 저러고 사나?” 싶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기쁨과 감격과 열정이 있고 더군다나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까지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사병 환자가 되어 걷게 되는 이 쉽고 가벼운 제자도가 바로 안식에 대한 약속이고 이 땅의 삶에 대한 성경의 모든 약속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한 약속이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약속이고, 의인, 즉 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한 약속이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실한 상사병 환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쉬운 멍에를 지고 예수님의 가벼운 짐을 들고 걷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환상적인 삶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지게 될까요. 우리에게 이미 진행된 과정도 있고 또 앞으로 진행될 과정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에서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4장 25절부터 27절까지 말씀을 봉독합니다.
(눅 14:25-27)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첫 번째 과정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끔찍이 사랑하는 대상들이지요. 가장 본질적으로는 자기 목숨입니다. 자기 우상숭배지요.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그걸 지적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미워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미워하게 될까요? 진리를 깨달으면 미워하게 될까요? 이제부터 미워하겠다고 결단하면 미워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결단하고 각오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 때문에 내 실존이 멸망의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미워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나를 우상숭배를 하느라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내 목숨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점점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감지하면서 미워하게 됩니다. 관념적으로 깨닫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사색을 해서 깨닫는 거요? 그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육적인 내가 내 목숨에 집착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이 삶이 결국 나 자신은 물론 모두를 파멸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때 미워하게 됩니다. 그 대상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 대상을 향한 내 마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천륜과 인륜으로 맺어지고 의리로 뭉쳐진 이런 관계가 증오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 때문에, 그들을 향한 내 마음 때문에 내가 진리에 소경이 되고 내 마음이 진리를 향하게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은 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영원한 파멸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낄 때 그때 몸서리를 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몸서리가 바로 우리를 세리의 기도로 이끌게 됩니다. 이 세리의 기도가 쉽고 가벼운 제자도로 우리가 옮겨가게 만드는 두 번째 과정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이 비유를 지난주에도 보았었지만 오늘 주제와도 당연히 관련이 되니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기도가 의에 합당한 기도라고 말씀하셨지요. 세리는 어떤 기도를 한 겁니까? 13절을 봉독합니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우상숭배의 삶이 구조적으로 나를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절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탄원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11절과 12절입니다.
(눅 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차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그것이 의가 아니라 자기가 빠져 있는 함정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직접 체득하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현실에서 체득하게 되면 세리의 기도를 드리게 되지요.
그리고 이 올바른 기도는 낙망치 말고 끈질기게 행해져야 함을 그 앞에 있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지난주에 설명해 드린 대로 에크디케오, 즉 의를 펼치신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는 우리가 신실한 제자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의를 펼쳐 주셔서 나를 속박하고 있는 사슬에서 풀어주시사 저를 신실한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를 신실한 상사병 환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쉽고 가벼운 멍에와 짐을 지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피스티스를 보겠느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피스티스를 받은 자, 즉 신실한 자가 되어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감당하게 되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를 염려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피스티스는 흔히들 말하듯 기도의 방법이나 조건이 아니고 기도의 목적이자 결과입니다. 세리의 기도를 드리는 자들이 마침내 피스티스가 자신에게 임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가 임할 때까지입니다. 피스티스는 성령의 열매에 들어 있는데 충성으로 번역이 되지요. 충성스러운 상사병 환자가 되도록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을 따다드리려고 온 산을 밤새 작대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열정에 가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끔은 실제로 별도 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표적들이에요. 이 표적이 임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과정입니다. 필요할 땐 표적까지 일어나도록 허락을 하시는 것이지요. 마가복음 마지막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부터 20절을 봉독합니다.
(막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우리가 상사병 환자로서 미친 듯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우리처럼 상사병 환자로 만들려고 애를 쓸 때 표적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표적도 일으키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끔은 하늘에서 실제로 별도 따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표적이고 기적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표현을 하셨지요. 우리가 잘 아는 1장 8절을 봉독합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는 성령이 임하시면서 우리가 받게 되는 권능으로 표현되고,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들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자세하게 분류해서 설명됩니다. 앞의 마가복음 말씀에서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라고 하셨는데 예전에 미국에서 전도자들이 다니면서 실제로 독을 마시는 시범을 보이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여기서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표현은 구약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표현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유대인 제자들은 모두 구약에 그 말씀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용을 하신 겁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등의 그런 표현들이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구약의 상징적인 표현을 끌어다가 말씀하신 것인데 그걸 모르니까 뱀에 물리는 시범을 보이거나 독을 마시는 시범을 보이는 그런 어리석은 짓들을 하는 거지요. 앞에서 제가 가끔 별을 딸 때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여러분 중에 ‘김용호 전도사가 정말로 하늘의 별을 땄나보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표현들 하나하나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성경 66권을 다 꿰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오류까지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또 다른 표현을 보기 위해 요한복음 16장 23절과 24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 16:23-2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이 주신 짐을 지고 걸어가는 제자도 상에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선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이지요. 마가복음에서는 함께 하시사 그 표적으로 말씀으로 확실히 증거하시느니라,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으리라, 여기서는 너희들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라고 표현이 되었는데 다 같은 약속입니다. 같은 약속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지요.
요한일서의 표현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 이것이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의 짐을 들고 가는 제자도 상에서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전제입니다. 상사병 환자가 그 상사병 때문에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말씀이지요. 예전에 육에 속한 자로서 자기 우상숭배를 위해서 기도를 드릴 때는 절대 안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그걸 사람들이 몰라요. 성경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고 “일단 와서 마구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떡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지요.
왜 이렇게 성경과 반대로 갈까요? 소경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소경입니까? 자기 우상 숭배하느라고 다를 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소경과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소경 이렇게 두 가지 소경이 있습니다. 쾌락적으로 자기를 우상 숭배하는 소경들은 보수기독교에 우글우글하고 자기 의를 숭배하느라고 정신없는 소경들은 진보기독교에 우글우글합니다. 소위 휴머니즘 기독교지요. 둘 다 절대 안 들어 주십니다.
가끔 들어주시던데 왜 그러냐구요? 간증들도 많다구요? 가끔 들어주시지요. 왜 그러겠습니까? 당근을 처음에 주시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기도의 응답은 우연의 일치였던가 더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사단의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회개로 집중시키지 않는 기도응답이라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간증들을 하고 별소리를 다 하고 다니지만 그 사람의 결말을 보면 압니다. 열매를 보고 안다고 그러시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했느냐, 아니면 그 사람이 자기 쾌락을 채운 것이냐, 아니면 그 사람이 자기의 의를 드높인 거냐? 셋 중에 어떤 것이냐를 우리가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결말을 지켜봐야 해요.
야고보서 4장 3절 말씀이지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절대 못 받습니다. 심지어 에스겔 14장 7절 이하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내 앞에 나오는 자도 죽여 버릴 것이고 거기에 대답하는 선지자도 죽여 버린다고 그러십니다. 다 멸해버리신다는 거지요. 그런데도 뭐 수능시험 대비 40일 특별새벽기도회 이런 걸... 참 겁도 없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 즉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이 주신 짐을 들고 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상사병 환자가 되어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우리들에게는 기도에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멍에는 더 쉬워지고 짐은 더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합해서 사도 바울이 정말 아름답게 표현한 말씀이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런 황홀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세계적인 대부호가 되든, 노벨상을 열 개를 타든 뭘 하든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런 삶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이런 삶이 진행된다는 거지요.
상사병 환자로 평생을 살다가 상사병 환자로 죽은 사도 바울의 증언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입니다.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을 향해서 사모함으로 항상 불타고 있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불치의 중증 상사병 환자지요. 그런데 아주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 같이 상사병에 걸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 주류 기독교처럼 성직자는 성도들을 목양하고 성도들은 성직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구조는 문제를 심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원이 다 상사병 환자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절대 조건입니다. 그 모습이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봉독하겠습니다.
(갈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 몸의 가시라고 표현했던 질병이 안질이었기 때문이라고들 보는데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안질 때문에 고생하는 나에게 만약에 가능한 일이기만 하다면 너희가 눈이라도 빼서 나에게 주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만 상사병 환자가 아니라 다 같이 상사병 환자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마음으로 한 몸을 이루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 종노릇을 하게 되니 제자도는 더욱 쉽고 가볍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사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립니다. 자기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사람의 그 지독한 독기를 감당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과는 헤어지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건 대책이 안 선다 그거지요. 자기 배를 섬기는 자가 바로 자기 우상 숭배를 하는 자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우상숭배가 그 핵심입니다. 자기 배를 섬기는 자와는 절대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깨트리는 건 순간이예요. 그 사람들의 독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카페에 청마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의 글이 수십 개가 올라와 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 청마님은 여러 분들이 합류하시기 전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같이 신앙생활 하다가 연기처럼 사라지신 분입니다. 40대 후반의 여자분이었는데 30편정도 되는 그분의 글 중에 “전도사님은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요. 그 분이 무슨 얘기를 하셨냐 하면 전도사님은 어떻게 해서 자기 방어기제까지 발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느냐 그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가 그 글을 읽을 때는 저에 대한 칭찬인 줄 알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모든 것을 다 받아줄 수가 있느냐? 자기 방어기제까지 사라진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그래서 제가 ‘아, 좋은 얘긴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읽어보았더니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함해서 다들 한 가닥 한다는 사람들인데 열린 입이라고 다들 쓸데없는 소리들을 하는 걸 어떻게 그렇게 그냥 계속 바라보기만 하고 놔두느냐고 하는 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이었어요. 뭔가 리더로서 통제를 가해야 되지 않느냐는 제안글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허전도사와 같이 기도하면서 고민해 보겠다고 답글을 달았는데.... 그거요? 안 됩니다. 제가 무슨 권면을 하고 무슨 협박을 해도 안 돼요.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영성이 엄청나서 그런 것을 다 수용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저의 무능함을 알기 때문에 그냥 보고 있는 거예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그때는 수요 성경 공부 후에 옆에 있는 맥주집에서 애프터를 자주 했는데 그 자리에서 한 자매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김용호가 별겁니까?”라고 외치는 것이었어요. 술도 취하기 전인데... 그럼 저야 뭐 가만히 있어야지요. 청마님 주장은 그런 걸 계속 보고만 있으면 어떡하느냐는 거지요.
근데요, 안 됩니다.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상사병 환자로 만들어놓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헤어지라는 겁니다. 해결 방법이 없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바꿔놓으시면 그때 다시 합치든가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게 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안타깝고 불쌍해 보이고 측은해 보이면서 내 안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뿐 좀처럼 짜증이 난다든가 분노가 생긴다든가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그런 행동과 말들이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짓눌려서 나오는 비명들이거든요. 그 사람의 멍에와 짐을 예수님의 멍에와 짐으로 바꾸어주지 못하는 나의 무능이 안타까운 것이지 제가 권면이랍시고 그 사람에게 훈계를 하거나 정죄를 한다고 해서 깃털만큼도 달라질 일이 아닙니다.
이 그리스도의 제자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휘파람을 불면서 가는 즐겁고 쉽고 가벼운 길입니다. 제가 흥미진진이라고 항상 표현하는데 정말 흥미진진한 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오늘도 눈물 흘리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언제나 우리의 애통함은 세리의 기도에 있습니다. 세리의 고통 속에 우리의 고통이 있는 거지요. 나의 죄성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멍에와 그리스도의 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건 뭔가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된 겁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근심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오는 하나님의 근심입니다. 따라서 내 죄성 때문에 오는 근심이 있고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근심이 오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방향이 거꾸로 된 경우입니다. 우리가 걷는 제자도는 나의 죄성과 이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 그 자체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기쁨이고 감격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따려고 작대기를 들고 밤을 꼬박 새면서 온 산을 헤집고 뛰어다닐 수 있는 거예요. 기쁨과 감격이 그렇게 큰 것이지요.
이러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입니다. 좀 긴 장면을 우리가 다 봉독하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지요. 사도행전 20장 17절에서 38절까지 오늘 대표기도하신 최윤주 자매님이 봉독해 주시지요.
(행 20:17-3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아멘. 완전 환자지요? 완전 환자인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지체들에게 또 동시에 우리들에게 자기처럼 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상사병 환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까지 덧입는 상사병 환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밤새도록 하늘의 별을 따러 뛰어다녀도 힘든 줄을 모르는, 즉 쉬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가벼운 예수님의 짐을 들고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사명은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상사병 환자로 만드는 일인데 그 일은 우리가 직접 감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 일을 그 사람에게 하시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빌미를 제공하고 조건을 조성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처럼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게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더 심각한 상사병 환자로 만드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인간이 진 그 무겁고 수고로운 짐에 깔려 비명을 지르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을 부르셔서 그 짐을 치우시고 예수님의 쉽고 가벼운 멍에와 짐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일을 진행하시려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저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회개하게 하셨고 사모하게 하심으로써 나날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가고 각양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하나님과 지체들과 또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향하여 불타는 마음을 주셨으니 저희들이 그 불타는 마음으로 제자도로 걸어갈 때에 약속하신 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시옵고 때로 우리에게 벅찬 사명을 감당할 때에는 힘들어하거나 지치지 않게 해주시옵고 주시는 권능으로 덧입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여전히 신음하며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저들에게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를 건지신 것처럼 저들을 건져주시옵소서. 그 일에 우리가 합당하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날로 날로 성장시켜 주시어서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동원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도 놀랍게 역사하실 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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