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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계간 한국시학 / 한국경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嘉南 임애월
◩ 2022 [문예운동] 여름호 릴레이 특집 <나의 시 나의 시론> - 임애월 시인
역주행 속으로
임 애 월 (시인)
1. 역주행
3년째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래 숙주는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이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코로나19 시발점이 중국 우한에서 박쥐를 잡아먹은 사람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사람들이 경계를 넘어 동식물계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바이러스는 인간의 영역으로까지 확산하였고 그로 인한 피해와 고통도 고스란히 인간의 몫이 되었다. 지구환경을 함부로 오염시키고 파괴한 인간들에게 내리는 자업자득의 징벌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지구의 환경은 지금 매우 심각한 위기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서둘러 노력하지 않으면 복구조차 어렵다고 한다. 생태계의 파괴와 오염으로 동식물들의 서식지가 좁아지면서 종과 개체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대로 진행되면 자연계의 수많은 생명체들이 멸종에 이를 수도 있다는데 그 피해는 결국 인간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환경론자들은 그 결과가 재앙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인간은 작은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욕망으로 직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행위의 근원은 그 욕망에서부터 출발한다.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먹고사는 수준을 넘어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서로 혈안이 되어있다. 삶의 목표를 거기에 두는 자들이 지구상에 넘쳐나고 그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피멍이 드는 건 현재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이 지구별이다.
이 글은 자연보호 캠페인도 아니고, 무슨무슨 거창한 시론에다 내 시를 꿰어 맞추려는 작업도 아니다. 그저 몇 편의 시와 그 시작(詩作) 배경을 가볍게 이야기하려고 하다 보니 서두가 좀 길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들이 폭주하는 대열에서 벗어나 나는 지금 자연과 무소유의 삶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요즘 내 시의 화두는 ‘원시의 자연’과 ‘느림의 미학’이다. 시쳇말로 벌써 한물가서 식상해진 화두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내 삶의 궁극적 목표이고 출발점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연은 종교이고 우상이며 나는 그 자연에 귀의하였다. 앞으로 내 안에 숨어있는 원시적인 야생성을 남김없이 깨우고 자연에 충만하게 동화되어 그 종속자로서 숭배하며 살아가려 한다. 대자연이 그렇게 나를 끌어 줄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남루하지 않고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이다.
AI의 시대, 메타버스의 시대라는 작금의 변화를 발 빠르게 받아들인 작품들이 그나마 주목을 받을까말까 하는 이 혼란의 시기에, 진부해 보이는 화두를 다시 꺼내드는 것은 분명한 역주행이다. 디지털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아날로그적 역주행 속으로 내가 돌아가는 이유는 결국 예술이 추구하는 진정성과 자유, 즉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속성을 나름대로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폭주하는 이 시대의 낯선 속도에 더 이상 함께 매달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쟁사회의 분주함이 소거된 소박하고 느리게 사는 산골마을에서 나는, 산의 침묵을 읽고 바람과 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새들의 노래와 들꽃들의 춤, 영원한 순례자 구름의 흔적을 쫒으며 흙의 전해주는 가장 원시적인 언어로 시를 쓰려고 한다.
문득
나무들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날 있다
지은 죄도 없이 깊은 골에 유배되어
선 채로 형벌을 사는 나무들의 창백한 이마가
늦은 봄날 오후 햇살에 견고하게 빛날 때
한번쯤 그 푸른 동맥에 손을 얹어
우주의 핏줄을 관통하는 심박수
그 뜨거운 순환을 느끼고 싶은 날 있다
아득한 천공에 매달려
한발도 내딛지 못하는 붙박이별처럼
벼랑 끝에 온전하게 발목 잡혀버린 날
그의 처절한 자유의지가
하늘로 밀어올린 무수한 잎사귀들
미세한 잎맥을 타고 흐르는
어둠 속 뿌리의 절규
간절하게 듣고 싶은
그런 날 있다
- 「그런 날」 전문
“나무들의 체온이 그리워”서 서너 해 전 경북의 깊은 산골짜기에다 나를 이식하였다. 남은 삶에 대해 진심이고 싶어서 저지른 절박한 충격요법이었다. 타고난 성향이 식물성인 나는, 사막처럼 건조해진 도시의 콘크리트 숲속에서는 꽃은 고사하고 모래바람 속에서 겨우 만들던 가시도 더 이상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에 대한 완벽한 패배이다.
목을 축일만한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 그 무자비한 모래폭풍의 소용돌이를 드디어 벗어나 사시사철 새소리, 물소리 들리는 골짜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산골 비탈밭에 나를 다시 삽목하였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내 안에 내장되어 있던 원시적인 야생성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꽃은 생(生)의 시작이고 또한 끝이다
지난 계절 혹독하게 상처 입은 목숨들은
이곳 산골마을로 몰려와 꽃을 피운다
까슬하고 메마른 시간을 딛고 봄빛 맑은 날
빛과 흙, 바람과 물의 기운을 빌려
자기만의 언어와 색깔로 말문을 연다
오랜 세월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실존의 기억들을 길어올린다
꽃을 보는 일은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간의 상처들이 너울대며 꽃무늬를 이룬다
그 무늬 속을 거슬러 통증의 파편들이 고여 있는
깊은 동면의 우물 속 두레박 끌어올리면
비로소 드러나는 지난 시절의 결핍들
너른 산맥의 빛 속에서 찬란해진다
어둠과 갈등의 먼 계절을 돌아와
오늘 기꺼이 하늘로 밀어 올리는
저 빛나는 꽃잎, 꽃잎들
이 봄, 그대는 상처마저 당당하다
- 「지상낙원 6」 전문
대자연은 인간의 상처를 품어주고 치유해 준다. 마음이 다쳐 자존감을 상실했을 때 그것을 치유해 주는 건 누구도 아닌 바로 자연이다. ‘빛과 흙, 바람과 물의 기운을 빌’어 ‘자기만의 언어와 색깔로 말문을’ 열게 해준다. ‘지난 계절의 결핍’들이 ‘너른 산맥의 빛 속에서 찬란해진다’. 그리하여 ‘그대는 상처마저 당당’해진다. 오래 되어 옹이 깊은 내적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이다.
2. 원시의 자연 속으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지구상의 공간 소유를 넘어서 이제는 메타버스라는 두 번째 세상을 만들었다. 이 지상에서 소외된 영혼들이 시공간을 넘어 개척하는 새로운 세상. 거기에 편안한 휴식과 자유로운 이상이 실현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면 더 이상 바랄나위도 없겠지만 새로운 개념의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부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멈출 수 없는 시대의 갈림길에서 나는 맨 처음 원시의 길로 되돌아 왔다.
대나무가 벼과라는 걸 우연히 알았다
하늘로 가는 가장 정직한 거리
직립의 길을 선택한 그의 의지가
육십갑자의 시간 속에서
가볍게 부풀어 오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부서지던 생(生)의 조각들
게워내고 비워버린 제 속살들은
어디쯤서 포만의 게으름을 좇고 있을까
마지막 공명(共鳴)으로 밀어올린 한 생애의 방점
딱 한번 피워올린 꽃이여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의 꿋꿋함이여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땅 속 어둠을 거머쥐었던 단단한 발톱 끝에
비로소 어린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 「대나무꽃」 전문
대나무는 꿋꿋하고 곧은 이미지를 상징하지만 그가 본디 “벼과”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비울수록 제 몸이 굵어지고 텅 빈 속을 갖고도 휘지 않고 곧을 수 있음이 놀라웠고, 물관부 하나 보이지 않는 마르고 긴 몸의 끝에서 꽃을 피울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정확한 팩트인지는 모르겠지만 60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도 놀랍다. 제 이름에 걸맞는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무한한 경배를 보낸다.
빛의 찬란함과
소리의 옥타브
부피의 탐욕을 버리면
내 몸은
날개옷처럼 가볍다
아무리 밟혀도
상처받지 않는다
직진을 고집하는 빛의 질주
소리 없이 오려내고
기꺼이
맨바닥으로 내려앉는
내 몸은 어둠이지만
언제나 밝은 양지를 품고 있다
- 「그림자」 전문
인간의 속성 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욕망은 인간의 생활을 발전적으로 진보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서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민하게 한다.
그 욕망의 굴레에 갇혀 소유하면 할수록 제 몸은 무거워지고, 무거운 것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는 누군가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겠지만 자유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살맛나게 하는 환희를 준다. 다른 동물에 비해 특히 정서적으로 매우 예민한 인간들에게 자유는 천금보다 귀하다. 소유하지 않는 자들의 자유로움, 그들에게는 강물이 풀리는 소리도 행복이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봄새의 날갯짓에서도 희망을 본다. 들꽃들이 향기 속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밤별들이 들려주는 노래는 열린 귀를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 경청하리라.
어떻게 보면 무소유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조차도 또 다른 이름의 욕망일지도 모르겠지만.
3. 유년 시절의 결핍
내 문학의 시작은 결핍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건 순전히 타의에 의해 이미 결정지어진, 그 사람의 타고난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변방의 섬 제주도, 거기서도 시골구석의 식구 많고 빈한한 가정에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난 나는 지독한 결핍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내 주변 친구들 집안의 경제적 수준도 우리집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남들보다 더 지독하게 느끼는 열등감으로 나는 다소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고 자존감마저 떨어졌다. 아마 그래서 책읽기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책 속에는 내가 아는 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숨겨져 있었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 속을 거닐다가 책을 덮고 나면 더욱 허망해지기도 하였지만 독서는 중독처럼 나를 유혹하였다.
생애 처음으로 읽었던 만화책 『파란 도깨비의 슬픔』이나 『삼천계단』, 동화책 『엄마 찾아 삼만리』 『소공녀』 들을 읽으며 주인공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함께 공유하면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지만, 한편으로는 그 공유된 슬픔의 조각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기도 하였다.
꿈틀거리며 새어나간
지상의 시간
변태(變態)의 통증을 견디며
또 하나의 생(生)을 벗는다
빗나간
기억의 진액을 뽑아
바람 속에서 직조해 낸
천상의 날개옷 한 벌
상현달 걸린 허공
황홀하게 훔쳐내고
오래된 우주를
하나씩 삼킨다
- 「나비의 시간」 전문
가끔씩 날개가 생기는 꿈을 꾸기도 한다. 꿈속이지만 생생한 그 기억은 우주공간에 나를 띄워놓고 푸른 지구별을 날아다니다가 깨고 나면 더욱 허망해지기도 한다.
몇 번의 “변태”를 거치면 꿈꾸는 “날개옷”을 얻을 수 있을까. 씨앗처럼 조그만 알에서부터 징그러운 애벌레, 무거운 침묵의 시간 고치를 벗어나면 가볍고 찬란한 날개가 정말 돋아날까. 아직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나는 결핍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오늘도 사유(思惟)의 변태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4. 구원으로써의 문학
내게 있어서 문학은 말 그대로 구원이다. 요즘 길어지는 코로나 블루로 인해 피폐해진 영혼이 한없는 나락으로 가라앉다가도 원고청탁서 한 장 받으면 곧바로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일구어 놓은 게 없는 내 삶에서 그래도 나를 붙들어준 것은 ‘시 쓰기’였다. 물론 어디 내세울만한 변변한 작품 하나 없지만 앞으로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이 벼랑 끝에 선 나를 항상 붙들어주곤 한다.
10여 년 전 사랑하는 피붙이가 별나라로 떠나고 그 상실감으로 우울증까지 겹쳐 밤을 견디기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때도 나를 부축해 준 건 바로 ‘시’였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정말 좋은 시 몇 편은 써야하지 않겠니. 밤마다 스스로에게 사명감을 앞세워 세뇌하고 격려하며 다짐하였다. 다음의 「어떤 혹성을 위하여」는 그때 당시 고통을 짧게 표현한 작품이다.
불혹의
고단한 풍경
바다 위에 부려놓고
샛바람
물길 따라
이어도로 돌아간
누이야
너도 듣고 있니?
감꽃이 피는 소리
- 「어떤 혹성을 위하여」 전문
불혹에 세상을 떠난 동생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이어도’는 제주도 전설 속 환상의 섬이다. 격한 감정을 절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독자들에게는 평범하게 읽힐지도 모르지만 ‘누이야,/너도 듣고 있니?/감꽃이 피는 소리’의 행간 속에 묻어둔, 이제는 ‘감꽃’을 함께 볼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통에 필자는 지금도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 그 고통이 사라지지만 가슴 속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꽃이 진다
네가 떠난
그
빈자리에
고여 드는
바람의 허무
화석으로 굳어가는
환하던
기억의 빛 너머로
그대 없는 하루가
속절없이 지고 있다
- 「낙화」 전문
아물지 못한 고통은 잠들지 못하는 밤이나 꽃이 지는 저녁나절 수시로 들락거리며 나를 괴롭힌다. 아직도 툭하면 터지는 눈물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호수처럼 흐르고 넘쳐 출렁거린다.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영혼이 속절없이 부르는 노래이다.
5. 체험을 통한 진정성의 시를 쓰고 싶다
체험을 통해 삶의 냄새가 묻어나는 진정성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상상력과 기교에만 의존해서 쓰는 관념적인 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만하고 불온했던 눈 먼 시간의 기억들을 정제하고, 실제로 몸 부딪쳐 얻어낸 현장체험을 통한 실존의 언어로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아주 평범한 자연현상들이 마법처럼 신비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땀 흘리며 직접 체험으로 얻어낸 것들은 못난 열매 하나도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였고, 그 속으로 무한 감사와 감동이 스며들었다. 대자연은 절대로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속으로 나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작은 풀꽃 하나도 큰 의미를 지녔으며,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된 게 아니라 처절한 고통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낸다는 사실을 오감으로 체득하고 있다.
산자락 아래 비탈밭 농사는
고라니와 내가 서로 병작을 한다
추운 겨울 지나고 나면
더 달달하고 맛있는 봄동배추
가을에 씨는 내가 뿌리고
작은 씨앗들 바람에 날릴까 봐
고라니가 꼭꼭 밟아주었다
여기저기 돋아난 잡풀들 뜯어먹고
염소똥 같은 거름도 고라니가 주었다
경칩 지나고 햇살 따순 날
바구니 들고 봄동나물 캐러 나갔다
연한 속잎들은 고라니가 먼저 뜯어 먹었고
나머지 겉잎과 둥치들은 내가 뽑는다
이 지구의 주인이 어디 사람뿐이겠니
너도 당당한 주인이지
서로서로 도와가며 지은 봄동 농사
나누어 먹는 기쁨을 내게 주었으니
그저 고맙구나
달큰한 봄햇살 바구니 가득 담고 돌아오는 발걸음
휘파람새처럼 휘이호르르
노래라도 한 소절 부르고 싶어진다
- 「병작」 전문
자연 속의 작은 개체인 내가 가장 원시적인 언어로 또 다른 개체인 고라니에게 전하는 순정한 말이다. 처음에는 고라니 방지용 울타리도 어설프게 둘러쳐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둘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지은 농사이거늘 어찌 나 혼자 수확하려 했던가. 이 시에서 고라니를 대하는 시선은 내 자신의 내면을 향한 응시이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화해의 손짓이다. 어느 날의 일기처럼 어떤 꾸밈도 없이 누드기법으로 쓴 이 시는 현재의 내 정신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방전되어 게을러진 내 삶에 대자연으로부터 순수한 피를 수혈 받아 새로운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있다.
6. 숨어있는 야생성의 부활을 기대하며
살아있는 야생의 원시성을 회복하고 헐거워진 생각의 근육을 키우려 한다.
깊은 산골짜기에 스스로를 위리안치 시키고 한 그루 나무처럼 붙박이로 서서 시간의 발자국을 따라 사유의 실타래를 길게 풀어놓겠다.
호흡 푸른 그늘 아래
물관부 깊게 열어
잎사귀마다 빛살을 끌어 쟁인다
어디에나 초록이 질펀한 5월
오래된 원시림 가지 끝에
새롭게 귀를 여는 기억의 세포들
놓쳐버린 시간의 궤도 위에
시퍼런 직립의 문장으로 부활한다
부리 긴 여름새가 물어 온 초록빛
그 살아있는 생명의 원형질
거친 야생의 몸짓으로
5월에 더욱 생생하게 덧나는
그리움을 덧칠한다
- 「광합성을 위하여」 전문
사람들은 지구라는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제3의 세계로 그 공간성을 확대하고 있다.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나 만나던 세계가 이제 현실이 되었고 그 속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소위 디지털 신인류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앞으로 대부분의 일들은 그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혁명적 공간이다. 이제 그곳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캐리어와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서 생활하며 일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곳이 주된 생활무대이고 지상의 존재는 그저 한낱 아바타가 될 수도 있다. 특히 IT산업의 발달로 전반적인 인프라 구축이 잘 되어있는 한국은 이 현상이 더 빠르게 진행될 조짐이 보인다.
건조하고 차가운 메탈적 감성을 지닌 아바타의 세계, 앞만 보고 폭주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나는 과감하게 탈주하였다. 등에 달라붙어 있던 버거운 멍에를 내려놓으니 이곳이 곧 낙원이고 천국이다.
앞으로 나는 햇빛과 바람의 광합성으로 무성한 잎사귀를 피워 올리겠다. 시냇물 소리로 지심에 깊이 뿌리도 내리겠다. 그리고 바람과 비에 젖으며 고라니의 눈망울처럼 거짓 없는 진정성의 시를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