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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이 사망하다
1922년 9월초의 어느 날, 민석린이 황급히 이동녕과 김구를 찾아와서 신규식의 병이 위중하다고 알렸다.
김구와 이동녕이 부랴부랴 민석린을 따라 신규식의 거처인 프랑스 조계지 어양리(漁陽里)로 향했다.
두 사람이 신규식을 생각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신규식은 풍전등화 같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만구하려고 침식을 잊어가며 노심초사 하다가 끝내는 지나친 과로로 심장병과 신경쇠약에 걸렸던 것이다. 그의 병세를 두고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 이들이 안창호, 이동녕, 조소앙, 김구, 박은식 등이었다.
신규식은 열렬한 애국자였고 견강한 독립투사였으며 저명한 시인이고 학자였으며 임시정부의 건립과 유지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으며 한인혁명가들 중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신임 받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민석린은 신규식에 대해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무릇 전에 신선생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그의 매섭고도 날카로운 눈과 카이저식 구레나룻 및 예쁘장하게 가꾼 말쑥한 턱밑수염을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선생의 바른 쪽 눈은 처참하고도 원한에 찬 옛날을 담고 있는 듯 언제나 흘겨보셨고 그 품이 마치 선생 가슴 속에 사무친 끝없는 분한(憤恨)과 정열과 아울러 영혼의 고통과 호소 및 피눈물과 쓰라린 고생과 투쟁을 비쳐내는 듯 했다. 신선생의 카이저식 구레나룻은 이미 선생의 강철 같은 의지와 강인한 투쟁심과 백절불굴의 담대한 무겁심(無怯心) 및 용감하고 호매하고 견절(堅節)함을 상징하고 있다. 선생의 예쁘장한 턱밑수염은 지그시 눈과 구레나룻의 엄하고 사나운 기상을 풀어주고 아울러 종교가의 자애와 관후와 연학(硏學) 및 화평을 엿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수다한 세월을 이리저리 표박하셨고 험한 길을 전패(轉沛)하며 유량하셨으며 일생을 두고 간난신고 하셨으므로 원래 크고 말쑥한 키가 더욱 야위고 후린해졌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소년시대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으셨고 언제나 몸가지심에 있어 끝끝내 군인의 규율과 단정을 간직해 지키셨으므로 선생에게는 일종의 장엄하고도 위대한 기상이 떠돌았다.”[1]
이러한 신규식이었기에 심지어 이승만마저도 신규식의 재능과 애국심과 인간 됨됨이에 대하여 존경하고 탄복하고 신임하였다. 임시정부 성립 초기 파벌투쟁이 아주 심했다. 1920년 상해에 온 이승만은 총통의 권한으로 각 파 지간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는 신규식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예관 선생은 다년간 이역타향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겪었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모든 것을 독립투쟁에 바쳤으며 종래로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심대로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이에 나는 진심으로 탄복합니다. 나는 오늘 원동 일로 하여 미국으로 떠나면서 모든 걸 선생에게 맡기려 합니다.”[2]
이리하여 이승만이 떠난 후 신규식이 대리 국무총리 겸 법무총장과 외무총장을 맡게 되었다.
신규식은 1880년 2월 22일, 충청북도 문의군(文義郡) 동면(東面) 계산리(桂山里)에서 태어났다. 호로는 예관(猊觀), 청구(靑丘), 한인(恨人), 일민(一民)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신정(申禎)으로 많이 통했다. 신규식은 3세에 한자를 깨우쳐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8세 미만에 사서오경을 독파했고 한시를 잘 썼다. 15세에 「척왜격(斥倭檄)」,「벽사(僻邪)」 등 글을 지어 제국주의 열강과 싸울 것을 호소했다. 17세에 관립학교에 들어가 한어를 배웠으며 20세 때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자결을 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오른 쪽 시신경을 다쳐 똑바로 보지 못하고 흘겨보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그는 왜놈을 흘겨본다는 뜻으로 스스로 예관(猊觀)이라고 불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또 음독자살을 하려 했지만 대종교 종사 나철(羅喆)에 의해 구원되었고 얼마 후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온 후 상해에서 진보신문 『민립보(民立報)』를 통해 중국의 혁명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민립보』는 중국의 유명한 혁명지사인 우우임(于佑任)이 창간한 신문으로 그 신문이 인연이 되어 중국동맹회 회원들인 송교인(宋敎仁), 진기미(陳其美) 등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들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나라 잃은 조선민족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중국적에 입적하고 이름을 신정(申禎) 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인 최초로 신해혁명에 참가하였고 그 과정에 중국의 많은 진보인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중국혁명의 후설인 『민립보』가 자금난으로 허덕일 때 수중의 거액의 자금을 서슴없이 내놓아 수많은 중국인 지사들이 감개무량해 하였다.
신해혁명이 실패한 후 신규식은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의 혁명단체인 『남사(藍社)』에 가담했고 거기서 유아자(柳亞子)[3] 등 진보적인 문인들과 두터운 우정을 맺었으며 수차례 『남사』의 시인모임에 참가하여 격정이 도도한 주옥같은 시들을 내놓았다. 『남사』에 가담한 후 얼마 안 되어 신규식은 『남사에 부쳐(寄藍社)』라는 시를 지어 유아자 선생에게 부쳤다.
샛바람 몰아치니 물결도 사나운데
이 나라는 아직도 깊은 밤 못 깨누나
예로부터 연남에는 강개지사 많았건만
오늘은 상해가 문명의 요람이구나
슬프도다 국권 잃고 전철을 밟은 것이
무능한 이 몸을 저주할 뿐이어라
눈물로 적셔온 고통스런 5년이여
아득해라 어디에서 구원을 바랄손가
당시 군벌혼전으로 험악한 중국의 현실과 망국의 한을 통탄한 시다. 이 시를 보고 유아자 선생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예관선생은 뛰어난 시인이자 견강한 혁명자입니다. 우리 남사의 여러 사람들은 선생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신규식은 손중산과도 우정이 두터웠다. 손중산이 남경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했을 때 신규식은 격동되어 일필휘지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촉산오수의 길 평탄치 않아도(荊天荊地一身經)
그대는 가시덤불 헤쳐 왔어라(楚山吳水路不平)
피어린 싸움으로 키워온 포부(鐵血疆場當日願)
만백성 모두다 그대를 환호하네(數千萬口是同聲)
신규식은 1912년 7월,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 반일비밀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발기 결성하였다. 본부를 상해에 두고 북경, 천진, 만주 연해주, 구라파, 아메리카, 일본 등지에 지사를 두었으며 본부에는 이사장과 총재를 두고 지사에는 사장과 간사를 두었다. 본부 사장에 신규식, 총재에 박은식이었다.『동제사』의 주요 멤버로 활약한 이들로는 홍명희, 문일평(文一平), 박찬익(朴贊翼)등이었다.
1913년 초에는 또 중국혁명 세력의 지원을 받기 위해 『신동제사(新同濟社)』를 창립했다. 『신동제사』 순수 조선민족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돕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진기미가 감독을 맡고 다수의 중국인 혁명인사들이 가담하였다. 주요 인사들로는 송교인, 호한민(胡漢民), 요중개(廖仲愷), 추로(鄒魯), 대계도(戴季陶), 진과부(陳果夫), 풍옥상(馮玉祥), 손과(孫科), 오철성(吳鐵城) 등이다. 이들은 후에 모두 국민당의 고위급 인사들로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중한 두 나라 혁명자 지간에 맺어진 두터운 우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규식은 또 문무가 겸비한 독립투사들을 배양하고자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창립해 100 여 명의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학교의 교원들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 혁명가들인 박은식,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조성환 등이었고 중국인 농죽(農竹)과 미국화교 모대위(毛戴衛)도 있었다. 『남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신규식은 『한국혼』, 『이순신장군』, 『안중근』 등 책들을 집필했으며 한시도 많이 썼다. 그 때 쓴 한시 160 여 수는 모두 『아목루(兒目淚)』에 수록되어 있다. (兒目淚)란 나의 눈에서 눈물이 난다는 뜻 혹은 나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로 쓰는 시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신규식의 작품에서 『한국혼』은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한국독립투쟁에 거대한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중문으로 되어 많은 중국인 지식분자들의 사랑도 받았다.
글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내가 『한국혼』을 저술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쌓여있는 깊고 한없는 슬픔 때문이어니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노라. 느끼는 대로 서술하는 것이니 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도다. 바라건대 동포들이여, 모두 가슴속 깊이 느낀 슬픔을 영원히 마음속에 기억해 망국의 치욕에서 벗어날지라!”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가장 간고하고 혼란스런 시기에 대리총리, 외교총장, 법무총장 직을 맡고 수많은 고생을 겪었다. 이때 그가 한 일 중에서 가장 큰 공적은 호법정부 총통 손중산을 알현하고 국서를 봉증하여 호법정부로부터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은 것이다. 신규식은 또 대한임시정부가 세계의 승인을 받기 위해 워싱턴에 보내는 『요구서』를 작성하여 손중산에게 주어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그것도 안심되지 않아 손중산에게 편지를 하여 회의 때 한국임시정부를 위해 좋은 말을 많이 해달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다. 한편 『중화민국의 제군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인도주의, 세계평화, 국제신의, 한중관계 등 각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이 한국의 독립투쟁을 지원하여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논술하였다.
민석린이 어양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김구와 이동녕에게 말했다.
“선생은 혼수상태에서도‘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럼 잘 있으시오! 친구 분들이여…… 나는 그만 가겠습니다.’하고 반복하셨습니다. 임시정부의 혼란 상태를 두고 그렇게도 걱정스러워 했습니다.”라고 고통스럽게 되뇌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김구와 이동녕의 마음이 칼로 찌르는 듯 괴로웠다. 오죽하면 혼미상태에서도 임시정부를 외웠으랴. 임시정부의 분열현상이 여러 사람들이 제 이익만 챙기려고 아웅다웅한 탓이지 어찌 그의 탓이랴. 참으로 천고에 드문 애국자였다.
그날 이동녕과 김구는 신규식을 병문안 하러 갔지만 환자가 중태에 빠진 상태라 말 한마디 못 나누고 돌아왔는데 그 것이 더더욱 괴로웠다.
신규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여 25일간 불식(不食), 불어(不語), 불약(不藥)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22년 9월 25일, 마지막으로“정부! 정부!”를 부르짖으며 처참하게 눈을 감았다.
그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의 죽음은 한인동포들의 단결과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투쟁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의 죽음으로써 조국의 광복의 날을 앞당기려 했을는지도 모른다.
신규식이 사망 후 한중인사 천여 명이 모여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당시의 상해에서는 보기 드문 방대한 장례식이었다. 중국 측에서는 유아자, 오철성, 주가화, 황염배, 저보생, 진과부, 진립부 등 600여 인이 왔다. 경무국장 김구가 장례식과 유관되는 모든 일을 맡아하였다.
신규식이 사망한 후 해내외의 여러 신문들에서 사망 소식을 크게 보도하고 수많은 추모문장을 실었다. 그 중 한 두 편만 알아보자.
중국의 저명한 언론인 호림(胡林)은 신규식의 『한국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내 감히 조선 문제를 말하려니와 일본군벌은 일본국민들에게 큰 빚더미를 남겨놓았다. 이 빚은 조만간 청산하여야 할 것이다. 폴란드가 독립하였다! 체코도 새로 흥기하였다! 인도, 이집트도 조만간 독립할 것이다. 이제 조선도 멀지 않았다. 신선생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죽지 않았다! 이 한 권의 「한국혼」은 바로 신선생 영혼의 불멸의 결정체이다.”[4]
베트남의 애국지사이며 신규식의 벗인 토반(土潘)이 1923년 6월 15일, 『대공보』에 『한국혼』을 두고 다음과 같은 서언을 써 신규식을 추모하였다.
“드넓은 바다에 요기가 서리고 망망한 대륙에 금수가 득실거린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세상, 민족자결을 외쳐도 응답이 없구나. 그러나 무릇 존망이란 끝이 있는 법. 인심이 살아 있으면 나라가 망해도 망하지 않은 것이요, 인심이 죽으면 나라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다. 폴란드와 이집트가 독립한 것은 바로 인심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로다. 예관 선생의 『한국혼』을 읽고 그 강개함과 비장함과 통쾌감에 울기도 웃기도 하였노라. 영웅의 뜻을 이어 이제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싸울 것인즉 예관 선생은 결코 죽지 않았다. 이 한 권의 좋은 책을 나의 동지들에게도 소개할 것이다.”[5]
[주]
[1] 민필호, 『예관 신규식 선생 전기』.
[2] 『대통령각하서』 [한], 예관 선생 기념회, 1955년.
[3] 유아자(柳亞子, 1887-1958): 중국 강서성 오강 (吳江)사람, 원명 위고(慰高), 시인, 소주(蘇州)에서《남사》를 창립, 손중산 총통부 비서, 중국국민당 감찰위원 역임. 신규식과 친분이 두터웠음.
[4] 대공보』대공보,1923년 9월 5일『예관 신규식선생전기』.
[5] 동상.
모친이 상해로 오다
이른 봄의 포근한 햇살이 대지를 살뜰히 보듬는다. 겨우내 얼었던 백사장이 폭신폭신해졌고 길가의 가로수들에 푸른 잎이 빠끔빠끔 눈을 내밀기 시작했다.
1922년 3월 28일, 김구가 황포부두에서 모친을 영접했다. 모친 곽씨는 며느리가 곧 해산한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상해로 온 것이었다. 모친은 금년에 63세였지만 신체가 건강하였다.
“어머니께서 평안히 도착했으니 전 정말 기쁩니다.”
김구가 어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날 글자를 모르는 늙은이라고 보지 마라. 그래도 상해까지 오지 않았느냐? 다만 고깃배를 타고 먼 길을 왔더니 좀 어지럽구나.”
“나석도(羅錫滔)와 이승춘(李承春)군은 잘 지내는가요?”
“무사히 지낸다. 이번에 그들 덕에 예까지 왔느니라. 그들 둘이 날 동산평에서 나오게 했고 장산에서 고기배로 산동의 위해까지 실어다 주고 상해로 오는 배표까지 사주었다. 이 늙은것 때문에 고생을 무척 했느니라. 고마운 애들이지.”
나석주와 이승춘은 김구가 황해도 재령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을 때 김구가 사랑하던 학생들이었다. 후에 두 사람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비장하게 희생되었다.
김구는 삼륜차로 모친을 집까지 모셔왔다.
곽씨가 집안에 들어서자 며느리가 절을 하였다. 곽씨가 며느리 보고 물었다.
“인아의 애비가 괄시하지 않더냐?”
최준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이 너무 바빠서 절 괄시할 짬이 없어요.”
곽 씨가 흐뭇하게 웃었다.
김구는 모친을 몹시 존경했다. 그는 병신년 7월 25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당시 21세에 나던 김구는 치하포(鴟河浦)에서 일본 군관 쓰치다를 때려죽여 체포되었다. 곽씨는 김구를 구하기 위해 가산을 팔아가지고 순경들에게 이송되는 아들을 따라나섰다.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그날 밤, 그날 밤은 달도 없어 사위가 칠흑처럼 캄캄하였다. 배가 강화를 지날 때 곽 씨가 순경들이 잠이 든 것을 보고 아들한테 가만히 말했다.
“얘야, 이번 걸음에 네가 반드시 왜놈들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저 맑은 물에 너와 내가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
말을 마친 곽씨가 김구의 손을 잡고 배전으로 다가갔다. 김구는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이번에 가서 죽을 것 같습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해 하늘에 사무치는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곽씨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김구의 손을 이끌었다. 김구는 더욱 자신 있게“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왜 아들의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하고 간곡히 위로하였다.
그제야 곽씨가 결심을 버리고“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가 함께 죽자고.”하고 말했다.[1]
김구 모친은 이런 사람이다. 서서 죽을지언정 엎디어 살기를 원치 않는 성격이었다.
모친의 이런 정신이 김구를 심심히 감동시켰고 김구는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그날 밤 강화도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하였다.
김구의 온 가족이 끝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모이게 되었고 김구가 어머니에게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이 환락의 가정에 또 희사기 있게 되었다. 최준례가 둘째 아들 신(信)을 낳았던 것이다. 그 해 7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김구와 여운형 등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성립하였다. 이 조직의 성원들은 대부분 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각 파의 모순으로 하여 『시사책진회』는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김구는 부단히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면서 대한임시정부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다.
10월 1일, 김구는 또 손정도[2], 이유필[3], 여운형 등 정치이념이 부동한 사람들과 함께 『한국노병회』[4]를 조직하고 제1기 이사장을 맡았다.
11월에 원 이동휘의 대표였던 한형권이 모스크바로부터 가져온 소련정부의 일부분의 지원자금을 안창호와 여운형에게 주었다.
이듬해 3월, 70개 단체의 대표들이 독립운동자 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하느냐 임시정부를 취소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쟁론을 벌렸으나 아무 결과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았다. 6월 2일, 국민대표회의의 개조파들이 비밀리에 헌법을 통과하고 고려공화국을 건립하였다. 그들은 소련정부의 지지를 받으려고 서 시베리아로 전이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소련정부는 고려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보고 소련에서 떠나라고 축객령을 내렸다.
임시정부가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였다. 노백린이 국무총리, 김구가 내무총장, 조소앙이 외무총장, 이시영이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김구는 내무총장으로 임명된 후 내무 제1호령을 발표하여 국민대표대회에서 6월 2일에 제정한 『고려공화국』 연호, 국호는 민국을 배반한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김구의 과단한 조치로 상해국민대표대회에서 일어났던 풍파가 아주 빨리 갈앉았다.
[참고문서]
[1] 《백범일지》 96 쪽.
[2] 손정도(孫貞道): 1872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 1910년 선교사로 만주에 파견되었다가 독립운동에 투신.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의장, 의장을 역임. 1922년에 김구, 여운형 등 16명과 함께『노병회』 발기. 1922년 2월 대한적십자 회장에 추대, 1931 년 사망. 1962년에 건국훈장 추서.
[3] 이유필(李有弼 1885년-1945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 1919년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장 역임. 1922년 10월 김구, 손정도 등과 함께『노병회』를 조직하고 경리부장, 이사장 맡음. 1923년 교민단 단장, 인성학교 교장 역임. 1926년 임시정부 재무부장, 1932년 윤봉길 의거주모로 잡혀 3년형 선고 받음.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4] 『한국노병회』: 1922년 김구, 손정도, 이유필, 김홍서 등이 군인양성과, 독립군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성립한 한국의 항일독립운동단체.
백범과 약산의 첫 상봉
이른 아침, 누가 큰 소리로 대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김구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대문으로 들이닥쳤다. 이어 프랑스 경관 시대나가 일본경관 7명을 데리고 김구의 방으로 들어왔다. 시대나와 김구는 아주 잘 아는 처지고 두 사람의 관계도 좋았다. 시대나는 일어는 캄캄 무지라 체포자명단에 김구의 이름이 적힌 줄을 몰랐던 것이었다. 집안에 들어서서야 김구인 줄 알고 그는 놀랐다. 그는 아주 예의 있게 김구더러 함께 경찰국으로 가자고 했다. 시대나는 일본경찰이 김구의 손에 수쇄를 채우려는 것을 견결히 막아버렸다. 경무국에 이르니 이미 원세훈 등 5명의 독립운동자들이 체포되어 와 있었다. 프랑스경무국에서 김구를 보고 어제 황포부두에서 어떤 사람이 일본육군 대신 다나카 이키치(田中義一)를 죽이려 했기에 이 사건으로 부득불 혐의 범들을 체포한다고 설명했다. 김구가 원세훈 등을 가리키며 이들은 모두 양민(良民)으로서 이런 끔찍한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증명하였다. 하여 김구의 보석으로 5명이 모두 석방되었다.[1]
김구는 다나카 모살사건을 아주 중시하였다. 이 사건은 그에게 하나의 계발을 주었다. 그는 미국에 의거하여 구국하자는 이승만의 주장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한국과 일본은 전쟁상태에 처해 있었고 침략자와 피 침략자의 신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김구는 역량대비가 현저한 상황에서 폭력의 수단으로 왜놈들의 원흉을 타격하는 것도 하나의 필요한 투쟁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구는 의열단 단장 김약산(金若山)을 만나기로 결정하였다. 김구는 유자명을 보고 약산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다. 약산과 만나자면 자기와도 가깝고 약산과도 가까운 유자명이 나서는 것이 제일 적합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김약산은 천진, 북경,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어 행적을 종잡을 수 없었다. 다만 유자명만은 알고 있었다.
몇 개월 후 김구는 유자명의 주선으로 남경로의 한 여관에서 김약산을 만났다.
김약산의 원명은 김원봉(金元鳳)이고 중국명은 진국빈(陳國斌)이었다. 최림(崔林)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적지 않은 독립투사들이 신변의 안전이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명이나 가명을 많이 썼다. 한국 보훈처에 따르면 많은 독립투사들이 원 이름을 감추고 필명이나 가명을 사용하다가 희생되었기에 지금까지도 진정한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중국의 광야에 쓸쓸하게 묻혀 있는 독립지사들이 허다하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김약산은 1889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서울에서 중학을 다니다가 1918년에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여 덕화학당(德化學堂)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이어 남경의 금릉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중국어에 아주 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폭발한 후 김약산은 파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일본 대표 이시이(石井)를 죽여 한국복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중시를 일으켰지만 권고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키려 하엿으나 임시정부대표 김규식과 중국대표 고위균(顧維鈞)권고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 후 길림에 가서 석정 등과 더불어 의열단을 성립하였다. 의열단이란 결국은 테로 조직이었다. 의열단의 최초의 공약은 10가지였다. 공약의 내용을 보면 의열단은 민족해방 사업을 위해 달갑게 일체를 헌신하려는 열혈 청년지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자원적으로 가장 엄격한 규율에 복종하고 단체가 하달한 임무를 완성하며 한국독립을 위해 자기의 일체, 심지어 목숨까지 달갑게 바치려 하였다.
공약은 10가지였다. 공약의 내용을 보면 의열단은 민족해방사업을 위해 달갑게 일체를 헌신하려는 청년지사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열단은 창립초기부터 1926년 사이에 선후로 비교적 큰 10여 차례의 암살활동을 하였다. 의열단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죽이려 했고, 상해 황포부두에서 일본 다나카(田中) 대장을 죽이려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하지만 한때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24년, 김약산의 의열단은 광주로 남하하여 손중산을 만나보고 가르침을 받았다. 손중산은 암살로서는 한국이 독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1926년, 의열단 성원들은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김약산은 황포에서 원 의열단 성원이며 다나카 암살사건에 참가했던 오성윤(吳成侖, 후에 반변 함)과 저명한 혁명가 양림(楊林)을 만났다. 그들은 함께 한국 혁명의 책략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중국혁명이 성공하여야 한국독립도 희망이 있다고 인정하고 김약산과 허다한 한국적 학생들이 북벌에 참여하였다. 1927년,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에 대해 대 토벌을 감행하자 김약산은 분연히 북벌군을 떠나 북경에 가서 조선공산당(ML파)에 가입했으며 레닌주의학교를 세우고 잡지 『레닌』을 꾸렸다. 후에 공산당 내부에 파벌투쟁이 심해지자 제3국제에서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 이때로부터 김약산은 조선공산당을 떠나 자기 나름대로 독립운동의 진리를 모색하였다. 그는 비록 공산당 조직에 참가했지만 그의 원 뿌리는 민족주의자였다.
유자명은 그런 김약산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김약산을 말할 때 유자명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유자명은 프랑스의 프루동과 러시아의 바쿠닌 등의 무정부의(아카니즘) 이론을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1922년에 천진에서 두 사람이 만난 후부터 의기상투하여 가장 가까운 사이로 되었다. 유자명은 의열단의 크고 작은 일에서 고문으로, 참모로 활약하였다. 여기에 대해 유연산은 이렇게 썼다.
“김약산과 유자명이 천진에서의 만남은 의열단의 투쟁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자명이 의열단에 참가한 이후의 의열단의 활동을 보면 약산 개인의 풍모에 유자명의 무정부주의 성향의 조직적 특성이 결합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2]
같은 해 그는 광주에서 손중산을 만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견해를 청취하였다. 그 후, 동북 길림시에 가 석정(石井) 등과 함께 의열단을 건립하였다.
약산은 한국독립운동에서 좌파수령으로 활약했다.
김약산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무엇을 생각했으면 무엇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뇌는 아주 명석하고 사유가 비상히 민첩하였다.
그런 약산에게 유자명이 김구를 소개했다.
“약산, 이 분이 백범 선생이네. 오늘 특히 자네를 만나러 왔네. 비록 다나카 이키치(田中義一)를 죽이진 못했지만 백범 선생은 자네에게 탄복하고 있네.”
“백범 선생님, 자명이 선생에 대해 많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김약산이 인사를 했다.
“사건이 벌어진 이튿날 프랑스경무국에 불려갔습니다. 거기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김구가 일부러 화제를 다나카 이키치(田中義一) 모살사건으로 돌렸다.
“헌데 가석하게도 우리 대원들이 경험이 없어 다나카는 죽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이 아주 갸륵하고 칭찬 받을 만합니다.”
김구가 진심으로 칭찬하였다.
김약산이 의열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들의 초기강령은 왜놈을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며 계급을 타도하고 토지를 골고루 나눈다는 거였지요. 광복 후 한국은 봉건착취 제도를 폐지하고 농사짓는 자가 땅을 가지는 제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투쟁이 심입됨에 따라 우리들의 강령도 일부 시정하여 반제, 반봉건 색채가 더 진하데 되었습니다……”
김약산은 마치도 연설이나 하듯 도도불절(滔滔不絶)히 자기의 정치주장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시 김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열단의 공약과 행동방법, 파괴 대상, 암살 대상 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일곱 암살 대상(七可死)
1. 조선통독 이하 고관
2. 군부 수뇌(일본)
3. 대만 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탐정
7. 민족을 배반한 토호열신(土豪劣紳)
반드시 파괴하여야 할 다섯 가지(五破壞)
1. 일본 내각, 경찰서
2. 조선총독부
3. 동양척식회사
4. 매일신문
5. 일본 기타 행정기관
의열단 공약
1. 견결하게 천하의 정의로운 사업을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3. 무릇 충의와 기개가 있는 자는 본 단의 단원으로 될 수 있다.
4. 단의 공약을 준수하는 것이 단원의 첫 번째 의무다.
5. 본 단의 대표를 선거한다.
6. 언제 어디서나 달마다 단에다 활동정황을 보고한다.
7.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단의 의무를 완성하여야 한다.
8. 단을 배신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3]
김구는 김약산이 자기보다 26세나 연하인 아들 벌 되는 젊은이지만 사람이 똑똑하고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김구의 머릿속에 <암살>이라는 낱말이 점점 더 확고히 자리 잡았다.
김구는 아주 유쾌한 기분으로 약산과 갈라졌다.
“원봉 선생, 고맙소. 오늘 많은 것들을 공부했소. 앞으로 손을 잡고 일본 놈들과 본때 있게 싸워 보기오.”
[주]
[1] 『백범일지』, 231쪽.
[2] 상해『건설』잡지, 제1권 제4호.
[3] 『한국독립운동사』, p43-47.
김익상과 오성륜이 다나카를 저격하다
김구는 김약산이 소개한 의열단의 반일구국강령과 전술 등 정황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김구는 의열단의 정치강령 중 일부는 임시정부의 헌장과 비슷하나 어떤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나카 이키치를 암살하려던 대목에 이르러 김약산은 흥분하여 조금도 숨기지 않고 전반 과정을 이야기했다.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 『민국일보』에 실린 것이다.
김약산은 신문에서 다나카 이키치(田中義一) 대장(大將)이 필리핀을 방문한 후 귀국 도중에 상해, 남경, 북경, 천진, 봉천을 시찰한다는 소식을 알았다. 다나카 이키치는 한중 두 나라 민중들에게 무수한 재난을 들씌운 악명이 자자한 흉악한 군국주의 두목이었다. 다나카(1864-1929)는 1864년 7월 25일에 일본의 산구(山口)현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참모차장, 육군상을 역임하였다. 1921년에 육군대장으로 승급하였고 1925년 퇴역 후에는 정우회(政友會)총재를 맡았으며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내각수상으로 있었다. 그는 정보 천재로 소문났었다. 수상으로 재임한 동안 중국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실시한 그는 두 차례 『동방회의』를 소집하고 구체적인 침화 정책을 제정하여 비밀리에 황제에게 올렸다. 그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다나카상소』다. 내용의 핵심은“중국을 정복하려면 반드시 만몽을 먼저 정복하여야 하고 세계를 정복하려면 반드시 먼저 중국을 정복하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나카는 산동에 출병함과 동시에 중국 동북을 침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획책하였다. 이른바 『만주국』 은 다나카의 음모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김약산은 이 원흉을 꼭 죽이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죽이는 장소를 상해, 남경, 천진 세 곳으로 정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의열단 회의를 열고 단원들에게 자기의 계획을 말했다. 이어 여러 사람이 자원해 나섰다. 김약산은 그 중에서 김익상(金益湘)[1],오성륜(吳成崙)[2], 이종암(李鐘岩)[3] 세 사람을 골랐다. 구체적인 작전방안은 이러했다. 다나카가 일단 부두에 내리면 오성륜(일명 全光, 李正龍)이 권총을 쏘고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김익상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며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면 이종암이 다나카가 자동차에 오를 때 손을 쓰는 것이었다.
3월 28일 오후 3시가 금방 지나자 다나카를 영접하려고 외탄 신관부두에 많은 일본인들이 모였다.
김익상과 오성륜도 사람들 속에 끼어들었다. 김익상은 양복을 입고 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매고 황색외투를 입었다. 오성륜은 중국인 옷차림을 하고 검은 외투를 입었다. 두 사람은 권총을 휴대하고 김익상은 수류탄도 지녔다. 대략 3시 10분경, 필리핀에서 상해로 오는 윤선 「알렉산드르호」가 서서히 항구에 접근하였다. 승객들이 짐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 그 중 양복을 입은 한 작자가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았고 짧은 바지를 입은 몇몇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양복을 입은 작자가 갑판에서 내리자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던 일본 영사관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양복을 입은 작자가 다나카라고 단정하였다.
오성륜이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오고 김익상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동정을 살폈다. 그들의 추측이 맞았다. 양복을 입은 작자가 과연 다나카였다.
그가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그의 앞으로 몰려가 그를 부축하였다. 줄곧 지켜보던 오성륜이 총을 쏠 기회를 찾았다. 다나카가 영접하러 온 사람들과 악수하는 순간, 오성륜이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다나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 서양 여자가 다나카 앞으로 걸어갔다. 총알이 서양여자의 가슴에 박혔다.
“잘못 쐈구나!”
김익상이 소리를 크게 지르며 뒤로부터 튕겨 나와 다나카를 향해 두 발을 쏘았다. 그러나 총알이 다나카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 김익상이 다시 수류탄을 던졌으나 급한 김에 미처 도화선을 뽑지 않았다. 한 영국 선원이 황급히 수류탄을 주어 황포강에 던졌다. 일이 실패하자 김익상과 오성륜은시내 쪽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이때 거리에 경적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조계지 순포방에서 각 골목마다 삼엄한 경비망을 늘여놓았다. 김익상과 오성륜이 선후하여 체포되었다. 이종암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 번 사격에서 한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부상당하였다. 그 죽은 여자는 다나카와 같은 배를 타고 상해로 오던 미국인 스베트 부인이었다. 혼비백산한 다나카는 이튿날 『송방호(松邦號)』 윤선을 타고 몰래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일본조계지 순포방으로 압송되었다. 심문받을 때 그들은 아주 태연자약하였다. 김익상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으니 후회가 없다. 다만 성공하지 못한 것이 한일뿐이다.”고 떳떳이 말했고 오성륜은 “다나카를 죽이려고 한 것은 전 세계에다 한국이 일본한테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당당히 말했다. 일본인들은 이 기회를 통해 한국임시정부를 소멸하려고 두 사람에게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며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한 행위라는 공술을 받아내려 하였으나 그들이 이를 악물고 다나카를 죽이려고 한 것은 자기들이 분노를 참지 못해 한 일이고 임시정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우겨 김익상과 오성륜의 입을 통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려던 일본인들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갔다.[4]사건의 경과는 이러하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김구가 말하였다.
“일본영사관에서는 이 번 사건이 임시정부의 소행일 거라고 판단했고 특히 나를 의심하였소.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오. 통쾌한 것은 당신들이 확실히 큰일을 해냈다는 것이요. 당신들에게 감사를 드리오.”
그 번의 김약산과의 회견은 김구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후에 김구가 전개한 한국애국단의 암살활동은 김약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구와 약산이 만난 뒤인 6개월 후인 1922년 9월 하순,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김익상에게 무기도형을 선포하였다. 익상이 판결서를 듣고 대노하여 의자를 법관에게 던졌다. 11월 상순, 나나가사키 법원이 원 판결을 뒤집고 김익상을 사형에 처하였다. 한국임시정부는 사형소식을 들은 후 일본정부에 서면 내용을 작성하였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외무대신 나이타 고우사이(內田康裁)각하: 소식에 의하면 한인 김익상이 투탄사건으로 귀정부의 나가사키에서 사형 당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참을 수 없다. 한인이 폭탄을 잘못 던져 외인을 오살했으면 응당 우리의 법에 의하여 다스려야지 일본정부에서 관여할 바가 아니다. 한일 두 민족은 역사적으로 갈등이 있는데 이는 결코 일시적인 감정 충동으로 위엄을 부려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형사정책으로 봐도 사형은 의미가 없고 소득도 없다. 안중근이 사형당한지 10년이 채 안되었다. 오늘 한국민족의 의협심으로는 또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오직 반감만 있을 뿐이다. 하여 본 외무총장은 김익상의 사형을 두고 일본정부에 항의를 제출한다. 만약 이후 무수한 김익상이 나타나 민족의 의분을 발휘하더라도 이는 절대 본 정부의 책임이 아니다. 이에 다시 한 번 선언하기니 와 즉시 답복하기 바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5]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아무런 답복도 없었다.
[주]
[1] 김익상(金益相, 1885-1925): 경기도 고양 출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의열단 핵심 성원,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세인의 주목을 받음. 1922년 상해 세관부두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됨. 복역 중 감형되어 출옥했으나 일본형사에게 살해됨. 역사에서 천추에 남을 의사로 기록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2] 오성륜(吳成倫): 1900년, 함북 온성 출생. 1919년 의열단 가입. 1922년 김익상, 이종암과 같이 상해에서 다나카 이키치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 수감되었다가 탈옥함. 1923년 사회주의 단체인『적기단(赤旗團)』결성. 1926년 모스크바동방노동자대학 졸업. 1930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선전부장.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 1941년에 체포된 후 변절. 일제가 패망한 후 팔로군에 체포.
[3] 이종암(李鐘巖):독립운동가 일명 이종순이라고도 함. 1922년 상해 세관부두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저격 활동에 참가했다가 폭탄의 불발로 실패.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되었으나 이종순은 탈출에 성공함.
[4] 『민국일보』1922년 3월 30일.
[5] 『김익상의 처형에 관한 임시정부의 항의』, 상해『신보』, 1922년 11월 17일.
제5부
창해가 거꾸로 흐르다
나는 독립하지 못한 조국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70 여년의 생애에서 무수한 능욕과 고난을 겪으며 살아왔다. 만약 누가 나 보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완전히 독립한 자유국가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1]
최준례가 사망하다
1924 년 1월 1 일, 이 날 김구의 모친은 아침부터 푸념을 늘여놓았다.
“며느리가 입원한지 20일이 되는데 도대체 병세가 어떠한지 모르겠구나.”
김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처 최준례의 폐병이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돈이 없어 치료할 수 없었다. 후에 어떤 사람이 프랑스 조계지밖에 있는 홍구폐병병원에 연계하여 주었다. 이 병원은 외국인이 꾸리는 병원이었는데 고맙게도 최준례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아내를 병원에 보낼 기회조차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일단 프랑스 조계를 나가기만 하면 일본영사관의 특무와 경찰들에게 즉시로 체포될 위험이 있었다. 김구는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봐주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지 어쩔 수 없었다.
이날, 김구는 아내에 대한 미안한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제 2차 이사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김구는 노병회를 건립한 이후의 일들과 한국 청년들을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 보낸 정황을 총결하였다. 2년 사이 7명의 청년들을 중국의 군사학교에 보냈는데 병공학을 배우는 학생이 3명이고 군사학을 배우는 학생이 4명이었다.
회의 후, 김구가 금방 내무총장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김의한[2]이 총망히 들어왔다.
“백범 선생, 부인의 병세가 위급합니다. 병원에 가 보셔야 되지 않을까요?”
“정황 어떠한가?”
“이미 인사불성이어서 말을 못합니다.”
어느 사이에 이동녕이 김구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백범 동생을 괴롭히지 말게. 하늘이 무너져도 갈 수 없네.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게.”
김구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삼켰다. 창문가로 걸어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여성 독립운동가이며 김의한의 부인인 정정화[3]가 1987년에 출판한 회억록『녹두화(綠豆花)』에서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1924년 정월 초하루, 나와 남편 성암(成岩: 김의한의 호)이 함께 노선배들에게 세배를 한 후 전차를 타고 홍구 폐병병원으로 갔다. 그 때 내무총장 김구 부인의 폐병이 악화되어 입원하고 있었다. 내가 그 곳에 가는 것은 별문제였지만 성암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병원에 이르니 담당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성암이 노하여 큰소리로 꾸짖었다.
“환자가 임종에 이르렀는데도 즉시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병문안도 못하게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놈의 도리야?”
우리 두 사람은 대방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병실로 들어갔다. 최 여사가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핏기가 전혀 없었다. 말할 기운조차 없어 다만 눈으로 멍하니 우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눈길을 보니 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싶었다. 나는 최여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김 선생을 오시라고 할까요?”
내가 이렇게 물으니 그는 힘없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럼 어머님을 오시라고 할까요?”라고 물어도 역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병실에서 나왔다. 성암은 백범한테로 가고 나는 백범의 모친한테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김구는 홍구병원에 오지 못했고 김구 모친이 양세환(楊世歡)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이 왔을 때는 이미 최준례가 숨을 거두었고 유체가 태평실로 옮긴 뒤였다.
최준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조계에 알려지자 한인교포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장례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김구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첫째로는 혼인이나 장례에 큰 의식을 거행하지 못한다는 임시정부의 규정이 있었고 둘째로는 돈이 없었다. 김구와 그의 모친, 그리고 어린 아들이 거의 반 기아상태에서 사는 형편이라 병 치료는 물론 장례를 치를 형편도 못되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강경한 요구를 물리칠 수 없어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장례를 반드시 장중하게 거행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여성동포들이 더욱 그러하였다. 이신준(李信俊)은 이렇게 말했다.
“최준례 여사가 비록 임시정부 성원이 아니고 전쟁판에 나가 일제와 직접 싸우지 않았습니다만 그가 무엇 때문에 상해로 왔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가 남편이 옥에 갇혔을 때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고난을 박차면서 꿋꿋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는 병으로 앓으면서 약 한 첩 못 쓰면서도 한 마디 원망도 없었습니다. 그 것은 최여사가 남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잘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망명자들이며 환난지우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한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여럿이 도와 나서야 합니다. 우리의 난우(難友) 최준례 여사를 기념하기 위해 반드시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야 합니다.”[4]
이신준의 폐부지언에 모든 사람들이 감동되어 호응해 나섰다. 동포들이 돈을 모아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최준례의 유체는 프랑스조계지 숭산로(崇山路) 순포방(巡捕房) 뒤에 있는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석비를 세웠다.
[주 ]
[1] 《백범일지》301쪽.
[2] 김의한(金義漢 1900년∼미상): 독립운동가. 이명은 김재한(金在漢), 김의환(金毅煥). 서울 출신. 1919년 아버지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상해로 망명. 1934년 1월 이동녕, 김구, 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 조직.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선전위원. 1940년 5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감찰위원,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 19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선임, 1943년 8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1945년 6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 한국전쟁 당시 납북.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3] 정정화(鄭靖和): 1900년 8월 3일 수원 유수(水原留守) 정주영의 셋째딸. 김의한(金毅漢)과 결혼. 3.1운동이 일어난 후 시아버지인 김가진(金嘉鎭)과 남편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으며 1920년 비밀연락망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 연통제가 폐쇄되자 밀사역할 수행.《장강일기》(長江日記)를 남김. 김구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라 칭송 받음.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1991년 사망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장.
[4] 정정화『녹두화』 89쪽.
죽어도 중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김구의 아들 신아는 금방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고 젖도 아직 떼지 않았다. 낮에는 우유를 먹였지만 저녁에 잠 잘 때는 할머니의 젖꼭지를 물고서야 잠들었다. 후에 김신아가 처음 말을 배울 때 할머니란 말만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1922년은 상해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기던 시기였다. 한형권[1]이 레닌한테서 받아 온 2백만 루블을 가지고 상해에서 돈을 뿌려가며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말 그대로 잡동사니 회의였다.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 등 각 처에서 무슨 무슨 단체 대표라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서 이르쿠츠파와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끌고 쫓고 하였다. 이르쿠츠파는 『창조론』을 내들었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했다. 『 창조론』은 지금 있는 정부를 뒤엎어버리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고 『개조론』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는 전제하에서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두 공산당 파가 입에 거품을 물고 아웅다웅 하였으나 국민대표회의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마침내 분열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창조 파에서는 자기들의 주장대로 대한민국 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대한민국정부를 끌고 블라딕보스토크로 갔으나 모스크바가 본체만체하니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두 파가 싸우는 바람에 순진한 독립 운동가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양파의 언어모략에 현혹되어 시국이 혼란하므로 내무총장이던 김구가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내무부 포고령 제5호를 발표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강제적으로 해산시키고 반대파들을 상해에서 축출하였다.[2]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 김립(金立)은 오면직과 노종균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한형권에 대해서는 러시아에 대한 임시 정부 대표직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결국 이로써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말썽이 많은 임시정부와 더 거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로 하여 레닌이 주기로 했던 1백 60만 루블도 떼이고 말았다. 가령 그때 임시정부가 일치 단결하였고 레닌이 준 돈을 효과적으로 썼더라면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지지와 협조를 받았을는 지도 모른다.
임시정부는 고난의 시기에 들어섰다.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정세의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사상이 날로 줄어들고 쇠퇴하던 중에 공산주의자들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향하고 있었다. 또한 소위 만주국이란 것이 서자 정의부가 임시정부와 관계를 끊고 자기네들끼리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살을 깎으며 싸우다가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렸으니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해의 정세도 서로 패하여 함께 망한 꼴이 되어 겨우 한국독립당 하나로 민족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3]
국민대표회의 사건 이후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중 대부분이 상해를 떠나 어떤 사람은 광주로 가고 어떤 사람은 만주나 소련으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김구는 그냥 상해에 남았다. 그는 늘“한 사람이 고생하면 중생이 복을 얻고 그 사람은 보살이 된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중생이 고통을 받고 그 사람은 죄인이 된다.”는 격언으로 자신을 격려하였다.[4]
상해에서 태어난 김신 장군은 훗날 한국에서 오선백(吳鮮白)에게 그 시기 부친에 관한 작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 때는 말 그대로 처량하고 비장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께서는 갖은 곤란을 이겨가면서 혁명운동을 견지하였습니다. 재정 곤란과 엄중한 내외국세로 당시의 혁명은 저조기에 처했지요. 많은 혁명동지들이 생활이 부유한 미국에 가 혁명하려고 하나, 둘 상해를 떠났습니다. 조모께서도 부친더러 미국에 가라고 여러 차례 권고했지만 부친께서 견결히 반대하셨습니다. 부친께선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게 되면 혁명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조모께서 또 한 번 부친을 보고 미국에 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부친께서 역시 견결히 반대하자 조모가 분을 참지 못해 부친을 때렸습니다. 부친께서 조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이 김구는 설사 죽는다 해도 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중국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모가 부친에게 물었습니다.
“매를 맞아 아파서 우는 거냐 아니면 억울하여 우는 거냐?”
부친께서 울면서 말했습니다.
“전에 어머니께서 절 때리실 때는 몹시 아팠습니다. 그러나 오늘 맞은 매는 아프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이젠 힘이 없으시군요. 만약 어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난다면 누가 절 관심해 주겠습니까?”
조모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부친의 울음소리는 더욱 높았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 와 있던 안창호 선생의 부인이 조모를 보고 아들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 때려서 되겠느냐며 나무람 했습니다.[5]
1926년, 김구의 모친이 손자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김구는 또 홀로 외롭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추호의 적막도 느끼지 못했다.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갈망이 김구로 하여금 모든 고독과 적막을 잊게 하였던 것이다.
[주]
[1] 한형권(韓亨權): 함경북도 경흥 출신. 생몰년 미상. 러시아에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 사회당에 입당. 이동휘가 가장 믿던 사람.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레닌한테 가서 독립지원자금을 가져 옴. 탐오, 횡령죄로 임시정부의 지탄을 받음. 그의 측근 김립은 탐오, 횡령지로 처형 당함.
[2] 『백범일지』, 239쪽.
[3] 『백범일지』, 242쪽.
[4] 김신, 『부친을 추억하여』 .
[5] 동상.
신채호가 눈물로 성토문을 쓰다
위대한 독립투사들 중에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이탈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다. 신채호는 1880년에 충청북도 창원군에서 출생했다. 아호와 필명으로 무애성(无涯生),연시몽인(燕市夢人), 한놈, 적심(赤心) 등이 있으나 단재로 널리 통한다.
단재는 민족의 독립과 민적사의 정기를 천추에 길이 빛내기 위해 일생을 분투한 독립가이며 탁월한 사학가이며 정열적인 정치가이고 문필가다. 단재는 총명이 과인하여 12살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숙달하였다.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그 해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일제를 반대하는 글들을 썼다. 신채호는 망국을 한탄하며 장지연과 함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오늘 목 놓아 우노라)라는 글을 써서 이완용 등 매국 5적을 통책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又放聲大哭)』(오늘 다시 목 놓아 우노라)라는 글을 발표하여 2천만 동포의 울분과 비통을 크게 자극하였다.
1909년, 비밀단체 『신민회』가 결성되자 『신민회』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이 기간에 『을지문덕 』,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을 집필하여 국권의 부활을 고창함.
1911년 러시아에서 『권업신문』의 주필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3년 신규식의 전갈을 받고 상해에 가서 신규식, 박은식, 김규식 등과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며 독립정신을 주입시켰다. 1915년에 북경에 정착하였고 그해 3월에 상해에 가서 신규식, 이상철, 박은식 등 여러 독립지사들과 함께 『신한인당』을 조직했다. 북경시절에 중국신문 『중화일보』와 『북경일보』에 반일사상이 농후한 글들을 발표하여 중국문인들의 절찬을 받았다. 이 시기에 중편소설 『꿈하늘』,역사소설 『백세노승의 미담』, 『 일목대왕의 철퇴』를 창작하였다. 『꿈하늘』과 후에 발표한 『용과 용의 대결』은 단재의 대표작이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의정원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의회에 출석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은 사연에서 비롯된다.
임시회의가 처음 열렸을 때 회의에서 그 당시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신채호가 단호히 반대하였다. 신채호는 아메리카와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준비논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과 서재필의 독립외교노선도 반대하였다.
특히 이승만이 미국정부에 한국을 미국의 위임통치 하에 두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자 신채호는 분이 극도에 달했다. 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는 매국적”이라고 통책했다. 오랫동안 신문편집사업에 종사하여 온 신채호는 이 사건을 먼저 알았고 또 위임통치의 본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을 견결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 의회의 많은 의원들은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심지어『위임통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또 당시 지식인들 중에 친미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안창호까지 친미였다. 그리하여 의회의 대부분 사람들이 신채호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결의안에 동의하였다. 이 때 신채호는 분을 참지 못해 “미국의 위임통치라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통치와 똑 같다.”고 하면서 분연히 퇴장하였다.
임증빈은 신채호의 강직한 성격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었다.
신채호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한번 먹은 마음은 굽히지 않는다. 사생활에서도 그러하였다. 세수할 때도 “사나이가 세수를 한다고 하여 고개를 숙이다니 될 말이냐?”라고 하면서 옷이 물에 젖어도 꼿꼿이 선채로 세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은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 시기 이승만은 대통령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지 상해에 와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적도 없었고 임시의회, 임시정부와 통신거래도 별로 없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친 독립외교노선은 결국 파탄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계속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신채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 당시 이광수가 단재를 보고 『독립신문』주필을 맡아 임시정부 대변인 사업을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리고 주간신문 『신대한』주필이 되어 임시정부기관지인 『독립신문 』에 맞섰다. 상해에 머무는 기간에 신채호는 여러 민중대회의 초청을 받고 늘 연단에 올라 조선역사에 대한 연설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 연설에서 그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지휘하여 발끝까지 무장한 일본 해군을 거북선으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마치 보는 듯이 생동하게 이야기 했을 때 누구 하나 감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자리에 임시정부 요원들인 안창호와 김구도 있었다.
1921년 봄에 단재는 미국에 있는 박용만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의 명의로 미국대통령에게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다는 내용과 이에 재미동포들의 분노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다는 『위임통치청원서』원문과 번역본이 들어 있었다.
박용만은 무력투쟁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편지를 받은 신채호는 분통이 터져 울먹거렸다. 박은식과 김창숙도 펄펄 뛰다가 통곡하였다. 그들 셋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등 요인들을 찾아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축출할 것을 제기했으나 헛물만 켜고 말았다.
그들은 1921년 봄에 이승만을 성토하는 대회를 열었다. 1921년 4월 19일, 신채호가 통탄의 눈물을 흘리며 성토문을 썼다. 『성토문』의 발표는 결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이며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이었다.
1921년 4월에 신채호, 박용만, 신숙 등이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위원회』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동북과 원동의 군사단체문제에 대한 의견을 통일하고 군사통일기관 및 독립전쟁지휘권 귀속문제를 토의하였다. 회의 중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문제가 불거져 나와 회의가 이승만을 성토하는 대회로 변해버렸다. 결국은 임시정부까지도 불신임이 되어 『국민대표대회』를 열어 상해임시정부 해체와 군사지휘권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지었다. 4월 27일에 임시정부 해체를 요구하는 통첩문을 임시정부에 발송하고 29일에 대표를 상해에 띄워 임시정부의 해산을 최후로 통첩하였다.
이 해 5월 신채호는 『국민대표대회』의 소집을 가속화하기 위해 김정묵, 마봉래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를 발기하고 『통일책진회 발기취지문』을 작성,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이 진척이 늦어 1923년 초에 가서야 각 지, 각 파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국민대표대회를 열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임시정부고수파와 개편하자는 소극적인 개조파, 결렬 청산하자고 하는 적극적인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난투까지 벌어졌다. 결국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고수파들이 승리하였다. 5월에 이르러 국민대표대회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내무총장 김구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 내무령 1호로 국민대표대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김구도 이승만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임시정부만은 하늘이 무너져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다가 회의 결과에 크게 실망하고 북경에 돌아가 김약산의 무정부주의와 손잡고 무정부주의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시기 또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 이대소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신채호는 일제와의 판가름 싸움을 맹세하고 폭탄제조소를 설치하였다. 그는 자금을 해결하려고 위조화폐를 가지러 갔다가 대만 기륭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적들 앞에서 항상 의연한 자세를 가졌으며 눈에는 언제나 차가움이 서려있었다. 1936년 2월 21일에 신채호는 57세를 일기로 여순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신채호는 상해임시정부 초기에 당파싸움에 염오를 느끼고 독립투쟁문제에서 분기가 있어 임시정부에서 탈퇴했지만 누구보다도 강직한 독립투사로, 애국자로, 민족사학의 위대한 선구자로 역사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이승만을 탄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상해 프랑스 조계지의 한인교포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한 차례 전에 없던 정치 대논전(論戰)을 벌였다. 김구는 이 정치 대논전에서 적지 않는 정치예술을 학습하였다.
국민대표회의의 소란이 잠잠해진 후, 상해 한국임시정부는 파멸의 변두리에 이르게 되었다. 주요 지도자들이 잇달아 상해를 떠났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태산 같았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不信任案)을 취소하고 이승만이 상해에 와서 취임하고 대세를 주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임시의정원에서는 1924년 6월, 임시헌법 제17조에 근거하여 『임시대통령유고안(臨時大統領有故案)』을 통과하고 국무총리 이동녕을 대리총통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동녕이 내각조직에서 실패했다. 하여 12월에 박은식을 대리총통으로 선출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결정을 중국 각 지방과 미국의 한인교포들에게 통고하고 그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려 하였다. 헌데 뜻밖에도 이승만이 미국의 재정지원을 끊어버렸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항의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한국의 독립운동을 동서로 나누고 동방은 상해임시정부가 영도하고 서방은 뉴욕에 있는 이승만이 영도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승만의 이런 작법은 상해에 있는 모든 한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1925년 3월, 한국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할 준비를 하였다.
대통령 대리 박은식이 내무총장 김구를 찾아와 탄핵으로 하여 초래될 후과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날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고 있었다. 박은식과 김구는 어느 자그마한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22년, 국민대표대회가 소집됐을 때 김구와 박은식 사이에 엄중한 마찰이 생긴 적이 있었다. 김구는 심지어 분을 못 참고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朴始昌)을 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필경은 저명한 역사학자라 흉금이 넓어 김구를 이해해주고 그때의 일을 가슴에 묻어두지 않았다. 오늘 두 사람이 다정하게 한 자리에 앉았다.
박은식은 1859년 생으로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호가 성칠(聖七)이고 자가 백암(白巖)이다. 그는 저명한 철학가이고 정론인이고 소설가였다. 3.1운동 후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에 참가하였고 후에 상해에 와서 『동지회』를 꾸리고 총재가 되었으며 『독립신문』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철학 상에서는 “마음은 만물의 근원이다”, “천도(天道)는 규칙적으로 순환한다”와 물극필반(物克必反) 등을 주장하였고 “생존경쟁은 천인지리(天演之理)고 우수한 것이 반드시 승리하고 낙후한 것이 반드시 멸망한다(優勝劣敗)”는 설법을 제창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한국통사』,『한국독립혈사』,『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외 애국소설과 평론이 있다. 그는 학자로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한 나라를 이끌 만 한 정치인으로서는 손색이 있었다. (그는 총리대리로 선거된 이듬해, 1926년에 별세하였다.)
박은식이 차 한 잔을 들고 말했다.
“오늘 김 총장과 만나자고 한 것은 이승만 일 때문입니다. 가령 이승만을 탄핵하게 되면 미국의 지지를 잃게 되고 자금 후원이 끊어지게 됩니다. 지금 국내와의 연계도 이미 중단된 상황입니다. 김 총장의 생각엔 어찌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김구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의탁하여 한국의 독립을 하려고 하는데 이는 원칙문제로서 절대 안 됩니다. 그는 또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어 그가 미국의 한국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상해임시정부는 중국과 시베리아만 영도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 분열의 행위로서 절대 불가능합니다. 저는 미국의 교포들이 모두 이승만의 부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선 우리의 동포입니다. 그들이 일단 진실한 내막을 알게 되면 반드시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입니다.”
박은식이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한탄조로 말했다.
“10년의 삶에 10년의 교훈이니 도대체 어느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김구와 담화를 나눈 후 박은식은 용기를 얻어 최후의 결심을 내렸다.
제13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안위원회(提案委員會)를 성립하고 제안위원회의에서 제출한 내용에 근거하여 임시정부 대총통 이승만 심판위원회를 설립했다.
1925년 3월 11일, 심판위원회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심판서를 공포하였다.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대통령 직을 해임하는 사실과 이유
대한민국 7년3월 18일, 임시의정원에서 통과한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 안에 근거하여 이승만의 위법증거를 아래와 같이 열거한다.
민국 6년 12월 22일, 전 재무총장 이시영이 이승만에게 공문을 보내주었다. 같은 날 국무원 성원이 전문 열독하는 임시대통령 공문을 보냈다. 민국 7년 7월 3일, 구라파, 미주 위원부의 특별통신을 보내주었다. 민국 7년1월 28일, 구라파, 미주 특별호 통신을 보냈다. 같은 해 2월 박은식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한 번도 응답이 없었고 전혀 관심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늘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외사활동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제 마음대로 직무를 떠나 해외에 떠난 지 이미 5년이 되었다. 위기를 수습하고 독립대업을 이루는 일에서 그 어떤 성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요언을 살포하여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인심을 해이시켰다(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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