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牛禁峙)전투. (1894년 10월 ~ 11월)
삼례(參禮)에서 제2차로 기포(起包)한 전봉준(全琫準)등 남접(南接)과
보은(報恩)에 집결한 손병희(孫秉熙)등 북접(北接)은 협력해 충청감영 소재지이며
서울로의 북상 길목인 공주(公州)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0월 9일 논산(論山)에서 합류한 4만 명의 양측 주력부대는
노성(魯城)을 거쳐 공주(公州)에서 30리 떨어진 경천(敬川)에 주둔하였다.
여기에는 낙오한 청군(淸軍)도 40∼50명 가량 가담하였다.
이에 대항해 구상조(具相祖)·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경리청(經理廳) 병정과
장용진(張容鎭) 등의 통위영(統衛營) 병정을 중심으로 한 관군(官軍)810명과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이 지휘하는 감영병(監營兵)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은 공주(公州)를 부여(扶餘)와 논산(論山)양 방면에서
협공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10월 23일 이인(利仁) 쪽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이 날 관군은 패퇴하였고, 공주감영(公州監營)과 10여 리 되는 효포(孝浦)까지 빼앗겼다.
24일과 25일에는 관군의 응원군과 일본군 1개 중대 100여 명이 가세해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효포(孝浦)의 후면에 있으며 공주감영(公州監營)과 직통하는
웅치(熊荳)를 둘러싸고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은 그 대다수가 죽창(竹槍)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잘 훈련되고 우세한 화력을 가진 관군과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하였다.
다시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의 초포(草浦)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이인(利仁)과 우금치(牛禁峙)를 거쳐 공주(公州)로 들어가는 통로를 주 공격로로 삼고,
웅치(熊荳)를 비롯한 몇 개의 통로를 보조공격로로 잡아 공주(公州)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1월 8일 동학농민군의 한 부대는 경천(敬天)에서 판치(板峙)를 거쳐 공주성의 남동쪽으로 진격했고,
다른 한 부대는 이인(利仁)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남서쪽에서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오후 3시경 제1대는 먼저 판치(板峙)를 넘어 효포(孝浦)를 공격해 관군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렸다.
동시에 제2대 1만여 명은 이인(利仁)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향해 진격하였다.
총지휘를 맡은 일본군 대위 "모리야"(森尾雅一)는 280명의 경리청병을
우금치산(牛禁峙山) 으로 후퇴시키고, 일본군 1개 소대와 함께 우금치(牛禁峙)를 수비하였다.
밤새 불을 피우고 총과 포를 발사하는 등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던 양군은
날이 새자 결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11월 9일 오전 양군(兩軍)의 배치를 보면, 동학농민군은
동쪽의 판치(板峙)부터 서쪽의 봉황산까지 40∼50리에 걸쳐 포진했고,
특히 주력부대는 우금치산(牛禁峙山)전방 500m에 있는 산 위로 전진해갔다.
통위영병과 감영병은 전면과 오른쪽 방어를 맡아 금학동·웅치·효포·봉황산에,
그리고 경리청병 일부와 급파된 독립19대대 중로분진대(中路 分進隊)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은
우금치산(牛禁峙山)과 견준산(犬浬山)에 분산 배치되었다.
오전 10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牛禁峙)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동시에 삼화산(三和山)에 진을 쳤던 1만 여명의 동학농민군도 오실(梧室) 뒷산을 향해 전진하였다.
고지전(高地戰)적인 양상을 보인 전투에서 지세 상 유리한 곳에서 수비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대포를 비롯해 각종 화기를 돌격하는 동학농민군에게 퍼부었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맞써 싸웠으나
일본군의 "개틀링기관총"에 무참히 학살을 당하게 된다.
당시 일본군이 가진 신무기인 "개틀링기관총"(Gatling gun)은 치명적인 무기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굴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방전이 오후까지 이어졌으나,
관군의 공격적인 방어를 막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로 1만여 명이었던 동학농민군은 2차 접전 후 3,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다시 2차 접전 후에는 500여 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였던 관군도 감히 더 이상 그들을 추격하지 못하고 정세만 살피고 있었다.
한편, 효포(孝浦)쪽을 공략하던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방어가 소홀하면
그 틈을 타서 산봉우리를 점령하는 등 하루종일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커다란 희생을 치렀으면서도 관군과 일본군의 견고한 수비를 돌파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결국 11일 오후에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쪽으로 완전 후퇴하기에 이르렀고,
전봉준은 조선사람끼리 싸우지 말고 척왜(斥倭)와 척화(斥和)를 하자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또, 효포(孝浦)에 주둔하고 있던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도 사기를 상실해
변장한 관군 10여 명에게 기습당하고 계룡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공주를 점령한 다음 서울로 북상하려던 동학농민군은 이렇게 우금치(牛禁峙)에서 좌절당하고 말았다.
항상 가보고자 했던 우금치(牛禁峙)를 10월 초에 방문하게 되었다.
찾아간 첫 인상은 너무도 황량하고 쓸쓸했다.
주차장은 버스와 소형차가 나뉘어 주차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그날은 내 차 하나 뿐이였다.
알림터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실에서 여직원이 나와 반가이 맞아준다.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학군(東學軍)이 왜 봉기했는지 그 진실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사회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반란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동학군(東學軍)의 이곳 공주 우금치(牛禁峙)전투가 최대의 치열한 싸움터였다는것도 사실 모른다.
동학군의 패배 원인인 수뇌부의 지휘능력, 초보적인 무기,
이러한 것들이 지금까지도 냉철히 지적되지 않고 있다.
특히 지금 70대 세대때는 동학운동에 대해 그리 우호적으로 교육되지 않았다.
우금치 알림터에서 위령탑으로 가는 길은 수크렁만이 가득한 쓸쓸한 길이다.
이 詩碑를 읽다보면 글자가 각각이다.
이 詩碑를 세운 이야기를 먼저 읽어 보아야 이해가 된다.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년 횃불 맨몸으로 일어선
오늘도 백성은 하늘이다.
짓밟힌 가슴
온갖 설음받던 것들 함께 모여
타오르던 벌판
굴절된 역사의 어리석음으로
채 오르지 못하고 쓰러진
아 사무치는 우금티
산맥을 품고 달려온 이들아
두눈 크게 뜨고 보아라 여기
사람사는 세상 으로 흐르는 강물
손길 발길 다지고 다져 보는 흙담
알알이 쌓아 새긴 돌무지탑 염원으로
울려 퍼지는 자주 평등 대동 세상
어와 내사랑 우금티에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년 봉화 고스란히 남은
끝끝내 백성은 하늘이다.
동학혁명군 위령탑 (東學革命軍慰靈塔)
동학혁명군 위령탑 (東學革命軍慰靈塔)인데 안내문에는 "군"(軍)이 빠져 있다.
천도교(天道敎)에서 붙인 감사문인데 일부 글자들이 훼손되어 있다.
우금치(牛禁峙)로 올라가 본다.
옛날에도 이렇게 넓었는지 모르겠다.
700m 올라가면 봉화대라고 하는데 다니는 사람이 없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언덕 옆 숲에는 마치 숨어있듯 장승들이 서있다.
오래 돼서 부식이 많이 됐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올려다 본 우금치(牛禁峙).
저 위에 기관총을 설치하면 이 넓은 평지에 숨을 곳도 없어 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우금치 아래로 터널이 뚫려있다.
큰 길로 내려가는 포장도로 옆에는 우금치에 대하여 쓴 많은 詩가 있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중요한 곳인데 왜 이리 쓸쓸할까?
아마도 교육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역시 동학혁명에 대해 그리 배우지 못하고 자란 세대이다.
아니 어쩌면 혁명이란 단어가 금기시 되어 있던 세대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혁명이란 말을 들으면 저 마음속 깊이 거부감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며칠 후 제주도를 간다.
이번에는 제주의 4.3터를 조금이라도 돌아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