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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장로 상 [강의 / 청주소명교회 진범석 목사]
1. 장로의 기원
⑴ 장로의 뜻
장로라는 말의 어원은 헬라말의 "프레스뷰테로스"이다. 이 말을 영어로"Presb yter"(프레스비터)라고 부르고, 다시 "Elder"(엘더)라고 번역되어 이에 따라 우리말로 장로라고 하였다. 장로라는 말이 구약에 약 100회 신약에 60회 기록되어 있다. 장로교란 명칭이 장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장로교회란 교회회원이 선택한 장로에 의하여 다스리는 대의제의 정치 형태를 가진 교회이다. 성결교회도 이정치 형태를 가진 교회에 속한다.
성경에 나타난 장로라는 말의 듯을 종합해 보면 "나이 많은 사람, 수염이 난 사람,존경할 만한 사람,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공직자, 다스리는 자, 원로, 민중의 대표자, 백성들의 대변자, 가르치는 자, 예배를 돕는 자, 구제 사업을 돕는 자" 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한글학회 큰 사전에 의하면 일반 사회에서도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장로라고 불렀고, 불교에서도 학식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 그 절의 원로를 높이어 부를 때 장로라고 했다고 한다. 장로란 ‘덕망이 있고 경험이 많은 지도자’라는 뜻이다.
⑵ 모세시대의 장로
원시 사회의 단위는 씨족이거나 대가족이어서 그 중에 연장자는 그 씨족이 나 가족을 대표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히브리인 사회와 종교 행사에 있어서 가족의 어른 즉 가장을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존경하였다.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창18:12) 저는 추장(chief)이며, 장로(elder)이며, 아버지(father)이다. 이러한 장로(elder), 늙은 자가 국민을 대표하여 히브리 공동 사회의 권위적인 존재가 되었다. 요셉 시대에 애굽과 바로 궁중에도 장로가 있어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지만 (창50:7) 이스라엘 사회에도 장로가 있어서 지도적 권위를 가진 그룹으로 나타났다.(출3:16,4:29). 그중에서도 "70인 장로"들은 모세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엄숙한 언약을 위해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70인 장로"들은 장로들 중에서 선택되어 임명함으로 (민11:16) 대의제도를 엿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산헤드린(Sanhedrin)의회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선택된 장로들은 일반 장로들과 구별되었고, 그들의 기능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민11:17,25). 장로들은 종교적 기능 이외에도 전투의 ‘지휘자’로 ‘재판관’으로, ‘충고와 권면자’로, ‘행정의 증인’ 등으로 다양했으나, 그중에도 공동체의 대표자의 기능이 가장 중요 하였다.(레4:13-21,신21:1-9).장로들은 선지자의 친구요 (왕하6:32), 왕의 고문이요(왕상20:8,21:11), 국무에 있어서 백성들을 돕는 자들이었다. 장로의 존재와 그 영향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치성의 원리와 습성을 배양하였다. 모든 도시와 마을에는 장로들로 구성된 단체가 있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 에게 깊이 뿌리를 내린 비정치적인 종교 단체이었다. 그러므로 포로 시대에도 이 모임은 계속되었으니 그것이 회당(Synagogue)제도이다. 이러한 제도가 예수 당시에는 산헤드린 의회로 계속된 것이다.
⑶ 회당에서의 장로
이스라엘사회에서 장로의 직책이 자라고 정착된 곳이 회당이다. 회당은 집회 또는 공동체 교구를 의미하는 낱말로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낱말이 없고 신약성경에는 "모이는 장소""예배와 교훈의 집"이란 의미로 이 낱말이 사용되었다 (행6:9). 회당의 요소와 공중예배의 모습을 포로 시대에부터 엿볼 수 있다. (느8:1-26). 그 후에도 모임의 형태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2세기경부터 회당은 바리새파의 율법 보존 운동으로 인하여 크게 발전하여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율법은 유대 민족의 종교 교육과 율법 교육을 회당에서 실시했다. 희생을 드리는 성전의 예배보다는 교육에 의한 회당의 예배를 창안한 것은 혁명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회당은 장로들로 구성된 자치 기구로 유대인의 민사, 형사, 종교상의 문제를 판가름하는 법정 구실을 했고 (눅12:11,마10:17), 장로들은 판사역할을 했다. 회당은 장로가 최고 관리자가 되어 율법 교육을 맡았고, 이단과 배교자들을 회당으로 부터 추방할 권리가 있었다. 회당의 상임 관리자를 회당장이라고 불렀다.(막5:22,눅8:49) 유대 사회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기름 붓는 예식이 있으나 장로는 기름 붓는 직분이 아니었다. 장로제도는 유대교의 제도이었으나 기독교회가 그 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⑷ 초기교회의 장로
사도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를 세워 교회를 조직하였다. (행14:23). 장로선택은 회중에서 선출하여 약간의 경험을 쌓은 후 안수하여 임명하였다. 장로의 임무는 교인을 감독하고 다스리고 보호하는 것이요,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은 장로의 본래적 임무는 아니었다.
초기교회에서 감독과 장로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행20:17-28, 딛1:5-17) 그 후에 감독과 장로로 구분하게 되었다. 교회를 영적으로 먹이고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을 전담 한 자를 감독이라 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그들을 지키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자를 장로라고 하였다. 감독직과 장로직이 분리가 되는 동시에 감독직이 점점 중요시되어 감독은 목회를 위해 부름 받은 직책이요, 장로는 교회를 위해 선택받은 명예직으로 이해되었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장로(감독)의 자격을 가르치면서 (딤전3:2-7, 딛1:5- 9)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안 된다고 하였다.
2. 장로의 역할
열차를 타고 달리다가 차창 밖으로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을 보게 된다. 마을가운데 있는 아담한 교회와 솟아오른 십자가는 보는 이에게 정겨움과 평화로움을 전해 준다. 그런 교회 모습의 이면에는 성도들, 특히 이름 모를 영적 지도자들의 치열한 주님 사랑이 배어 있다. 그렇다.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는 아름다운 희생과 성숙한 인격의 대명사였다. 적어도 한 세대 전에는 이에 대해 교회안팎으로 이의를 다는 이는 없었다. 오늘의 장로상(長老像)은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뭐래도 한국교회의 큰 이미지는 목회자와 장로의 합작품임에 틀림없다. 장로의 인격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성 싶다. 장로의 직분자체는 성경에서 증거 하는 대로 존귀하다. 누가 장로의 직분에 대해 폄하한다면 덕스럽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장로직분을 수행하는 당사자 역시 인격이나 사역에서 ‘공사 중, 수리 중’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⑴ 장로는 섬김의 시작인가, 끝인가
장로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더럽히는 것은 장로의 속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함백산 계곡이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인 것처럼, 장로영혼의 지성소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섬김의 출발과 종착을 결정한다. 이상하게도 한국 교회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없어져야 하지만,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것이 “그 사람 장로 되더니 사람 버렸다”는 식의 말들이다. 장로직의 생명은 순전성(integrity)에 있다. 주님과 교회에 한 몸 드려 섬기겠다는 의지는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성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반해 장로 직을 통해 얻는 유·무형의 보너스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면, 개인과 장로 직분의 추락은 시간문제다. 장로 됨이 섬김과 희생의 출발이라고 인식할 때와 존경받고 다스리는 직분이라고 인식할 때 나타나는 양상이 같을 수 있겠는가?
⑵ 주님께 인정의 도장을 받아라
교회시무 장로는 당회 원으로서 각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에서 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을 가진다. 직분수행을 하다보면 자연히 많은 서류를 접하게 되고, 도장 찍는 재미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체질화되면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것으로 중심 이동이 이뤄질 수 있다. 나중에 도장 찍고 일 처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무릇 장로의 직분을 받은 이는 주님께 인정과 신뢰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장로님처럼 교회 생활하고 싶다.” “저 장로님 가정처럼 살고 싶다”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역할 모범의 본래적 사명을 이룬 것이다. 장로 직분은 서류에 도장 찍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풍겨 나오는 주님의 향기로 일하는 것이다.
⑶ 담임목사의 목회에 꽃피우게 하라
만약 장로가 반석 같은 목회철학이 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쉽게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에게는 섬김과 충성의 철학만 있을 뿐이다. 담임목회자의 목회 철학에 동역해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지가 불탈 뿐이다. 장로의 참다운 동역은 자신의 철학을 버리고 담임목사의 목회방향에 온전히 적용할 때 조화를 이룬다.
왜 수많은 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를 청빙해 잔칫집처럼 출발했다가 초상집처럼 갈라서는가? 이유는 철학과 철학, 이론과 이론, 권위와 권위가 맞부딪쳤기 때문이다. 마치 갈라디아교회의 교우들이 성경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형국과 비슷하다. 목회자를 철저히 검증 절차를 거쳐 청빙하든지, 아니면 아예 청빙하지 말든지 해야 한다. 청빙해 놓고 소신껏 목회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흔들고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장로가 철옹성 같은 목회 철학을 소유하는 한 목회 현장에 은혜의 봄바람이 불기는 어렵다. 여러 장로들의 모임에 참석 빈도가 높을수록 목회에 대한 규제도 심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목회자들만의 느낌인지 자문해 볼 일이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 함께 동역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해 감동을 받아 후세에 전한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 하느니라.”(롬16:4). 이런 목회자와 동역자 간의 가슴 뭉클한 순애보는 과거의 일로만 기억될 것인가. 우리시대의 장로와 목회자의 결단이 필요하리라.
⑷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를 좋아하라
왜 일반시민들이 장로와 돈을 오버랩 시킬까. 개발 논리에 따라 ‘잘 살아 보세’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을 때 교회만이라도 ‘올바로 살아 보세’의 원리를 붙잡았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깨끗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장로는 돈을 좋아하지 말고 도(道, 말씀)를 좋아해야 한다. 교회건축 과정에서 이권에 개입하다 망신당한 장로가 어디 한두 사람인가?
온몸을 통째로 드려 헌신하는 품격 있는 장로가 있는가 하면, 온몸으로 뛰어 돈 되는 일에 몰두하는 장로도 있다. 건축 중인 어느 목회자가 이미 건축이 끝난 이웃목회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던 중에 제일 먼저 들은 말이 “목사님, 절대로 장로를 믿지 마십시오”이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장로는 경건의 능력으로 돈을 다스리는 모습을 실제로 교우들에게 보여주는 역할 모범의 선두 주자이며, 향도적 사명을 가진 자이다. 세상 사람이 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장로만은 돈에 대해 높은 표준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리기를 교우들은 기대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에 장로들의 삶에서 희망의 불씨를 보기 원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돈 냄새나는 장로가 아니라, 예수 냄새나는 장로에 목말라 한다.
⑸ 간증 많은 장로로 서라
장로는 선견자가 돼야 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보고(先見), 바로 보는(正見) 지도자가 필요하다. 먼저 보고, 바로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과 고상한 인격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자칫 장로 직을 오래하다 보면 자신의 주장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이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매사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이끌어 주신 간증이 많다는 증거이다. 자기주장은 교우들에게 부담을 준다. 교우들을 억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증은 교우들에게 기쁨을 준다. 교우들의 마음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느 2:8, 18)에 대한 다양한 체험이 있었다. 은혜 받은 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간증이 많은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교회는 예외 없이 정면으로 장애물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태산이 평지가 되는 은혜로운 역사도 체험한다. 이에 반해 자기주장이 많은 장로가 있는 교회는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역사의 진보는커녕 현상 유지도 힘들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들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반드시 간증이 충만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포진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력 지수나 경제 지수도 좋지만 은혜 지수가 장로의 대명사가 돼야 당사자도 살고 교회도 산다. 교우들을 인도하려고 소매를 걷어 올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무릎을 꿇는 장로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교제를 통해 많은 간증을 추수하게 된다. 교회의 보물 같은 장로는 은혜 지수가 높아 성도의 신앙 지수를 상향 조정한다.
⑹ 예배기도는 짧게, 개인기도는 길게
초 신자에 대한 배려는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이뤄진다. 대표적인 것이 목회자의 메시지와 장로의 예배 기도이다. 목사의 메시지가 교우들에 대한 따뜻함이 배어 있지 않으면, 교우들은 영적 영양실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일하게 장로의 예배 기도가 교우들을 민감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교우들은 기도생활에 대한 참신한 맛을 보기도 전에 기도에 식상해 한다. 회중의 눈을 뜨게 해놓고 주제 없는 메시지를 펼치는 것과 회중의 눈을 강제로 감게 해 놓고 중심 없는 기도를 강요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교자에 대한 배려로서 예배 실 뒷면에는 반드시 큰 회중시계나 디지털시계가 자리 잡고 있다. 설교시간과 예배시간에 대한 무언의 또 다른 메시지인 셈이다.
그런데 장로가 담당하는 공적 예배의 기도는 모두 눈을 감고 하니 개인적 제어 장치가 사라진다. 주관적 감각의 시계만 기도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주관적이라고 다 나쁠 수는 없다.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회중은 눈을 감은 채 미로를 헤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경우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목회자의 설교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동일선상에서 장로의 기도가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는 것도 축복이다. 장로들의 기도시간이 마치 고문당하는 시간처럼 지레 겁을 먹는 교우들도 많이 있다. 진정으로 주님과 회중을 사랑한다면 개인 기도를 깊고 오래하고, 예배 기도는 생수 터지듯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예배기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이다.
⑺ 장례식에서 목사의 눈에 눈물 흐르게 하라
목사가 가장 영광스러울 때가 바로 장로장례식의 집례이다. 충성된 장로, 온 교회의 사랑을 받던 장로의 죽음은 말이 장례식이지 교회의 영적갱신이 일어나는 또 다른 잔치라 할 만하다. 조객들과 집례자의 눈에 맺히는 눈물은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의 믿음의 행적이 보여주는 감동에 대한 거룩한 답례이다. 이런 장례식은 교회에 힘을 준다. 비록 이별의 아픔이 있지만 만남의 소망도 크기에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선다.
그런데 장례식이 집례 자에게 가장 곤혹스럽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집례 자와 조객, 성경본문과 찬송, 심지어 순서도 동일하지만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바로 고인이 된 장로의 생전의 믿음생활 때문이다. 명목상의 장로였는지, 실제로 장로처럼 살았는지 주님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대놓고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교회 회중이 다 알고 있다. 인생의 결론이 예수 닮은 장로인가? 세상 닮은 장로인가? 자신을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교회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어떤 태도로 살아온 장로인가가 인생의 결론이다. 우리는 인생 최후 순간에 집례 목사의 눈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로가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도/ 초심을 유지하며 충성하는 주님의 종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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