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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칼빈과 웨슬리의 성화론 비교
양희화
1. 시대적 배경
(1) 칼빈의 시대적 배경
ㄱ) 로마 카톨릭 주의
로마카톨릭은 그들이 진리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기에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킬빈은 그것을 맹복적인 복종과 연합으로 간주했고, 진리는 성경에 속한 것이며 교회의 권위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 했다. 그는 교황제도를 “그리스도의 자비와 그의 계명의 적”으로 간주했다. 로마교회에 대한 단호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연합, 보편성, 질서, 권위”에 대한 뛰어난 지적 감각을 이어 받았다. 둔스 스코투스의 영향 아래 칼빈은 모든 참된 지식은 복종의 결과라고 인정했고 하나님의 절대 자유는 어떤 성례전이나 인간의 줄에 매이지 않는다는 오캄의 견해에 동의했다. 비록 칼빈이 감정적 경험, 신비주의적 금욕주의, 영성주의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지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같은 그의 사상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ㄴ) 리버티니즘
칼빈은 리버틴들이 세상을 자기들처럼 되게 만들길 원하며, 복음은 “단지 삶에 대한 권위에 대한 반발과 정욕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미친 사람들로 간주했다. 그들은 가장 위험스럽고 전율케 하는 성화의 적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순간적인 영감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었다.
(2) 웨슬리의 시대적 배경
어니스트 래튼버리(J. Ernest Rattenburt)는 “카톨릭과 루터교, 성공회와 모라비안의 영향들이 모두 웨슬리 안에 혼합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그의 언급은 웨슬리가 카톨릭과 루터 신학, 율법주의와 모라비안의 신비적 정적주의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다는 셀의 평가와 유사하다. 성화에 대한 그의 교리는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하에 형성되었다고 말하지만 웨슬리는 수동적이고 정적인 반율법주의를 거절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혹은 우리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를 강조했다. 웨슬리는 확실히 영국 성공회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대체로 그 교회의 교리를 따랐지만 성공회의 형식적인 법과 제도는 거절했다.
ㄱ) 형식주의
웨슬리는 18세기의 대부분의 성공회 지도자들이 묘사했던 선한 그리스도인을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쳤다. “이름들과 함께 사라져라! 의견들과 함께 나가라!” 그는 그런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생기 없는 형식적인 종교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형식주의가 하나님의 임재를 제공하지도 않고 성령의 열매를 산출할 수도 없기 때문에 거절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와 연관되었으며 그의 ‘완전성화론’의 특징이 되었다.
ㄴ) 알미니우스주의
데이비드 베넷(David Bennett)은 “웨슬리가 1740년에 무상의 은혜에 관한 그의 논쟁적인 설교시기부터 1778년에 알미니안 잡지를 출판할 때까지 자신을 확실히 알미니안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1740년에 무상의 은혜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 웨슬리는 택자들에게 제한된 은혜와 속죄, 이중 예정, 특히 영원으로부터의 유기(reprobation)를 거절했다.
“알미니안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무상의 은혜에 의한 응답”에서 그는 원죄와 믿음에 관하여 제이콥 알미니우스의 편을 들었다.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세 가지 점에서 칼빈주의와 비교했다. 첫째, 칼빈주의자들은 영원으로부터의 절대적 이중 예정과 택자들을 위한 제한적인 속죄를 주장하는 반면에, 알미안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기초한 예정과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무제한적인 속죄를 주장한다. 둘째,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불가항력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알미안들은 비록 그것이 때때로 불가항력적이지만, “일반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칼빈주의자에게 예정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이지만, 알미니안에게 그것은 조건적이다.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의 사상으로부터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지만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목회적인 자신의 관점에 맞도록 적응시켰다.
ㄷ) 합리주의와 이신론
17세기 후반부터 영국 성공회는 종교에 합리주의의 영향이 미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합리주의는 “십자군 운동의 야수성”과 고통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에서 합리주의는 이신론과 교류하면서 그 힘을 더욱 더 강화시켰다.
이신론(deism)은 이성(reason)을 하늘까지 높였고, 미신(superstition)은 전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신론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신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ㄹ) 모라비안의 신비적 정적주의
아우틀러에 따르면 웨슬리는 세 가지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첫째는 아 켐피스(a Kempis), 로우, 캇니자(Catniza)등에 의해 대표되는 자발적인(voiuntaristic) 신비주의, 둘째는 몰리노, 기용, 드 살레스(de Saies)에 의해 대표되는 정적주의적(quietistic) 신비주의, 셋째는 클레멘트, 오리겐, 에프렘(Ephrem) 마카리우스(Macarius)에 의해 대표되는 동방 영성이다.
1738년 이후에 웨슬리는 사색적이고 은둔적이며 수동적인 삶을 격려하는 모든 종류의 가르침을 반대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말보다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후자가 인간의 본성이 신성에 삼키워진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마이클 크리스텐센(Michael J. Christensen)이 적절하게 언급하고 있듯이, 웨슬리는 성화에 대한 그의 사상에서 교부들의 전통과 자발적인 신비주의의 요소들을 일부 수용한 반면에 정적주의적 신비주의는 수동성(passivity)과 은둔성(seclusion) 그리고 반율법주의적 경향 때문에 비판했다.
ㅁ) 독일 경건주의
케네스 콜린스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독일 경건주의는 16세기의 스콜라주의와 17세기의 정통주의에 기인한 형식성(formality)과 비인격성(impersonality)에 대한 반발과 그리고 30년 전쟁과 같은 종교전쟁에 기인한 도덕적 혼란에 대한 반발에서 성장했다. 웨슬리는 주로 요한 아른트(1555-1621)의 작품 “진정한 기독교(Wahres Christentum, 1605)”와 필립 야곱 스페너(1635-1705)의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 1675)”,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의 “할레의 경건(Pietas Hallensis, 1707)”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았다.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로부터 웨슬리는 세 가지 주제를 배웠는데 첫째,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 가지의 다른 발달 단계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진정한 동교는 외적인 변화보다는 내적인 신생(rebirth)에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교리의 순수성은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라 거룩한 삶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신학 여정의 초기에는 모라비안의 경건이 즉각적인 변화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면 테르슈테겐의 경건은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성숙한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콜린스는 오리혀 웨슬리는 그가 영국 성공회와 사도적 교부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에서 영국 복음주의자로 간주하였다. 비록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강조했지만, 그는 복음의 확장과 그리스도를 강조했기 때문에 경건주의자라기 보다는 복음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강조하였으며 경건주의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범으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비판했다.
ㅂ) 열성주의(Spiritualism)
1750년에 웨슬리는 열성주의를 “마음의 무질서”와 “광기(madness)의 한 동류” 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세 가지 종류의 열성주의를 제시했다. 첫째 유형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유형은 “자신들이 가지지 않은 은사들을-예를 들면 치유능력이나 예언 같은-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웨슬리는 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는 대체로 율법이나 성경의 증언에 의해 분별된다고 보았다. 어떤 비전이나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반적인 규칙은 그것이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좀더 세부적인 것들은 우리의 합리성과 경험에 의해 판단된다. 열성주의의 셋째 유형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능력에 의해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고 목적을 획득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넷째 유형은 “하나님의 계시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계시에 속한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그의 섭리에 돌렸다. 웨슬리는 그것을 “셋째 계명에 대한 명백한 위배”로 간주했다. 그는 영성주의(Spiritualism)가 “믿음과 사랑, 의와 참된 거룩의 샘을 메마르게 하고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음과 완고함을 동반하는” 교만을 만든다고 결론지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더 깊은 고찰”에서 웨슬리는 열성주의자들(Enthusiasts)이 완전에 대한 순간적인 획득을 주장하고 완전 전에 책임 있는 성장을 주장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웨슬리는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라고 묘사했다. 결론적으로 비록 웨슬리가 “순간적인 회심,”“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회심의 경험적 증거”와 같은 열성주의자들의 타당한 요소들을 인정했지만, 그들의 비합리성과 거짓된 가정들은 반대했다. 한마디로 웨슬리는 열성주의를 성화의 해로운 적으로 간주하였다.
2. 정의
A. 칼빈의 구원의 서정
(1) 소명
칼빈의 구원단계가 예정론을 기초로 함으로 예정 다음에는 자연히 택한 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이 온다. 이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이미 아들의 위치에 택하셨으나 칼빈은 부르심 받은 자만이 이 위대한 긍휼을 소유하게 된다고 본다. 부르심의 방법은 은혜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부르심은 말씀의 들음과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성립된다. 택한자들에게 내면적 부르심은 거짓없는 구원의 보증이 된다. 칼빈은 예정에 대한 연구를 오직 부르심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끝나게하자고 주장한다. 부르심은 보편적 소명과 특별소명이 있는데 보편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외적 말씀전파를 통해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만 이것은 사망에 이르는 향기와 무거운 단죄의 기연이 되는 부르심이다. 특별소명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만 주시는 것으로 전파된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뿌리내리도록 성령의 조명을 실현시키는 경우이다. 때로는 일시적 조명을 받은 자도 이에 참여하나 후에 그들은 배신의 연고로 버려지게 된다.
(2) 중생
중생은 “영적 삶의 시작”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에게 중생은 초기 중생과 일생 전반에 걸친 중생의 두 개념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칼빈은 중생의 의미를 일생에 걸친 회개, 회심, 성화로 보았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의식하는 것과 무관하게 성령으로 직접 나게 하시는 것이다. 중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이뤄지며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상실한 하나님의 의 가운데로 회복되는 것으로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엄밀한 의미로 중생은 새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주시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중생은 인간의 근본적 변화로 전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순간적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중생으로 그리스도는 우리 것이 되시며, 우리는 그의 몸에 접붙임 받아 그의 영을 통해서 살고 그의 통치를 받게 된다. 또 중생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므로 옛사람이 그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죽어 타락한 성품이 힘을 못쓰게 된 사건이다. 중생의 목표는 신자의 생활 중에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순종과의 조화 및 일치를 나타내는데 있고, 그들이 자녀로 영접되었음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3) 신앙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제공된 은혜를 수납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자녀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거주하지 않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따라서 신앙은 신자의 “중생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이 “성령에 의한 마음의 조명”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신앙은 중생을 따른다고 말해질 수 있다. 신자의 의식에서는 신앙이 중생을 앞선다.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신자를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자신을 신자에게 알리시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제공하신다.” “은혜의 두 종류”로서 회개와 죄사함은 신앙에 의해서 획득된다. 신앙은 신자들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발생시킨다.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신자를 “그의 몸에 접붙이시고 그의 모든 유익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 참여자가 되게 하신다”. 신앙은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거룩한 끈”이다.
칼빈은 신자 안에서 그의 기쁨을 위해 의도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신자의 노력을 하나님의 노력으로 돌렸다(빌 2:13). 그는 “(사람의)의지에게 스tm로의 힘이라고 주장할 만한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칼빈은 견인과 관계된 모든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 돌리고 사람에게 돌리지 않았다.
(4) 회심
칼빈에게 중생, 회심, 회개와 성화는 거의 같은 용어이다. 칼빈은 회개를 첫째, “하나님께로의 참된 전향”으로 정의했다. 둘째, “어느 누구도 과거의 삶의 잘못에서 자신을 바른 길로 옮기고 회개의 실천을 위해 자신의 전적인 노력을 적용함이 없이는 복음의 은혜를 수용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셋째, 칼빈이 회개에서 심령의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성화와 회개의 구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외적인 고백을 강조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선을 반대하기 위해서다. 칼빈은 회개를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두 형태로 본다. 율법적 회개는 그것으로 죄인은 뼈아프게 생각하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자기 상처를 위한 약으로, 공포에 대한 위로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다. 회개와 신앙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으나 칼빈은 구분시킨다. 회개의 뜻은 신자의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전향하는 것이며, 그 전향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옛사람과 육신이 죽는 것과 성령에 의해 새로 사는 것이다. 이 갱생은 순간의 사업이 아니라 죄와의 투쟁에 있어서 신자의 지상생활 중 계속하는 것이다. 비록 허물은 씻겼으나 죄의 사실이 정욕 가운데 남아 있기 때문이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의 의무와 사람에게 대한 사랑의 의무이며, 중생, 성결, 순결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회개는 지정의의 요소를 포함해야 하며 회개의 지는 죄를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지적수준에서 정적수준으로 향상되어야 하며 완숙한 회개는 의지적 단계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앞으로 삶을 결단하는 것이다.
(5) 칭의
예정하사 택하고 부르신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회개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앙은 칭의에서도 유효하다. 칼빈은 “칭의의 은혜가 비록 중생과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에게 “칭의와 성화는 뿌리와 가지가 아니고 한 공통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들”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둘 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접붙여진 직접적인 결과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신자는 단 번에 칭의되고 그 때 성화되기 시작한다. 신자는 삶의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칭의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성화시키지 않는 어느 누구도 칭의 시키지 않는다”. 한 마디로 성화는 칭의의 목적이다. 칭의의 목적은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칭의는 그리스도가 신자를 위해서(대리로서)행하신 일이다. 칭의는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롭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칭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성부께 복종하신 그 순종을 믿음으로 그 의를 옷입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은 무죄하기 때문이 아니고 은혜스러운 전가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6) 성화
칼빈에게 성화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계속적으로 신자의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림으로써 신자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화란 죄인을 순결하게 하시며 죄인의 전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하여 선행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운 작용이다. 칼빈에 의하면, 죄용서와 성화 또는 의인과 중생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합일로 얻게 되는 최상의 두선물이다. 성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신자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성별하고 십자가의 제사에서 자신을 드렸듯이 하나님께 신자의 목과 마음을 성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칼빈은 단순히 회개를 성화로 설명하여 성화의 목표는 아담의 범죄로 더러워지고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 한다. 칼빈은 순식간에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성화과정을 말하며 그동안에도 여전히 죄인이므로 평생 회개해야 함을 말한다.
칼빈에 있어서 성화가 일어나는 근거는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에 의존하며 그의 은총에 근거하지 우리 자신의 노력, 선행, 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7) 견인
견인은 모든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생애 동안 믿음과 성화의 지속으로 정의될 수 있다. 신자의 삶이 사탄과의 끊임없는 전투이기 때문에 끝까지 신앙의 시험을 견디어야 한다. 견인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칼빈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했다. “견인하기 위해서 힘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칼빈은 견인이 인간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견인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기도와 관계한다. 견인은 신자가 구원의 길에서 인내하는 계속적 활동을 암시해 주지만 실제 견인은 신자의 활동이기 보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신자가 이 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성령이 신자 내부에서 이루시는 계속적인 구원완성을 위한 작용이다. 성도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음은 이런 하나님의 견인은혜를 믿을 때이다.
칼빈에게, 신자들이 견인하는 것은 가능한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효과적으로 영향 받아서 자발적으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견인은 비록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하나님께서 신자의 구원을 성취하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필요로 한다.
칼빈의 구원관은 이처럼 예정론에 근거하여 구원된 성도를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시는 견인에서 절정에 이른다.
(8) 선행
칼빈은 신앙이 없이는 “선행으로 보이는 것들이 죄로 변하기 때문에” 단지 신앙에 의한 선행만이 하나님께 열납된다고 보았다. 선행은 자신의 소명을 성취하는 열매이다. 한 마디로 선행은 회개의 열매다. 눅가복음 3:10의 주석에서 칼빈은 신자가 경건한 자들과 위선자들을 선행에 의해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선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식을 수행함에 의해서 자신이 회개하는 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자선과 율법의 둘째 돌판에 쓰여진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경건과 예배의 외적인 고백”을 무시하지 않으시지만, 회개의 열매를 “좀더 확실한 구별의 표시”로 간주하신다. 이런 구별은 신자를 더 적은 실수로 이끈다.
선행은 성화된 사람들과 말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행동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위선자들과 구별시킨다.
(9) 영화
영화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성령의 적용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보다는 예정과 소명으로 시작한 전 구속과정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하나님의 선택이 성부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 예정된 바 그 목적 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보장된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생의 삶은 죽음으로서 중대한 일단락을 맺게 된다. 육신의 죽음은 성도의 싸움의 종국을 의미한다. 한편 영화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소망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완전한 심판을 고대하게 한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영화를 경험한다.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화로움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완전히 만족할만한 완성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영화를 소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직 주의 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날에 성도는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어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B. 웨슬리:1700년대 중반
1) 칭의 전의 상태
(1)잠자는 상태
“속박의 영과 양자의 영”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자연적인 사람의 상태를 “잠의 상태”로 비유했다. 자연적인 사람은 그의 눈이 영적인 어둠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영적인 사물을 불 수 없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함과 행복에 대해 전적으로 부지하다. 그의 잠자는 상태는 “지상적이고 마귀적인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평화의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행은혜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선행은혜는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2) 깨어있음: 칭의 전의 회개
웨슬리는 칭의 전의 회개와 칭의 후의 회개를 구별했다. 그는 칭의 전의 회개를 율법적인 회개로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일깨워진 사람이 진지한 결심으로 자신의 생애에서 새로운 영적인 여행을 시작할 때 발생한다. 이 회개는 “교정에 대한 참된 갈망과 진지한 결심에 이르게 하는 죄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적인 죄보다는 실제적인 죄와 관계가 있다.
믿음과 회개의 관계에 있어서 칼빈은 복음적 회개의 전제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것으로 간주하고, 구원을 위해서 율법적 회개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한 반면에, 웨슬리는 율법적 회개가 이신칭의 전에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웨슬리에게 율법적 회개와 그 열매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필수적으로 믿음에 앞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우선 회개함이 없이는 아직 참으로 복음을 믿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어느 누구도 우선 죄를 확신하지 않고는 참으로 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는 “그것이 믿음의 성장이나 지속에 필수적”이기에 초기 칭의에 간접적으로 필수적인 반면에, 믿음은 직접적으로 칭의에 필수적이다.
웨슬리는 율법적 회개를 종의 믿음과 연결시켰으며, 복음적 회개를 아들의 믿음에 연결시켰다. 칭의 전의 회개의 과정에 관하여 웨슬리는 일반적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은 후에, 각성한 사람은 그의 온 이해력과 모든 의지력을 다해서 죄와 싸우려고 투쟁하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사단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죄와 속박을 더욱 더 느끼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는 어떤 외적인 죄에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어떤 내적인 죄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가 그것에 대해서 초조해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는 반복해서 회개하고 죄를 짓는다. 마침내 그는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하면서 탄식한다.
웨슬리가 칭의를 죄에 대한 확신 혹은 자기 지식, 영의 빈곤, 자기 의의 거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는 콜린스의 분석은 타당한 것 같다. 영의 가난함은 성령의 조명 안에서 율법을 통해 본 자기 지식의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칭의 전의 회개는 아들의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위해 간접적으로 필수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웨슬리는 칭의 전의 회개의 열매를 선행으로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했으며 사단과 죄의 세력에 의해 거룩하지 못한 요소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에 의한 칭의 이후의 회개의 열매는 선행으로 간주되었다.
(3) 칭의
웨슬리는 칭의를 “과거의 죄에 대한 사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성부 하나님의 행동으로 정의했다. 이런 정의는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첫째, 칭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 칭의는 죄사함을 수반하고 죄인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시킨다. 셋째, 칭의는 과거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전가된 의, 즉 칭의는 하나님께 용납됨의 근거이다. 반면에 내재하는 의, 즉 성화는 그것의 열매이다. 비록 웨슬리가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회개와 선행이 칭의에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칭의의 공로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칭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서 내재적인 의는 최종칭의에 필수적이다.
웨슬리는 칭의가 대체로 순간적이라고 강조했다. 칭의시키는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은 사람은 그의 심령을 다스리는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양자의 영”을 받아 “아빠 아버지!”라고 외친다. 따라서 칭의는 신분적 성화라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웨슬리에게 초기칭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존하지만 최종칭의는 믿음, 회개, 선행에 의존한다. 개력주의자들과 대조적으로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칭의의 형식적인 원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트렌트공회와 유사하게 공로적인 원인으로 보았다. 초기칭의는 계속해서 죄 가운데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상실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간적인 선물이며 때때로 불가항력적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회개와 그것의 열매에 뒤따르는 것이며 중생과 동시에 발생한다.
(4) 중생
웨슬리에게 중생의 때는 칭의의 순간과 같다. 중생과 칭의는 모든 신자에게 “한순간에 동시에” 주어진다. 동시에 “그의 죄는 지워지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다.”
중생의 필수성에 관하여, 웨슬리는 요한복음 3장 3절을 언급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웨스리는 교만, 자기의지, 우상숭배가 심령을 지배하고 있는 한, 행복을 위한 공간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생과 성화의 관계에 관하여, 그는 중생을 성화의 입구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설교에서(1787), 웨슬리는 “신생은 성화의 시작점”이라고 하였다.
성화는 점점 더 환전한 날까지 증가한다. 신생은 “모든 선한 기질을 이식시키는 것”인 반면에 완전성화는 “모든 악한 성향으로부터 구원”이다. 중생은 “성화의 전 과정이 아니고” 성화의 현관이다. 신생 후에,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진다.
변화의 방향의 관점에서, 웨슬리는 중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생은 “어둠에서 놀라운 빛 속으로”, “야수와 마귀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상의 육적이고 마귀적인 마음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으로의 내적인 변화이다. 리처드 모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중생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남, 신적인 모양의 회복, 여전히 계속되는 심령과 삶이 우리의 가장 거룩하신 구속주와 일치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신생의 완전에 관하여, 웨슬리는 중생한 자들은 이미 죄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다고 보았다. “어떤 후기 대화에 관한 메모”에서 그는 칭의시키는 믿음을 가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외적인 죄를 이길 능력과 내적인 죄를 억누를 힘”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5) 칭의 후의 회개
칭의에 뒤따르는 회개를 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아무런 죄책도, 아무런 정죄감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육적인 마음, 즉 “악으로 기운 성향, 뒤로 물러나려는 심령과 성령을 거스려 갈망하는 육의 계)속되는 경향”에 대한 자책(확신)이다. 전자는 율법적 회개라고 불리고, 후자는 복음적 회개라고 불린다. 복음적 회개는 “모든 죄에서 모든 거룩함으로” 심령이 변화하는 것이다. 율법적 회개는 외적인 죄와 관련된 반면에, 복음적 회개는 내적인 죄, 즉 육적인 본성과 관계되고 더욱 더 영적인 성숙을 목표로 한다.
“전적인 무력감”에 대한 확신은 이런 회개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칭의 전에 그랬듯이, 칭의 후에도 신자들이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들은 선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약과 신약에 있는 완전성화를 약속하셨다. 그것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또 다른 단계이다. 회개와 신앙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웨슬리는 그 둘을 세 가지 축면에서 비교했다. 첫째, 회개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심령에 남아 있으며 우리의 말과 행동에 붙어 있는 죄를 느끼는 반면에,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순화시키고 우리의 손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 둘째, 회개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어쩔 수 없는 자책을 갖는 반면에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단지 자비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순간에 우리를 돕는 은혜도 받는다. 셋째, 회개는 “그가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신앙은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웨슬리에게 칭의 후의 회개는 “은혜 안에 지속과 성장,” 즉 점진적 성화에 필수적이다.
(6) 완전성화
웨슬리에게 완전성화는 이생에서 획득할 수 있는 성화의 최종적이고 최고의 상태이다. 감정의 관점에서, 웨슬리는 완전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인내하는 사랑이며 우리의 기질과 말과 행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완전은 예수님이 홀로 “모든 움직임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심령을 다스리는 상태다. 이런 방식으로 완전성화는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바른 관계 속에서 감정의 순수화로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와 거의 같은 의미다.
내적인 죄에 관하여, 웨슬리는 완전성화를 내적인 죄를 구성하는 악한 생각과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했다. 웨슬리는 우리의 기질, 생각, 말과 행동에 있어서 전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대한 우리의 일치로서 우리의 행동과 삶을 배제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완전성화를 “완전한 율법에 대한 온전한 일치”와 동일시하지 않았고 도덕적 기준의 견지에서 우리의 실제적인 변화로서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완전을 지키는 방법에 관하여 웨슬리는 양심과 관련지어서 몇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 “죄가 최초로 나타날 때 죄의 경계선에 주의하라. 둘째, 하나님 앞에서 즉,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라. 셋째, 당신의 심령과 삶을 부지런히 검사하라. 넷째, 당신의 전 삶이 천국을 위한 준비가 되게 하라.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죄를 범하는 모험을 하지 마라.” 여섯째,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마라. 일곱째, 사건들이 아니라 당신의 의무를 기억하라. 여덟째,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무슨 충고든지” 당신에게 적용하라. 아홉째, 당신이 기도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마라. 열째,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자리에 있다면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라.
웨슬리는 양심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 거룩을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웨슬리에게 완전성화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최종적인 단계다. 그것은 칭의의 목적이요 결과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불변의 뜻이다.
결론
칼빈과 웨슬리는 각자 자신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였다. 두 신학자의 신학은 강조점의 차이가 있으나 지향하는 방향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칼빈과 웨슬리는 ‘죄론’에 있어서 차이가 보인다. 두 신학자의 ‘죄론’의 차이는 ‘성화론’의 차이로 이어진다. 칼빈에게 있어서 죄는 인간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성화적 삶을 산다 할지라도 현세에서 이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투쟁하는 모습으로 성화적 삶을 사는 것이다. 웨슬리 역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안받아들이냐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칼빈과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차이를 보이는데 그것은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한 사건의 다른 면으로 파악한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기인하며 인간의 활동은 주변적일 뿐이다. 칼빈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고 중생과 회심과 성화를 동일시하였다.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를 명백하게 구분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용어사용은 칼빈과 차이가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는 중생과 동일하며 중생은 성화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러나 중생은 성화와 다르다. 웨슬리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칭의와 중생을 동일한 편에 두며 중생과 성화를 구별한다.
칼빈과 웨슬리의 성화론 비교에 있어서 서로의 신앙적 확신에 대해 상호 이해하고 용납하여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때 모든 성도들과 한국 교회의 미래가 밝아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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