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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궁자의 비유 | 의미 | 교설 | 오미 |
아들을 찾으려고 쫓다 | 의의(擬宜) | 화엄(華嚴) | 유미(乳味) |
저택에서 일하도록 한다 | 유인(誘引) | 아함(阿含) | 낙미(酪味) |
부자의 신뢰를 강화한다 | 탄가(彈呵) | 방등(方等) | 생소미(生蘇味) |
가업을 관리시키다 | 도태(淘汰) | 반야(般若) | 숙소미(熟蘇味) |
가업을 정식으로 상속하다 | 개회(開會) | 법화(法華) | 제호미(醍醐味) |
[엔도] 법화경은 '불법의 제호미'이군요. 법화경을 알지 못하면 불법의 참된 '맛있는' 부분을 모르게 됩니다.(웃음)
석존은 처음에 자신이 깨달은 세계를 대강 나타냈습니다(화엄). 하지만 이승(二乘)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사람들의 낮은 뜻에 맞춰, 낮은 목표를 설정한 소승의 가르침인 아함경을 설했습니다.
다음에는, 뜻이 높은 사람들을 위해 대승의 여러 경전을 설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들은 소승의 가르침에 집착하고, 대승의 가르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사이토] 이승들은 그 일을 회상하면서 "하루 급료를 받았을 뿐인데 잔뜩 받았다고 만족하여, 다시는 받으려고 생각지도 않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SGI 회장] 소욕지족(小欲知足)도 중요하지만(웃음), 정법에 대해서는 탐욕스러워야 합니다. 욕심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욕심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입니다. 무상의 깨달음, 보리를 구하는 욕심은 즉 보리가 됩니다. "나는 이 정도로 좋다."고 하면 겸허한 듯하지만, 실은 생명의 가능성을 낮게 보는 대만(大慢)입니다.
[엔도] 이승들은 소승의 소법(小法)에 집착하여 대승으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신해품에서 사대성문은 "옛날에 석존은 보살앞에서 '성문으로서 소법에 집착하여 그것을 구하는 자'를 비난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까닭은 대승으로서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법화경 223쪽, 취의)라고 회상했습니다.
'대승'이란 유일한 참된 대승인 법화경을 말합니다. 이것이 부처의 참된 '재산'입니다.
'신해(信解)'의 의의
[스다] 신해품은 이렇게, 성문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영해하여(이해하여) 진심으로 기뻐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므로 '신해품'이라고 부르는 셈이지만, 이 '신해'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디무쿠티'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경도(傾倒)' '의향(意向)'을 뜻합니다. '~에 마음이 향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시하는 것이므로 '뜻'이라고 해도 좋다고 봅니다. 또 '무쿠티'는 '해탈'을 의미하는 '모크샤'와 어원적으로 연관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법화경(正法華經)>(축법호 역)에서 '신요품(信樂品))'이라고 번역한 신해품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나습 역)에서 '신해품'이라고 번역한 것은 본뜻을 더 깊이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GI 회장]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御義口傳)'에서 묘락의 <법화문구기>를 인용하여 "정법화경(正法華經)에는 신요품(信樂品)이라고 이름하는데 그 뜻이 통한다 해도 요(樂)는 해(解)에 미치지 않는다. 지금은 영해(領解)를 밝히는데 무엇을 가지고 요라 하느뇨."(어서 72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신해'라는 두 글자 속에 '신심과 지혜' '신앙과 해탈(깨달음)'이라는 불법상의 근본문제가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서는 '신앙과 이성' '믿는 것과 아는 것'이라는 철학과 문명의 근원적인 과제와도 연관됩니다. 매우 예민한 문제이고, 인지과학(認知科學), 심리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과도 연관됩니다. 또 불교에서도 예로부터 정밀한 고찰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대화로 모두 논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피해지나갈 수 없는 주제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들에게 파스칼이 "종교가 이성에 반(反)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 말을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믿는 것' 특히 '신앙'은 이성에 반하는 행위이거나, 적어도 이성을 잠들게 하는 측면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런 광신적인 종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검증도 하지 않고 '모든 종교가 똑같다.'는 말은 비약이며, 그것이야말로 이성에 위배됩니다. 근거 없는 맹신이며, 그것이야말로 이성에 위배됩니다. 근거 없는 맹신과 똑같다고 단정해도 좋습니다.
고등종교는 본래 이성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면서 인류의 보편적인 신뢰를 쟁취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지혜의 종교'라는 일컫는 불교는 매우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인간을 초월한 인격신(人格神) 등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서양적인 종교관에서 보면 "불교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입니다.
[스다] 특히 원시불교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대승불교가 되면 '신(信)'이 강조됩니다만….
[SGI 회장] 물론 그 말도 맞지만, 원시불교의 경우에도 불도수행의 근저에는 석존에 대한 '신'이 있고, 석존이 설한 법에 대한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을 출발점으로 하여 지적인 탐구도 성립했고, 분석적인 지성뿐 아니라 직관지(直觀知) 등 정신의 심층까지 동원한 '전 인격적인 사유(思惟)'가 가능해졌습니다.
[사이토] 종교뿐 아니라, 어떠한 수행이라도 처음부터 스승을 의심하면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활은, 모두 처음은 모방이다. 타인이 행하는 일을 보고 흉내 내면서, 믿고 생활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꽃꽂이도, 춤도, 검도도, 유도도 스승이 말하는 대로 믿고 모방하는 것이고, 그를 바탕으로 그 다음에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생활법이다."
[엔도] 갓난아이가 부모의 말도 전혀 믿지 않고(웃음), 우유도 독이 아닌가 의심하고(폭소), 물도 거부하며 마시지 않는다(웃음). - 그래서는 살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신다'는 것은 무언가를 '믿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회 자체가 서로 신뢰 없이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이런 생활상의 '신'은 종교적인 '신' 그 자체는 아니지만, 양자는 결코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연속된 것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는 "사람은 관념을 갖는다. 하지만, 신념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의 '관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생각한다'는 경우에도, 그 생각하는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무엇인가의 '신념'이라는 대지 위이고, 신념은 '생(生)의 용기(容器)'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는, 신념은 이미 우리의 심층부에서 작용하고 있다."
"신념은 우리 생의 기반을, 다시 말해 그 위에서 인간의 생이 전개되는 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략) 우리의 행위는 지적인 행위를 포함해, 모두 우리의 진정한 신념체계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러한 신념 속에서 '살고, 행동하고, 존재'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러한 신념에 대해 명백한 의식을 갖지 못한 채, 신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념은, 우리가 명석한 의식을 갖고 행동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모든 행위 속에 포함되어 있고, 잠재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르테가는 "신념은 지(知)의 하부구조를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논의를 보아도 현대의 통념이 된 '믿는 것과 아는 것의 대립'은 결코 자명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信)'은 인간 생(生)의 기본조건이고, 인간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믿느냐.' 뿐입니다. 그리고 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를 체계화한 것이 종교이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만인의 인생과 일상에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스다] 다만 많은 사람은 '자신이 기대에 서 있는 대지'인 '신념'에 대해 그다지 자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사이토] 오르테가의 관점에서 말하면,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 상태로는 자기 신념의 정당성에 대해 '이성적인 음미'를 시작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믿는' 것과 인연이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또 그렇게 믿는 사람일수록 자기자신의 생의 기반에 대해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SGI 회장] 대지에 비유해보면, 지진이 났을 때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았던 대지라는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뒷받침하는 신념이 무너졌을 때일수록 그 신념을 더욱 강하게 자각합니다.
개인에게 적용시켜 말하면, 인생의 심각한 벽에 부딪쳐 그때까지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는 때입니다. 석존 곁으로 찾아온 많은 사람도 그런 고뇌가 새로운 '신(信)'의 세계를 추구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막힌 결과, 문명의 근저에 있던 기본적인 가치관을 되묻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현대가 그런 시대임은 분명합니다. 특히 '신(信)과 해(解)'에 바탕을 두고 말하면, 근대사상의특징이던 '신(信)과 지(知)의 분리*대립'이라는 전제 자체를 되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과 지의 통합*지양(止揚)'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엔도] 이 점에 관해 이전에 이케다 선생님이 소카대학교에서 '스콜라철학과 현대문명'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신 일이 생각납니다. (1973년 7월,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1> 수록), 중에 '암흑시대'의 '어용철학'으로 생각되었던 스콜라철학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비추면서, 근대 이후의 과제인 '신과 지의 통합' '전 인격적인 지'를 향한 크나큰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셨기에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스다] '이성은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이라는 견해는 확실히 과거의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예를 들면 과학사(科學史) 분야에서도 '패러다임의 전환'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과학의 지식은 어떤 시대에도 변함없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라고 인식해왔지만, 실은 그것도 "과학자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시대에 지배적인 견해(패러다임)'와 불가분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엔도] 그 견해는 지금 매우 많은 학자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이성이 작용하는 근저에도, 예를 들어 '과학자 자신이 자명한 것으로서 믿고 받아들이는 사물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작용하고 있다. 이성의 근저에는 신(信)이 있다."는 주장이 점차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이토] 이 점에 대해서는 현대의 철학자도 여러 각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영국에서 활약하면서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준 비트켄슈타인은 "인간이 안다는 것의 근저에는 그 사람이 믿는 무엇인가의 '세계상(世界像)'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근저에는 증명이 불가능한 '신(信)'이 있고, 일체의 '지'의 작용도 신에서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체의 것을 의심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회의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의심하는' 것 자체를 믿고 있는 것이 됩니다.
[스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역사에 제약받은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 사회가 전제하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데서 인간은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SGI 회장] 무엇인가의 신념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기반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신념 그 자체는 최대로 존중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신념도 '이성'과 '사실'에 따라 검증(테스트)받지 않으면 자기의 주관 속에서 끝나버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보편성을 갖지 못합니다.
법화경이 설하는 '신(信)이 해(解)와 일체가 된 신' 다시 말해 '신해(信解)'라고 함은, 그 신이 단순한 주관이 그치지 않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처가 깨달은 근원의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소멸(心行消滅)'(<마하지관>)이고, 언어와 이성의 작용으로는 모두 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어와 이성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그 작용을 최대로 존중하는 것이 불법의 관점입니다. 부처의 깨달음은 이성이 미치는 바가 아니라 해도, 적어도 그 깨달음은 이성을 적대하거나 이성적 비판을 거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해의 '해'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성 자체는 아니지만, 이성과 합치하여 이성이 그 일부인 듯한 '지혜'입니다. 극한까지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전 인격적인 '지혜' - 그것을 '신'으로써 얻은 것이 '신해'입니다.
[엔도] 니치렌 대성인도, 극한까지 이성적이라고 하는 불교의 왕도(王道)를 행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굳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확인하셨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일례로서 입종선언을 하시기 전, 대성인은 각지의 사찰 등을 순회하셨습니다. 그때 종파로 갈라져 서로 다투는 당시의 불교계에 대해 "그런데 십종(十宗)*칠종(七宗)이 서로 쟁론(爭論)하여 따르지 아니하니, 나라에 칠인(七人)*십인(十人)의 대왕이 있어서 만민이 평온치 안니함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근심한 끝에 하나의 원(願)을 세웠노라. 나는 팔종(八宗)*십종(十宗)에 따르지 않겠노라."(어서 294쪽)라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의 권위에 맹종하는 것이 아닌, 경전을 기준으로 스스로 깊이 사색하여 대성인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확증을 추구하셨습니다.
[사이토] 사도유죄 대도 그렇습니다.
법화경 행자인 니치렌 대성인이 왜 난을 만나느냐는 내외의 의난(疑難)에 대해 '개목초(開目抄)'에서 "이 의문은 이 서(書)의 간심이요, 일기(一期)의 대사(大事)이므로 곳곳에 이것을 쓰고 그 위에 의문을 강하게 해서 답을 마련하리라."(어서 203쪽)라고 말씀하셨듯이, 그 의문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의문을 검토함으로써 자신의 말법의 어본불이라는 결론을 밝히셨습니다.
여기서도 의문을 거부하지 않고, 그 의문을 통해 더욱 높은 차원의 답을 내놓으셨습니다. 대성인이 나타내신 신(信)은 지적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SGI 회장] '개목초'에는 "종종(種種)의 대난이 출래(出來)한다 할지라도 지자(智者)에게 아의(我意)가 타파되지 않는 한 채용하지 않으리라. 기외(其外)의 대난은 바람 앞의 먼지와 같으니라."(어서 232쪽)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세운 교의는 어떠한 비판에도 파절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표명하셨습니다. 대성이니 얼마나 지성을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배견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또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에서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없느니라."(어서 1361쪽)라고, 행(行)과 나란히 학(學)의 노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지(知)의 탐구와 검증이 없으면 불법은 없다.'고까지 단언하셨습니다. 이처럼 대성인의 불법은 이성의 작용을 최대로 존중했습니다.
법화경의 '신(信)' - 이신대혜(以信代慧)
[스다] 화제가 다시 법화경으로 되돌아갑니다만, 법화경에 나오는 '신(信)'에는 '신해(信解: 아디무쿠티)' 외에도 산스크리트어로 '슈라다'라고 일컫는 '신'이 있습니다.
'슈라다'의 '다'는 '놓다(置)'라는 뜻의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슈라다'는 '신을 놓다.' '신을 일으키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불도수행의 맨 처음에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불전보다 더 옛 시대의 '베다'(바라문교의 성전) 등에서는 '호기심을 갖는 것' 애타게 구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종교적 감정의 원천으로서 '놀라움'이 있다고 하는데, '놀라움'이 가지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호기심' 등의 심정이 '슈라다'의 의미라고 합니다. 자신의 사의(思義)가 미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건한 마음'입니다. 이 '경건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욕망으로 치닫는 것이 '잇찬타카', 다시 말해 '일천제(一闡提)'입니다.
[엔도]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는 '슈라다'의 신을 '도(道)의 근원' '공덕의 어머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또 법화경에 나오는 "이신득입(以信得入: 신으로써 들어갈 수 있었거늘)"(법화경 198쪽)의 신(信)도 '슈라다'입니다. 어서에는 "신(信)으로써 근원으로 하느니라."(어서 1244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SGI 회장] 불법의 신은, 이성을 내던지고 맹목적으로 귀의하는 그런 '광신'이 결코 아닙니다. 경건한 탐구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지혜를 길러 나아가려는 이성적인 정신의 영위입니다.
[사이토] 또 불법에는 '신'을 나타내는 '프라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프라사다'는 '물과 소리 등에 탁함이 없이 맑고,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불법을 듣고 '미혹이 없어지고 마음이 깨끗하여 맑은 상태'를 말하는데, '정신(淨信)'으로 한역됩니다.
이 '정신'이 완성된 상태는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아는 경지'라고 합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올바른 '신'의 효용은, 마음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만 지혜가 빛납니다.
'이성은 정념(情念)의 노예'라고 생각한 철학자도 있었습니다. 또 아우구스티누스(기독교 초기 철학자)처럼 "신앙은 이성에 앞선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입론(立論)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성은 결코 자기만족이라는 오만에 빠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현재의 자기를 끝없이 초월한다. - 거기에 참된 이성의 갈앙(渴仰)이 있습니다. 자기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이까지 향상하고 계속 초월하고자 합니다. 그 에너지가 되고 기반이 되는 것이 현재의 자기를 초월한 무엇인가에 대한 '신'입니다. '신'은 '지'를 깨끗하고, 강하게 하고, 높입니다.
'정신(淨信)'은 철저하게 연마된 '신'이고, 동시에 완벽하게 단련된 '지'입니다.
[스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사리불이 석존에게 "믿겠으니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청할 때, '슈라다'와 '프라사다' 양쪽의 '신(信)'으로써 믿겠노라고 서원합니다. 한역하면 '경신(敬信)'이라고 번역합니다.
[엔도] 지금까지 살펴본 세가지 '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법을 듣고, 그 훌륭함에 외경(畏敬)의 마음을 품어 '슈라다(경신)'을 일으켜 실천에 들어간다. '아디무쿠티(신해'를 관철함으로써 마음이 연마되고 단련되어,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하다고 각지(覺知)하는 '프랏하다(정신)'라는 대경애의 완성으로 향한다. -
[SGI 회장] 불법의 '신'은 '끝없이 향상'을 위한 엔진입니다. 지성을 포함한 전 생명을 향상시키고 개화시켜, 간직된 힘을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스다] 그런데 이런 신(信)과는 이질적인 '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박티'라고 일컫는 신입니다. 이것은 '신(神)에 대한 절대적이고 열렬한 신(信)'입니다.
어원적으로는 '나누어 갖는 것' '일부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물의 근원이며 우주에 편만한 브라만(梵)과 일체가 된다.' 등으로 '자신을 초월한 신비로운 것과의 일체화'를 지향하고, 자기다움을 죽이면서까지 헌신적인 신앙을 향해 돌진하는 신입니다.
신(神)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자주 이 '박티'라는 말을 쓰는데, 불교에서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박티'라는 신(信)은 불법 본연의 신과는 다릅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자기를 없애고, 커다란 것에 삼켜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이야말로 무한한 보물창고입니다. 자신의 몸 그 자체가 공덕취(功德聚)입니다. 자신의 몸이 법화경입니다.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는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내재하는 자신의 생명에서 향기롭게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불법의 신은 참된 자신의 확립입니다. 그리고 우주대의 무한한 지평이 자신의 생명을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주에 생명을 열고, 우주에 감싸인 자기가 우주를 다시 감싸는 것입니다. 대우주와 교류하고, 서로 어우러져 울리는 일입니다. 신은 그 도약을 위한 점프대입니다.
[엔도] 법화경이 불교의 일반적 관념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 신(信)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이토] 법화경은, 석존이 설법을 개시한 방편품에서 이미 신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것은 제법실상*십여시를 설한 다음, 사리불이 석존에게 미문(未聞)의 법문을 설해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석존은 '그 법문을 설하면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할 것'이라고 하면서 사리불의 요청을 세번에 걸쳐 제지합니다.
하지만 사리불은 "회좌(會座)에 참석한 대중는 반드시 그 법을 믿겠습니다."라고 서원하고, 부처의 설법을 촉구합니다. 그 열렬한 '신'에 응해 석존은 "일체중생에게 불지견(佛知見)을 열고, 나타내고, 깨닫게 하여 들어가게 하는 일'이 부처가 세상에 출현한 목적임을 밝히고, 개삼현일(開三顯一)의 법문을 본격적으로 설합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법화경의 설법 자체가 '신'을 대전제로 하여 개시되었습니다.
[엔도]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성문 중에서 처음으로 성불의 깨달음에 도달한 사리불도 '나 자신의 지혜가 아닌, 신에 의해 부처의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이신득입<以信得入>)고 말했습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불법의 대해(大海)는 신(信)을 능입(能入)으로 하고 지(智)를 능도(能度)로 한다."고 씌어 있듯이, 신(信)에서 시작되는 불도수행으로 지혜를 획득하고, 그 지혜의 힘으로 '불법의 대해를 건넌다.'(성불한다)는 것이 불교의 일반원칙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자신의 지혜를 강조하기보다, '신에 의해 깨닫는다.'고 강조합니다. 그야말로 신(信)이 지혜를 대신하고 있습니다.(이신대혜<以信代慧>)
[SGI 회장] 여기에 깊은 의의가 있습니다. 법화경도 '지혜' 즉 '성불'임은 똑같습니다.
다만 법화경에서는 신(信) 속에 이미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신해'입니다.
대성인은 "해(解)란 지혜의 이명이며" "신(信)외에 해(解)가 없고 해 외에 신(信)이 없으며"(어서 725쪽)라고 단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신 없이 해(지혜)는 없고, 해(지혜)로서 나타나지 않는 신도 가짜입니다. '해(解)'는 '해탈(解脫)'의 해이고 '해방(解放)'의 해에도 통합니다. 모든 고뇌의 쇠사슬에서 해방된 자유자재의 경지. 그것이 '해'이고, 그 지혜의 경지는 '신'에 의해서만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엔도] 법화경 분별공덕품 제17장에서는 "어떤 중생이 부처의 수명이 이와 같이 장원(長遠)하다는 것을 듣고, 이에 능히 일념의 신해을 일으키면, 얻는 바의 공덕은 한량이 없으리라."(법화경 501쪽)라고 '일념의 신해'가 강조됩니다.
또 "여래가 멸한 후에 만약 이경을 듣고, 헐뜯어 비방하지 아니하고 기쁜 마음을 일으키면, 마땅히 알지어다. 이미 깊은 신해의 상(相)이 되느니라."(법화경 507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묘법을 처음 듣고 수희하는 '초수희(初隨喜)'의 사람은 이미 '깊은 신해'를 얻은 모습이라고 설합니다. 신해의 성불의 실질(實質)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SGI 회장] 자세한 내용은 분별공덕품 부분에서 논하겠지만, 사신오품(四信五品)이라고 해도 법화경의 본의는 처음의 '일념신해'와 '초수희'에 있습니다.
[스다] 법화경이 왜 '신(信)'을 강조하느냐는 문제는, 법화경이 부처의 '수자의(隨自意)의 경'이라는 점에 열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수타의(隨他意)의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중생의 경애에 응하여 설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이신(易信)'이고 '이해(易解)'입니다. 하지만 범부의 상상과 사유를 초월한 부처의 경애는 '난신(難信)'리고 '난해(難解)'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강조합니다.
대성인은 이금당(已今當: 과거*현재*미래)의 경과 법화경의 차이에 대해 전교대사의 <법화수구(法華秀句)>에 나오는 구절을 몇번이고 인용하셨습니다.
"마땅히 알지어다. 이설(已說)의 사시(四時)의 경*금설(今說)의 무량의 경*당설(當說)의 열반경이 이신이해(易信易解)임을 수타의인 고로, 이 법화경은 가장 이는 난신난해(難信難解)이니 수자의인 고로"(어서 688쪽)
수자의의 경은 범부가 지닌 경애의 틀을 훨씬 벗어나 있기 때문에 '지해(知解)'할 수 없습니다. '신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우주로켓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듯이, 생명의 우주를 자유롭게 유희하는 묘법이라는 비술(秘術)은 범부의 사의(思義)를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강한 '신'의 힘으로 묘법의 궤도를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신'은 맹목적인 것이 아닌, 문증(文證)*이증(理證)*현증(現證)에 근거한 '신'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의학의 지식이 없어도 의사를 신용함으로써 병을 고친다. 그때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다음 세가지 조건에 일치하는 의사를 고르려 할 것이다.
① 학력이나 직함, 전문성 등을 생각하는 것은 문증에 해당한다.
② 그 의사가 많은 환자를 실제로 낫게 하고 잇는 지가 더 중요한 조건이며, 이것은 현증이다.
③ 게다가 그 치료법은 의학적으로 합리적임을 이해한다면, 이미 아무런 불안도 없다. 이것이 도리, 다시 말해 이증이다."
[엔도] 과연 이러한 일상적 차원에서도 '이신대혜'가 있고, '삼증'도 있군요. 그야말로 일체법즉불법입니다.
[SGI 회장] 법화경이 '신'을 강조하는 까닭을 생명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법화경의 목적은 생명의 근본적인 무지 다시 말해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끊고, '원품의 법성(法性)' 다시 말해 '본래의 자기자신을 아는 지혜'에 눈뜨는 것입니다. 이 법성을 '불성(佛性)' '불계(佛界)'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법성은 생명의 가장 깊은 심층(深層)에 있으므로, 더욱 표층에 있는 이성 등으로는 개시(開示)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포함한 생명 전체를 묘법을 향해 열고, 맡김으로써 비로소 '불성'과 '불계'는 자신의 생명에 현현하게 됩니다.
대성인은 "이 신(信)의 자(字)는 원품의 무명을 자르는 이검(利劍)이로다."(어서 72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개(開)'이고, 의(疑)'는 '폐(閉)'입니다.
묘법에 대해 자신을 열면, 묘법이 자신에게 열립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믿는 마음이 강함을 이름하여 불계라고 한다."(니치칸 상인, '삼중비전초<三重秘傳抄>)'입니다. '신'도 불계, 그 결과인 '지혜'도 불계입니다.
우주 근원의 '법'을 그 우주의 일부인 인간의 작은 머리로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법'이 자기 생명에 나타나도록 심신(心身)을 갖추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한, 묘법에 대한 '신'이고 '귀명(歸命)'입니다. 대성인은 "신(信)은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로다." "해(解)는 수연진여(隨緣眞如)이며"(어서 72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명으로 말하면 신은 '귀', 해는 '명'입니다.
묘법을 믿고 묘법에 '귀(歸: 귀의)'함으로써, 묘법이 자신에게 현현하고, 묘법에 '명(命: 바탕을 두다)'한 생명이 됩니다. 묘법이 약동하는 생명으로 된 증거가 수연진여의 '지혜'이고, 신해의 '해'입니다. "신(信)은 가치(價値)와 같고 해(解)는 보배와 같도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제불(諸佛)의 지혜를 사는 것은 신(信)의 일자(一字)이며"(어서 725쪽)라는 말씀대로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과 해는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물론, '신은 해를 뒷받침할 뿐'이라는 정지적(靜止的)인 것도 아닙니다.
본래 일체의 것이지만 굳이 나누면 '신에서 해로', 그리고 해에 의해 더욱 신을 강하게 하는 '해에서 신으로' - 이 양방향의 역동적인 반복으로써 무한하게 향상하는 것이 '신해'의 본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산스크리트어인 '아디무쿠티'가 '뜻(志)'으로도 번역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성불이라고 해도 하나의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즉자비를 깊게 하면서 끝없이 계속 향상하는 경애 - 그 '뜻'으로 나아가는 두 바퀴가 '신'과 '해'입니다.
[사이토] 현대의 세속적 사회에서는 '신앙'이라고 하면, '이성을 잠재우고 폐쇄된 주관의 세계에 안주한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법화경의 '신해'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SGI 회장] 그렇습니다. 법화경이 말하는 '신앙'은 인생이라는 난문제에 대해 안이한 회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안이함을 거부하고 '신'과 '해'라는 '생명탐구의 두가지 무기'를 움켜쥐게 해줍니다. 그리고 '끝없이 의문을 품고 끝없이 향상해가는 에너지'를 부여해줍니다.
근대의 '지'는 '신(信)'과 분리함으로써 '자립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물질주의를 비롯해 '검증 없는 신(信: 자명한 전제)' 위에 안주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거기서 근대의 고뇌와 유전(流傳)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대의 여러 과학마저 시야에 넣은 새로운 '신과 지의 통합'입니다. 그것은 장대한 문명적 도전입니다. '신념 없는 지식'과 '이성 없는 광신'으로 찢겨진 인간사회를 부흥시키는 시도입니다.
또 생명이라는 '부모'의 슬하로 '방랑하는 자식'(근대의 '지')이 귀환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해' - 그것은 현대라는 '정신의 표류시대'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생명의 높은 곳으로 진보시키는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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