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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글
이 졸고는 하이퍼시를 선호, 주장하는 시인들과 하이퍼시를 공격, 배격하는 사람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쓴 글이다.
5년 전에 최룡관 시인이 한국의 이름 있는 시인 심상운으로 부터 하이퍼시 이론을 배워가지고 연변에 와 하이퍼시를 선전하고 제자들을 배양하였다. 시인들은 이들을 일컬어 “하이퍼동아리”라고 부른다. 최룡관 시인은 고 한춘 시인, 김파 시인과 더불어 시 혁명에서 언제나 앞장서서 달린 사람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면 연변 땅에 하이퍼시라는 것이 늦게 나타났거나 혹은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최 시인의 공로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하이퍼시에 심취한 사람이 20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동아리”라는 말이 어딘가 폄하고 얕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하이퍼시동네”라고 명명하고 최룡관 시인을 동네의 “촌장”을 이라고 부른다. “하이퍼시동네”에서는 “촌장” 최룡관을 주자로 하이퍼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왔고 큰 효과도 보아 5년 사이에 하이퍼시집 4권을 내놓았다. 방산옥이 《연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김파가 《00》를 내놓았고 그 중에 방순애가 《시간은 원이 되어》와 《황금률하이퍼시집》 두 권을 펴냈다. 그 중 《황금률하이퍼시집》은 하이퍼시의 원리를 차용하면서도 그러나 분명히 하이퍼시와는 변별이 되는 혁신적인 시집이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이론에 비추어 자세히 보면 이들이 내놓은 하이퍼시에 하이퍼시가 아닌 것들이 꽤 된다.
헌데 하이퍼시가 나타난 이래 중국조선족시단에는 이를 두고 是非가 난무하였고 이런 시비가 지금도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시비를 한 마디로 개괄하면 “난해성”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사람들은 하이퍼시 기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하이퍼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이퍼시는 순 언어장난이며 시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비들이 成文化되어 지면에 오른 적은 없고 다만 필자가 일부 평글에서 하이퍼시에 대한 견해를 간접적으로나마 약간 피력한 글 세편이 있을 뿐이다. 소위 평론가라는 이름을 띠고 문단의 是非에 대해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것은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나간 후 필자를 비난 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평론가의 소명감 그리고 시문단의 발전을 위해 주저 없이 이 글을 쓰게 된다.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의 하이퍼시는 비난과 공격을 많이 받고 사면초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는 시 혁명의 산물로 존재이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하이퍼시라고 하면 대다수 시인들이 반대를 하고 있을까? 필자는 이 문제를 두고 많이 생각하였고 그 이유를 아래의 몇 가지에서 찾아보았다. 하나는 하이퍼시 다운 시들이 적기 때문이다. 어떤 시들은 설익은 이미지들을 아무렇게나 배열하여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기 바쁘고 어떤 하이퍼시들은 “달을 먹고 해를 먹고”처럼 상상의 방식에서 동시와 비슷하여 동시인지 하이퍼시인지 가늠하기 바쁘다. 하이퍼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동시로부터 문학에 입문했거나 지금도 동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하퍼시가 그 이론에 비해 질이 낮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이퍼시를 선호하는 적지 않은 시인들이 문덕수의 이론- 탈 관념+무의미를 그대로 대입하거나 모방하기에 개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모방작품들은 언어의 폭력조합이랍시고 언어를 제멋대로 비틀어놓아 불필요한 난해를 만들고 있다. 문학에서의 난해는 예술미를 산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난해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난해거나 값싼 언어유희에 머무르고 만다.
한국에서도 서로 비슷한 하이퍼시들이 양산되고 있어 물의를 일으키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술에 공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개성의 훼멸을 의미한다. 이론을 활용하고 보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시인다운 시인으로 될 수 있다. 이 면에서 방순애의 《황금률하이퍼시집》은 보기가 된다. 다음으로 하이퍼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 천진한 사람들이 하이퍼시를 하나의 완성된 문학流派로 誤認하거나 하이퍼시가 최고라고 생각하므로 비난을 받는다. 하이퍼시는 지금 難解와 不通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필자는 미학, 철학, 역사 등 여러 가지 학문에 바탕을 둔 연박한 지식의 축적이 없이는 좋은 하이퍼시를 쓰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하이퍼클럽에서 활동하는 20여명의 회원들 모두 시인이면서 학자이고 평론가들이다. 그들은 하이퍼시를 연구하면서 하이퍼시를 쓰며 저마다 하이퍼시의 새로운 기법을 창조하기 위해 고심한다.
사실 “하이퍼시는 지금 새로운 구조를 실험하고 있는 중”[1]이며 아직까지 하이퍼시론은 완전히 정립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시는 실험 중에 있는 미완성품이지 완제품이 아니다. 이 말은 하이퍼시인들이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말과 통하기도 한다.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에서는 하이퍼 뒤에 즘(sm주의)자를 붙일 그날을 위해 모질음을 쓰고 있다. 즉 하이퍼즘이라는 문학사조로 승인 받기 위해 고심참담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내용, 기법, 형태 등 여러 방향으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논의되어야 할 과제인데 필자도 지금 실험단계에 있어 ‘과정수행 중’이다. 좋은 작품이 생산되어 빨리 새로운 이즘으로 명명식을 갖고 문예사조에 분류될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2]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이퍼시를 현대시보다 한층 높은 類槪念으로 의식하는데 필자는 이들과 달리 하이퍼시를 현대시의 한 갈래로 보고 있다. 한국 하이퍼시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고 권위인 심상문도 이렇게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하이퍼시는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自律的이고創意的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시로서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3]고 말하였다.
하이퍼시는 현대시의 상위개념이나 병렬개념이 아니라 모더니즘, 포스터모더니즘, 쉐르알리즘들과 등과 마찬가지로 현대시의 種槪念이고 下位개념이다.
지금 우리 시단에는 하이퍼시 주장파들과 하이퍼시 반대파들 간에 깊은 불신과 알력의 골이 패어져 있는데 그 골을 메우려면 사실은 간단하다. 주장파들은 대방이 승복할만한 합격된 하이퍼시를 내놓으면 될 것이고 반대파들은 하이퍼시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하지 말고 우선 하이퍼시에 대해 기본지식을 상식으로나마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반박의 근거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 혹시 우점을 찾는다면 차용하여 자기의 시를 더 충실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김철호 선생이 필자에게 “나의 시를 충실히 하기 위해 하이퍼시를 공부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자세가 아주 좋다고 생각된다.
상술한 몇 가지 의도를 깔고 하이퍼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본 글은 한국의 하이퍼시의 주요 멤버이며 최근 하이퍼시의 탐구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는 李善의 理論을 논제의 의거로 삼았으며 필자도 하이퍼시를 배우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부언한다.
2.하이퍼시에로의
접근과 이해
하이퍼문학은 전자공업의 발전과 함께 태어났다. 1962년에 컴퓨터 개척자인 레오날드 넬슨이 처음으로 “하이퍼텍스트”란 말을 하였고 1992년에 미국 작가 죠지 렌드가 처음으로 《하이퍼텍스트》라는 이론저서를 펴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리좀이라고 불리는 망상형(網狀形: 그물모양의 상태)을 구축하여 언어의 의미를 연결한다. 우리가 익숙히 아는 아날로그시는 수학에서의 십진법인 12345678910처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따라서 의미類推가 가능하다. 즉 1다음에 2일 것이고 2다음에는 3일 것이고 3다음에는 4가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하이퍼시는 디지털기법을 채용하여 뜀 띄기를 하며 따라서 의미단절현상이 나탄난다. 간단히 설명하면 아날로그는 연속을 의미하고 디지털은 순간이나 불연속을 의미한다.
예하면 13579는 2진법이다. 컴퓨터의 모든 프로그램은 2진법이다. 4진법에서는 10+3=7이 되고 102진법에서는 10+3=105가 되며 1255진법에서는 10+3=1258이 된다. 5진법에서 4x4=31이 되고 7진법에서는 4x4=22가 된다. 한마디로 디지털기법을 차용한 하이퍼시는 연속적인 이음이 아니라 단절의 상태이다. 이 단절의 상태를 뜀뛰기 기법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난해가 생긴다. 단절의 공간이 길고 멀수록 난해도가 높게 나타난다.
문덕수는 하이퍼시를 탈 관념과 무의미로 정의하였고 그 특징을 탈 관념사물과 상상이미지가 연결된 구조의 시라고 하였다. 하이퍼시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심상운은 문덕수의 이론을 더 구체화하여 다선화, 다초점, 다시점을 제창하였다. 심상운은 《단선화에서 다선화에로》 라는 논문에서 하이퍼시의 요소를 9가지로 정리하였고 옴니버스형식(한 마차에 여럿이 탄 형식: 필자 注)의 사물시들을 창작하였으며 실험을 통해 다초점과 이미지의 집학적 결합을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이퍼시클럽에서 내놓은 《하이퍼시》 제3집에서는 하이퍼시의 특징을 “형이상학이미지의 세계에로의 비약을 목표로 서정시나 관념적사유의 시와는 다른 시적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고 천명하였다. 최근에 한국 하이퍼시클럽의 맹장인 이선이 《하이퍼시창작기법》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다. 그는 문덕수, 심상운, 김규화, 오남규 등의 이론을 종합한 다음 미술의 회화적요소를 차용해 새로운 하이퍼시기법을 일곱 가지로 내놓았는데 아주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기타의 하이퍼시론에 긍정을 하면서도 한계점을 지적하였고 자기의 이론을 증명할만한 시작품도 소개하였다.
그는 단순한 “무의미”에 悔意를 던지며 심상운이 다선화에서 말한 다시점, 다초점과 변별이 되는 다시점, 다초점과 상상력의 이동이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심상운의 다시점, 다초점은 평면상의 다시점, 다초점이며 자기가 주장하는 것은 겹쳐그리기 기법, 움직이는 그림의 기법(상상력의 이동)이며 따라서 입체로서의 다시점, 다초점임을 밝혔고 자기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작품도 내놓았다.
특히 그가 제기한 “디자인바꾸기”라는 창조적인 신조어가 아주 신선한 느낌과 함께 설득력을 안겨주고 있다. 그는 “디자인바꾸기”에서 감정의 개입도 실험하였다.
그가 미술의 회화요소를 차용하여 만들어낸 일곱 가지 하이퍼시 창작기법은 아래와 같다.
첫째, 정물화기법-“탈관념”
둘째, 겹쳐그리기기법-“다시점”, “다초점”,“다선화”
셋째, 움직이는 그림기법-“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보스기법-“낯설기 하기”(옴니버스란 여럿을 태운 마차 즉 합승버스를 말한다. 필자 注)
다섯째, 기호시기법 -“무의미”
여섯째, 모지이크기법-“이미지결합”
일곱째, 추상화(구성)기법 -“시스탬(디자인) 바꾸기”
아래에 위의 창작기법들에 의해 써진 하이퍼시들을 일부 소개한다.
빨간 저녁놀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에 실은
유리컵을 지켜보고 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시는 탈관념, 무의미시인데 李善은 정물화기법의 사물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사물시다. 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빨간 저녁놀’, ‘재떨이’, ‘서 있는 사나이’, ‘유리컵’, ‘담배’, ‘육각형성냥’, ‘라이터’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작가는 자기의 감정을 담지 않고 냉정하게 ‘정물화’를 그린 듯 탁자주변의 상황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여기에 관념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건조하고 딱딱한 사물들의 ‘정물화’는 무념무상이다.” “어떤 사건이 ‘침묵하는 사물’들의 배후에서 음모처럼 숨어 있다.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도 시적 긴장성을 갖도록 배치한 것은 작가의 저력이다. 작가의 숨은 의도는 한껏, 독자의 호기심을 부추겨 놓고는 짐짓 모르는 척 ‘새침데기’다.”
필자는 이 시는 하이퍼시 연구용으로는 훌륭한 시나 너무나 ‘냉혈’적이어서 독자 획득에서는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아래의 시는 겹쳐 그리기 수법으로 쓴 다시각, 다초점 시다. 시스템의 변화는 새로운 시 창작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운 철학이다. 겹쳐 그리기 수법을 운용한 故 오남규의 시 한수를 읽어보자.
비, 비, 파란 신호 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짝팔짝 숨을 쉰다. 에워싼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로운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세우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가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오남구,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이 시는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처럼 여러 방향을 한 지면에 표현한다. 앞과 뒤, 옆을 다 보이게 그리는 방법론이며 횡적구성의 요소를 지닌다. 여러 방향에서 관찰하고 직관하여 한 화면 우에 펼쳐 놓은 그림이다.
팔딱팔딱 숨을 쉬는 비, 단단한 비, 날카로운 날을 세운 비, 수직으로 솟는 비, 수평으로 퍼지는 비,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지는 비, 시인은 비를 직관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본다. 직관의 날카로움이 사물성의 비가 변화하는 모습을 생동하게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운동성이다. 아날로그시의 그림이 정지된 “정물화”라고 한다면 하이퍼시의 그림은 “움직이는 정물화”이다. 위상진의 《사진촬영금지구역》도 겹쳐 그림의 수법을 채용한 것이다.
마그리트그림 속, 눈 하나가 방에 가득 차있다.
어둠의 속눈썹을 따라 들어가면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처럼 내 얼굴에 떨어진다
-위상진,
《사진촬영금지구역》 제1연
빛이 얼굴에 쏟아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층위적이 묘사를 하고 있다. 이 시는 미술의 겹쳐 그리기 수법을 채용한 다시점, 다초점의 시로써 단일구성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복합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시를 쓸 때 사물성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관념에 층위를 여러 개 두면 넋두리시가 된다.
겹쳐 그리기 수법으로 쓴 위의 두 수의 시는 이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으나 과잉 무의미로 하여 독자와의 소외 내지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아래의 시는 움직이는 그림그리기의 수법, 상상력의 이동으로 쓴 秀作이다.
이젤(그림 그릴 때 화판을 고정시키기 위한 받침대: 필자 注)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게 하고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파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김규화,
《한강을 읽다》 전문
필자는 지금까지 많은 시들을 평했지만 시인의 관점이 아니라 사물의 관점(한강)에서 사물을 관철하는 시는 처음이다. 한강이 거꾸로 서서 이젤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는 역발상이 대단히 돋보인다. 강물에 비낀 아파트그림자를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이라고 한 묘사, 물결에 그림자가 지워지는 것을 강물이 “단숨에 지우고/짐짓 흔들어 본다”고 한 표현, 하늘이 강에 비낀 모습을 “하늘을 제 가슴깊이 클릭하고”란 표현은 상상의 공간과 동적이미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한 표현들이라 하겠다.
특히 시 마지막부분에 놓인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한강은 우리를 지운다”에서는 현실과 정서적 표현이 녹아들면서 심상에 한 폭의 그림이 생기게 한다. 李善의 말을 빌면 이 시는 “시간이동”, “공간이동”, “상상력의 이동”등 수법을 채용한 시다. 하이퍼시는 정서개입을 반대하지만 필자 보건대 이 시는 은근하게 어머니를 그리는 시인의 감정이 스며있는 것 같다. 하기에 필자는 무조건 탈감정을 내세우는 하이퍼시의 이론에 대하여 여직 이의(異意)를 품어왔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한강을 읽다》를 하이퍼시의 명작으로 추천하고 싶다.
다음은 양준호의 모자이크시 즉 이미지결합시를 볼 차례다. 모자이크란 여러 가지 색상의 돌과 유리조각, 기와조각(陶片)들을 평면에 늘어놓고 몰타르나 석회 혹은 시멘트 등으로 접착시켜 무늬나 그림모양을 표현하는 기법이며 공예품에서는 표면에 회화효과(繪畵效果)나 장식성을 나타내는 미술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다는 뜻인데 李善은 이런 기법으로 이미지집합을 설명하고 있다.
바람은 비늘 흔든다 귓속에
파란 새 날아간다
꽃은 피어라 말의 콧등에도
소금은 준비 되었을가
뼈들 파도초럼 춤춘다
눈알만 남아 귀만 남은
고무공 뛰여간다
-양준호,
《비상구》 전문
이 시는 문맥이 전혀 통하지 않으며 메마른 언어들이 멋대로 충돌하고 있다. 이런 시에서 의미를 추구하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이 시에 대하여 李善은 전혀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과 투척으로 만들어진 언어그림이고 단절과 단절의 절대고독의 이미지로서 이 시에서 구태여 의미를 추구할 필요가 없고 단지 슬픈 현대인의 모습과 “은둔”, “고독”을 썼다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 말은 어딘가 억지 풀이로 느껴지며 자가당착이라고 말하고 싶다. 까닭은 “현대인의 슬픈 모습”이나 “은둔”, “고독”이 바로 의미풀이, 즉 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미의 시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옴니버스형식을 차용한 심상운의 하이퍼시 《맨살에 링크하기》를 볼 차례다. “링크”란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말로서 연결을 의미한다. 심상운은 인터넷의 링크의 기능과 리좀(그물모양의 망상형: 필자 注)을 하이퍼시에 도입하여 두 가지 방향성 교환이론을 정립했다. 《맨살에 링크하기》는 옴니버스기법으로 쓴 소설적 하이퍼시다.
근년에 필자가 퓨전문학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지만 21세기는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퓨전을 떠나지 못하는 시대이다. 심지어 축구마저도 퓨전축구이다. 중국의 16개 슈퍼리그 팀을 보면 어느 팀이나 외국인 선수가 5,6명씩 된다. 시도 소설적 하이퍼시, 수필적 하이퍼시, 동화적 하이퍼시……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상운의 《맨살에 링크하기》가 바로 옴니버스기법으로 쓴 소설적 하이퍼시다.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 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 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사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을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뜩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 심상운,
「맨살에 링크하기」전문
이 시는 옴니버스기법으로 낯설기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시는 연과 연 사이에 애매하게마나 아날로그적성분이 있으며 따라서 의미유추가 불가능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꽁치도 맨살, 비누도 맨살, 두 마리 열대어도 맨살 아닌가. 이 맨살이 링크의 역할을 하면서 각 연을 이어주는 것 같다. 이 시에서 묘한 것은 마지막에 갑자기 어깨를 감싸 안은 두 청춘남녀를 등장시켜 화끈거리는 어떤 장면을 예시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필자는 이 시를 아날로그와 디지털기법의 융합이라고 보며 따라서 이 시는 “무의미”한 시가 아니라 “유의미”의 시라고 본다.
아래에 소쉬르의 기호학에 바탕을 두고 쓴 이선의 시 《( )와 ( )사이에》라는 기호시를 보자.
소쉬르에 의하면 기호는 원래 무의미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변한다. 우주라는 객관적 세계에는 고정된 방향이나 上下가 없다. 지금까지 “동쪽”을 “동쪽”이라고 부르고 “서쪽”을 “서쪽”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합의된 인류의 집단주관에 의해 그렇게 된 거다. 사실 “동쪽”을 “동쪽” 대신 “서쪽”이라고 부르면 바로 “서쪽”이 되는 것이고 “서쪽”을 “서쪽”이 아니라 “동쪽”이라고 하면 바로 “동쪽”이 되는 것이다. 화폐도 마찬가지다. 1원짜리가 1원이 되고 5원짜리가 5원이 되는 것은 인간이 법률적으로 그렇게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일단 법률적 약속이 폐기하면 화폐는 쓸모없는 종잇장에 불과하다. “순이”라는 이름(기표, 基標) 대신에 여러 가지 이름을 다 붙여도 기의(基意) 즉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호는 단지 기호일 뿐이고 의미는 없다. 이선은 바로 이러한 소쉬르의 기호이론을 하이퍼시에 새롭게 차용하고 있다. 아래에 나오는 시를 읽을 때 독자는 괄호 안에다 모든 의미를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 ]사이로
빌딩이 자란다
가로수, 긴 [ ]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먹어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입맞춤과 포옹은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괄호()가 화르르, 열린다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고
-李善,
[()와 ( ) 사이에] 전문
상술한 시에 대해 작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새로운 ( )기호시를 시도한 것은 무의미한 기표인 ( )를 시에 도입하여 언어와 사물, 관계의 무의미를 ( )화 하여 하이프적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의미적으로 해석되는 사물을 ( )역으로 추적해본 거다. 본래의 사물의 의미와는 상관없는 기표를 ( )로 사물화 하여 보았다.”
앞으로 이런 시가 독자들의 환영을 받겠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단 한 가지, 모험적인 실험정신만은 긍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하이퍼시에는 바로 이러한 창의정신과 모험정신이 결여하다.
하이퍼시의 창작기법에서 필자가 가정 수긍하는 것이 몬드라이수법(추상화수법) 즉 디자인 바꾸기 수법이다. 까닭은 이런 기법에는 정감이 어느 정도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감이 철저히 배제된 시는 미이라와 같은 시라고 생각하기에 반대한다. 누가 미이라처럼 차디찬 시를 포옹하거나 키스를 하려 하겠는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필자는 최룡관 “촌장”과 여러 번 논쟁을 벌였지만 번마다 항상 승부가 미지근하였다. 오늘 필자의 주장과 많이 통하는 이론을 만나게 되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하이퍼시라면 우리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디자인 바꾸기수법(추상화수법)으로 씌워진 시를 소개한다.
개미가 벌에게 엉뎅이를 냅다 쏘였다
이를 악물고,
입술이 노랗게 물들도록, 호박잎을 물어뜯는데
(“꿀맛 좋니?”-귓속말로)
오랫동안 기우뚱한 안방 벽이
너덜너덜 갈라지고 금이 간, 간너방 벽에게 묻는다
(“나한테 너무 오래 기대고 살지 않았니?”-귓속말로)
숫모기만 보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애- 앵 앵앵, 암모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끈질긴 구애
여자 뒤통수치기녀왕모기, 그녀
(“질투도 힘이니?”-귓속말로)
초승달이 허공에 밀려
헛바퀴 돌아, 돌아
구구로 매달려, 그믐달로 서있네요
(“하늘이 노랗게 보이니?”-귓속말로)
하이힐 소리 또각또각, 입술 빨간 꽃바람
피사의 탑에 미- 쳐서 리포트를 못 썼다나?
빨간 하품이 강의실 앞 붉은 장미가시에 걸렸다가
억대 소나무에 걸렸다가,
초록잔디밭 위를 떼구르르
대학정문 대자보에 걸렸다구요?
보석 자랑? 차 자랑? 구찌핸드백 자랑? 꽃바람
맨 먼저 대학교단에 선다고?
(“쯧 공부해서 남 주니?”-귓속말로)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잎 베어물고
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
(“후욱 불어버릴까?”-귓속말로)
보슬비, 눈썹에 내려앉아 가볍게 소곤댄다
(“슬픔도 키스처럼 부드럽지 않니?”-귓속말로)
-李善,
〈《귓속말하기》 -때, 장소, 시간, 그리고?〉전문
상술한 시는 다른 말로 몬드라인 기법, 혹은 추상화기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몬드라인은 네덜란드의 유명한 추상파화가인데 그의 작품은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무늬로 예술적미를 창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순수하다. 그는 엄격한 기하학언어로 최고의 순수함을 창조하려고 하였으며 명쾌함과 힘의 유토피아를 이룩하고자 했다. 예문에 올린 위의 시는 아무리 보아도 눈길을 모으게 하는 유표한 시다. 특히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잎 베어 물고/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는 표현은 기막히게 좋아서 기막히게 칭찬해주고 싶다. 시인은 디자인 바꾸기(시스템 바꾸기)라는 새로운 형식의 하이퍼시를 창작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필자의 졸시 《귓속말하기》는 시의 디자인을 바꾸고자 고민한 시다. 하이퍼시가 무의미한 단어들의 조합이나 연과 연의 독립된 단절만 추구한다면 똑같은 이미지와 형식의 시들이 양산될 것이다. 의미추구의 시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쉽게 쓸 수도 있다. 아무렇게나 단어를 던지기만 하여 시가 된다면 말이다. 개성을 추구하다 비개성적인 작품들만 양산될 수 있다. 하이퍼시는 이름만 가리면 누구 시인지 모른다는 비난을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이퍼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 말은 하이퍼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의미한 단어들의 폭력조합이나 연과 연의 독립된 단절만 추구하는 우리의 하이퍼시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시는 디자인과 시스템 바꾸기(변화)를 실험적으로 시도한 작품이며. ‘추상화 그림’ 기법으로 ‘몬드리안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성공한 시의 사례라 하겠다.
이야기조로, 동화적으로 그리고 유머와 해학으로 꾸며진 이 시는 아주 흡인력이 있고 재미있으며 낯설기를 하면서도 은근하게 감정이 개입되었고 의미유추가 가능하다.
시는 각 연이 하나의 독립된 언어의 색깔로 주조되어 있고 또 시인의 주관입김(정서 혹은 감정)이 해학과 유머에 앉아 은은한 향기로 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아날로그시기법과 디지털기법이 결합으로 이루어진 하이퍼시이며 의미유추와 독자와의 소통도 가능한 시다. 이런 시를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이 것이 우리의 하이퍼시인들이 쓰고 있는 하이퍼시와의 다른 점이다. 시에 등장하는 “벌” “꽃바람” “빨간 하품” “나뭇잎” “보슬비” 등은 각이한 장소, 각이한 시간에 벌어지는 다른 이야기들을 전개하면서 울긋불긋한 입체그림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이 시의 주제와 창작동기에 대하여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이 시는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잔혹하고 비밀스런 속성을 드러내어 폭로하고 싶었다. 소통이 되는 의미추구와 디자인은 ‘추상화(구성)기법’으로 하이퍼적이고자 시도하였다. 하이퍼시가 무의미만 추구한다면 몰개성을 초래하여 새로울 것이 없어진다.”[4]
이 말을 필자는 시에 일정한 감정색체를 부여하여 의미가 있는 하이퍼시를 창작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상으로 하이퍼시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 짓고 다음 화제로 옮긴다.
3. 하이퍼시의 문제점
-난해, 그리고 불통
위에서 필자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하이퍼시의 맥락을 고찰하여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이퍼시는 우점도 있고 결합도 존재한다. 하이퍼시는 이때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시 창작기법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탈관념, 무의미로부터 생기는, 불통(不通)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특히 일부 하이퍼시들은 연과 연사이의 단절이 절제가 없이 마음대로 전개되어 의미포착이 전혀 불가하므로 독자에게 짜증을 준다. 하이퍼시인들에게는 그 것이 법보로 될지는 몰라도 광대한 독자들한테는 몰리해의 근원이 되고 배격의 요인으로 되고 있다. 필자는 만약 하이퍼시가 변화가 없이 그냥 현재의 작시법을 고집한다면 그 것은 단지 소수 사람들의 연구용으로 될 뿐 광범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로 되기에는 바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탈관념과 무의미가 그 자체에 머무르지 말고 탈관념 속에서 관념을 찾아낼 수 있고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으로 되어야 하며 피가 없고 온기가 전혀 없는 미이라가 되지 말고 인간의 입김과 향기, 감정이 다문 얼마만이라도 녹아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하이퍼시들을 보면 좋은 시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하이퍼시가 사면초가에 빠지고 냉대를 받는 것은 주로 “불통(不通)”에 있다. 하이퍼시가 나오면서 한국문단에는 오랫동안 묻혀있던 “난해시”라는 말이 다시 불거져 나오고 있다. 하이퍼시 반대파들은 공격의 중점을 언어의 남용, 폭력조합, 그리고 이로부터 초래된 난해와 불통에 두고 있다. 우리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거의 백분의 95%이상의 시인들이 하이퍼시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하이퍼클럽에서도 큰 고민을 하고 있으며 대중과 소통이 되는 하이퍼시를 쓰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실험하고 있다.
하이퍼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한 평론가의 글을 살펴보자.
“진솔하게 토로하건데, 30년 넘게 시 평론을 해온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시들이 많다. 대충 짐작은 되지만, 그 시의 방향이나 의의(?) 즉 존재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시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 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고등학교 학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분노(?)하며 버린다. 그들은 눈 깜짝 하지 않겠지만. 과격하게 말하면 그 것들은 쓰레기 같은 시다…… 시를 단 한 명의 독자가 향유하더라도 그 시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많은 시들은 죽어 있다. 사체가 되어 썩어가고 있다. 그 것들은 태어날 때 생명을 담보로 한 치열한 정신으로 써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생명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썼기 때문이다.[5]
어떤 이는 하이퍼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언어의 초월주장(언어의 폭력조합: 필자 注)에 대해 異의를 제기한다.
“하퍼퍼시도 시인만큼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예술인 시가 언어를 초월한다는 것은 모순을 지니게 된다……
하이퍼시는 어디까지나 실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문화적 격변기에 구태를 벗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실험한다는 것은 시사적으로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6]
이선은 독자와의 소통공간을 넓히고 참여의 폭을 넓히기 위해 ‘상상력의 이동’ 수법을 잘 운용하여야 하며 언어에 감정이라는 디자인을 입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예술미라는 전제를 떠나 언어의 폭력조합이랍시고 언어를 마구 잡아비트는 것도 독자와의 불통을 인기하는 한 요인임을 귀띔한다.
“하이퍼시는 의미추구의 시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쉽게 쓸 수도 있다. 아무렇게나 언어를 던지기만 하면 시가 된다면 말이다…… 하이퍼시는 이름만 가리면 누구 시인지 모른다는 비난을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이퍼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변화가 필요하다.”[7]
심상문도 하이퍼시가 현실과 너무 일탈하면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배척현상이 일어남을 염두에 두고 현실과 추상을 결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영감(詩的靈感)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극복해야할 과제가 남는다.”
“그래서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을 소통의 바탕이 되고, 독자들에게 의미유추(意味類推)의 즐거움도 안겨주는 시적 소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기법으로 하이퍼시는 다선구조(多線構造) 속에 ‘현실과 초월의 결합’이라는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서사적(敍事的) 이미지 속에 의식과 무의식의 자연스런 합성공간(合成空間)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것은 하이퍼시가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이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초월’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합성’을 계기(契機)로 하여 새로 열리는 의미의 공간은 기존의 시와 차별화를 이루는 공간이 되고 있다.”[8]
우의 글에서 우리가 중시하여 볼 대목이 “서사적(敍事的) 이미지”와 “합성공간”이다. 이 말은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지 말고 현실과의 소통을 위한 그 어떤 문학기제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하이퍼시를 선호하는 우리의 어떤 시인들은 하이퍼시 기성이론에 너무나 충직한 나머지 그 것을 마치 철칙이나 법보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위의 말들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퍼시는 지금 실험단계에 처해있으므로 내용, 형식, 수법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 같다.
필자는 하이퍼시의 불통의 관건이 지나친 뜀질(단절과 폭력조합) 과 무의미에 있으므로 하이퍼시가 뜀질의 거리를 적당히 하고 정서개입도 적당히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최룡관 시인과 몇 번 마찰이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는 소통에 대하여 전혀 문제시하지 하였다. 그는 시의 왕국에서 시인이 왕이므로 시인이 즐기면 되는 거지 다른 사람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그렇다면 혼자서 즐기면 될 것이지 왜 하필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내려고 하는가. 인간은 진공상태가 아닌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어우러져 살기에 아무리 탈관념, 무의미를 주장해도 해도 작품에 다다소소히 정서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론을 받아들일 때 시대적 상황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염두에 넣어야 한다. 누가 시인을 “왕”이라고 한 것은 시에서의 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인데 앞뒤이야기를 다 빼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구절만 액면그대로 받아들여 논거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필자는 우리의 하이퍼시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첫째, 명실공히한 하이퍼시가 적기 때문에 하이퍼시가 소외를 당한다. 둘째, 난해성이 지나치기에 배척을 받는다. 그러므로 과도한 단절이나 무분별한 언어폭력조합을 자제하고 예술미를 체현하는 정도에서의 단절이나 언어폭력조합에 신경을 써야 한다. 지나치다는 건 극한을 의미한다. 극한의 끝은 훼멸이다. 바이올린 줄도 너무 세게 조이면 끊어진다. 음악에 저음만 있거나 고음만 있다면 그 것은 음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에서도 일정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거기에서 소통의 문이 열린다.
4. 끝내는 말
하이퍼시는 새로운 시 형식으로서 그로만의 우점이 있다. 우리가 채납할 것은 상상력의 이동, 이미지 집합적 결합, 다초점, 다시각, 다지인(정서) 등 새로운 기법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하이퍼시가 나오기 전부터 몽롱시를 비롯해 기타의 현대시에서 다다소소히 상술한 기법들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 되며 오늘의 여타의 시인들도 그런 기법을 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다고 하여 그들이 하이퍼시 기법을 차용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반대로 하이퍼시가 현대시에서 하이퍼적 요소를 흡수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필경 하이퍼시가 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는 우점이 있으면서도 난해와 무의미, 정서배격 등 치명적인 결함도 안고 있다. 이러한 결합들을 미봉하기 위해 현재 한국의 하이퍼시인들이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하이퍼시인들도 이렇게 하길 바란다.
아무튼 13억 한족들에게 없는 하이퍼시가 2백만이 되나마나한 중국조선족에게 있다는 것은 자긍할만한 일이다.
필자는 하이퍼시는 절대로 쓰기 쉬운 시가 아니라는 견해다. 필자가 위에서도 말했지만 철학, 미학, 역사를 포함한 다방면에 걸치는 풍부한 지식과 오랜 시간에 걸치는 깊은 탐구가 없이는 좋은 하이퍼시를 쓰기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하퍼시론은 현재 실험중이고 연구 중에 있으며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 졸고가 하이퍼시를 주장하는 시인들과 하이퍼시를 반대하는 시인 모두에게 자그마한 계시를 주고 이해에 도움을 주다면 무척 반갑겠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공부한다는 입장에서 이 글을 썼다.
이선의 말로 본문을 마무리 짓는다.
“하이퍼시는 내용, 기법, 형태 등 여러 방면에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논의 되어야 할 과제인데 필자도 지금 실험단계에 있어 ‘과정수행’중이다. 좋은 작품이 생산되어 빨리 새로운 즘으로 명명식을 갖고 문예사조에 분류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하이퍼시는 시인과 비평가들의 공격과 혹독한 질문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하이퍼시는 완성되지 않았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여야 한다.”[9]
[주]
1. 이선, 《하이퍼시 창작기법》 .
2. 이선, 《하이퍼시 창작기법》.
3. 심상운, 《하이퍼제시집제3권》 서문.
4. 이선, 《하이퍼시 창작기법 》.
5. 유한근, 《하이퍼시는 난해시》.
6. 신규호, 《서정시에 대하여》.
7. 심상운, 《하이퍼제시집제3권》 서문.
8. 《하이퍼시 창작기법》.
9. 《하이퍼시 창작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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